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맹랑한 꼬맹이
휘잉.
나와 서하린 사이에 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
“그게 무슨 뜻이오?”
나는 내가 혹시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어서 서하린에게 되물었다.
내 말에 서하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한 발짝 내게 물러서면서 말했다.
“이 공자께서 소녀의 몸을 원하신다면 바치겠습니다.”
“서 소저?”
“어차피 언젠가는 이름도 모를 작자들에게 시집가는 것이 아녀자의 운명입니다. 이번 비무에서 공동파가 패한다면, 소녀의 운명도 같아지겠지요.”
“서 소저, 지금 대체 무슨 말을···.”
“기녀로 팔리든, 부호의 첩실이 되든 끔찍한 운명이 소녀를 기다릴 것이 분명하니, 차라리 이 공자께 소녀의 운명을 맡기겠다는 말입니다.”
서하린이 비장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대신 반드시······. 이번 비무에서 흑룡방을 이기고, 나아가 강호 무림에 위명을 떨치는 일대고수가 되겠다 약조하십시오. 그렇다면 오늘 밤 이 공자의 처소에 찾아가겠습니다.”
서하린의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급발진에 내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아니 얘는 뭘 이렇게 쓸데없이 오해하고 있는 거야?게다가 밤에 처소에 찾아오겠다고?
‘설마 기정사실을 만드려는 건가?’
아무리 여심에 대해 무지한 나라도 서하린의 의도가 뭔지는 아주 투명하게 보였다.
지금 서하린의 말은 여기가 역설적으로 유교랜드였기에 사용할 수 있는 필살기였다.
사내가 되어서 여인, 그것도 외간 여자의 처음을 빼앗아놓고 책임도 안 지는 건 중세 무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괜히 옛날 노루표 무협지에서 춘약에 중독된 여고수를 살린다는 명분으로 운우지락을 나눈 뒤에 여고수가 몸이 더럽혀졌으니 책임지라며 닦달하는 장면이 나오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급발진도 아니군.’
서하린이 내뱉은 말의 내용은 급진적이었지만, 태도는 지극히 침착했다.
나는 그를 통해 서하린이 이 세계 결혼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연애 결혼이 보편화된 시기는 근대 이후 몇백 년에 지나지 않는다.
원래 결혼은 중매 결혼, 정략결혼이 정석이었다. 그리고 정략결혼은 결혼의 형태를 띈 거래였다.
서하린 말대로 이세계 중세 무림에서 아녀자의 운명은 이름도 모르는 사내와 중매를 통해 혼인하는 것 말고는 없었다.
아니면 비구니나 궁녀 같은 특수한 직종에 종사하면서 평생 독신으로 살던가.
게다가 비무에 패배하면 어차피 그녀의 신병은 사영회가 가져간다. 하지만 효녀인 서하린이 아버지를 버리고 도망갈 수는 없다.
그러니 나와 기정사실을 만들고 결혼하겠다. 과연 전생에서 공동파의 지낭(智囊)이라 불리며 사형 대신 공동파의 행정을 책임지던 냉혼검희다운 발상이었다.
하지만 굳이 이래야 했을까?
흑도를 물리친 것도, 흑룡방에 비무를 제안한 것도, 흑사룡의 사과를 받아낸 것도 전부 내가 하고 싶어 한 일이다.
그녀가 이렇게 나설 필요는 없다. 내가 알아서 흑룡방과의 비무에서 승리할 것이다.
그런데도 거래를 제안한 이유는······.
‘날 믿지 않아서겠지.’
정확히는 그녀는 지금 내 선의에 무언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 신뢰할 수 없어서 거래를 제안한 것이다.
적어도 상호 합의 아래 거래를 완료하고, 기정사실 생성으로 내 윤리적 약점을 틀어쥔다면 그때는 날 신용할 수 있을 테니까.
서하린은 그렇게 생각했겠지.
그리고 이런 파격적인 거래를 제안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스스로의 몸은 돌보지 않다니, 여전히 자기 파멸적이군.’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냉혼검희 서하린은 자기 파멸적 성격이었다.
필요하다면 스스로의 몸조차 도구로 던질 수 있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자면 본인의 몸을 돌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내 눈동자가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두근대는 심장도 차갑게 식었다.
