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여심을 사로잡는 협객
이철수의 말에 전영의 말문이 막혔다.
그의 말은 정론이었다.
지금은 몰락했지만, 공동파는 한때 구파일방에 이름을 올렸던 대문파.
상고시대 광성자 조사부터 지금까지 천 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중원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역사가 깊은 명문이다.
‘본 파는 본 장문인의 대에서 과거의 영화(榮華)를 잃어버렸다. 전영아. 이 사부는 그 사실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본 파의 정신은 아직 본산에 살아 숨 쉬고 있다. 본파는 협도를 걷는다. 약자를 돕고, 사마외도를 벤다. 벽사청정(闢邪淸正), 파사현정(破邪顯正)일지니. 본파가 백도임을 잊지 말거라. 이 점을 가슴에 새기고 주천검부에 계시는 선조님께 부끄럽지 않게 정도(正道)를 걷도록 하여라.’
전영의 머릿속에 노년의 사부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사부인 임백선이 귀천(歸天)하기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그는 죽음을 예감했는지 제자였던 전영에게 저렇게 말했던 것이다.
‘진정한 협객이란 자신을 돌보지 않고 협을 행하는 자일지니, 너도 정진해서 협객이 되도록 하여라. 사문의 재건도 중요하지만, 파사현정과 의협심을 잊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사문의 혼이 살아 있어야 재건도 의미가 있느니라.’
사부의 말이 전영의 귓가에 맴돌았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협을 행하는 자가 진정한 협객이다.
아무리 어린아이라고 한들, 사도팔문의 일좌를 차지하는 흑룡방의 강대함은 서 대인과 본인과의 대화에서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을 터.
1년이 넘도록 가르친 제자였기에 알 수 있었다. 이철수의 머리와 눈치가 제법 비상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장차 사문이 재건되면 장문인이 될 유진휘를 보좌할 총관(總管)에 적절한 인재라 내심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그렇기에 더욱 놀라웠다.
열네 살 어린아이가 흑룡방의 강대함을 알고도 물러서지 않고 협행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구나.’
동시에 그는 수치를 느꼈다.
사부 임백선이 죽기 전에 당부하지 않았는가?
사문의 혼이 살아 있어야 재건도 의미가 있는 거라고.
본 파의 정체성이 정파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하지만 그는 흑룡방이라는 거대한 이름에 눌려 도망칠 생각부터 했다.
현실적으로 봤을 때 흑룡방이 직접 손을 쓴다면 이미 몰락해서 과거의 영광만 남은 공동파는 그걸로 끝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단 말인가?’
진정한 협객은 스스로를 돌보지 않고 협을 행할지니.
흑룡방이라는 이름에 지레 겁을 먹은 것부터가 정도를 걷는 문파의 존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마외도와의 타협을 거부하던 공동파의 장문인으로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선사와 선조들께 부끄럽구나.’
공동파에 마지막 남은 사업장인 공동 객잔.
공동파의 이름을 빌려 승승장구하던 공동혈사에서 그나마 살아남았던 속가 제자들이 신분을 세탁하고, 그들이 차린 상단과 표국이 공동파와 연을 전부 끊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공동파에서 부리던 하인이 차린 공동 객잔만이 마지막까지 공동파와의 신의를 지켰다.
그야말로 가족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가족 같은 이들의 어려움을 외면하고 본산으로 도망칠 생각부터 했다니.
이보다 더 부끄러울 수는 없다.
주천검부에 모셔진 선조들의 위패가 자기를 꾸짖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네 말이 맞다.”
전영은 눈을 감으면서 말했다.
“공동파의 장문인으로서, 제자가 협을 행한다는데 이를 제지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전영이 눈을 뜨면서 이철수를 바라봤다.
"허나, 나는 공동파의 장문인이기 이전에 네 사부니라. 제자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이 당연하지. 모든 것은 살아 있어야 의미가 있다. 흑룡방을 상대할 복안이 있느냐?"
