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천무지체(天武之體)
서문현천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의 시야에 유진휘의 모습이 들어왔다.
공동파의 장문제자 유진휘.
지금까지 이철수에게 협상을 일임했던 그가 직접 나서서 둘 사이를 가로막았을 때만 하더라도 서문현천은 별 생각이 없었다.
물론 둘에 대한 정보가 없는 건 아니었다.
유진휘에게 일대기재라는 소문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검증받지 않은 뜬소문.
실제 강호에 통용될 정도의 재능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내 기도를 받아냈다고?’
하지만 지금.
서문현천은 소문이 실제를 전부 담아내지 못했음을 알게 되었다.
유진휘.
공동파의 장문제자.
그가 서문현천이 쏘아낸 기도를 정면에서 저지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공동파 제일기재라지만···.’
서문현천은 눈을 가늘게 치떴다.
말이 제일기재지 공동파 구성원이 셋뿐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고만고만한 수준일 것이다.
그렇게 예상했었다.
적당히 시험을 위해서였다지만, 애송이가 받아낼 수준의 투기는 아니었을 터.
그런데도 받아냈다. 버텨냈다.
흥미로웠다.
자연스럽게 호기심이 일었다. 단전에서 의념에 반응한 태황패력공의 진기가 솟구쳐 올랐다.
서문현천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서문세가의 무공은 중검(重劍). 내력을 검에 더해 무게를 늘려 압도적이고 무거운 기세로 공간을 장악, 무거운 일검으로 적을 제압하는 무공이다.
진천검왕은 태황패력공과 가주에게만 전해지는 비전절학인 진천패황검을 대성한 화경의 고수.
중검의 정점에 오른 서문현천의 내력은 수미산(須彌山)보다 무거우며, 하늘을 떨어 울릴 정도로 패도적이었다.
가히 검의 왕이라 칭할 만한 무겁고 패도적인 기운이 유진휘를 향해 쏟아졌다.
‘어디까지 버티나 보겠다. 공동파의 기재.’
처음은 분노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기재를 만난 호기심. 그리고 장차 공동파의 장문인이 될 유진휘의 전력을 파악하기 위한 탐사용 기도가 유진휘를 향해 집중됐다.
“······.”
하늘 아래 태산을 연상시키는 진천검왕의 기도를 정면으로 마주한 유진휘의 표정은 한 점 흔들림 없었다.
그녀는 침착했다.
‘사제는 내가 지켜야 해.’
더 이상, 이제는 사제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사제를 지키는 건 나다.
두근.
유진휘의 심장이 조금씩 느리게 뛰었다.
‘집중하자.’
찰나의 시간.
하지만 유진휘는 천무지체와 대종사의 자질을 보유한 하늘이 낳은 천재.
그녀의 시간은 일반인의 시간과 완전히 달랐다.
사고가 끝없이 가속된다.
찰나의 시간이 일각으로, 일각에서 한 식경으로, 한 식경에서 한 시진으로.
끝없이 엿가락처럼 늘어난다.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풍경 속에서 유진휘는 끝없이 고민했다.
그녀의 눈앞에 지금까지 익힌 공동파 심법의 구결이 펼쳐졌다.
기초공인 소양심법, 삼음진결. 역혈대법인 역라순혈공. 그리고 장문제자로서 한 번 열람하고 전부 외운 공동파의 최상승 절학인 이합신공의 구결까지.
‘이걸로는 안 돼.’
이걸로는 진천검왕의 기도를 막아낼 수 없다.
공동파 무공의 근간은 음양전도.
음양이기의 상전이를 통해 폭발적인 힘을 끌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공동파의 검공은 강검이었다.
거칠고 강한 힘을 담아 검을 끝없이 적에게 폭풍처럼 몰아치는 것이 공동파의 검공.
힘에는 힘으로 맞서는 것, 차라리 부러지고 말지 꺾이지는 않는 것이 공동파 무학의 성질이었던 것이다.
‘정말 그런 걸까?’
찰나의 시간을 끝없이 쪼갠 사고의 미궁 속에서 유진휘는 의문을 던졌다.
공동파의 무공에는 정말 강(强)의 묘리만 있는 것일까?
혼원검제가 창안한 공동파 무공의 궁극인 이합신공은 강의 묘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힘의 방향을 자유자재로 변환해서 적의 힘을 이용해 내 힘을 강하게 만드는 건 물론, 적의 힘을 역이용해 반격할 수도 있었다.
