61화 공개 고백
자금성 함복궁.
오늘도 태평공주 주가율은 유모에게 강호 무림의 소문을 듣고 있었다.
“마마. 최근 천하 무림이 들썩이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공동파와 흑룡방의 비무가 그것인데 세간에는 비무에서 승리하는 쪽이 향후 백 년을 제패한다는 소문이 돌아 정파의 구파일방과 육대세가, 사파의 사도팔문 모두가 주목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미 정사지쟁이라 부르는 사람도······.”
유모의 말을 들은 주가율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반짝였다.
공동파와 흑룡방의 비무.
‘······전생에서는 없었던 사건이야.’
그건 전생에 없었던 사건이었다.
공동파와 흑룡방의 충돌은 지금 일어나면 안 된다. 지금으로부터 몇 년 후, 검성 유진휘가 강호로 출도하면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왜 지금······.
뭔가 있다.
주가율의 감이 이 이야기를 더 들어야 한다고 부추겼다.
주가율이 어린아이 같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유모. 나 이 이야기 더 듣고 싶어.”
주가율의 말을 들은 유모가 웃었다.
서출이라 후궁인 어머니도, 황제 폐하도 관심을 두지 않는 아이.
새장 속의 새처럼 그저 멍하니 자랐던 그녀가 생기를 되찾은 것이 유모는 마냥 기뻤다.
무림의 풍문과 무공에 유독 관심을 보이는 모습도 좋았다.
최근 태평공주는 무공에 입문하여 황궁무공의 기초공인 연무진결을 수련하는 중이었는데, 그 모습도 유모는 좋았다.
무언가에 몰두할 때의 주가율은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어머 그래요? 그럼 더 자세히 말씀드릴게요. 마마. 이번 비무의 원인은 공동파의 사업장인 공동 객잔에서······.”
비무의 전모가 유모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주가율은 유모의 말을 귀를 열고 경청했다.
그때.
“······그래서 이 대 삼의 후기지수 비무로······.”
“유모. 이 대 삼이라고?”
원래 역사와 또 달라진 부분을 잡아낸 주가율이 되물었다.
지금 시점의 공동파가 제자가 둘이라는 건 말이 안 된다.
서하린이 공동파의 제자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번 비무의 원인이 공동 객잔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녀가 제자가 되었더라도 비무에 출전할 정도로 무공의 성취가 깊어진 것은 아닐 터.
그렇다면.
‘누군가 있어.’
주가율은 뛰어난 통찰력으로 알아차렸다.
유진휘와 서하린 외의 제삼자가 공동파에 입문했으며, 그자가 이번 비무를 설계한 자라는 사실을.
“네. 공동파 쪽에서는 장문제자 유진휘와······. 두 번째는 누구였더라······.”
유모는 풍문으로 들었던, 긴가민가했던 이름을 기억 한쪽 구석에서 떠올렸다.
“그래. 이철수. 그런 이름이었습니다. 이철수 소협이 이번 비무에 출전해서······.”
이철수.
그 이름을 유모에게 들은 순간.
두근.
주가율의 심장이 뛰었다.
그녀의 눈빛에 생기가 차올랐다. 그녀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죽어있던 그녀의 혼백이 되살아났다. 그동안 막혔던 숨통이 마침내 트였다.
드디어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주가율이 눈을 감았다.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그녀의 마음속이 환희로 가득 차올랐다.
‘찾았습니다.’
드디어 찾았다.
아버지이자 오라비이자 연인이자 친우이자 스승이었던 그분을.
그녀의 전부이자 삶의 이유였던 그분을.
‘이 노야.’
마음 속으로 그의 이름을 부른 순간.
주가율의 심장이 더 세게 뛰었다.
그녀의 호흡이 가빠졌다. 그분께서 살아계신다. 그분과 나는 그때처럼 지금, 같은 하늘 아래 숨 쉬고 있다. 그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너무 기뻐서.
너무 좋아서.
주가율의 뺨을 타고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마마. 마마! 괜찮으십니까?”
저 멀리서 들리는 듯한 유모의 말을 들으면서 주가율은 웃으며 소매로 눈물을 닦아냈다.
“괜찮아. 유모.”
주가율은 뛰어난 통찰력을 통해 깨달았다.
‘노야께서도 돌아오셨군요.’
