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역천의 흉성
“사제, 저기 빛이야!”
어두운 통로를 걷던 내 귓가에 사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말대로였다.
드디어 저 멀리 햇빛이 보였다.
사형과 나는 소양보를 운용해서 동굴 안을 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후아!”
“헉, 허억.”
장장 일주일이 지난 오늘, 나는 마침내 바깥 공기를 마실 수 있었다.
청명한 아침 하늘에 뜬 햇빛이 우리를 반겼다.
초봄의 산바람이 내 몸을 휘감았다.
뒤를 돌아보니 칼날 같은 절벽이 있었다.
쿠구구구궁!
절벽이 흔들리면서 굉음이 울렸다.
비동이 완전히 무너진 모양이었다.
“이제 본산으로 가죠. 우제가 길을 찾아보겠습니다.”
“응. 이번에도 사제만 믿을게.”
사형이 내 말에 헤실헤실 웃었다.
전영은 지금쯤 일주일 째 실종된 우리를 찾아 공동산 곳곳을 뒤지고 있을 터.
전생의 기록에서도 유진휘가 실종된 뒤에 공동산을 계속 쏘다녔다고 했었으니까.
동창 말단 정보원 시절 습득한 추적술을 사용하면 전영의 흔적을 쫓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귀찮고 힘든 일이다. 몸도 지쳤는데 지금은 그냥 본산에 가서 쉬면서 그를 기다리는 편이 더 낫다.
그렇게 내가 사형과 함께 공동파 본산으로 복귀하던 그때.
“처, 철수? 뒤에는 휘아더냐?!”
본산 근처에서 나와 사형은 사부인 전영을 만났다.
일주일 넘는 시간 동안 공동산 여기저기를 쏘다닌 모양인지, 여기저기 흙먼지가 묻은 검은 무복을 입은 전영이 우리를 보고 눈물을 글썽였다.
“대, 대체 지금까지 어디 있었던 것이더냐? 이 사부가 너희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느냐?”
멋스럽게 수염을 기른 사부의 초췌한 눈동자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그 모습을 보니 괜히 마음 한쪽 구석이 찔렸다.
동창 시절 추적술과 안법, 관찰법을 배운 나였기에 알 수 있었다.
안 그래도 낡았던 검은 무복이 군데군데 해진 모습, 흙먼지가 여기저기 묻은 모습, 다 떨어진 신발 밑창, 초췌한 얼굴과 퀭한 눈동자 등. 종합적으로 보자면 사부는 정말 칠주야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우리를 찾아다닌 것이다.
남자의 눈물은 싫지만, 남자 이전에 인간 대 인간으로서 뭔가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밤의 산길에서 그만 길을 잃어버려······. 이 모든 것은 길 안내를 맡은 불초제자가 부덕(不德)한 탓입니다. 본 제자를 벌해주십시오.”
나는 미안한 감정을 담아서 전영에게 머리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내 말에 전영이 뭐라하려던 그때.
“아닙니다! 사부님! 사제한테 벌을 주지 마십시오! 사형제는 일심동체(一心同體), 사제의 허물은 곧 사제를 잘못 지도한 사형인 제 허물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차라리 저를 벌해 주십시오!”
스윽.
사형이 나와 사부 사이를 가로막았다.
사형의 등짝이 보였다.
아니 시키지도 않았는데 왜 끼어들어?
잘못은 내가 했는데. 하여간 호구 아니랄까 봐.
당황스럽다.
“허허허······.”
그 모습을 본 전영이 웃음을 흘렸다.
그가 우리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우선 묻자꾸나. 둘 모두 일주일 동안 대체 어디에 있었던 것이냐?”
“그것은······.”
전영이 질문을 던진 순간, 사형이 먼저 운을 뗐다.
그의 입에서 지금까지 나와 겪었던 일이 흘러나왔다.
길을 잃었다가 우연히 광성단혈을 발견한 일. 안에서 미타성수와 홍양태를 발견하고 복용한 일. 벌모세수를 이루고 공동파의 실전된 절학을 되찾은 일. 복마검법을 되찾고 진법을 통과해서 이합신공을 습득한 일까지.
