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따서 갚으면 되잖아
진천검왕이 쓴 친필 답장을 가지고 공동파로 돌아가는 길.
나는 사형을 데리고 서문세가의 정문을 나와 다시 공동산으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서문세가행은 결과적으로 본다면 성공적이었다.
진천검왕은 감히 허접 정치력으로 공자 앞에서 문자를 쓰다가 탈탈 털렸고, 무엇보다 서문청하와의 비무 약속은 앞으로도 서문세가를 두고두고 괴롭힐 것이다.
진천검왕은 이제 공동파 전용 ATM이 될 거고.
문제라면 사형이 천무지체라는 사실을 진천검왕이 알아낸 건데, 그것도 어차피 비무에서 밝혀질 사실이라 별 상관은 없었다.
“사제, 내가 이번에 무공을 만들었는데······.”
문제라면 누가 희대의 천재 아니랄까 봐, 진천검왕과 기도를 주고받은 그 짧은 찰나에 무공을 만들어낸 사형의 솜씨였다.
“······그래서 이 무공은 아직은 미완성이지만, 완성되면 어쩌면 혼원일기공과 비슷한 무공이 될지도 몰라. 하지만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니까, 일단은 혼원공(混元功)이라 이름 붙였어.”
사형이 옆에서 신나게 무공 이야기를 해댔다.
그의 눈이 반짝였다.
혼원일기공 급의 무공을 만들어냈다고?
하긴 사형의 재능을 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공동파 무리의 근간은 음양전도. 궁극의 목적은 순극생기.
그리고 상징은 역태극이다.
그리고 음양전도의 밑바탕이 되는 묘리는 혼원(混元).
태극 이전의 우주를 뜻하는 원리였다. 혼원의 묘리를 통해 음양이기를 역전하는 것인데, 이를 다시 역으로 뒤집으면 태극이 된다.
무당파처럼 태극의 묘리로 적의 공격을 부드럽게 받아 흘려낼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말이야 쉽지, 그걸 실전에서 찰나의 순간에 깨달아서 즉석에서 구결을 재조합, 새로운 무공을 만들어내는 건 현경의 경지에 오른 나도 불가능한 일이다.
오직 눈앞의 괴물, 사형만이 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전생에서는 공동파의 실전된 무공 대다수를 사형이 파편만으로 재창조해냈으니까.
“그렇군요. 잘하셨습니다. 사형.”
“응! 칭찬 고마워! 사제 덕분이야. 사제가 아니었다면, 혼원의 심득도 얻지 못했을지도 몰라. 사제한테도 알려줄까? 혼원공의 구결.”
“사부님한테 먼저 보고하지 않아도 괜찮습니까?”
나는 자꾸만 근거리로 달라붙는 사형에게서 반보 떨어지면서 말했다.
다가올 때마다 들꽃 향기가 훅 들어오는 게 살짝 소름 돋았다.
내 말에 사형이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아. 사제는 내 하나뿐인 사제니까.”
“그렇다면 좋습니다. 우제가 귀를 열고 사형이 만든 무공의 구결을 경청하도록 하겠습니다.”
내 말을 들은 사형이 구결을 전음을 통해 반복해서 불러줬다.
의외로 구결 자체는 간단하고 짧고 외우기 쉬웠다.
“다 외웠어.”
“그렇습니다.”
“사제를 위해서 구결을 쉽게 만들었는데, 다행이야.”
사형이 웃으며 말했다.
날 위해서라고? 살짝 소름이 돋았다.
우리 너무 친해지지는 말자고.
“감사합니다. 사형.”
나는 사형에게 비즈니스 예의를 차리면서 그가 불러준 구결을 머릿속으로 곱씹었다.
혼원공.
그렇게 이름 붙인 사형의 무공은 내 예상대로 혼원의 묘리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이 무공이라면 음양전도를 이뤄서 복마검법을 사용할 수도 있겠어.’
물론 진짜 혼원일기공 만큼의 효율은 나오지 않겠지만, 사용 불가능했던 무공이 이제는 사용이 가능해진 것이다.
상승의 내가기공을 일순의 깨달음만으로 창안하다니.
인세의 재능이라 할 수 없었다.
역시 천무지체 코인을 탄 건 잘한 결정이었다.
‘서문세가와의 비무까지 전부 마무리되면, 정말 싫지만 소림사를 찾아가야겠어.’
소림사.
생각하기만 해도 끔찍한, 남자들만 사는 시커멓고 땀내 나는 절.
하지만 나는 거기에 가야만 했다.