눈앞의 서하린이 더 이상 소녀로 보이지 않았다.
마치 조정에서 정적과 마주 선 기분이었다.
이런 기분은 오랜만이었다.
그럼 이 맹랑한 꼬맹이를 어째야 할까.
나는 고민했다.
뇌가 색욕에 절여진 색마라면 서하린의 제안을 옳다꾸나 받아들이고 그녀와 거사를 치르겠지만, 나는 냉철한 이성을 지닌 색도의 일대종사이자 50년 경력의 간신배.
이대로 서하린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녀의 몸은 소유할 수 있겠지만, 그녀의 마음까지 가질 수는 없다.
거기에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이와의 정치질에서 구천구백구십구세의 권신인 내가 패배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건 안 돼.’
오직 육체적 쾌락만 추구하는 공허한 관계야말로 내가 가장 지양하는 운우지락이었다.
색도의 수행에는 반드시 육체적 쾌락과 정신적 교감이 동반되어야 했다.
그러니 여기서는 그녀의 제안을 거절해야 했다.
내가 아무리 여자에 미쳐도 그렇지, 미성년자랑 그렇고 그런 짓을 할 정도로 미치지 않기도 했고.
“······왜 고민하는 것입니까? 소녀의 몸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색목인의 피가 섞인 것은 흠이나, 그래도 천하에 드문 절색(絶色)이라 평가받은 적 있습니다. 이 정도면 이 공자의 배필로는 충분······.”
내 말에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장점을 어필하는 서하린.
나는 대답 대신 그녀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따악.
“흐앗?!”
서하린이 이마를 부여잡으며 한 발짝 물러섰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서 소저의 눈에는 내가 대가를 바라는 것처럼 보였소? 태사공서(太史公書, 사마천의 사기)에서 이르기를, 진정한 협객은 협행에 있어 몸을 사리지 않는다고 하였소. 나 또한 정파인으로서 협객의 도를 추구했을 뿐이오.”
역시 고금제일고자 사마천.
사기는 고환과 맞바꿀 정도의 가치가 있는 역사서가 맞다. 내가 사마천이라면 안 했겠지만.
“하지만······.”
내 말에 서하린이 빨갛게 부어오른 이마를 문지르면서 말끝을 흐렸다.
물론 나는 순수한 협객만을 연기할 생각은 없었다.
서하린이 믿어주지도 않을 테고.
상대를 설득하는 거짓말의 요점은 100% 거짓이 아닌, 1%라도 진실을 섞어 거짓과 배합하는 것.
나는 서하린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서 소저뿐만 아니라 무고한 이들에게 돌아갈 피해를 막고자 한 일이었거늘, 부끄럽게도 서 소저의 신뢰조차 얻지 못했소.”
“그건···.”
“이번 비무가 본파의 승리로 끝난다면, 본파의 이름이 천하에 널리 알려질 거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서 소저가 대가를 치르겠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는 거요.”
내가 신뢰를 사지 못했다고 말하자 서하린의 몸이 움찔했다.
“······그리고 서 소저에게 음심을 품은 적은 없소. 그런 무리한 제안이 아니더라도 나는 비무에서 이길 거요.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서 소저를 보호하고, 본파를 재건하고, 사형과 함께 일대협객으로 강호에 이름을 떨치는 것. 그게 내 목표요. 지금은 말이지.”
내 말은 당연히 100% 진심이었다.
물론 협객으로 이름을 떨친 뒤에 여심을 사로잡아 삼처사첩을 이룬다는 말은 생략했다.
생략의 미학이야말로 거짓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니까 말이다.
내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본 서하린의 몸이 떨렸다.
그녀도 깨달은 거다. 내 말에 거짓이 없다는 사실을.
“······그러면 저는 어쩌면 되겠습니까? 그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한 무력한 저는······.”
서하린의 어깨가 떨렸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빨갛게 달아오른 이마를 추궁과혈의 묘리를 담아 꾸욱꾸욱 눌러서 병 주고 약 주면서 말했다.
“왜 무력하다고 생각하시오? 내가 내상을 입었을 때, 서 소저가 지극정성으로 돌봐주었는데. 서 소저의 노력이 없었다면 그렇게 쉽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도 못했을 거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은혜라고 생각하오. 나는 그렇소.”
