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그런 건 필요 없다
면사 너머.
적사월의 눈동자가 붉게 반짝였다.
‘사내는 다 똑같아. 믿을 수 없어. 특히 색(色)을 밝히는 저놈은 더더욱.’
적사월이 면사 너머에서 입술을 깨물었다.
이철수. 그가 색(色)을 밝히는 남자라는 사실은 이미 대면할 때부터 깨달았던 그녀였다.
사실 이철수는 본인이 색을 밝힌다는 사실을 숨기려 들지도 않았다.
도가의 방중술 운운하며 운우지락을 대놓고 언급하며 자신을 희롱했던 이철수였다.
‘그냥 치마를 두르면 누구라도 좋아하는 미친놈인 게 분명해.’
화면호검의 미모가 아름답다고 말한 이철수의 말은 진실이었다.
하지만 천하는 넓고 사람은 많은 법.
이철수가 만약 여인이기만 한다면 모두 운우지락이 가능한 미친놈이라면?
그래서 여기저기 양물을 휘두르고 다니는 색마(色魔)라면?
‘그런 사내를 화면호검의 마음에 둘 수는 없지.’
시험은 통과하기는 했지만, 그런 미친놈이라면 인정할 수 없다.
염왕이 아닌 화면호검이다.
적사월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고운 손을 꽈악 쥐었다.
두근, 두근.
하지만 이성과는 달리 감성을 담당하는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적사월은 심장의 고동을 애써 외면하면서 내력을 끌어올렸다.
무위가 고작 이류에 불과한 그를 유혹하려면 일성이면 충분했다.
고작 일성의 섭심유혼기면 충분히 저 남자를 발정나게 만들 수 있었다.
그 이상은 필요 없었다.
적사월은 그리 자신했다.
‘모든 사내는 다 똑같으니까.’
천하제일미의 유혹을 견딜 수 있는 사내는 세상에 없다.
그런 사내가 있다면 둘 중 하나다.
남색가이거나 고자거나.
이철수는 둘 다 아니니 무조건 유혹에 넘어갈 것이다.
그녀를 보고 음심을 품었던 이 세상의 모든 다른 사내들처럼.
흑도의 왈패건 정파의 이름 있는 대공자건 예외는 없다.
그래서 그가 찾아온 모습을 보고 일부러 불렀다.
만약 그가 넘어간다면?
그다음에는······?
적사월의 머릿속에 얼굴이 붉어지면서 그녀를 덮치는 이철수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특실에는 그와 그녀 단둘뿐.사르르.
비단 이불 위로 서로 겹쳐지는 그와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심장 박동이 최고조에 이른 순간.
‘그, 그렇게 둘 수는 없어! 바로 혈도를 제압해야지!’
적사월이 빨개진 얼굴로 스스로의 망상을 부정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혈도를 제압할 것이다. 그래서 그녀만 아는 하오문의 비밀 안가로 데려가 죄값을 물을 것이다.
비밀 안가라면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단둘이 있을 수 있······.
‘놈한테 죄값을 물을 의도다. 다른 의도는 없느니라.’
적사월은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섭심유혼기의 기도를 해방했다.
‘······본녀의 마음을 쉽게 가져가게 둘 수는 없는 법이지.’
두근, 두근.
적사월은 심장 고동을 외면하면서 면사 너머로 이철수를 응시했다.
*
적사월은 미염공(美艶功)의 대가다.
그렇다면 미염공이란 무엇인가? 쉽게 말해서 이성을 유혹하는 무공이다.
남자가 익히면 여인을, 여인이 익히면 남자를 유혹하는 색기를 연마하는 무공.
모든 색공(色功)의 기본이 되는 무공이라 할 수 있겠다.
채음보양이나 채양보음을 하려면 우선 상대를 유혹해서 잠자리까지 유도해야 했다. 그래서 색공에 입문하면 가장 먼저 미염공을 기초공으로 배운다.
삼류 미염공은 웃음, 눈짓, 몸짓 따위로 이성을 홀리지만, 상승의 미염공은 거기에 더해 상대의 정신에 간섭해서 이지를 흐트러트리는 일종의 정신적 디버프 기술이다.