왜냐하면 소림사의 신승이 불에 타서 1/3만 남은 혼원일기공 비급을 보호하고 있으니까.
신승 원극대사.
검성 유진휘 이전의 정파제일인이자, 50년 전 정마대전 당시 오대산에서 전전대 천마를 맞이해 칠 주야에 걸친 혈투 끝에 천마를 격살하고 정마대전을 정파의 승리로 이끈 장본인.
내가 본격적으로 권력을 잡았을 때는, 정파제일인의 자리를 사형에게 넘겨주고 은퇴한 뒤 입적해서 나도 기록으로만 접한 인물이었다.
그 신승은 정마대전 당시 공동파 장문인과 친분이 있었고, 공동혈사를 알아차리고 가장 먼저 도착한 고수도 바로 당시에는 활염라(活閻羅)라 불렸던 신승이었다.
물론 신승이 도착했을 때 마교의 본대는 이미 감숙을 넘어 산서성으로 향했을 때였고, 후발대가 뒤처리를 맡은 상황.
그때 신승이 후발대를 급습, 혼원일기공의 비급을 지키려 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마교도에 의해 비급이 훼손되었던 것이다.
1/3만 남은 혼원일기공의 구결로 혼원일기공을 익힌다면 백이면 백 주화입마가 올 것은 자명한 사실. 거기에 일부이지만 신공절학. 몰락한 상태의 공동파가 지켜낼 수 없는 보물이었다.
1/3의 혼원일기공은 공동파에 독이 됐으면 독이 됐지 결코 약이 될 수 없는 빛 좋은 개살구, 짐덩어리에 불과했다.
그런 사정으로 정마대전이 끝난 뒤, 신승은 전대 공동파 장문인 임백천과 약조를 맺어 공동파가 재건될 힘을 되찾을 때까지 불완전한 혼원일기공을 소림사 면벽동에 봉인하기로 결정했다.
대대로 장문인에게만 내려오는 비밀이라 아직 장문제자 신분인 사형은 모르겠지만.
‘이번 정사지쟁에서 승리하고 서문세가까지 ATM으로 만든다면 사부가 자연스럽게 소림으로 향하라고 하겠지.’
전생에서도 그랬다.
흑룡방과의 혈투에서 이긴 사형이 공동파의 장문인 자리를 이어받고 가장 먼저 소림으로 찾아가 신승을 대면했다.
그 과정에서 받은 불완전한 혼원일기공의 구결. 보통 사람이라면 익히는 즉시 얼마 지나지 않아 주화입마에 들고 말 위험한 물건을 가지고 사형은 남은 2/3의 구결을 재창조했다.
혼원일기공이 새로운 무공으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여러모로 사형이 없었다면 공동파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번에도 혼원일기공의 조각을 얻어 사형을 굴려서 혼원일기공을 재창조해야했다.
“사제, 혼원공 마음에 들어?”
“네, 마음에 듭니다.”
무척이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형과 함께 공동파 본산으로 향했다.
*
이철수와 유진휘가 진천검왕의 답장을 들고 공동파 본산에 도착한 직후.
당문, 청성, 아미, 항산에서 보낸 전령도 공동파 본산에 도착했다.
네 문파에서 공동파 측 공증인으로 비무에 참여한다는 내용의 서신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전영은 즉시 친필 서신을 적어 화정현 사영회에 머무르고 있는 위소련에게 전달하게 시켰다.
물론 그 임무를 자처한 건 나였다.
서문세가라면 모를까, 위소련에게 서신을 전달하는 것 정도는 나 혼자서도 충분했다.
‘사형을 위소련에게 보낼 수는 없지.’
거기에 위소련은 이미 산문에서 사형의 미모를 칭찬한 전적이 있었다.
사형과 위소련을 더 만나게 하면 위험하다. 자칫하다가는 위소련이 사형에게 반할 위험이 존재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사형에게 미소녀가 넘어가다니.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런 꼴은 볼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서신 전령을 자처했다.
화정현에 들를 장소도 있었고 말이다.
사실 사형이 본인도 가겠다고 집요하게 말했지만, 나는 비무를 위해 지금은 수행할 때라는 말로 간신히 떼어놓는데 성공한 참이었다.
하산해서 오랜만에 다시 본 화정현은 평소보다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뚝딱뚝딱.
화정현 마을 옆 공터에는 이미 목수와 인부들이 동원되어 비무대를 건설하고 있었다.
정사지쟁이라는 소문이 이미 퍼진 모양인지
“여기로군.”