허락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사부로서 걱정을 안 할 수도 없었다.
1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전영은 이철수와 사제관계로서 상당한 정을 쌓았다.
제자의 안위에 문제가 생기는 꼴을 그는 두고 볼 수 없었다.
전영의 시선이 이철수와 마주쳤다.
이철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
복안이 있냐고?
강호 무림의 일은 고르디우스의 매듭과도 같다. 그냥 풀려면 복잡하지만, 칼로 자르면 간단히 풀리는 것이 강호 무림의 일이다.
쉽게 말해서 칼 들고 설치면 웬만한 일은 전부 다 해결이 된다. 물론 그럴 만한 힘과 그걸 뒷감당할 세력, 정당한 명분이 있어야 하지만 말이다.
‘이 일을 꾸민 주체는 흑룡방, 따라서 놈들을 여기로 끌어내야 한다.’
사영회를 처단하는 건 간단하다.
하지만 문제는 흑룡방이다. 놈들이 꼬리 자르기를 한다면 이쪽이 곤란해진다.
사영회가 망한 뒤에 본인들은 흑룡방과 관계없다고 시치미를 떼면서, 앞마당에 또 비밀 멀티를 설치하고 수작을 부릴 가능성이 십 할이다.
그러니 완전한 해결을 위해서는 사영회가 아닌 흑룡방을 테이블로 끌고 와야 했다.
그리고 내게는 흑룡방을 끌어낼 비책이 있었다.
‘미끼를 던져줘야겠군.’
놈들이 바라는 건 공동파 몰락.
그렇다면 공동파 몰락을 판돈으로 올리면 된다. 그렇다면 흑룡방주가 아니라 흑룡방주 할애비라도 안 나오고 못 배길 것이다.
‘공동파 봉문을 조건으로 후기지수 비무를 제안해야겠어.’
조건도 저쪽이 유리하도록 2:3 연전 방식으로 제안할 생각이었다.
이쪽은 사형과 나 두명, 저쪽은 나와 같은 또래의 후기지수 세 명.
이렇게 비무대 위에서 일대일로 차례대로 붙어서 승자가 비무대 위에 남아서 패할 때까지 연전을 치르는 방식이었다.
나이 패널티를 뺀다면 흑룡방에 지나치게 유리한 조건. 흑룡방주라면 너무 터무니없다고 구라치지 말라고 할 정도의 조건이다.
이 정도 조건을 건다면, 놈들은 과정이 어떻건 결과적으로 반드시 테이블로 올라올 것이다.
안 되도 내가 되게 만들 것이다.
사파제일 후기지수로 유명한 흑룡방 소방주, 나와 동갑인 흑사룡(黑邪龍) 위소련이 나선다면 무조건 이기는 게임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별호가 흑사룡이 뭐야 흑사룡이 안 부끄럽나?’
흑사룡 위소련이 기재기는 하다.
여인의 몸으로 사파제일룡의 자리를 꿰찬 건 물론 장성해서 미래에는 화경의 경지까지 오른 고수였으니.
하지만 그래봤자 과거도 현재도 미래에도 유진휘보다 약한 하수에 불과했다.
아직 유진휘의 정보는 강호 무림에 알려지지 않았으니, 나는 이 정보의 비대칭을 적극 활용할 생각이었다.
“있습니다.”
“어떤 복안이지?”
“무림의 일은 무림의 방식대로 처리하는 게 이치에 맞는 법입니다. 본 파의 이름으로 흑룡방에 비무첩을 보내겠습니다.”
“그들이 본 파의 비무첩에 응하겠느냐?”
“나올 수밖에 없는 대가를 걸면 됩니다. 놈들이 바라는 궁극적인 목적은 본 파의 몰락. 그렇다면 패배할 시 본 파의 봉문을 조건으로, 이 대 삼의 후기지수 연전으로 일을 해결하자 배첩에 적으십시오. 흑룡방 놈들은 무조건 나올 수밖에 없을 겁니다.”