그분께서 대법을 실행했는데도 미래에서 만날 수 없었던 이유.
그건 그분 또한 과거로 돌아갔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과거로 돌아간 그분은 전생과는 달리 궁에 입궁하지 않았다. 환관도 되지 않았다. 공동파에 입문했다.
그 이유를 주가율은 알았다.
‘운우지락과 삼처사첩을 이루기 위해 양물을 되찾은 뒤 강호 무림으로 가셨군요. 노야께서는.’
그녀는 그분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다.
이 노야의 말버릇도, 그분의 키와 몸무게도, 그분의 목소리와 외모도, 그분의 무공과 말버릇, 좋아하는 음식과 싫어하는 음식, 그분의 고향, 그분의 체취, 그분의 취미와 특기, 그분의 잠버릇까지 전부 그분과 관련된 것이라면 사소한 것까지 뭐든 다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분의 진정한 꿈이 권력이 아닌 운우지락과 삼처사첩이라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수단으로 강호 무림을 택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환생 대법으로 되살아난다면 무림의 고수가 될 거라고 말했던 노야였으니까.
실제로 노야께서는 무덤 부장품으로 다음 생에 사용할 비급과 영약, 보물을 모아놓지 않았던가?
행방불명된 왕삼은 아마 이 노야의 손에 처리당한 것이리라.
‘아아······. 제 몸이 약관을 지났더라면······.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을 텐데······.’
주가율이 배를 쓰다듬으면서 생각했다.
황제였던 그녀였다. 옥체라 불리는 황제의 몸이었지만, 노야에게만큼은 거리낌없이 바칠 수 있었다.
오히려 그분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그분께서 환관만 아니었더라면 이미 오래전에 그분의 품에 안겼을 것이다. 아니, 수십 년 전부터 이미 그녀의 몸과 마음은 전부, 털 오라기 하나, 숨소리 하나마저도 온전히 그분의 것이었다.
그분의 꿈이 운우지락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주가율은 그리 생각했다. 몸 따위는 얼마든지 드릴 수 있다고.
하지만 이번 생의 노야는 환관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분께 안길 수 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주가율의 몸이 전율로 떨렸다.
‘노야의 꿈은 짐의 꿈이나 마찬가지. 그렇다면 짐이 노야의 꿈을 돕겠습니다.’
주가율이 웃었다.
그리고 그분의 꿈을 돕기 위해서는 역시 권력이 필요했다.
공주의 남편이자 황제의 사위인 부마도위(駙馬都尉)는 축첩을 하지 못했다. 그러니 공주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황제가 되어야 했다.
황제가 되어서 대명률(大明律)을 뜯어고칠 것이다. 반대하는 자는 숙청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을 강호의 영웅, 아니 악왕(岳王)과 관성대제(關聖大帝)를 뛰어넘는 중원의 영웅으로 만들 것이다. 그 누구도 감히 황제인 그녀를 부인으로 맞이한 그분의 축첩을 반대하지 못하도록.
그래서 그분의 꿈을 이루리라.
물론 정실부인의 자리는 당연히 그녀의 소유였다. 그 누구에게도 넘겨줄 생각은 없었다. 물론 정실부인이라는 자리 따위가 감히 그녀와 그분의 관계를 전부 담아낼 수는 없었다. 아니 인세의 어떤 단어와 작위도 노야와 그녀의 관계를 감히 정의내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녀가 아닌 누군가가 그분의 1순위가 되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전부.
‘짐이 노야의 일 순위가 되겠습니다.’
모든 행위에 있어서 처음은 그녀가 차지해야 했다.
주가율은 그렇게 다짐하면서 잔혹하게 웃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일 시간이었다.
남만도 못한 오라비들과 선황을 처리하고 자금성 태화전에 있는 황제의 옥좌를 쟁취해야 했다.
거긴 원래 그녀, 원화제 주가율의 자리였으니까.
그러니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그분께서 앉혀주신 옥좌의 감촉을, 머리를 쓰다듬던 그분의 손길을 떠올리던 주가율의 눈동자가 황홀로 물들었다.
*
아침 발기를 가라앉힌 나는 케겔 운동과 함께 문을 열었다.
“일어나셨군요. 이 공자님.”
서하린이 다소곳하게 인사했다.
그녀의 화려한 백금발과 투명한 하늘빛 눈동자가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났다.