사형의 말을 들은 전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와중에도 사형은 괴물 살무사로 생사탕(生蛇湯)을 해먹은 일은 의외로 사부에게 말하지 않았다.
비밀이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지키다니, 호구 같으니라고.
“······방금 말이 전부 사실이냐?”
“네, 사실입니다. 사부님.”
나는 봇짐을 열어 전영에게 비동에서 습득한 비급서를 보여주었다.
비급서를 받아든 전영이 팔랑팔랑 소리와 함께 페이지를 넘겼다.
“······틀림없군. 이 비급서는 전부 진본이로다.”
비급서 탐독을 끝낸 전영이 유진휘의 손목을 붙잡아 진맥했다.
“정말로 임독양맥이 전부······. 그렇다면······. 너희가 혼원검제 선조님의 안배를 취하고 유지를 수습한 것 또한 전부 진실이로군.”
확인 작업이 끝나자 전영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실로 기연이야, 기연이로다. 허허허허허허······. 이 또한 본 파의 선조들께서 너희를 보우하고 인도하셨음이라.”
주륵.
전영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아까와는 다른, 기쁨의 눈물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전영은 평생 사부가 남긴 공동파 재건이라는 사명을 운명으로 여기며 본인보다는 사문을 위해 살았던 무인이었다.
그가 눈물을 흘리며 본산 방향으로 두 번 절한 뒤에 일어났다.
“너희의 무단 이탈은 분명한 과실이다. 허나 본 파의 절학을 되찾은 공로(功勞) 또한 있다. 이번 일의 공과(功過)를 따져보자면 공로 쪽이 훨씬 크다. 따라서 이번의 무단 이탈은 장문인으로서 불문(不問)에 부치겠다. 허나 책임을 묻지 않더라도 과실은 과실, 두 사람 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여라. 휘아도 책임지고 철수를 지도하도록 하고. 사부가 없으면 장문제자인 네가 본 파의 장문인이니라.”
전영이 짐짓 엄격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알겠습니다. 사부님!”
“알겠습니다. 사부님.”
나와 사형은 사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불문에 부치겠다는 결말 정도는 예상했기에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
기연 보따리가 넝쿨째 굴러 들어왔는데, 이런 사소한 걸로 벌한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전생에서도 유진휘가 기연 취득 이후 벌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었고.
우리의 대답을 들은 사부가 허허허 웃었다.
그가 팔을 벌려서 우리 둘을 끌어안았다.
아니 이렇게 또 포옹을 당한다고?
나는 몸을 움찔했지만, 지금의 화해 무드에서 이 포옹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빌어먹을.
어쩔 수 없다.
나는 체념하고 전영의 포옹을 받아들였다.
“잘 돌아왔다. 휘아야, 철수야. 두 사람 모두 수고가 많았다.”
전영이 살짝 흐느끼면서 우리에게 말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와 사형의 기연찾기 대모험은 마무리되었다.
*
본산으로 돌아온 나와 사형은 현천궁에서 사부와 함께 복마검법 비급서를 제작했다.
사형이 복마검법의 구결을 구술(口述)해주면 사부가 서책에 붓으로 구결을 받아쓰는 형식이었다.
내 대외적인 한문 성취는 이제 막 천자문(千字文)을 떼고 사서삼경(四書三經)에 입문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복원 작업에서는 벼루에 먹 갈기 등의 잡일을 맡았다.
두 시진 정도 이어진 복마검법 비급 제작 과정은 사부가 마지막으로 서책 표지에 고풍스러운 서체로 복마검법이라는 글자를 써넣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허허, 복마검법이 본 파로 되돌아오다니, 실로 본 파의 홍복(洪福)이로다. 내 생전에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구나. 이제야 돌아가신 선사(先師)님을 뵐 면목이 서겠어. 허허허허.”
복원된 복마검법의 비급서를 보는 사부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런 사부를 바라보면서 헛기침했다.
“사부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더냐?”
전영이 내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복마검법을 되찾아서 기분이 좋은 모양.