그리고 적사월의 독문무공인 섭심유혼기가 바로 그 상승의 미염공이었다.
‘감히 이 나를 상대로 미염공이라니.’
나는 미염공이 싫다.
미염공이 최면 어플이랑 뭐가 다르단 말인가? 본디 운우지락이란 사내와 여인의 육체와 정신이 모두 통할 때에 진정한 쾌락을 느낄 수 있는 법.
하지만 미염공은 아니다. 상대의 이지를 흐트러뜨려 잠자리로 인도하는 것이 대체 현대의 약물 섹스와 뭐가 다르단 말인가?
자고로 여심(女心)이란 편법 없이 정도(正道)의 방법으로 직접 성취해야 하는 법. 미염공 같은 사마외도의 수법으로는 결코 상대의 진정한 마음을 얻을 수 없다.
미염공과 섭혼술로 상대를 꾀어내 몸을 취해봤자 진정한 마음은 얻을 수 없다. 그저 육체의 교합만 있을 뿐이다.
그건 올바른 섹스가 아니다.
그러니 적사월의 미염공 따위에 걸려줄 생각이 없었다. 내가 비록 신체는 이류지만 정신은 이미 완성된 현경의 고수.
정신에 작용하는 모든 종류의 무공과 술법은 나보다 높은 경지의 고수가 사용하는 것이 아니면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 설령 적사월이 진심으로 미염공과 섭혼술을 펼쳐도 같은 현경의 정신력을 지닌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 내가 일부러 걸리거나, 그녀의 유혹에 진심으로 넘어가 마음을 주는 게 아닌 이상.
나는 적사월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탁자 위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궁에 있을 때 물처럼 마셨던 서호용정이나 철관음 같은 최고급 차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고급차인 모양인지 차향이 꽤 좋았다.
“따질 게 있어서 왔소.”
적사월이 발한 일 성의 섭심유혼기의 공력을 나는 그대로 받아 물처럼 흘렸다.
섭심유혼기는 현경의 정신력을 지닌 내 이지를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나는 눈빛이 흐려지지도, 이지를 잃지도 않은 채 똑바로 적사월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하오문에서 공동파의 제자를 미행했다. 그것도 하필 비무를 앞두고. 너무 시일이 공교롭다고 생각하지 않소? 어쩌면 당신들이 수집한 정보를 통해 흑룡방이 살막에 우리를 해하라는 의뢰를 넣으려 한 걸지도 모르지. 비무의 당사자가 없어지면 비무도 성립되지 않으니까 말이오. 도리가 없이 방종을 추종하는 사파의 무리가 자주 쓰는 수법처럼.”
나는 적사월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원래 하려 했던 말을 내뱉었다.
물론 흑룡방이 미친 게 아니고서야 나와 사형을 해코지하려 하오문에 의뢰를 넣었을 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에 있어서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선동과 날조라도 이쪽에 유리하게 진실로 만들면 그만이었다. 현대 정치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네거티브 전략이었다.
내 말에 적사월의 손이 떨렸다.
섭심유혼기가 통하지 않아서 당황하는 건가?
“호호호. 소협께서 왜 그런 오해를 하신 건지 모르겠군요. 저희 하오문은 그저 정보 수집차 의례적으로 두 제자분의 행적을 추적했을 뿐입니다. 흑룡방과 공동파의 대결은 지금 천하 무림의 화제니까요. 정보 장사로 먹고 사는 저희 하오문이 끼어들 수밖에 없는 주제예요. 흑룡방과는 무관하답니다. 물론 미행에 대한 사과는 이 자리에서 드릴게요.”
적사월이 요염하게 웃는다.
그녀의 몸에서 다시 요염하고 끈적끈적한 색기가 일어났다.
섭심유혼기, 이번엔 삼성의 공력이었다.
일류의 고수라도 얼굴을 붉히고 심장 박동수가 올라갈 수밖에 없는 공격.
하지만 설령 적사월이 십이성의 섭심유혼기를 펼쳐도 내게는 통하지 않는다. 그녀가 직접 물리적으로 나를 제압한다면 모를까. 나는 그녀의 색기를 자연스럽게 흘러내면서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말했다.