탁.
발걸음이 사영회라는 간판이 걸린 장원 앞에서 멈췄다.
“네놈은 공동파의 제자? 여긴 무슨 일이지?”
“흑룡방한테 전하는 본 파의 답신을 가져왔다. 문을 열어라.”
문을 지키는 왈패에게 서신을 흔들어 보였다.
왈패가 구시렁대더니 문을 열었다.
“따라오슈.”
문을 열고 들어간 사영회의 장원은 제법 고급스러웠다.
나는 왈패의 안내를 받아 본채를 지나 후원에 있는 별채로 향했다.
규모는 작지만 제법 고급스러운 기와집에 도착한 나는 마침내 별채 내부에서 흑사룡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래. 공동파 장문인의 서찰을 가져왔다고?”
새카만 흑단을 닮은 윤기가 흐르는 흑색 단발이 인상적인 미소녀가 흑룡이 수놓아진 흑의 무복을 입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흑사룡 위소련이었다.
“그래. 공증인을 모두 구했다는 전갈이다.”
내게 서신을 받아든 위소련이 내용을 읽은 뒤에 탁자 위에 올리면서 말했다.
“청성, 당문, 아미, 항산 그리고 서문세가가 공증인으로 참여한다라. 알겠다. 곧 내 몸종이 될 터이니 미리 몸종이 되면 뭘 할지 생각해두도록.”
“너나 미리 날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연습부터 하도록. 어차피 이 비무는 우리가 이길 테니까 말이야.”
“······크윽······. 흥. 돌아가라. 비무 날 다시 보도록 하지.”
내 말을 들은 위소련이 부들부들 떨더니 고개를 돌렸다.
하여간 도발해봤자 본전도 못 찾을 거면서 왜 저러는 건지.
“그래. 다음에 보자. 우리 귀여운 동생.”
나는 위소련에게 손을 흔들면서 웃었다.
내 말을 들은 위소련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소리쳤다.
“나가!!”
마지막까지 위소련의 속을 긁으면서 별채에서 나온 나는 별채 앞을 지키는 왈패를 바라보며 말했다.
“야. 너희 회주 좀 만나자.”
“공동파 제자가 우리 회주님은 왜?”
“왜 만나겠어?”
나는 왈패를 바라보면서 웃었다.
“너희 사채 놓잖아. 사채 좀 빌리려고.”
하오문이 비무 토토를 할 거라는 건 1000% 사실이었다.
사실 지금부터 도박판을 열었을 거다.
그리고 공동파에 역배가 걸릴 거라는 것도 사실이었고.
그렇다면 당연히 한탕 해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역배를 터뜨리기 위해서는 종잣돈이 필요한데, 지금의 나는 무일푼이다.
야명주는 이미 공동파 재정으로 들어가서 팔 수 없다.
하지만 돈이 없으면 만들면 된다. 그러니까, 빌려서.
아 따서 갚으면 되잖아.
어차피 우리가 이기면 이놈들은 관아에 전부 넘겨질 예정이니 채무도 소멸할 거다.
내 말을 들은 왈패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너 미쳤냐?”
“안 미쳤고 지극히 정상이니까 빨리 안내해. 뭐 해? 고객 응대해야지? 이 새끼들이 사채업도 서비스업인거 몰라?”
“이런 미친 새끼······. 서비수업? 그건 또 무슨 말이냐?”
“모르면 됐다. 안내나 해.”
나는 왈패의 극찬을 받으며 회주를 만났다.
“공동파 제자 주제에 본 회에서 돈을 빌리겠다고? 이런 미친놈을 보았나······.”
“장사꾼이 고객 가려 받을 생각입니까? 일단 제 신용으로 얼마까지 대출 가능한지 확인 좀 해주시죠.”
회주 역시 나를 극찬하며 차용증을 쓰고 돈을 빌려줬다.
내가 공동파라는 보증을 세워서 빌린 금액은 은자 십오 냥.
이자는 한 달에 삼 할이라는 미친 금리였다.
심지어 복리였다.
산X머니, 러시X캐시, 일수업자들도 울고 갈 살인적인 이자율!
그야말로 염왕채라는 말에 걸맞는 고리대였다.
물론 어차피 비무 결과 놈들을 관아에 넘겨서 채무를 공중분해시켜 배를 쨀 생각이었기에 금리가 얼마인지는 내게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렇게 전낭에 은자 십오 냥을 넣고 향한 곳은 유흥가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비무 토토에 역배를 걸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