마치 태극을 근본 원리로 삼은 무당의 무공처럼.
‘역태극과 태극은 꼭 반대여야 하는 걸까?’
무당의 태극과 공동의 역태극.
둘은 정말 다른 것일까?
‘아니야.’
아니다.
둘이 정말 다른 것이라면, 혼원검제의 이합신공을 설명할 수 없다.
둘은 같지도 다르지도 않다.
혼원검제.
혼원이라는 근본에서 갈라져나온 형제인 것이다.
거기까지 도달한 유진휘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혼원일기공이 그런 무공이었어.’
양강기공과 음한기공을 통해 음양전도를 이루는 내가기공.
지금은 실전된 공동파 최상승의 내가기공. 혼원일기공이 바로 이합신공의 밑바탕이 된 무공이리라.
혼원일기공을 바탕으로 이합신공을 창안했음을, 유진휘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공동파에 혼원일기공은 없다. 그러나 유진휘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뛰어난 오성이, 대종사의 자질이 정답을 제시하고 있었으니까.
그녀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혼원검제 선조님께서 남긴 도해에서 복마검법을 복원했을 때처럼.’
유진휘의 머릿속에 사제와 함께 했던 혼원비동의 날이 떠올랐다.
혼원비동의 석벽에 새겨진 복마검법의 도해(圖解)는 불친절했다.
도해를 해석하는데 무려 이틀이 넘는 시간이 소요됐을 정도.
‘사제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긴가민가할 때마다 적절히 들어오던 사제의 조언이 없었더라면,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가능성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도해가 아니었을지도 몰라.’
유진휘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그녀는 이제야 깨달았다.
벽면에 새겨진 검흔.
그건 도해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석벽 너머의 이합신공을 숨기기 위해서 설치한 모종의 기관일지도 모른다고.
그렇지만 그녀 본인은 그 검흔에서 복마검법을 복원해냈다.
그렇다면.
복원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다.
‘나는 기재니까.’
그녀는 공동파의 장문제자.
차기 장문인이자, 장차 공동파의 재건을 도맡아야 할 기재.
‘천무지체를 보유한 나라면 할 수 있어.’
아니 내가 책임지고 해야 한다.
사문을 재건하고 소중한 사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렇지 않으면, 내가 짊어진 이 천형(天刑)이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유진휘의 눈에서 안광이 반짝였다.
그녀가 지닌 대종사의 자질이 빛을 발했다.
하늘이 내린 오성이 그녀의 뇌리에서 가장 먼저 찾아낸 무공은 이거였다.
‘역라순혈공.’
공동파의 역혈은 마교와는 달리 음양전도를 이루기 위한 수단.
그리고 음양전도는 혼원의 묘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역라순혈공은 혼원일기공의 밑바탕이 된 기공이다.
역라순혈공에도 혼원의 묘리가 일부지만 깃들어 있다.
그렇다면, 혼원을 중심으로 이합신공의 묘리와 역라순혈공의 묘리를 조합한다면.
어쩌면······.
유진휘의 머릿속에 구결이 재조합된다.
역태극을 혼원의 묘리를 통해 역전해서 다시 태극으로 되돌린다.
그녀의 시선이 진천검왕을 똑바로 향한다.
새로운 무공의 구결을 속으로 읊는다. 그녀의 단전이 호응하며 내력이 혈도를 내달렸다. 유진휘의 손이 역태극을 그려 뒤집은 순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기도의 방향이 뒤틀리며 그녀와 그녀의 등 뒤에 있는 이철수를 비껴나 사방팔방으로 비산한다.
이 과정에서 거친 서문현천의 기도가 부드러운 봄바람으로 변해 가주실 내부를 휘돌았다.
휘잉.
한 점의 봄바람이 서문현천의 수염을 간질이며 지나갔다.
“······서문 대협. 후배가 묻겠습니다. 아직도 본 파가 만용을 부리고 있다 생각하십니까?”
유진휘의 말에 서문현천은 침묵했다.
화경의 절대고수인 그였기에 알 수 있었다.
방금 유진휘가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지.
서문현천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기도를 받아넘기다니, 이건 지금 혼원(混元)이 없는 공동의 무공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야. 혼원일기공을 극성으로 익힌 공동파의 복마검수가 아니라면. 하지만 지금 공동파에 혼원일기공은 없다. 그렇다는 건······.’
