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충분히 가능
기척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공동파 산문 앞, 찬란한 달빛이 비추는 공동산의 절경 위로 흑의 무복을 입은 여고수가 등장했다.
내 예상과는 다르게 복면은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머리에 죽립을 쓰고 얼굴 전체를 면사로 가리고 있었다.
그렇다. 여고수였다.
나는 빠르게 눈으로 여고수의 전신을 스캔했다.
중세 무림 시대의 의복은 기본적으로 폭이 넓고 노출이 극도로 적다.
하지만 문제의 흑의 여고수는 그런 펑퍼짐한 옷 위로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미드를 가지고 있었다.
마음이 큰 여자였다.
거기에 잘록한 허리는 또 어떻고.
몸매만 본다면 가히 천하일절이라 할 만했다.
“네가 이철수로군.”
면사 여고수가 나를 바라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검병에 손을 얹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그렇소. 그쪽은 누구시오? 양상군자(梁上君子)처럼 밤이슬을 틈타 본 파의 본산에 온 것부터 별로 좋은 의도 같지는 않소만.”
“······여인이 보는 앞에서 음적처럼 대놓고 하물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구나.”
그녀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
그녀 말대로 내 양물은 하늘을 향해 꼿꼿이 고개를 쳐든 상태였던 것이다.
여기서 일반적인 남자라면 당황하면서 사과하겠지만, 나는 범인이 아니었다.
굳이 당황할 필요가 없다.
자연스럽게 나가면 되었다.
그녀가 몸매가 제법 좋기는 하나, 어차피 흑룡방에서 파견한 고수가 분명할 터.
전생과는 다르게 흑룡방과의 갈등이 일찍 일어난 덕분에, 사영회에 머무르던 흑룡방의 고수도 전생과는 다른 인물이었다.
원래는 사혈도(邪血刀)라는 일류 낭인이 사영회에 파견되어 전생의 사형과 맞섰다. 지금으로부터 사 년 후에 말이다.
하지만 눈앞의 여고수는 사혈도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게 사혈도는 남자였기 때문이다.
몸매가 괜찮기는 했지만, 어차피 적이니만큼 잘 보일 필요도 없었다.
나 이철수, 색도의 일대종사기는 하지만 양물로 사고하는 색마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여자라고 전부 봐주지 않는다.
오히려 이쪽이 예상 밖으로 뻔뻔하게 나갈수록 상대는 당황하는 법.
적의 심리를 뒤흔드는 것이야말로 심리전의 기초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여기서는 오히려 당당하게 나가는 게 좋았다.
“이건 그쪽이 오기 한참 전부터 이미 서 있었소. 자연스러운 생리 현상인데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구려. 양물을 자주, 오랫동안 자연스럽게 세울수록 정력이 증진된다는 건 상식이오. 도가의 가르침인 방중술(房中術)을 따라 사내가 양기와 정력을 단련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요? 굳이 문제라면 예고도 없이 야밤에 일문의 총본산에 찾아와 이런 광경을 목격한 불청객인 당신이 문제가 아니겠소?”
“······.”
내 말에 여고수가 헛바람을 삼켰다.
그녀의 몸에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게 뿜어져 나왔다.
나는 당당했다. 내 말이 팩트였기 때문이다. 굳이 잘못이라고 하면 밤을 틈타 공동파에 수작질을 부리러 찾아온 여고수 쪽이 잘못한 거지, 난 잘못한 게 없다.
정력 수행이 뭐가 잘못이란 말인가? 남자로서 남자의 능력을 단련하는 건 죄가 아니다. 방중술(房中術) 수행은 도가에서도 인정한 선도(仙道)의 수행 방법이다.
나는 당당하다.
“게다가 타인의 수행을 훔쳐보는 건 강호 무림의 금기. 헌데 그쪽 소저께서 내 양기(陽氣) 수행을 몰래 엿보았으니, 오히려 무례는 소저가 저지르고 있는 것 같구려.”
강호 무림에서 지켜지는 암묵의 룰 중 하나가 바로 타인의 수행을 훔쳐보지 말라는 거였다.
이는 독문무공이나 진산절기 유출을 막기 위해 지정된 관습법이었다.
이를 어기고 몰래 훔쳐보는 자는 수행 당사자에게 칼 맞고 죽어도 강호인들이 저놈이 수행을 훔쳐봤다고? 그거 잘 죽었네 하고 인정할 정도로 철저히 지켜지는 룰이었다.
그리고 케겔 운동은 엄연히 미국 산부인과의 일대종사 아놀드 케겔 조사님으로부터 내려오는 현대 의학의 신공절학이자 나 이철수의 독문무공.
그런 케겔 운동의 수행법을 저 여고수가 훔쳐본 셈이니, 강호의 법칙에 따라 여고수는 내게 칼빵을 맞아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아아, 몰랐는가? 이것이 바로 무정강호라는 것이다.
