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10년째 0명
“······천무지체라면 승산은 충분하지. 만용이 아니다. 공동파의 저력을 얕본 것에 대해 사과하지. 유 소협.”
“서문 대협의 한 수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선의로 베푼 가르침이 아니다.
허나 천무지체의 무인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그 사실이 자못 무겁게 다가왔지만, 서문현천은 애써 그 사실을 외면했다
“그래. 그리고 같은 정파 무림의 동도로서, 감숙 무림의 대형으로서 이 땅을 범하려는 사파의 위협을 좌시할 수는 없는 법. 이번 비무에 본가도 공증인으로 입회하도록 하겠네. 장문인께 그리 전해드리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서문 대협.”
포권을 하는 이철수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서문세가가 마침내 공증인으로 입회한 그때.
[사제! 나 잘했지?]
그의 귓가로 유진휘의 전음이 들려왔다.
진중한 겉모습과는 달리, 유진휘의 가슴은 지금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드디어.
지켜냈다.
흑사룡 위소련과의 신경전 때와는 달랐다.
위소련은 유진휘의 상대가 될 수조차 없는 하수였으니까. 그렇게까지 큰 위험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천검왕 서문현천은 달랐다.
천하에 열일곱 뿐인 화경의 고수로부터 사제를 지킨 것이다.
뿌듯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제가 산문에서 흑의복면인에게 암습당하는 것조차 몰랐던 그날 밤과는 달랐다.
사제를 위해서라면.
진천검왕이 아니라 더한 고수와도 맞설 수 있었다.
[계속, 이렇게 상대가 누구건, 어떤 상황이건 사제는 내가 지킬 거야. 그러니까 안심해.]
유진휘가 사제를 향해 다정한 목소리로 전음을 흘렸다.
사제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이 의지되는 사형이라는 사실을.
이 세상에서 그를 생각하고, 앞뒤 가리지 않고 그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녀뿐이라는 사실을.
지금처럼 이렇게 안심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것뿐이니까······.’
하늘이 내린 무재를 지닌 유진휘였지만, 그녀의 재능은 어디까지나 무학에 한정된 재능.
다른 분야에 대한 재능은 오히려 범인(凡人)보다 살짝 뒤떨어졌다.
그녀가 이렇게 날뛸 수 있는 것도, 서문현천을 곤란하게 만든 것도, 공동파의 뜻을 서문세가에 관철한 것도.
전부 사제의 공이라는 사실을 유진휘는 알고 있었다.
그에 비한다면 그녀가 한 일은 그저 무력을 과시하는 것뿐이다. 보잘것없는 일이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제는 사문을 위해 헌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천하는 그런 사제의 노고를 알아주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녀의 고절한 무공을 칭송할 것이다.
그 사실이 유진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라도 알아줘야 해.’
구주팔황이 전부 적이 되더라도, 자신만큼은 사제의 편이 되어주리라.
유진휘는 그렇게 다짐하면서, 고개를 돌려 사제를 바라보았다.
그녀와 사제의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친 사제가 전음에 답한다는 듯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런 사제를 본 유진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두근.
뛰기 시작한 그녀의 심장은 진천검왕에게 인사를 끝낸 뒤 사제와 함께 가주전을 나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
같은 시각.
산서성 항산(恒山).
중원 오악 중 북악(北岳)으로 꼽히는 천혜의 영산.
북악항산지유(北岳恒山之幽), 항산다호별수(恒山多好列岫)로 칭송받을 정도로 산세가 험하고 기세가 웅장한 산. 108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하여, 산이 아닌 산맥(山脈)이라 불릴 정도의 명산.
절벽이 끝없이 이어진 험한 항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구름을 뚫고 솟아난 천봉령(天峰岺)에는 구파일방의 일좌를 차지하는 대문파가 자리해 있었다.
항산파(恒山派).
300년 전 혈세신마의 공격으로 멸문한 남해 검각의 생존자들이 혈교의 난을 피해 강북으로 올라와 건립한, 검각의 후계 문파.
50년 전 몰락한 공동파를 대신해서 구대문파의 자리를 채운 명문대파.
파양호 대전으로 혈교가 몰락하고 대명제국이 건국된 이후에도 항산파는 검각이 있던 절강성으로 가지 못하고 있었다.
사도팔문의 일좌를 차지하는 사파의 대문파, 소금 밀매 상인들이 모여 결성해서 이제는 흑점(黑店)과 암상(暗商)의 연합 문파가 된 밀금당(密金黨)이 절강성의 패권을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강남 전체가 사파의 영역이 되었기에 더더욱 항산파의 권토중래(捲土重來)는 요원한 일이 되고 말았다.
항산파는 검각의 전통을 따라 오직 여인만이 입문을 허락받는 모든 제자가 여인인 여인문파였다.