“사과라, 말로만 사과할 셈이요?”
이제 거의 다 왔다.
사실 내가 트집을 잡은 부분은 강호 무림에서는 그레이존이었다.
개방과 하오문이 정보 수집을 하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미행을 붙인다는 사실도 다들 알고 있다. 하지만 미행을 들킨다면?
천하의 무림인 중에 본인의 미행을 바로 용서해주는 놈은 없다. 체면이 걸린 문제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이제 협상의 영역이 되는 것이다.
내가 음모론을 제기한 건 협상의 대가를 늘리기 위한 블러핑이었다. 물론 너무 몰아붙이면 역효과가 날 수 있으니 적당히, 이쯤 물러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적사월의 몸이 다시 떨렸다.
그녀가 뜨거운 한숨을 내뱉으면서 말했다.
“물론 아니랍니다.”
스르륵.
그녀가 면사를 벗었다.
흑단처럼 고운 검은 머리카락,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보석처럼 검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천하의 모든 풍류공자를 홀린다는 사천제일기녀 염희(艶姬)의 미모가 눈앞에 드러났다.
적사월의 본모습만큼은 아니지만, 그에 버금가는 미모.
미염공을 쓰지 않아도 사내들을 홀릴 만한 절세의 미녀가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몸에서 섭심유혼기의 끈적한 색기가 피어올랐다.
이번에는 오 성 공력.
심지어 면사까지 벗었으니 웬만한 사내는 여기서 버티지 못하고 쓰러질 것이다.
실제로 정신이 아닌 육체에는 이미 반응이 오고 있었다.
신체연령 14세. 돌도 씹어먹을 질풍노도의 시기이니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내력을 운용해서 신체를 진정시켰다.
“당연히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해드려야죠.”
쪼르르.
적사월이 고운 손으로 내 찻잔에 차를 따른다.
차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그녀가 교태로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적사월의 몸이 움직이자 그녀의 몸매가 그리는 유려한 곡선과 앙가슴이 언뜻 시야에 비쳤다.
차부터 시작해서 조명의 각도, 가구의 배치, 적사월이 입은 옷과 방금의 모습까지.
철저히 사내를 유혹하기 위해 계산된 상황이었다.
이 방 전체가 나를 잡아먹으려는 함정이나 다름없다.
“어떤 보상을 원하세요? 공자처럼 기개가 준수하고 용모가 관옥 같은 사내라면 백화루에 초대해서 제 하룻밤 정도는 내어드려도 괜찮답니다?”
스윽.
적사월이 자연스럽게 섬섬옥수로 내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그녀의 손에서 체온이 전해졌다.
적사월의 몸에서 달콤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극성에 이른 섭심유혼기를 적사월이 펼친다는 증거였다.
절정의 고수라도 곧바로 이지가 흐트러져 앞뒤 분간을 못 하고 적사월에게 넘어갈 수준의 미염공.
실제로 내 신체는 동요하고 있었지만, 내 머리는 놀랄 정도로 차가웠다.
하룻밤이라.
이건 더 말할 것도 없이 대놓고 함정이다.
적사월이 노골적으로 나를 시험하는 것이다.
차려진 밥상을 못 먹는 건 남자의 수치라지만, 밥상에 청산가리가 있는데 먹는 건 사내가 아니라 등신이다.
내 목표는 삼처사첩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인에 미친 색마처럼 아무 제안이나 덥석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나는 냉철한 이성을 보유한 색도의 일대종사니까.
그리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나는 이런 정신적인 수단을 사용해 일방적으로 하는 섹스를 좋아하지 않는다. 남자건 여자건 강요가 아닌 서로 원해서 하는 운우지락이야말로 최고의 섹스니까.
“그런 건 필요 없소.”
나는 적사월의 손을 뿌리치면서 말했다.
“아······.”
적사월의 얼굴이 살짝 흐려졌다.
그녀가 아쉬운 한숨을 내뱉으면서 어깨를 살짝 늘어뜨린다.
사내의 동정을 사기 위해 계산된 포즈.
거기에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나는 품에서 서신을 꺼내 그녀 앞에 펼쳐놓았다.
“이 서신을 서문세가를 제외한 구파일방 육대세가에 서문세가의 눈을 피해 보내주시오.”