이것도 진심이다.
서하린이 아니었더라면, 그렇다면 나는 사형의 간호를 받았겠지.
남자의 간호라니.
그 끔찍하고 부조리한 광경을 떠올리기만 해도 온몸에 오한이 돌았다.
서하린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내 말에 서하린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좋아.
지금이 바로 그 말을 꺼낼 타이밍이다.
나는 그녀가 무언가 말을 꺼내기 전에 상냥하게 웃으면서 그녀에게 먼저 말했다.
“그런데도 스스로가 무력하다고 생각된다면, 이번 비무가 끝난 뒤에 본파에 정식으로 입문하시오. 스스로의 운명을 바꾸고 싶다면 말이오. 사부님께서도, 서 대인께서도 반대하시진 않을 거요.”
이대로 비무를 끝낸다면 전생과는 달리 서하린이 공동파에 입문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게 둘 수는 없다.
천재 중의 천재. 일대종사의 자질과 천무지체를 타고 태어난 규격 외의 괴물인 사형만큼은 아니지만, 서하린 역시 전생에 화경의 경지에 도달했을 정도로 뛰어난 자질을 지닌 기재다.
공동파 재건을 위해서라도, 나는 그녀를 반드시 공동파에 끌어들여야 했다.
물론 사형과의 접근은 차단해야겠지만.
빨갛게 달아오른 이마가 가라앉았다.
나는 그녀의 이마에서 손을 떼어냈다.
“소녀의 삶은 소녀가 정한다. 공자께서는 정녕 제가 무공을 배운다면, 강호에 이름을 떨칠 일대여협이 되리라 보십니까?”
서하린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무공을 익힌다면, 반드시 그리될 거요. 어쩌면 여중제일인까지 가능할지도 모르지. 내 이름 석자를 걸고 맹세할 수 있소.”
내 말을 들은 서하린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비무가 끝난다면······. 생각해보겠습니다.”
한없이 긍정에 가까운 고려하겠다는 답변이다.
됐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
“마지막으로 당부하겠지만···. 서 소저.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시오. 자신을 사랑하시오. 내게 한 그런 말은 다른 이들에게 하지 않길 바라오”
처음에 몸을 바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깜짝 놀랐다.
내가 들어서 망정이지 사형이 들었다면?
상상하는 것조차 싫다.
앞으로 내 사매가 될 서하린이 아무에게나 그런 말을 하고 다니게 둘 수는 없다.
“······알겠습니다.”
내 말에 서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는 이만. 아직 날이 쌀쌀하니, 서 소저도 들어가 쉬도록 하시오.”
“그리하겠습니다.”
서하린의 대답을 들은 나는 먼저 몸을 날렸다.
시간이 늦었다.
심폐 지구력 운동 및 제자리 뛰기 운동 및 행잉 운동과 젤크 운동을 해야 할 시간이다.
*
몸을 날려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진 이철수의 모습을 보면서 서하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나가 아닙니다. 이 공자이기에 그런 말을 했던 것을······.’
그녀가 마음속으로 말을 조용히 삼켰다.
콩닥콩닥.
서하린의 가슴이 조금씩 뛰기 시작했다.
처음이었다.
타인에게 이유 없는 순수한 호의를 받은 건.
심지어 그는 본인의 몸조차 원치 않는다고 했다.
사내들의 음심 어린 시선을 늘 받아왔기에 서하린은 알 수 있었다. 이철수의 눈빛과 표정 그 어디에도 그녀를 향한 음심은 없었다는 사실을.
그의 말대로, 그는 처음부터 아무 대가 없이 그녀를 지키려 했다는 사실을.
전부 깨달은 서하린이 고개를 숙였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화악.
뒤늦게 본인이 여인으로서 수치스러운 말을 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서하린이 얼굴을 붉히던 그때.
“서 소저.”
그녀 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서하린이 고개를 들었다.
거기에는 절색이라 자처하는 서하린조차 한 수 접어줄 정도로 압도적이고 폭력적인 미모를 지닌 흑의 무복의 미소년.
이철수의 사형인 유진휘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