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근본도 없는
적사월이 물러난 뒤의 흑룡방 본타 회의실.
상석에 앉은 흑룡방주 광마도군 위천명 앞에 둘러앉은 흑룡방의 고위 간부들이 탁자 위에 올려진 비무첩을 두고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감히 공동파 따위가 비무첩이라니요? 이걸 굳이 받아줄 이유가 있습니까?”
“군사의 말이 맞소! 방주! 내게 명령만 내리시오! 명령만 내리면 이 오만방자하고 위선적인 공동파 놈들의 대가리를 흑룡묵도대의 힘으로 전부 썰어 오겠소이다!”
“공동파 놈들이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제 놈들이 아직도 구대문파인줄 아는 모양인가? 감히 대흑룡방에 도전을!!”
흥분하는 간부들의 목소리에 위천명은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이럴 줄 알았다.
그도 마음 같아서는 간부들의 말처럼 비무첩을 무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비무를 받아들여라.
이기되 적당히 해라.
사도련주가 내린 절대 명령이 위천명의 머리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배신과 비열이 본성인 사파였지만, 사도련주의 명령을 거역하는 사파인은 없었다.
마교처럼 강자존 약자멸에 의한 상명하복이 사파의 미덕이라서는 아니다.
사파 하면 하극상, 하극상하면 사파가 아니던가? 자유를 넘은 방종이야말로 사파의 정체성이었다.
그런데도 사파인들이 사도련주를 거역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빌어먹을 할망구가 하오문의 문주만 아니었어도······.’
그렇다.
사도련주 천변만화 염왕 적사월이 보유한 또 다른 직위는 바로 하오문의 수장.
정파의 개방과 유일하게 견주는 게 가능하다는 정보 조직 하오문을 거느리고 있는 적사월은 주요 사파 고수들의 약점을 속속들이 전부 알고 있었다.
개인적인 약점을 쥐고 흔드는 적사월이었다. 사파에서 그녀의 명령을 거역하면 즉시 약점이 파헤쳐져 인간적으로도 몰락하게 된다는 사실을 위천명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길 수 없었다.
심지어 무위가 현경에까지 이른 절대 고수가 아닌가? 반항해도 국물도 안 나왔다.
그러니 여기서는 간부들을 진정시켜야 했다.
“다들 조용.”
탁탁.
위천명이 거칠게 탁자를 내리쳤다.
그가 말했다.
“······공동파 놈들의 비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소.”
위천명의 말에 뻘쭘한 침묵이 흘렀다.
그가 반대할 줄 알고 언성을 높인 간부들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찬성이라니.
이렇게 뻘쭘한 일이 또 있을 수가 없었다.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건지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방주님?”
뻘쭘한 침묵을 깬 건 군사였다.
흑룡방의 내정을 총괄하는 군사의 말에 위천명이 답했다.
“원래는 공동파 따위가 대흑룡방에 도전한 건 있을 수 없는 일이 맞소. 하지만 공동파의 제안이 우리에게 유리한 것 또한 사실이요. 거기에 정파의 방식으로 상대해서 우리가 이긴다면? 서문세가 놈들은 물론 정파 위선자 놈들의 모든 체면을 깎아먹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거요.”
위천명이 열변을 토했다.
련주에게 떠밀려서 맡은 비무이기는 하지만, 이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아무 이득도 없는 헛일이었다면 아무리 련주라더라도 항명했을 것이다.
이득이 있는 일이기에 위천명이 련주의 명을 수락한 것이다.
‘그 점도 교묘하다니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던진다.
련주의 교묘함에 위천명은 혀를 내두르면서 말을 이어갔다.
“그뿐만이 아니오. 비무대회를 연다면 자연히 서문세가 놈들이 공증인으로 참관할 터. 그 자리에서 우리가 공동파를 꺾고 공식적으로 화정현을 차지한다면, 서문세가 놈들도 우리한테 함부로 참견하지 못할 거요.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비무의 결과로서 벌어진 일이니 말이오. 서문세가 놈들의 명분을 앗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지.”
위천명이 말했다.
서문세가가 화정현의 일을 묵인하고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
공동파를 흑룡방의 손으로 차도살인하기 위해서였다.
그 뒤에 서문세가는 공동파의 복수라는 명분으로 흑룡방을 공격할 거라는 사실 정도는 위천명도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흑룡방이 공식적인 비무를 통해 정정당당하게 공동파를 꺾는다면?
명분을 빼앗긴 서문세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백도란 명분에 살고 명분에 죽는 머저리들, 흐흐흐흐. 우리가 비무를 수락한 순간 명분을 잃어버린 놈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음이야.’
