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사랑에 빠진 소녀
시간은 어느새 밤. 홍등과 청등이 밝혀진 화정현의 유흥가에는 정사지쟁의 소문을 듣고 중원 전역에서 몰려든 사내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어머, 놀다 가! 거기 공자!”
“우리 가게에서 놀다가. 잘해줄게. 응?”
성수기를 맞이한 유흥가는 활발했다.
호객행위를 하는 기녀들과 기루로 들어가는 사내들. 주향과 분향이 뒤섞인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지만 놀랍게도 나를 알아보는 기녀도, 나를 유혹하는 기녀도 아무도 없었다.
빌어먹을.
나는 씁쓸함을 안고 청등이 밝혀진 곤화루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옵······. 너는?!”
나를 보자마자 얼굴이 일그러지는 총관.
나는 그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알지? 안내해.”
“네놈이 여기가 어디······. 잠깐.”
내 말에 노발대발하려던 총관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전음을 받는 중인 모양.
“······특실로 들이라는 명이다. 고마운 줄 알아라.”
하 총관의 말과 함께 나는 2층으로 올라갔다.
일전에 왔을 때와 달리 영업시간이라 그런지 만석인 1층 테이블과 2층 기방.
가무(歌舞) 소리와 함께 기녀들과 손님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들을 전부 지나쳐 특실 앞에 들어섰다.
드르륵.
미닫이 문이 절로 열렸다.
사람이 연 게 아니었다. 허공섭물의 기예였다.
하여간 경지 높은 고수들 내공 낭비하는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나는 혀를 차면서 특실 안으로 들어섰다.
탁.
미닫이문이 허공섭물의 수법으로 닫혔다.
“처음 뵙는군요.”
어두운 방 안. 흔들리는 촛불에 하얀 가면이 비쳐 보였다.
호리호리한 체구, 백가면과 대조적인 흑의가 인상적인 미남자가 의자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적사월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저자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다.
백면암군 매지량.
적사월의 하나뿐인 제자이자 화경의 고수이자 현대 하오문주.
그리고 게이다.
그렇다.
저 인간이 바로 이 세계 최강의 게이였다.
적사월이 딱히 좋은 건 아니지만, 왜 여기서 적사월이 아닌 게이가 나온단 말인가?
나는 나도 모르게 엉덩이가 시려오는 걸 느끼면서,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일그러지려는 얼굴 근육을 통제하면서 자리에 착석했다.
“공동파의 이 소협.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부족하지만 하오문의 문주를 맡은 매 모(某)라고 합니다.”
그가 게이 같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듣는 것만으로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
강호 무림에서 제일 만나고 싶지 않은 고수를 지금 만나게 되다니.
이게 무슨 빌어먹을 일이란 말인가?
난 그저 토토를 하러 왔을 뿐인데.
“강호에 이름 높은 백면암군 매 문주님을 만나서 영광입니다.”
하지만 나는 최대한 싫은 내색을 감추고 위소련 앞에서 서하린의 다과를 먹을 때처럼 초인적인 연기력으로 비즈니스 스마일을 만들어내며 자리에 앉았다.
“본문은 어떤 일로 찾으셨습니까?”
백면암군이 내게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오문이 주관하는 비무 도박에 돈을 걸어보자 하여 왔습니다. 당사자가 돈을 걸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말하고 빨리 빠진다.
저 게이와는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다.
내 말에 백면암군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렇군요. 어디에 걸 생각이신가요?”
“공동파 승. 전부.”
탁.
나는 품에서 전낭을 꺼내 탁자 위에 은자 십오 냥을 쏟아내며 말했다.
탁자 위의 은자가 뿌리는 반짝이는 은빛이 백면암군의 눈빛에 비쳤다.
“······현재 배당률은 공동파 승이······.”
쓸데없이 분위기를 잡고 은밀하게 배당률을 알려주는 백면암군.
현대로 따지자면 공동파 승은 20배였다.
20배라니.
역배 중의 역배가 따로 없다.
은자가 복사가 된다고.
이 정도라면 정력 식단을 원 없이 하루 세끼 먹을 수 있겠군.
좋은 금액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래도 공동파에 전부 걸겠습니다.”
배당이 얼마가 됐건 어차피 우리가 이기는 게임이다.
안 걸 이유가 없었다.
돈, 더 많은 돈이 있어야 정력제를 사 먹을 수 있으니까.
내 오늘만큼은 역배충에 빙의하리라.