“미친놈이로구나······. 그게 무공 수행이란 말이더냐?”
“그렇소. 처음 보는 상대한테 무공의 연원까지 밝히라는 무례한 요구를 할 참은 아니라고 믿겠소.”
무공의 연원을 묻는 것 역시 강호 무림의 금기다.
“······.”
내 말에 여고수가 침묵했다.
그녀의 검병에 얹혀진 그녀의 오른손이 부르르 떨렸다.
“오히려 제가 소저한테 사과받아야 할 것 같소만.”
“······.”
여고수의 손이 더 격하게 떨렸다.
내 시선이 그녀의 검병으로 향했다.
그녀의 검 손잡이 끝에는 여우 장식이 달린 수실이 매여져 있었다.
잠깐, 여우 장식이라고?
나는 그제야 그녀의 전신을 다시 훑어봤다.
펑퍼짐한 흑의 무복으로도 전부 못 가릴 정도로 폭발적인 몸매, 죽립과 얼굴을 가린 면사를 지닌 사파의 여고수.
그런 인물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그 여우 수실을 보니 떠오르는 강호의 선배 한 분이 있구려. 얼굴을 면사로 가리고 흑의를 즐겨 입으며 여우의 표홀한 움직임을 닮은 환검으로 유명한, 사천 무림의 이름난 사파의 여고수가 있다 들었소. 소저가 혹시 화면호검 여예령 선배가 아니시오?”
나는 그녀를 향해 강호 무림의 에티켓을 지켜 통성명을 시도했다.
일류 이상의 고수쯤 되면 대부분 별호 하나씩은 가지고 다니기 마련이었는데, 이 별호를 본인 입으로 스스로 말하는 경우는 잘 없었다.
대부분 이렇게 인물의 특징이나 사용하는 무공의 특징 따위를 알아챈 상대방 쪽에서 먼저 당신은 누구누구가 아니시오? 라고 물으면 내가 그가 맞다고 답하는 것이 강호 무림의 예의였다.
하긴 나라도 내 입으로 내가 흑사룡이다라고 먼저 말하면 쪽팔려 뒤져버릴 것 같긴 했다.
사람 별호가 흑사룡이 뭐냐고, 흑사룡이.
하여간 유교 탈레반의 나라 아니랄까 봐, 이런 사소한 데서까지 예의를 지키다니.
“그렇다. 내가 강호의 동도들로부터 화면호검이라 불리는 여예령이다. 내 정체를 알았다면 내 얼굴이 어떠한지도 알겠지?”
내 말에 여예령이 순순히 본인의 정체를 인정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나는 등에 식은땀이 한줄기 흐르는 걸 느꼈다.
‘여예령이 왜 여기 있어?’
여예령.
설마 했더니 진짜 그녀였을 줄이야.
세간 사람들은 그녀가 일류의 고수인 줄로만 알지만, 나는 그녀의 진짜 정체를 알고 있었다.
‘염왕이 왜 여기서 나와?’
우내삼존(宇內三尊).
정사마의 대표로 당대 강호 무림을 삼분하는 현경의 절대고수 3인.
그중에서 사파제일인이며 하오문의 태상문주이자 사도련의 련주인 천하제일미녀 천변만화(千變萬化) 염왕(閻王) 적사월이 여예령의 진짜 정체였다.
염왕은 천면만화라는 별호처럼 역용술의 귀재로 남녀노소 어떤 모습으로건 변장이 가능한, 사실상 폴리모프 수준의 절학인 백면천화공(百面千化功)을 익히고 있었다.
그녀는 사도련의 운영을 총군사에게 맡기고 백면천화공과 하오문의 정보망을 사용해서 위장 신분, 요즘 말로는 부캐를 잔뜩 만들어 부캐 플레이로 강호를 주유하는 것이 취미였다.
그런 염왕의 부캐 중 하나가 화면호검 여예령이었다.
끔찍한 화상으로 얼굴의 절반이 타버린 흉한 외모의 여고수에 남자에게 무자비한 손속을 자랑한다는 설정의 여고수.
거기에 빨간 마스크 괴담처럼 얼굴을 가린 면사를 벗어 자기가 예쁜지 묻고, 진심으로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으면 전부 고자로 만드는 기행으로도 유명했다.
상대의 감정을 표정과 눈빛을 통해 전부 읽어내는 그녀 앞에서 지금까지 진심으로 아름답다고 말한 사내는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그녀의 손에 고자가 된 남자의 숫자는 수도 없이 많았다.
뭐 사마외도의 고수 놈들의 기행이야 그거보다 더한 짓도 많으니 그러려니 하지만 문제는 더 있었다.
‘염왕은 남자를 불신했지.’
올해로 60세가 된 염왕은 본디 하오문의 예기(藝妓)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남자의 적나라한 욕망을 보고 자랐기에 남자를 불신하는 인물이었다.