마찬가지로 항산파의 장문인이자 최고수는 검각의 전통을 따라 대대로 검후(劍后)라는 별호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올해로 46세를 맞이한 당대 검후(劍后)이자 화경의 고수인 은설란은 지금 항산파 본산의 중심에 있는 월은각(月殷閣)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항산파의 최상승 절학인 월녀검을 대성한 영향으로 밤하늘의 달빛처럼 투명한 은빛으로 물든 은설란의 머리카락과 눈썹이 창살 너머로 들어온 햇빛을 받아 신비롭게 반짝였다.
46세의 나이인데도 고절한 무공으로 20대 중반의 미모를 유지하고 있는 은발 미녀, 은설란이 한창 업무를 보고 있던 그때.
“사부님!”
드르륵.
문이 열리며 흑색 머리카락 사이사이에 은빛 머리가 섞인 미소녀, 은설란의 제자이자 항산파의 장문제자인 소검후(小劍后) 천소빈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은설란이 은빛 머리카락만큼이나 냉랭한 말투로 그녀에게 물었다.
“오늘도 도전자가 없다는 소식이에요! 후후. 역시 사부님. 모든 강호 여인들의 우상인 사부님을 감히 사내 따위가 데려가려고 하다니! 백 년은 이르다고요! 호호호호호호호!”
천소빈이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은설란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 모습을 본 천소빈이 두근대는 가슴을 잠재우면서 속으로 경탄했다.
역시 사부님이었다.
강호 모든 여고수의 우상.
감히 사내 따위에게 내줄 수 없다.
그런 천소빈과는 달리 은설란의 속은 들끓고 있었다.
‘왜 10년째 도전자가 한 명도 없는 거야!’
30년 전.
그녀가 아직 팔팔한 이팔청춘, 16세의 소검후였던 시절.
혈기가 끓던 그때 그녀는 용봉지회에서 선언했다.
‘저는 절 이기는 사내를 지아비로 삼겠어요. 누구든지, 정파의 동량지재라면 저한테 도전해서 이긴다면 저를 배필로 삼아도 좋아요. 단, 그게 가능하다면요.’
사내가 배필을 선택하는 풍조와는 정반대로 아녀자가 지아비를 선택하겠다는 파격적인 선언.
그 선언은 용봉지회를 넘어 정파 무림을 위진시켰고, 수많은 도전자가 절벽 위의 꽃인 그녀를 배필로 삼기 위해 도전해왔다.
결과는 전승.
검각과 항산파의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재능을 지닌 은설란이었기에 어쩌면 예정된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소검후 시절의 은설란은 다른 강호의 여인들과 달리, 스스로의 운명은 스스로가 정한다는 행위에 도취되어 있었다.
나는 다른 아녀자들과는 다르다는 우월감이었다. 실제로 강호 무림의 여인들은 그녀의 행보에 열광했다.
무림에서 대다수 여인의 운명은 정략결혼이나 중매결혼으로 귀결되어 출가외인이 되기 마련. 그렇기에 그녀들은 평범한 여인의 삶을 벗어난 은설란의 행보에 열광했다.
하지만 세월이 10년, 20년 흐르고.
소검후가 아닌 검후가 되고, 화경의 경지에 오른 이후.
은설란의 생각은 달라졌다.
용봉지회 때 사귄 친구들은 이미 가정을 이루고, 아이도 낳아 행복하게 아녀자의 기쁨을 누리고 있었다.
중매결혼, 정략결혼이라 한들 정을 붙이고 잉꼬부부처럼 백년해로하는 여인들이 더 많았다. 가끔 자식, 손주 자랑을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지아비는커녕 정인조차 없었다.
아니 정인도 만들 수 없었다.
30년 전, 철없을 때 내뱉은 용봉지회의 선언이 아직 그녀를 옭아매고 있었으니까.
공식적으로 그녀의 정인이, 배필이 되기 위해서는 그녀를 비무로 이겨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구파일방의 장문인이자 화경의 고수가 된 이후부터 정파에서 그녀에게 감히 도전하려는 사내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미모는 소검후 시절부터 중원 무림에 정평이 나 있었고, 지금도 정파제일미녀로 꼽히지만 정작 사내들은 그녀를 절벽 위의 꽃처럼 그저 경외하며 강호의 어른으로 공경만 할 뿐이었다.
천하의 어떤 사내도 그녀를 여인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전부 그 비무 때문이었다.
반대로 여인에게는 아직 폭발적인 인기를 자랑했다. 소검후의 말대로 지금의 그녀는 정사마를 가리지 않고 모든 여고수의 우상이었다. 처음에는 그 인기가 좋았던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나도······. 누군가 옆에 있었으면······.’