사천에서 당문, 청성, 아미라는 거대 백도 셋과 다투는 사파의 거두로서 정파의 생태를 누구보다 잘 아는 흑룡방주였다.
서문세가의 행동을 예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호오, 과연 그런 방법이!”
“역시 방주님입니다!”
“방주님의 계책이 하늘에 닿았구려!”
간부들의 칭찬을 받은 흑룡방주의 어깨가 으쓱해졌다.
모두의 칭찬을 들으니, 오히려 비무를 수락하기를 잘한 기분이었다.
‘흐흐흐, 이거 련주한테 감사해야겠군.’
협박당한 것도 잊은 채 입술을 씰룩거리던 위천명이 탁자 위에 서신을 올려놓았다.
흑룡방주의 직인이 찍힌 공동파 비무첩에 대한 답신이었다.
“소방주.”
위천명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두의 시선이 소방주에게 쏠렸다.
탁자 끝, 상석에 앉은 위천명과 마주보는 위치에 앉은 흑단처럼 새카맣고 탐스러운 단발의 미소녀.
은빛 실선으로 수놓아진 흑룡이 새겨진 흑의 무복을 입은 미소녀의 까만 눈동자가 방주를 바라봤다.
십만 사파 중 제일로 꼽히는 후기지수.
차기 흑룡방주는 물론, 차기 사도련주로도 거론되는 사파제일기재.
정파제일기재인 화산파의 검룡(劍龍)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는 사파가 낳은 희대의 천재.
소방주 흑사룡(黑邪龍) 위소련이 바로 그녀였다.
거친 사내들의 집단인 흑룡방에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압도적인 재능을 타고난 잠룡을 보는 흑룡방주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가 말했다.
“이 서신을 공동파 놈들한테 전달하도록.”
“알겠습니다. 아버님.”
위소련이 서신을 품에 넣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
내상이 낫기까지 걸린 시간은 정확히 일주일.
그동안 나는 누워서 호화롭게 서하린의 병시중을 받으며 몸을 회복했다.
“아, 하십시오. 이 공자님.”
병석에 누워 있으면서 감숙 제일 미소녀, 아니 정파 제일 미소녀인 서하린에게 돼지고기 아앙~을 받는 삶이란!
물론 무표정한 얼굴에 텅 빈 눈동자로 내게 젓가락으로 삶은 돼지고기를 먹이는 서하린의 모습은 어떻게 보기에는 조금 섬뜩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런 모습도 나와 처음 만났을 때 날 경계하던 황제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었다.
“감사합니다. 서 소저. 매번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거기에 내가 인사하면 묘하게 얼굴이 떨리는 서하린의 모습이 귀엽기도 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고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편안해지는 느낌!
남자인 사형과는 질이 다르다.
빨리 서하린이 공동파에 정식으로 입문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즐거운 나날들을 보내면서 나는 내상을 털고 일어섰다.
그렇게 내가 내상에서 전부 회복한 뒤에 맨 처음 한 일은 공동파 산문에서의 스쿼트였다.
“후우, 흐읍, 후우!”
공동산 취병봉 꼭대기에 있는 공동파 본산 산문에서는 공동산의 전경이 내려다 보였다.
현대와는 달리 공장도 없어서 미세 먼지도 없어 깨끗한 중국 공기가 폐부에 들어왔다.
나는 들숨과 함께 토납법을 운용하며 스쿼트를 이어갔다.
내력 없이 오직 육체의 힘만으로 스쿼트를 반복하자 땀이 비 오듯 흘렀다.
하지만 나는 스쿼트를 멈추지 않았다. 운우지락의 기본은 튼튼한 하체와 허리에서 오는 법. 단단한 하체야말로 여인을 극락으로 보내는 기초라는 점을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케겔 운동은 당연히 병행 중이었다.
움찔.
치골미골근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한다.
그렇게 스쿼트와 케겔 운동을 반복하고 있던 그때.
기감에 인기척이 감지되었다.
잠깐, 인기척?
‘어떤 놈이 내 수련을 방해하는 거지?’
시간은 금이다.
그 격언은 참으로 옳은 말이었다. 정력 수행 시간은 내게 천금의 가치보다 더 중요했다.
그런데 그 천금의 가치를 지닌 시간을 감히 방해하다니.
사형과 사부, 서하린은 본산 내부에 있다. 서 대인은 아니다. 기감에 감지된 기척은 명백히 무공을 배운 자의 움직임이었다.
‘사파 놈들인가?’
소거법을 사용하면 사파 놈들밖에 없다.
