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미래의 백도제일화
낡아빠진 객잔 안에는 손님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문자 그대로 파리 날리는 수준.
지금은 점심 대목인데 아무도 없는 건 좀 그랬다.
“어서 옵······. 전 대협 오셨습니까?”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뛰쳐나온 중년인이 전영 앞에서 허리를 공손히 숙이며 인사했다.
공동객잔의 주인 겸 숙수 겸 점소이 겸 백도제일화의 아버지를 역임하고 있는 서원광이었다.
백도제일화의 아버지답게 유진휘 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댄디한 멋을 보유한, 선이 굵은 미중년인 그가 웃으며 우리를 응대했다.
“오랜만입니다. 전 대협. 이쪽은······.”
“본 파에 새로 입문한 제자 이철수다. 철수야. 이분께서는 본 파의 재정에 큰 도움을 주고 계시는 공동객잔 주인 서 대인이다. 인사하도록.”
“하하하. 전 대협. 일개 숙수에 불과한 소인한테 대인(大人)이라니 부담스럽습니다.”
전영의 말에 손사래를 치며 웃는 서원광.
나는 그를 향해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 정중하게 포권하면서 인사했다.
“이철수입니다. 본 파의 살림을 책임지는 서 대인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기록에 따르면 백도제일화는 편부 가정에서 자랐다. 게다가 그녀는 아버지를 끔찍이 여기는 효녀였다.
따라서 백도제일화에게 점수를 따려면, 금적금왕(擒賊擒王)의 묘리에 따라 우선 그 아버지에게 점수를 딸 필요가 있었다.
“이철수 공자셨군요. 전 대협한테 서신을 통해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기개가 헌앙하시군요. 강호 무림에 공동파의 위명이 알려지는 것도 금방일 듯합니다.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대인 호칭이 싫지 않은지, 내 공손한 인사를 받은 서원광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씰룩거렸다.
“과찬입니다. 서 대인. 저야말로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내 말에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서원광.
우리는 그의 인도에 따라 비어있는 팔선탁에 앉았다.
메밀국수인 교면합락(蕎面饸饹) 세 그릇과 양고기 수육인 수조양육(手抓羊肉) 하나를 주문한 사부가 서원광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서 대인의 딸아이가 안 보이는군. 내 철수한테 하린이를 소개해주려 했건만······. 어디 있는가?”
사부의 입에서 드디어 기다리던 백도제일화의 안부가 튀어나왔다.
내가 말하기도 전에 알아서 나와 백도제일화를 서로 소개해주려 했다니.
나는 움찔거리는 입술 근육을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통제하며 무표정을 유지했다.
전영이야말로 진정한 사부가 틀림없다.
역시 스승의 은혜는 하늘과도 같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여 영원하라!
나는 딴청을 피우는 척하면서 귀를 열어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
“린아를 말씀하는 거라면 요 앞에 심부름을 보냈습니다. 지금쯤 도착할 때가 되었습니다. 아, 마침 저기 보이는군요. 린아야!”
서 대인의 말과 함께 우리 모두의 시선이 객잔 입구에 집중됐다.
객잔 입구에 쳐진 발이 들어 올려지면서 그녀가 나타났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 중원인과는 이질적인 하늘색 눈동자에 백금발 머리가 인상적인 미소녀.
미래의 백도제일화 서하린이 거기 서 있었다.
공동산이 있는 감숙성은 중원의 변방이자 실크로드의 출발점.
서역과의 무역이 활발한 지방이기 때문에 색목인 혼혈을 찾아보기 상대적으로 쉬운 곳이었다.
그렇기에 서하린 역시 중원인과 색목인 사이의 혼혈이었다.
아직 젖살이 다 안 빠진 모양인지 통통한 볼과 앳된 얼굴을 지닌 그녀였지만, 미래의 백도제일화답게 벌써 미(美)가 개화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교과서적인 미소녀였다.
하지만.
‘너무 애잖아?’
서하린의 나이는 나와 동갑. 13세다.
당연히 애다.
내가 색도를 추구하기는 하지만, 어린아이에게까지 흑심을 품을 정도로 양물로 사고하는 쓰레기는 아니다.
그런 건 사마외도의 색마 놈들이나 하는 거다.
분명 미래의 정파제일미녀이니만큼 예쁘기는 하지만, 어려서 그런지 아무 생각도 안 든다.
‘황상이 생각나는군.’
오히려 그녀를 보니 황상이 생각났다.