처음 10년은 좋았다. 다음 10년은 뭔가 허전했다.
그리고 마지막 10년은······. 끔찍했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 누군가 이 텅 비어버린 마음을 채워줬으면 좋겠다. 과거 어릴 때의 일을 그녀는 후회했지만 되돌릴 수 없었다.
가끔 얼굴을 알 수 없는 사내의 품에 안겨 망측한 일을 하는 음란한 꿈을 꿀 정도로 그녀는 지금 사내의 애정에 목말라 있었다.
같은 경지의 사내들은 이미 전부 가정을 이뤘거나, 신승처럼 종교적 이유로 혼인을 못하는 사내들뿐이었다.
그런 이유로 지난 10년 간, 그녀에게 도전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선언을 철회하기에는, 너무나 멀리 와 버렸다. 사마외도의 도전을 허가하는 건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였고.
30년 동안 그녀에게 달라붙은 강호 여후배들의 선망과 동경을 이제 와서 선언 철회로 부술 수도 없었다.
지금의 항산파가 융성한 데에는, 그런 여인들의 선망도 한 몫 했으니까.
그녀를 동경하는 여인들이 항산파의 문을 두드려 항산파의 문도가 폭증했기 때문이었다.
눈앞의 천소빈 역시 그런 소녀였고.
게다가 체면이 걸린 문제기도 했다. 화경의 고수이자 항산파의 장문인이며 검후인 그녀가 했던 말을 철회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최선은 누군가 그녀를 비무로 이겨주는 거였다.
‘······이대로는 안 돼. 이대로는 그 요녀처럼 평생 독신으로 살 텐데, 그럴 수는 없어.’
은설란의 머리에 적사월이 떠올랐다.
사도련주이자 자타공인 천하제일미녀인 그 요녀는 60년 일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한다.
풍문으로는 적사월은 사내를 거부하며 싫어한다던데, 은설란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었다.
그녀는 결코 독신으로 살 생각이 없었다.
지금도 이미 한참 혼인 적령기가 지난 노처녀인 그녀였다.
더 늦으면 안 된다. 적사월처럼 환갑의 나이까지 독신으로 사는 건 죽어도 싫었다.
하지만 도전자는 이미 10년째 0명이었다.
“아, 그리고 사부님. 소식이 하나 더 있어요! 공동파와 흑룡방의 비무에 대해서 묘한 소문이 돌고 있어요. 이번 비무에서 이기는 쪽이 향후 백 년간 강호를 제패한다고······. 세인들은 이번 비무를 이미 정사지쟁으로 여기고 있어요.”
소검후 천소빈이 다른 화제를 꺼냈다.
흑룡방과 공동파의 비무.
거기에 대해서는 이미 은설란도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항산파가 구대문파로 올라선 건, 몰락한 공동파를 대신해서였으니까.
구대문파에서 탈락한 공동파는 자연히 항산파를 미묘한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공동파와 항산파는 그렇게 은원으로 묶였기 때문에, 몰락했다 한들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그래?”
하지만 그렇다고 어디까지나 관심에 불과했다.
그 이상으로 비무에 개입할 생각은 없었다. 개입할 명분도 없었고.
오히려 공동파가 몰락해주는 쪽이 굳이 따지면 항산파에 이득이었다. 은원이 소멸되는 거니까.
그런데 단순한 비무가 아니라 정사지쟁으로 격이 격상됐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항산파도 정파 무림을 영도하는 구대문파의 일원으로서, 정사지쟁에 개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네. 그리고 공동파 장문인이 보낸 서찰도 오늘 도착했어요.”
스윽.
천소빈이 내민 서신을 검후가 받아들였다.
그녀의 시야에 서신의 내용이 보였다.
‘공증인 입회를 요청한다······.’
이번 비무의 공증인 입회를 요구하는 서찰이었다.
“다른 구대문파도 서신을 받았다고 해요. 사부님.”
제자의 말을 들은 검후가 서신을 접었다.
다른 구대문파도 받았다면.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게다가 공동파와 항산파는 은원으로 엮인 사이. 거기다 저쪽에서 먼저 공증인 입회를 요청해왔으니 수락하는 것이 강호의 도리에도 맞다.
최근 본산에만 있는데다 도전자도 전혀 없어서 답답했던 참이다.
마실이라도 나갈 겸, 외유를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결정을 내린 검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랜만에 외출을 좀 해야겠구나. 채비하거라. 외출 전에 먼저 공동파에 답신을 보내는 것도 잊지 말고.”
“네, 사부님.”
소검후가 고개를 숙였다.
은설란이 서신을 품에 넣고 장문인실을 벗어났다.
검후의 발길이 지금, 항산을 벗어나 감숙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