내 말에 전영이 잠시 침묵했다.
누가 봐도 불리한 조건.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었으니, 내가 장문인이라도 고민했을 것이다.
“빚이 문제라면 귀물을 팔아 해결할 수 있지 않으냐.”
“함부로 내보일 때가 아닙니다.”
귀물이라 함은 내가 혼원비동에서 빼온 야명주를 뜻하는 거일 터.
지금 야명주를 팔자고?
흑의복면인 파티를 공동파 본산에서 열고 싶은 게 아니라면 하면 안 되는 미친 짓이다.
나는 그렇게 말하곤, 서 대인 쪽의 눈치를 흘깃 살폈다.
전생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믿을 만한 사람이기는 하다. 하지만 기록과 실제는 다른 법. 귀물에 대한 말이 나왔으니 자연스럽게 버릇처럼 시선이 돌아갔다.
사람의 탐욕은 신의를 저버리게 하는 법이다. 황궁 정치판에서 수도 없이 겪은 일이었다.
세간에는 군자라 알려진 선비가 실은 아무도 모르게 뇌물을 받아 처먹으며 남색을 즐긴다던가, 대쪽 같은 절개로 유명한 대신이 약점을 쥐고 흔든 협박 한 번에 당파를 배신한다던가 하는 일 말이다.
아니 근데 북경 사대부랑 선비 놈들은 왜 그렇게 남색을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다. 빌어먹을 게이들 같으니. 내가 이래서 과거 시험을 안 본 거다.
그러나, 서 대인의 눈빛에는 탐욕의 빛이라곤 한 점도 보이지 않았다.
호기심조차도 지워버린 듯한 눈이었다.
기록이 잘못되지는 않았군. 다행이다.
“본파의 힘만으로 지킬 수 없는 것을 굳이 내보여야 할 이유가 없지요.”
“으음···.”
“그것이 본파에서 나온 물건이라는 게 알려지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압박이 들어올 겁니다. 지금의 본파는 그걸 막아낼 힘도, 능력도 없지요.”
냉정한 이야기였다.
“그 신외지물이 더 큰 화를 불러울 것입니다. 그리고 사부님.”
나는 전영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제자를 믿으십시오. 흑룡방 후기지수 놈들 따위는 제자의 힘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제자가 못 미덥다면 일대기재인 사형을 믿으십시오. 서 대인과 린아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최선입니다.”
사부와 내 눈이 마주쳤다.
사형이라는 말을 꺼내자 유진휘의 몸이 움찔했다.
그는 아까 내가 흑도 셋과 싸울 때부터 이쪽을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었다.
눈은 살짝 울먹거리고 있는 채로.
사실 나 혼자서도 흑사룡까지 전부 이길 자신은 있다. 하지만 설득하기 위해서는 사형의 이름을 들먹이는 쪽이 좋았다.
실제로 나 혼자서 다 이길 생각도 없었고. 나 혼자서 흑룡방 후기지수 셋을 모두 이기면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내게 쏠릴 텐데 난 그런 걸 바라지 않는다.
내가 바라는 건 어디까지나 비선실세. 명성은 적당히, 여인들이 나를 흠모할 만큼만 있으면 된다.
과한 명성은 곧 책임을 부르는 일이다. 그 정도까지는 필요 없다.
책임은 사형이 지는 거지. 난 안 진다. 책임 없는 쾌락이 최고니까.
“사부님. 설마 사형이 흑사룡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시는 건······.”
지금의 사형이 보유한 전력은 현대로 따지면 핵무기와도 버금갈 정도.
후기지수 레벨에서는 사형이 지고 싶어도 질 수 없고, 구파일방의 장로와 붙더라도 그 괴물 같은 재능으로 비무 도중에 경지를 올려서 기어이 이길 인간이 사형이다.