“좋습니다. 접수하겠습니다. 배당금 지급은 비무가 끝난 뒤 이 목패를 가지고 곤화루의 하 총관을 찾아주십시오. 다른 용무는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다른 용무라니? 그런 건 없다. 한시라도 빨리 여기를 나가야 했다.
나는 텅 빈 전낭과 백면암군이 건넨 목패를 품에 챙긴 뒤 특실의 문을 나섰다.
탁.
허공섭물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후, 다시는 만나기 싫군.
좋아, 이제 남은 건 토토 대박뿐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곤화루를 나간 뒤 빠르게 신법을 펼쳐 유흥가를 벗어나 본산으로 향했다.
*
이철수가 곤화루를 벗어난 뒤.
드르륵.
기관장치 작동 소리와 함께 백면암군 뒤쪽 벽이 열리며 밀실이 드러났다.
어두운 밀실과는 반대로 등이 수없이 설치되어 대낮처럼 밝은 밀실.
거기에는 그녀가 있었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 검붉은 기운이 감도는 머리를 곱게 묶어 올린 미녀.
선녀가 그대로 내려온 듯한, 완벽하고 탱탱한 가슴과 가느다란 허리, 풍만한 엉덩이가 어울려 자아내는 하늘이 내린 빙기옥골이 그대로 비치는 하늘하늘한 적색 나삼을 입은 미인.
그녀의 얼굴은 천하 모든 미(美)를 집약할 정도로 압도적이며 폭력적인 미색을 드러내고 있엇다.
미염공도 섭혼술도 필요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미모. 포사와 달기를 능가하는 요녀. 서시와 왕소군의 뺨을 때리는 미녀. 얼굴만으로 천하의 모든 사내를 홀린다는 마(魔)의 미모를 지닌 사파제일인 적사월이 거기 있었다.
“제자야.”
적사월의 요염한 시선이 백면암군을 향했다.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색기가 공간을 장악했다.
화경의 고수라도 흔들릴 정도의 색기에도 백면암군은 멀쩡했다.
그는 남색가였기 때문이다.
“예, 사부님.”
백면암군이 공손히 부복했다.
“어떻더냐?”
앞부분이 생략된 질문이었지만, 백면암군은 그 뜻을 이해했다.
그가 말했다.
“이 소협은 남색가가 아닙니다.”
이철수.
백면암군은 그와 대면하는 짧은 시간 동안 그의 전부를 관찰했다.
동공 떨림, 말버릇, 얼굴 근육, 맥박까지 전부.
그 결과 그는 남색가가 아니었다.
“······하지만 확실히 평범한 사내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가 범인(凡人)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화경의 고수인 자신을 상대로 시종일관 여유 있는 태도로 대화를 이어갔으니까.
두려움도 공포도 없었다.
고작 열네 살의 소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기백이었다.
“그렇단 말이지.”
제자의 보고를 들은 적사월이 붉게 칠해진 손톱을 들어 턱을 괴었다.
여유롭기 짝이 없는 태도.
하지만 그녀의 심장은 이 이상 격렬할 수 없을 정도로 세차게 뛰고 있었다.
먼젓번 만났을 때 그의 손길이 닿았던 가슴 부근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남색가가 아니란 말이지.”
적사월이 자연스럽게 면사를 써서 얼굴을 가리며 괜한 말을 내뱉었다.
화악.
그 순간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감정이 제어가 되질 않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그런 주제에 감히······.’
적사월이 입술을 깨물었다.
감히, 천하의 모든 풍류공자들이 마음에 품은 사천제일기녀 능월향의 구애를 거절하다니.
금기서화의 시험을 통과한 자가 아니면 얼굴조차 볼 수 없는 능월향을 눈앞에서 차버리다니.
······가슴까지 봤으면서.
나에게 망측한 생각까지 품게 만들었으면서.
그러면서······.
향기 없는 모란꽃이라니.
나쁜 새끼, 용서할 수 없다.
“······역시 괘씸하구나. 그 이철수라는 아해.”
적사월이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면사를 쓴 사부를 본 백면암군이 조용히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백면암군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대체 왜 직접 이철수를 마주하지 않았는지.
지금도 면사로 가리지 못하는 귓불과 목덜미가 붉어진 모습을 보면, 모른 척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사부님께서는······. 부끄러워하고 계시는군.’
60년 일생을 독신으로 살며, 그 누구에게도 연심을 주지 않은 적사월이었다.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그 모습이 서툴 수밖에는 없었다.