황상, 아니 3황녀였던 그녀와 내가 처음 만났을 때 딱 저 나이였다.
괜히 쓸데없이 그 시절이 생각났다.
그래도 황녀 돌보기는 나름 보람차기는 했다. 어쨌거나 그녀는 미녀로 자라났고, 내 말도 고분고분 잘 들었으니까. 정도 들었었다.
빌어먹을 50년 고자 인생 중에서 황상과의 시간은 몇 안 되는 순수하게 좋은 추억이라고 할 수 있었다.
뭐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운우지락(雲雨之樂)보다는 못하겠지만.
고자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양물이 멀쩡히 달린 2회차 인생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황녀야 뭐······. 사실 그녀는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단순한 꼭두각시 황제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나와 버금가는 심계(深計)를 지닌 교활하고 노회한 정치꾼이었다.
그러니 나 없어도 알아서 이번 회차에서도 잘 먹고 잘살 것이다. 황제를 40년 넘게 보필한 내가 장담한다.
뭐 정 그녀가 위험하다 싶으면 내가 도와주러 가도 되고.
‘이번 생에서는 황상도 시집 좀 가야 할 텐데. 쯧쯧.’
나는 전생에 시집도 안 가고 독수공방했던 황상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미녀의 마음이라면 얼마든지 오케이지만 황제만은 예외였다. 그녀는 가족이니까. 가족끼리 그런 거 하는 거 아니다.
어쨌거나 황상과의 추억이 떠오르자 괜히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와 눈이 마주친 서하린이 움찔했다.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 텅 비어버린 공허한 눈동자가 이쪽을 응시했다.
“······다녀왔습니다. 아버지.”
서하린이 무감정한 목소리로 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그녀가 식재료를 빈 탁자 위에 올려놨다.
“수고했다. 린아야. 여기 오랜만에 대공동파 장문인과 제자들이 우리 객잔을 방문하셨단다. 다가서 인사하렴.”
서 대인의 말에 서하린의 초점을 잃어버린 죽은 눈동자가 이쪽을 향했다.
그녀의 얼굴에 살짝 적의가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녀가 저러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서하린은 편부 가정이다. 색목인인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열 살 때 사영회(私營會) 소속 무인들이 객잔에서 벌인 칼부림에 휩쓸려 서하린 앞에서 죽었다.
그 이후 그녀는 마음의 문을 닫았다. 무림인을 원망하고 사영회의 횡포에도 제대로 된 도움을 제공하지 못한, 무력하기 짝이 없는 공동파를 원망했다.
지금도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적의가 듬뿍 담겨 있었다.
그런 서하린이 공동파에 입문하게 되는 계기는 현시점에서 1년 후에 화정현의 흑도문파인 사영회가 객잔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공동파는 객잔을 보호할 힘이 모자랐고, 사형도 영약을 먹고 임독양맥을 타통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사영회를 상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서 대인은 금지옥엽인 서하린을 보호하기 위해 공동파에 입문시켰다.
무림인과 공동파를 싫어하던 서하린은 하늘 같은 아버지의 명령을 어길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공동파에 입문했고.
그런 서하린이 공동파 식구들에게 마음을 열게 되는 건 기록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4년 후의일.
유진휘가 사영회를 모조리 정리하고 그녀의 복수를 대신 갚아준 이후였다.
스펙이 완벽한 엘리트 절세미남이 복수까지 대신해준다? 내가 여자라도 반했을 거다.
물론 난 남자라서 결코 사형에게 절대로 반하지 않을 것이다. 빌어먹을 사형 같으니.
어쨌거나 공동파에 들어온 이후에도 서하린은 유진휘와 사부인 전영, 아버지 이외의 타인에게 냉랭하고 적대적이었다.
손속도 정파에서는 지나치게 잔혹한 탓에 그녀에게 붙여진 별호가 냉혼검희.
그와 동시에 서하린의 미모가 색목인 혼혈이라는 중세 무림 기준 패널티를 감수하고도 너무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백도제일화의 별호 또한 얻었다.
전생에는 그녀의 잔혹한 손속이 오히려 매력이라면서, 가시 돋힌 꽃 같다면서 정파에서 그녀를 따라다니는 팬클럽도 많았다. 물론 서하린은 그런 남자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런 서하린이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나를 노려보면서.
사형이라면 모를까, 미소녀의 노려보기는 괜찮다. 오히려 좋아.
무관심보다는 낫다.