내가 하오문과 접촉한 진짜 이유.
그건 내가 강호행을 나가기 전에 사부에게 직접 받아낸 공증인 입회를 요구하는 서신을 서문세가 말고 다른 구파일방과 무림세가에 뿌리기 위해서였다.
물론 전부 응하리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하나같이 엉덩이가 무거운 놈들이니까.
하지만 흑룡방과 은원관계에 놓인 당문, 청성, 아미는 무조건 올 것이다.
어쩌면 몰락한 공동파 대신 구대문파에 올라간 항산파도 올지도 모른다.
‘서문세가와의 협상에서 주도권을 빼앗길 수는 없지.’
서문세가.
거기에 가면 진천검왕은 무조건 이번 비무에서 공증인 입회를 대가로 뭔가 이득을 얻어내려 할 것이다.
서문세가 놈들이 사태에 개입할 명분은 사실 없는 거나 마찬가지지만, 이대로는 서문세가 놈들이 너무나 손해기 때문에 없는 명분을 억지로 만들 가능성이 100%다.
그렇게 무리수를 둬도 서문세가는 손해가 아니다. 그들은 육대세가의 일원인 거대 무림세가고 우리는 다 망한 좋소 문파니까. 강호 무림은 결국 약육강식의 정글이나 마찬가지인 곳. 서문세가가 억지 명분에 힘까지 더한다면 일이 이상하게 흘러갈 가능성이 높았다.
설령 일이 잘못되더라도 면피성 유감 표명만 하면 끝인 것이다.
그렇다고 서문세가 말고 다른 감숙 지방 문파나 무림인에 공증인을 요구한다? 감숙성에서 칼밥 먹고 사는 무림인은 거의 대부분 서문세가 따까리인 상황에서 놈들이 공증인을 해줄 리가 없었다.
놈들의 수작에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서문세가 본가에 가서 진천검왕 그 음흉한 놈이랑 정치질을 하는 건 하책이다. 물론 질 자신은 없지만, 굳이 어렵게 싸울 필요도 없다.
상책이란 이미 이겨놓고 싸우는 것.
내가 이길 수밖에 없는 판을 설계해서 상대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표국이나 개방보다는 하오문을 이용하는 편이 좋다.’
감숙의 모든 표국은 서문세가와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이 닿아 있다.
그러니 표국을 사용해서 서신을 보내면 정보가 유출될 것이다.
그리고 정보를 전달받은 진천검왕은 반드시 방해 공작을 펼칠 것이다.
그렇다고 나와 사형이 직접 천하 무림을 순회하며 서신을 전달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개방 감숙 분타도 마찬가지다. 감숙 분타주와 진천검왕은 지역 유지답게 서로 유착 관계에 있었다.
내가 찾아가면 즉시 진천검왕과 서문세가가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니 하오문이다.
사파인 하오문은 서문세가와 아무런 커넥션도 없으니까.
우리가 서문세가에 도착할 때까지, 진천검왕은 다른 문파에 서신이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물론 서문세가를 엿 먹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서신을 뿌리는 건 아니다.
‘판은 키우면 키울수록 좋지.’
여심을 사로잡는 협객 이철수의 데뷔 무대다.
판은 키우면 키울수록 좋다. 그래야 강호 무림에 이 나의 소문이 더 많이 퍼지지 않겠는가?
그렇게 소문이 많이 퍼지면 내 인기 또한 빠르게 올라갈 것이다.
나는 뭇 강호 여인들의 구애를 받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웃었다.
그래, 여심은 이렇게 정공법을 통해서 얻는 것이다.
미염공, 섭혼술 같은 사마외도의 수법이 아니라.
“해주시겠소? 그렇다면 내 소저가 미염공으로 나를 유혹하여 이지를 흐트린 뒤에 협상의 주도권을 가져가려 시도했다는 사실도 넘어가 주리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적사월의 붉은 눈동자가 떨렸다.
*
같은 시각.
자금성 함복궁(咸福宮).
구중궁궐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이자, 3황녀가 기거하고 있어서 사내의 출입이 금지된 궁.
이곳에 궁의 주인이 있었다.