사파 놈들이라면 둘 중 하나다. 정말 흑의복면인을 보냈던가, 아니면 비무첩에 대한 답장을 가져왔던가.
어느 쪽이건 내 정력 수행 시간을 방해하는 건 마찬가지다.
‘빌어먹을, 또 양물을 가라앉혀야겠군.’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바지를 뚫을 듯 치솟은 에베레스트 산을 사형의 얼굴을 떠올리며 가라앉혔다.
그렇게 바지에 우뚝 솟은 산이 평평하게 가라앉던 그때.
산문 앞에 흑의 무복을 입은 소녀가 나타났다.
온 몸을 빈틈없이 감싼 검은 무복 위로 은빛 실선으로 새겨진 용사비등(龍蛇飛騰)한 흑룡이 여덟 마리 새겨진 흑의를 착용한, 보이쉬한 미모의 미소녀가 산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흑의무복을 입은 미소녀, 그것도 여덟 마리의 흑룡이 새겨진 팔룡의를 입은 미소녀라면 천하에 단 한 명뿐이다.
흑룡방 소방주 흑사룡 위소련.
그녀가 직접 등장한 것이다.
“여기가 공동파인가? 초라하기 짝이 없군.”
위소련의 검은 눈동자가 이쪽을 향했다.
“거기 너.”
그녀가 나를 불렀다.
“본 소방주가 직접 대 흑룡방주의 답신을 가져왔다. 장문인을 불러와라.”
오만한 목소리로 말하는 위소련.
하긴 사파제일 후기지수라고 자칭타칭 불리고 있고, 공동파와 흑룡방의 위상은 글로벌 대기업과 동네 좋소기업 수준으로 차이가 나니 저럴 만도 했다.
하지만 여기는 자본주의와 평등이 지배하는 현대가 아닌 공자와 유교가 지배하는 중세 무림 랜드.
아무리 거대 방파의 후기지수라도 저렇게 대놓고 막말하는 건 결례였다.
물론 위소련은 보이쉬하고 남상이기는 했지만, 꽤 미소녀였다.
하지만 나는 미녀라고 앞뒤 안 가리고 발정난 개처럼 들이대는 색마가 아니었다.
냉철한 이성을 보유한, 뇌가 섹시한 이 시대의 지성인이 바로 나다.
그러니 여인의 외모에 미혹되지 않는다.
게다가 지금은 어쨌거나 적대 관계로 맺어진 사파의 후기지수가 아닌가?
‘게다가 위소련은 나쁜 남자를 좋아하지.’
그리고 나는 위소련의 이상형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의 이상형은 강하면서도 나쁜 남자.
그러니 여기서는 강하게 나가는 것이 맞다.
나는 스쿼트를 멈추고는, 이마에 맺힌 땀을 오른손으로 훔치면서 케겔 운동을 자연스럽게 행하며 말했다.
“감히 소방주 따위가 천년 역사를 지닌 정통 백도 문파인 본 파의 존주를 함부로 오라 가라하는 결례를 범하다니. 흑룡방은 후계자한테 공맹의 도리조차 제대로 안 가르치는 모양이오. 이래서 근본도 없는 사파들이란. 쯧쯧.”
내 말에 얼굴이 신호등처럼 붉으락푸르락 점멸하기 시작하는 위소련.
하지만 나는 당당했다.
못 할 말을 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체면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중세 무림에서 저렇게 상대가 깔아뭉개는데 고개를 숙이는 건 대놓고 개처럼 바닥에 드러누워 배를 드러내 보이는 짓과도 같았다.
“아무리 역사가 깊다한들, 지금은 다 영락해가는 문파일 뿐. 예의도 힘이 있어야 차리는 법이지.”
내 말에 위소련이 감정을 재빨리 수습하면서 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몸에서 거친 기세가 일어났다.
기도를 해방해 나를 압박하려는 수법. 중세 무림에서 고전적이며 효과적인 기선 제압이었다.
하여간 왜 다들 허구한 날 기도 해방가지고 기싸움 하는 건지 모르겠다.
평범한 이류 고수였다면 그녀의 압박을 못 이겼겠지만, 나는 현경의 고수.
그녀가 흘리는 기세 따위는 봄바람처럼 넘길 수 있었다.
그렇게 기세를 넘기면, 무협 소설처럼 그녀가 내게 흥미를 가지겠지.
그리고 그 흥미를 자연스럽게 호감으로 연결하면······.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기세를 받아칠 준비를 하며 내력을 운용하던 그때.
“대체 산문에서 이게 무슨 소란이오?”
저 멀리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나와 위소련 사이에 무복을 입은 미소년이 몸을 날려 끼어들었다.
빌어먹을 사형.
유진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