가능성은 두 개였다.
공동파에서 혼원일기공을 되찾았거나, 아니면.
눈앞의 유진휘가 즉석에서 새로운 무공을 창안했거나.
전자는 아니었다.
혼원일기공을 되찾았다면, 유진휘가 기도를 처음 마주하고 느낀 동요를 설명할 수 없다. 오히려 침착했겠지, 혼원일기공으로 반격하면 그만이니.
그러니 아니다.
즉석에서 새로운 무공을 창안한다?
말도 안 되는 결론은 아니다.
딱 하나.
눈앞의 유진휘가 그 체질이라면.
“천무지체(天武之體).”
천무지체.
태어날 때부터 기감을 각성하고, 범인과 기혈과 근골이 다르며 가속된 사고 속에서 범인과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하늘이 내린 오성을 보유한 오직 사내의 몸으로만 태어나는 천재 중의 천재.
무림사에 극히 드물게 나타난 모든 천무지체의 보유자는 일대종사의 자질을 겸비하여, 당대의 천하제일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리고 지금 그의 눈앞에 당대 천무지체가 있었다.
미래의 천하제일인이 있었다.
진실에 도달한 서문현천이 웃었다.
“흐, 흐흐흐, 흐하하하하. 천무지체란 말이지! 공동파 장문인이 호랑이 새끼를 키우고 있었구나!”
그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흘렀다.
서문현천이 기도를 거뒀다.
더 이상의 시험은 의미가 없었다.
천무지체였다.
하나를 배우면 일만을 깨우치는 희대의 천재에게 시험 따위는 의미 없다.
정파제일 후기지수로 꼽히는 화산파의 검룡도, 이번 비무 상대인 흑룡방의 흑사룡도 결코 유진휘를 이길 수 없으리라.
비무 도중에도 시간을 쪼개 심득을 얻어 더 강해지는 잠룡을 상대로 승리를 장담 가능한 후기지수는 천하 어디에도 없다.
이 비무는 공동파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그리고 후대의 서문세가도.’
공동파는 재건될 것이다.
미래의 천하제일인을 보유한 문파였다. 천하의 인재가 모두 몰리는 건 자명한 일이다.
문제는 서문세가였다.
후대의 서문세가는 과거만큼은 아니지만, 공동파에 눌리게 될 것이다.
시간은 공동파의 편이었다.
어쩌면 당대에 그런 결과가 도출될 수도 있었다.
진천검왕 본인 손으로 직접 일으킨 서문세가였다. 전통이 짧다 무시당하기는 했지만, 지난 세월 동안 서문세가를 육대세가의 말석에 오를 정도까지 키워냈다.
이제 와서 다시 추락할 수는 없었다.
‘본가는 결코 호락호락하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서문현천은 이 순간, 서문세가가 지는 해가 될 거라는 미래를 깨달았다.
미래를 바꿀 수는 없다.
그렇다고 뜨는 태양, 미래의 천하제일인에게 지금까지 이룩한 모든 걸 내줄 생각도 없었다.
그러기에는 서문현천의 드높은 자존심과 체면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니 최대한 저항하겠다. 견제하겠다.
아직은.
그래, 아직은 서문세가가 감숙제일문파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차후의 일. 이미 모든 퇴로가 막힌 지금 상황에서 그가 할 일은 없었다.
흑룡방과 손을 잡는 건 고려할 가치도 없다. 서문세가는 명명백백 정도 문파. 사마외도의 무리와 타협하지 않는다.
더 이상 비무를 무산시킬 방법도, 공증인 입회를 피할 방법도 없다.
결국 이 빌어먹을 뒤치다꺼리를 도맡아야 했다.
분노는 도움이 안 된다. 치밀어오르는 감정으로 달아오르는 머리를 식힌 진천검왕이 결론을 내렸다.
‘공증인 입회를 수락하는 수밖에 없겠군.’
지금은 일단 저쪽의 요구를 수용한다.
하지만 앞으로도 이런 천행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진천검왕은 그렇게, 본인이 아끼는 막내딸 서문청하가 이철수와 어떤 약속을 한 건지, 이철수가 서문청하와의 비무를 통해 어떤 계획을 꾸미고 있는지 꿈에도 모르는 상태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