전략 자체를 박살 내는 압도적인 힘이 손에 있다.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래서 힘이 없으면 머리가 고생하는 거다.
“아니다. 비록 본 파는 영락했지만, 휘아의 성취만큼은 명문정파의 이름난 용봉(龍鳳)과 견주어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제자들을 믿으십시오. 저희가 이 일을 해결하고 객잔도 지켜내겠습니다.”
내 말에 전영이 침묵했다.
객잔에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전영은 고민했지만, 그로서도 내가 말한 방도 이외에 다른 뾰족한 방도는 없을 것이다.
나는 느긋하게 그의 고민을 기다렸다.
“알겠다. 철수야. 네 주청을 받아들이마. 서 대인. 지필묵을 준비해주시오. 비무첩을 써야겠소.”
예상대로 전영은 내 제안을 수락했다.
그의 말을 들은 나는 입꼬리가 움찔거리는 걸 간신히 참았다.
‘흐흐흐흐, 이로써 인기남의 길에 마침내 한 발짝 내디뎠군.’
공동파와 흑룡방의 후기지수 대결은 당연히 강호 무림의 핫 이슈가 될 것이다.
그리고 대결의 참가자인 나 역시 주목할 만한 후기지수로 강호에 회자될 것이다.
그것도 그냥 후기지수가 아닌, 작은 객잔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협을 행하려 거대 방파 흑룡방에 용기 있게 맞선 공동파의 제자로 말이다.
현대로 치자면 공중파 3사 뉴스 그랜드슬램에 주요 일간지 1면 장식, 너튜브 영상 백만 조회 정도의 업적이다.
여심을 사로잡는 협객 이철수의 첫 행보로는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데뷔 쇼케이스다.
‘내가 봐도 이건 개쩌는 스토리야. 흐흐흐, 내가 여자라도 나한테 반했겠군.’
여심(女心)을 사로잡을 때 중요한 게 바로 토크다.
여자들의 이상형 중 하나가 유머러스한 남자라는 점에서도 볼 수 있듯, 여인들은 말을 재미있게 하는 남자를 좋아한다.
그리고 말을 재미있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스토리가 있어야 했다.
별 것 아닌 일도 재미있게 말하던가, 아니면 진짜 재미있는 일을 겪었거나.
나는 개쩌는 스토리를 재미있게 말할 생각이었다.
벌써 머릿속에 나를 둘러싼 절세가인들의 얼굴과 목소리가 떠오른다.
‘어머, 이 공자. 의협심을 참지 못하고 흑룡방과 대적하다니! 이 공자의 의협심은 정말이지 강호일절이군요!’
‘이 공자의 의협심에 소첩은 반했어요! 호호호호호호!’
‘이 공자, 밤도 늦었는데 오늘 소첩의 방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해주시면 안 될까요? 소첩, 오늘 이 공자의 이야기로 밤을 지새우고 싶어요.’
내 의협 스토리를 듣고 얼굴을 붉히는 절세미녀들!
자연스럽게 다 못 푼 썰의 뒷부분을 듣고 싶어서, 나를 본인의 침소로 초대하는 미녀! 그리고 이어지는 침대 위의 질펀한 남녀상열지사까지!
그야말로 완벽한 계획이었다.
‘이게 섹스지.’
협행의 목적이 무엇인가?
공과격? 명성?
다 틀렸다.
협행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여심을 사로잡아 운우지락(雲雨之樂)까지 이르는 것이다.
내 나이가 약관에 이르러 절세의 정력을 얻고 운우지락을 행할 그날까지.
나는 계속해서 협을 행해서 여심을 사로잡는 스토리를 쌓을 생각이었다.
나는 절세미녀와의 뜨거운 조운모우(朝雲暮雨)의 미래를 그리면서 웃었다.
흑룡방 이 새끼들 다 죽었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치골미골근을 움직였다.
움찔.
이제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오른 케겔 운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