서하린이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오늘, 반드시 이기셔야 합니다.”
“알겠소. 이길 테니까 걱정 마시고 본산을 잘 부탁하오.”
비무 동안 서하린은 본산에 두기로 이미 합의가 끝난 상황이었다.
내 말에 서하린이 고개를 숙이면서 머뭇거리다 품에서 무언가 꺼냈다.
그건 부적이었다.
“창칼을 막아준다는 효험이 있다는 부적입니다. 이 공자님이 생각나서······.”
말끝을 흐리는 서하린의 얼굴이 살짝 붉었다. 나는 그녀가 건네는 부적을 조심스럽게 받아들면서 품 안에 넣었다.
“고맙소. 오늘 반드시 이기고 오겠소.”
“······네. 몸조심하시길.”
서하린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배웅을 받으면서 나는 처소를 떠나 산문으로 향했다.
산문에는 먼저 도착한 전영과 사형이 있었다.
“이제 출발하도록 하자꾸나.”
굳은 표정의 전영과 결연한 얼굴의 사형과 함께 나는 산문을 벗어나 공동산 아래로 향했다.
휙. 휘이익.
경공을 펼치자 바람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공동산을 내려오고, 화정현에 도착할 때까지 사부도 사형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정현에 도착하자 평소보다 사람이 더 많아져 북적이는 마을의 모습이 보였다.
이번 비무가 단순한 비무가 아닌 정사지쟁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천하 무림에서 온갖 구경꾼들이 몰려든 탓이었다.
우리는 그들을 무시하고 달려서 마침내 공터에 설치된 비무대에 도착했다.
나무로 만들어진 비무대는 커다란 정사각형 형태로 마치 경기장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좌석에는 이미 중원 전역에서 모인 강호인들이 구름처럼 앉아 있었다.
“만나서 반갑소.”
비무대 앞에서 우리를 맞이한 건 오늘의 공증인이 되어줄 무림인 넷.
서문세가의 가주 진천검왕과 사천에서 온 당문, 아미파, 청성파의 장로 셋, 그리고 그녀가 있었다.
검후 은설란.
당대 항산파 장문인이자 진천검왕과 같은 화경의 고수.
항산파에서 공증인을 보낼 거라 예상하기는 했지만, 기껏해야 당문, 청성, 아미처럼 장로를 보낼 줄 알았는데.
검후 본인이 직접 오다니.
‘아니, 오히려 잘 됐나.’
예상치 못한 변수였지만, 오히려 좋았다.
내 삼처사첩 계획에는 검후 또한 포함되어 있으니까.
마침 무대도 딱 좋고 말이다.
검후의 모습은 미래와 같았다. 햇빛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는 은빛 머리카락을 곱게 묶은, 하얀 피부와 은빛 눈동자가 인상적인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미녀.
내 기억으로는 그녀는 결국 미래에도 지아비를 찾지 못했던 걸로 기억했다. 적사월과 함께 평생 독신이었었지.
진천검왕이 사부에게 인사를 건넸다.
“서문 대협을 만나서 영광입니다. 공동파의 장문인을 맡은 전영이라 합니다.”
뒤이어 사부가 청성, 아미, 당문의 세 장로와 인사를 나눴다. 우리 역시 사부를 따라 그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부와 나, 사형이 검후 앞에 섰다.
“항산파의 장문인을 맡은 은설란입니다. 부족하지만 검후의 이름을 이어받았습니다.”
“미욱하나마 공동파의 장문인을 맡은 전영이라 합니다. 검후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예의 바른 말과는 달리 허공에서는 날 선 시선이 교차했다.
구대문파에서 탈락한 공동파와 공동파의 자리를 대신해 구대문파에 등극한 항산파.
두 문파는 빈말로도 좋은 사이라고 할 수 없었다.
미래에는 사형이 검후도 비무행에서 격파하고 공동파를 구파일방과 육대세가 위에 군림하는 천하제일문으로 만들기는 한다. 하지만 그때도 사형은 비무에서 패배한 검후의 구혼을 거절할 정도로 공동파와 항산파는 서로 미묘한 라이벌 의식이 있었다.
“강호에서 이름 높은 검후 여협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공동파의 유진휘라고 합니다.”
“검후 여협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공동파의 이철수입니다.”