염왕은 어려서부터 천하제일미와 경국지색으로 천하에 소문이 자자했다. 그녀는 예순 살인 지금도 현경의 경지에 올라 반로환동과 환골탈태로 여전히 늙지 않고 탱탱한 20대 방부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염왕이 천하제일미 직위를 40년이 넘도록 독재 중이었다. 덕분에 그녀를 노린 남자들의 흑심과 욕망 역시 천하제일미라는 별호의 이면에서 평생을 따라다녔다.
자연스럽게 거기에 대해 트라우마가 생긴 적사월의 음습한 욕망을 발설하는 부캐가 화면호검이었다.
사내들은 외모만 본다, 따라서 얼굴이 흉한 화면호검을 진심으로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내가 있을 리 없다.
그것이 그녀의 생각이었고, 실제로 전생에서 화면호검의 시험을 통과하는 남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무림에서 수많은 강호인들이 검하고자(劍下鼓子)가 되었다.
염왕과 화면호검이 동일인이라는 사실 역시 전생에서 동창과 서창을 통해 어렵게 입수한, 개방과 하오문에서도 거의 아는 이가 없는 극비 정보였다.
“알고 있습니다.”
“호호호, 그렇단 말이지? 그렇다면 본녀가 지금까지 만난 사내들한테 한 가지 시험을 내린다는 사실도 알고 있겠구나?”
염왕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회귀해서 공동파에 입문한 지 얼마나 됐다고 천하에 단 세 명뿐인 현경의 고수와 마주치다니.
그것도 빨간 마스크 부캐 컨셉충에게 말이다.
하여간 사마외도의 고수 중에 정신이 제대로 박힌 인간은 단 하나도 없다. 현경의 고수가 부캐 컨셉충인게 말이 되냐고.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운도 더럽게 없다.
전생의 나였다면 그녀와 한 판 시원하게 붙었겠지만, 지금의 내 무위는 안타깝게도 이제 삼류를 지나 이류에 진입한 상황.
일류까지는 감당 가능하지만 절정부터는 불가능하다. 하물며 현경의 고수다? 전생의 무위를 되찾기 전까지는 상대가 안 된다.
운우지락도 살아야 의미가 있지 않는가?
물론 부캐 플레이 중인 그녀가 본신 전력을 드러낼 가능성은 없지만, 문제는 시험이다.
‘고자라니!’
통과 못 하는 사내를 고자로 만드는 무시무시함이라니!
기껏 회귀해서 양물을 되찾고 사내대장부가 되어 알파 메일의 길을 걷고 있는데, 여기서 고자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천하에서 사도련 총군사와 그녀의 제자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화면호검의 정체를 아는 인물.
시험 통과 정도야 껌이다.
나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고 있습니다.”
“후후. 그래? 그렇다면 말해보려무나. 후배. 선배의 미모는 어떻지?”
스르륵.
그녀가 면사를 벗었다.
오른쪽 얼굴은 미녀라고 불릴 정도로 멀쩡하지만, 왼쪽 얼굴은 화상이 그대로 남아 끔찍할 정도로 일그러진 상황.
그런 얼굴을 들고 화면호검이, 염왕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머릿속으로 전생에 만났던 천하제일미 염왕의 진짜 얼굴을 떠올렸다.
사형만큼 예쁘지는 않지만, 염왕 적사월은 노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고사가 현세에 현현했다고 착각될 정도로 압도적이었던 염왕의 미를 떠올리면서 나는 웃었다.
“정말로 아름답군요. 선배. 세간에서 여 선배를 왜 화를 부르는 얼굴이라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꽃을 부르는 얼굴이라고 하는 쪽이 더 어울리는군요. 아름답습니다. 여 소저의 그 얼굴도, 화용월태를 닮은 자태도 전부 제 취향입니다.”
우뚝.
나는 바지를 뚫을 듯한 양물을 과시하면서 그녀를 바라보면서, 염왕의 자태를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왼쪽 얼굴이 흉하긴 한데, 저 얼굴도 나쁘지 않다.
왼쪽 얼굴만 가리는 가면을 씌운다면 얼마든지 운우지락 가능이었다.
그쪽이 오히려 좋다.
여인의 결함을 자극, 내가 그녀의 결함을 메워준다면! 그렇다면 여인이 오직 나만을 바라보며 의존하도록 만들 수 있다.
나 이철수, 오는 여자에게는 관대하고 가는 여자는 못 가게 막는다.
색도의 철학에 의거, 화면호검의 얼굴로도 나는 충분히 운우지락을 즐길 수 있었다.
나는 진심을 담아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이철수, 공동파의 이름을 걸고 선언하겠습니다. 선배는 제게 충분히 가능합니다.”
“······.”
내 말을 들은 화면호검의 온몸이 굳었다.
아, 가능하다니까? 못 믿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