“린아야. 인사하렴. 이번에 공동파에 새로 입문한 이철수라고 한단다.”
서 대인의 재촉에 서하린이 그제야 마지못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서하린.”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냉랭한 목소리와 무표정한 얼굴로 이름만 내뱉는 그녀.
나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웃으며 말했다.
“공동파 제자 이철수라고 합니다. 서 소저를 만나 뵙게 되어 삼생(三生)의 영광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살갑게 웃으면서 포권을 취하는 나를 투명한 녹색 눈동자로 내려다보는 서하린.
그녀가 내 인사를 외면했다.
“······.”
침묵하던 서하린이 홱하고 고개를 돌려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본 서 대인이 곤란하다는 듯 멋쩍게 웃었다.
“하하하. 우리 딸아이가 붙임성이 없고 낯을 많이 가립니다. 두 분 대협 모두 죄송합니다.”
“괜찮네, 신경 쓰지 마시게. 철수야. 린아가 마음의 상처가 많아서 저러는 것이니 네가 사내답게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거라.”
사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사부님.”
뭐 고작해야 13세 어린애가 좀 튕긴다고 해서 진심으로 열받을 정도로 내 마음 수행이 얕지는 않다.
황제가 생각나는 미소녀기도 하고.
“두 분께서 이해한다니 다행입니다. 린아한테는 제가 따로 주의 주도록 하겠습니다. 아, 너무 떠들었군요. 저는 이만 식사를 준비하러 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소개 타임이 끝난 뒤, 서 대인이 주방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얼마간 기다리자 서 대인이 식탁 위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세 그릇의 교면합락과 산처럼 쌓인 수조양육을 올려놓았다.
“먹자꾸나.”
수조양육을 한 점 집어먹은 사부가 우리에게 말했다.
사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젓가락을 수조양육 그릇으로 뻗었다.
감숙성은 척박한 대지 때문에 농경보다는 목축(牧畜)이 발달한 지방.
양고기로 만든 수육인 수조양육은 원조 라면인 난주랍면과 함께 감숙을 대표하는 요리였다.
뜨끈한 수조양육을 한 점 집은 나는 고깃덩이를 소스에 찍어 입 안에 넣었다.
우물우물.
양고기답게 누린내가 조금 나기는 했지만, 생각보다는 먹을 만했다.
메밀국수인 교면합락도 제법 먹을 만했다.
그렇게 외식을 끝낸 우리는 서 대인의 배웅을 받으며 공동객잔을 나섰다.
본산으로 돌아가는 길.
“사제, 오늘 외식 좋았어?”
사부의 뒤를 따르면서 사형이 내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니 다 좋은데 왜 굳이 그걸 쓸데없이 옆에 붙어서 속삭이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내게 밀담(密談)을 속삭일 수 있는 건 오직 절세미녀뿐이다.
나는 곧바로 안전거리를 벌리면서 사형에게 말했다.
“네, 좋았습니다.”
미래의 백도제일화도 보고 오랜만에 고기도 몸보신도 하고 좋았다.
나물이 나쁜 건 아니다. 하지만 정력을 함양하기 위해서는 영양소를 골고루 균형 있게 섭취하는 것이 중요했다.
건강한 식단이 건강한 몸을 만들고, 건강한 몸은 곧 건강한 정력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식단 관리야말로 알파 메일의 기초라고 할 수 있었다.
“사제가 좋았다니 나도 좋아. 우리 앞으로도 자주 외식하자!”
사형이 내게 웃으면서 말했다.
오랜만에 사형이 동의할 만한 이야기를 했다.
외식은 나도 자주 가고 싶었다.
백도제일화와 자주 만나서 친분을 미리미리 쌓아서 장차 미래를 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형이 다시 웃었다.
“허허허.”
앞장서던 전영이 흐뭇한 미소를 흘렸다.
그렇게 공동파 본산에 도착한 이후.
오후 수련에 이어 사형과 함께하는 야간 수행까지 마친 나는 개인실로 복귀했다.
탁.
미닫이문을 닫은 나는 봇짐에서 낮에 저잣거리에서 구해온 부드러운 끈과 야간 수행에서 주운 1kg짜리 돌멩이를 꺼내 들었다.
왼손에는 끈, 오른쪽에는 돌멩이를 든 나는 웃으면서 바지춤을 내렸다.
기초공인 젤크 운동과 케겔 운동의 성취가 극성에 이르렀으니, 지금부터는 현대 의학의 상승절학인 행잉에 입문(入門)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