3황녀 태평공주(太平公主) 주가율.
올해로 9살이 된 그녀의 눈빛은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유모. 오늘도 무림 이야기 해 줘.”
“마마께서는 무림 소식을 참으로 좋아하시는군요. 해드리겠습니다. 정파제일 후기지수로 꼽히는 화산파의 검룡이 정식으로 비무행에 나섰다고 합니다. 곧 열릴 용봉지회를 위한 포석으로 꼽힌다는데······.”
유모의 무릎에 앉은 주가율이 꺄르르 웃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과 달리, 주가율의 머리는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아직도 노야의 소식이 없어······.’
태평공주 주가율.
아니, 미래의 원화제(元和帝) 주가율.
중원 역사를 통틀어 측천무후 이후 두 번째 여황제이자, 사례태감 이철수의 보좌로 대명제국의 보위에 올라 절대 권력을 휘두른 철혈의 황제.
주가율은 이철수가 죽은 직후 울면서 그가 전생하길 이철수의 무덤을 지키며 상복 차림으로 수십 년을 더 기다렸지만, 그분을 찾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그를 만나기 위해 최후의 수단으로 전생 대법을 감행했다.
그분이 없는 천하는, 대명제국은, 황제 위는 그녀에게 있어 아무런 의미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법의 결과는 전생이 아닌 과거로의 회귀였다.
결국 89세의 원화제 주가율은 80년의 세월을 거슬러 9살의 태평공주 주가율로 회귀했다.
‘노야, 정녕 살아계시는 겁니까?’
아버지이자 오라비이자 연인이자 친우이며, 존경하고 경애하며 사랑하는 분.
그녀의 전부인 그는 전생의 기록과는 달리 황궁에 입궁하지 않았다.
그를 황궁에 팔아넘겼던 장이현은 이미 잡아 죽였지만, 그조차 그분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그다음으로 그분을 납치했던 왕삼의 행적을 찾았지만, 왕삼은 이미 행방불명된 상태였다.
혹여나 그분께서 무슨 고초를 겪고 있지 않을까? 그분께서는 지금 어떻게 지내실까. 잠자리가 불편하신지, 음식이 입맛에 안 맞지는 않으실까?
실제 나이 89세인 주가율의 머릿속에는 온통 이철수 생각뿐이었다.
‘빨리 짐이 노야를 도와줘야 해.’
노야가 없는 천하는 공기조차 답답했고, 해와 달, 별조차 빛을 잃어가는 느낌이었다.
진수성찬을 먹어도 맛을 느끼지 못했고, 놀이에서도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다.
온 세상이 공허한 기분이었다. 하루하루 생기를 잃고, 말라 비틀어져가는 기분이었다.
폐부가 돌로 막힌 것처럼, 답답해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러니 하루빨리 노야를 만나야 했다.
숨을 제대로 쉬기 위해서라도.
사랑?
이 노야를 향한 그녀의 마음은 그런 하찮고 시답잖은 감정이 아니었다. 인세에 존재하는 문자 따위로는 그분을 향한 그녀의 마음을 감히 담아낼 수도 형용할 수도 없었다.
‘노야를 돕기 위해서는 짐이 미래처럼 다시 보위에 올라야 해.’
하지만 3황녀의 신분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었다.
회귀로 인한 미래 지식이 있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엄공 장이현을 족치고 왕삼의 행방을 알아내는 것밖에 없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무리수를 뒀다.
유모에게 무림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혹시 이 노야께서 그녀처럼 전생이 아닌 회귀를 겪었다면 무림으로 갔을 확률이 높을 거라 판단해서였다.
그러니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권력을 취해야 했다.
그분 없이 홀로 경쟁자들을 족치고 아바마마라고 불러주기도 싫은 선황에게서 양위를 받아내야 했다.
‘노야를 위해서라면······.’
그리고 주가율은 할 수 있었다.
노야가 없더라도, 혼자서 잘 할 수 있었다.
그분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더한 일도 할 수 있었다.
주가율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분을 찾는다고 생각하니 이제야 조금 숨쉬기 편해진 느낌이었다.
그녀의 눈빛에 오랜만에 연기가 아닌 진짜 생기가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