지금도 그렇다.
직접 만나면 될 것을, 부끄러워서 굳이 제자인 자신을 내보내지 않았는가.
그가 남색가가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말이다.
‘제자된 자로서, 사부님의 연정을 모른 척할 수는 없지.’
정사의 사이를 떠나서 60년 동안 고독하게 살았던 사부였다.
사랑이라는 당연한 감정을 평생 모르고 살았던 사부의 첫사랑을 백면암군은 외면할 수 없었다.
상대인 이철수도 그의 눈으로 보기에는 정파인 점만 제외하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아 보였고 말이다.
외모야 어차피 별 의미가 없다. 천하의 어떤 미공자를 가져다 대도 천하제일미인 적사월에 비하면 추남처럼 보일 테니까.
무엇보다 지금의 스승님은, 역대 최고로 아름다워 보였다.
스승님께서 사랑에 빠진 소녀가 되었기 때문이리라.
“이 소협은 특실에서 마주한 사람이 능월향의 모습을 한 사부님이 아닌 저라는 사실에 살짝 실망한 눈치였습니다.”
백면암군이 말했다.
실제로 그가 특실에 들어왔을 때 잠깐 멈칫했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아마도 사부님을 만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백면암군이 말끝을 흐린 그때.
“흥. 당연히 그래야지.”
적사월이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가 나를 보고 싶어한다.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적사월의 심장이 아찔한 수준으로 뛰었다.
그녀의 가슴이, 손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얼굴이 새빨개졌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60년 평생에 걸쳐 처음 느껴보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적사월을 덮쳤다.
사천제일기녀 능월향도, 사도련주 적사월도.
모두 평생에 걸쳐서라도 보고 싶어 하는 사내는 무수히 많았다.
그러니 그가 자신을 보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당연한 일인데.
어째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올라간 입꼬리에 화들짝 놀라 얼굴의 미소를 지워버렸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흥, 정 그렇게 그 아해가 본녀를 보고 싶어 한다면 얼굴 정도는 비춰줄 수밖에······. 정파의 제자가 기녀의 치마폭에 휩싸여 망나니로 전락하는 꼴을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일 것이야.”
그래.
이 모든 건 정파의 유망한 후기지수를 망나니로 타락시키려는 술책의 일환이다.
그러니 적사월이 아닌 사천제일기녀 능월향이 그를 만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임무의 일환이다.
정파의 제자인 그를 유혹해 망나니로 타락시키고, 자신의 치마폭이 아니면 안 되는 몸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적사월이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
“그럼 당분간 능월향의 신분으로 곤화루에 머물 예정이십니까?”
“어쩔 수 없이 그래야겠지.”
백면암군의 질문에 적사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내일 비무의 참관은······.”
“······하지 않겠다.”
두 번째 질문에 적사월이 고개를 저었다.
비무의 승부는 뻔했다.
공동파의 패배, 흑룡방의 승리.
어쩌면 그 과정에서 이철수가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그가 패배하는 꼴은 왠지 모르게······. 보고 싶지 않았다.
“광마도군 그 아해한테 승리하되 손속에는 사정을 두라 전하거라. 정사지쟁이 된 이상, 패배한 정파를 너무 자극하는 것도 좋지 않다.”
“알겠습니다. 사부님. 비무의 승패는 그럼 즉시 보고하겠습니다.”
“그래. 물러가라.”
고개를 숙이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백면암군을 보면서 적사월이 달콤한 한숨을 내쉬었다.
비무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공동파와 흑룡방.
이철수와 흑룡방.
둘의 관계를 생각하던 적사월이 머리를 헝클었다.
“······나쁜 놈······.”
적사월의 끈적한 색기가 담긴 목소리가 특실 안을 감돌았다.
*
내가 모든 사전 작업을 끝내고 사형이 창안한 혼원공이 사부의 승인으로 공동파의 공식 절학이 되고 며칠이 지난 날 아침.
“이 공자님. 일어나십시오. 아침입니다.”
나는 서하린의 모닝콜과 함께 눈을 떴다.
마침내.
공동파 대 흑룡방, 감숙성 대 사천성, 정파 대 사파의 운명을 결정지을 비무 당일이 밝았다.
장차 뭇 강호 여인들의 여심을 사로잡을 협객 중의 협객, 이 이철수의 강호 데뷔 쇼케이스가 바로 오늘 시작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