나와 사형의 인사를 들은 검후의 투명한 은빛 눈동자가 우리를 훑었다.
“그렇군요. 두 사람이 이번 비무에 출전하는 공동파의 기재······. 로군요. 비무에서의 활약 기대 하겠습니다.”
검후가 말끝을 흐렸다.
우리에게 뭔가 덕담을 해주려다가 말문이 막힌 듯한 표정.
별로 기대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기재는 무슨. 사부님을 먼 감숙 땅까지 발걸음하게 만든 자들이 겨우 이 정도라니. 아무리 봐도 승산이 있어 보이지 않는데요. 이봐요. 그쪽, 이번 비무에서 패배하면 대체 어쩔 생각이죠? 지금 귀 파의 사정이 그리 좋지는 않잖아요?”
검후의 말이 끝난 그때.
검후의 뒤에서 나와 동갑인 소녀 한 명이 빼꼼 고개를 내밀면서 이쪽을 응시했다.
검은 머리카락에 은빛 새치가 뒤섞인 투톤헤어를 한 미소녀.
소검후 천소빈이었다.
공동파를 무시하는 그녀의 발언에 놀란 검후가 타이르듯 소검후를 불렀다.
“소빈아.”
이쪽에서도 사형이 부글부글 끓는 표정으로 뭔가 말하려 한 그때.
“사형, 사형께서 나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답하겠습니다.”
나는 사형을 제지했다.
사형이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소검후와 검후를 번갈아가며 바라보면서 말했다.
“승산이 없는 싸움을 먼저 시작하는 바보는 천하 어디에도 없소. 이번 비무는 본 파가 반드시 승리할 것이오. 이번 비무는 본 파의 부활을 구주팔황에 알리는 기념식이 될 것이오. 나와 사형이 반드시 그리 만들 것이오. 그리고.”
내 시선이 검후 쪽으로 향했다.
“비무 시작에 앞서 우선 좌중 앞에 제 포부를 밝힐 것이니, 검후께서는 부디 이 후배를 어여삐 여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포부라는 말에 모두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포, 포부라니. 그게 무슨 말이죠?”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은 소검후였다.
그녀의 말에 나는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이상은 밝힐 수 없소. 어차피 조금 있으면 천하가 모두 알게 될 터이니, 신경 쓰지 마시오. 대신 본 파가 이긴다면, 오늘의 무례에 대해 소저한테 정식으로 사과받아야겠소.”
그걸 벌써 말하면 안 되지.
이 자리가 아닌,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말해야 했다.
“······좋아요. 이긴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주죠.”
내 말에 소검후가 한 발짝 물러섰다.
검후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그녀의 투명한 은빛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포부라. 그래, 기대하겠다.”
검후가 나를 바라보면서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에 포권하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된 뒤, 진천검왕이 전영에게 물었다.
“이제 곧 비무 시작이요. 귀 파에서는 첫 번째로 누굴 내보내기로 했소?”
“철수가 나가기로 했습니다.”
진천검왕의 질문에 사부가 답했다.
비무의 첫 번째는 내가 나서는 걸로 이미 정해져 있었다.
어차피 흑룡방 측에서도 소방주인 흑사룡은 마지막에 내보내려 할 게 분명했다.
그러니 내가 먼저 나서서 흑사룡이 나오기 전까지 흑룡방이 내보낼 두 명의 후기지수를 빠르게 컷한다.
다음은 최대한 멋있게, 협객답게 중과부적(衆寡不敵)을 연기하며 흑사룡의 도에 쓰러지는 모습을 연출하는 것이 내 원대한 계획이었다.
흑사룡은 사형의 몫으로 남겨둘 생각이었다. 사형이 흑사룡 따위에게 질 확률은 0%니까.
계획이 성공하기만 한다면 중원 모든 여인이 이 이철수의 협객담에 밤새 가슴앓이를 하게 될 거다.
좋아. 완벽한 계획이다.
“이 소협이······. 알겠소.”
내 말에 진천검왕이 나를 살짝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는 별 관심 없는 표정. 다른 공증인들과 검후 역시 마찬가지였다.
흐흐.
지금은 그렇지만, 비무가 끝나면 날 다시 봐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눈 공증인들이 비무대 근처에 마련된 귀빈석에 착석했다.
맞은편에는 하얀 가면을 쓴 고수와 하늘색 도포를 입은 문사 한 명이 앉아 있었다.
하오문주 백면암군 매지량.
그리고 사도련의 총군사인 귀제갈(鬼諸葛) 사마학이었다.
이 두 사람이 흑룡방 측 공증인이었다.
“이 자리에 모인 강호 무림의 동도 여러분, 시간을 내서 참석해주신 점 우선 감사의 말씀을 드리오. 본인은 서문세가의 서문표요!”
비무대 앞에서 제법 잘생긴 미남자 하나가 올라서서 말했다.
감숙에서 열리는 비무이니만큼, MC 역할은 당연히 서문세가가 맡은 모양.
“와아아아아아아! 서문세가의 대공자야!”
“백운공자(白雲公子) 서문표 대협!”
서문표의 별호를 부르는 관중들.
마치 월드컵 경기 현장처럼 가득 들어찬 무림인들의 모습이 시야에 보였다.
하긴 이 시대의 오락거리는 각종 자극적 컨텐츠가 넘쳐나는 현대에 비하면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기껏해야 매담자들의 이야기 듣기, 경극, 기루에서 가무 감상, 바둑, 장기, 시 짓기, 뱃놀이 정도?
그러니 범인을 초월한 힘으로 겨루는 무림인의 비무야말로 중세 무림에서는 가장 큰 오락거리인 것이다.
고대 로마에서 콜로세움에서 열리는 검투사 경기가 인기를 끈 것처럼.
“우선 본 비무의 취지부터 설명하도록 하겠소. 본 비무는······.”
서문표가 이미 다 아는 비무의 원인부터 진행 방식까지 전부 설명을 늘어놓았다.
기나긴 설명이 끝난 뒤, 서문표가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공동파과 흑룡방의 비무를 시작하겠소! 각 방파의 제자들은 비무대 위로 올라오시오!”
그의 말에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철수야. 긴장하지 말거라.”
“사제! 힘내! 다치지 말고! 혹시 다칠 것 같으면 무조건 기권해! 알았지?”
나는 사부와 사제의 응원을 들으면서 링 위로 올라서는 프로레슬러처럼 비무대 위로 올라섰다.
맞은편에 상대가 나타났다.
위소련과 마찬가지로 은빛 실로 수놓아진 흑룡이 인상적인 흑의를 입은, 내 또래의 소년이었다.
“네놈이 이철수인가? 난 흑룡방의 정지경이다.”
놈이 양아치스러운 말투로 내게 말했다.
정지경? 뭐 지금 남자의 이름 따위는 딱히 중요하지 않다.
“서문 대협.”
“말하시오.”
“비무 전에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서문표가 짧게 침묵했다.
까마득한 후배가 말이 짧다 여긴 것일까.
허나 공사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짧은 침묵 끝에 서문표의 고개가 위아래로 살짝 흔들렸다.
허락의 표시였다.
“그러든지.”
치졸하지만 반말로 돌려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쪼잔하긴.
좋아.
허락을 받아낸 나는 천천히 관중석과 귀빈석을 둘러보았다.
정파의 구파일방 육대세가. 사파의 사도팔문.
정파와 사파를 떠받치는 거대 문파에서 파견된 대리인들이 귀빈석에 앉아 있었다.
마교를 제외한 강호 무림의 주요 세력들이 모두 지금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아니, 마교에서도 스파이를 파견해서 이 현장을 관찰하고 있을 거다.
내가 만들어낸 광경이었다.
‘이 이상 좋은 무대가 있을 수 없군.’
정사마(正邪魔)가 모두 모인 자리.
무대는 완벽하다.
이제 아까 말한 포부를 밝힐 시간이었다.
내 시선이 공증인 자리에 앉아 있는 검후를 향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검후의 은빛 눈동자에 물음표가 떠오른 순간.
“검후 은설란!”
나는 내력을 실은 목소리로 검후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내 목소리를 들은 검후가 움찔했다.
“나 이철수는 성년이 되는 해에 당신한테 도전할 것이오!”
내 말이 끝난 순간.
비무대에 쥐 죽은 듯한 고요가 내려앉았다.
모두의 시선이, 심지어 내 상대인 흑룡방의 정 뭐시기의 눈길까지 나를 향했다.
순식간에 얼어붙은 비무대와 관중들을 보면서 나는 웃었다.
작전명 공개 고백.
성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