하긴 복마검법은 공동파를 대표하는 진산절기. 복마검법이 없는 공동파는 야동 없는 직박구리, 양물 없는 사내와도 같다.
그런데 이제 공동파가 복마검법을 되찾았으니, 사문 재건의 사명을 지닌 전영은 지금쯤 회귀해서 거물(巨物)을 되찾은 나처럼 극상의 쾌락을 만끽하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 얼굴도 지고의 야동을 접하고 흥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중년 아저씨의 저런 표정은 별로 보고 싶지 않았는데.
염병.
나는 울렁거리는 속을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참아내면서, 그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합신공과 야명주는 당분간 세간에 드러내지 않고 숨기는 쪽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어째서냐?”
전영이 내게 되물어왔다.
이합신공과 야명주를 숨겨야 한다.
이 결론은 비동을 탈출했을 때부터, 아니 혼원검제의 마지막 말을 들은 뒤부터 계속 생각했던 계획이었다.
혼원검제가 마지막에 남긴 의미심장한 말.
천하의 어둠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고, 역천(逆天)의 흉성(凶星)은 반드시 다시 떠오를 거라는 말을 나는 아직 기억했다.
천기에 위배되느니 뭐니 해서 구체적으로 말은 안 했지만, 그가 지칭한 천하의 어둠은 300년 전 발호했던 혈교, 역천의 흉성은 혈교의 수장을 뜻하는 말이 틀림없다.
‘정확히는 혈세신마의 후예겠지.’
혈세신마.
300년 전, 원말명초의 혼란기에 혈교를 이끌고 천하를 피로 씻는 대혈겁을 일으킨 장본인.
새로운 하늘의 기치를 내건 혈세신마와 혈교는 광동의 십만대산에서 출병하여 남해 검각(劍閣)을 멸문시키고 수많은 양민을 학살하였다.
안 그래도 강호 무림과 연합한 중원 각지의 한족 반란 때문에 유명무실해졌던 원나라 말기 황실은 혈교가 일으킨 혈겁에 결정타를 맞고 북경에서 대초원으로 패주했다. 그렇게 무주공산이 된 중원을 혈교가 접수하기 직전 등장한 고수가 혼원검제.
300년 전 천하제일인이었다.
혼원검제가 이끄는 무림맹은 주원장군과 함께 강서성 파양호(鄱陽湖)에서 하늘을 가르고 땅과 물을 뒤엎는 일대 결전을 벌였다. 칠 주야 동안 이어진 파양호 대전(鄱陽湖 大戰)의 승자는 혼원검제.
혈세신마는 죽고 혈교는 멸망하였다.
파양호 대전 이후 주원장은 천명을 거머쥐면서 명나라를 건국했다. 대명제국 개국에 일조한 강호 무림은 건국의 공로로 관무불가침의 특권을 태조 주원장에게 직접 하사받았다.
‘그리고 당연히 역적인 혈교는 풀뿌리 하나 없이 전부 사라졌지. 마교가 중원에서 신강 천산 산맥으로 쫓겨난 이유도 혈교가 마교의 극단주의 분파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고.’
전생의 내가 양물을 되찾으려면 죽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뒤에 옛 혈교의 비술인 환생 대법을 실행하기 위해 혈교의 후예를 찾았을 때. 그들은 장의사로 위장해 근근이 비참한 하층민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국가에서 철저히 박멸했기 때문이다. 동창과 서창의 정보망으로도 천하의 어둠이라고 할 만한 암중세력은 찾을 수 없었다.
내게 중요한 건 양물과 운우지락이지 강호 무림의 어둠 따위가 아니다. 그렇기에 그런 종류의 정보는 내 관심 밖이었다.
하지만 지금 혼원검제는 그 혈교의 후예가 반드시 나타날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50년 뒤의 미래에도 혈교는 안 나타났는데.’
그러나 내가 아는 미래에서는 혈교도 혈세신마의 후예도 나타나지 않았다.
미래의 유진휘가 검성의 무명(武名)을 얻은 건, 구파일방과 육대세가 상대 비무행에서 그가 전승(全勝)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중간에 그의 천하제일인 등극을 방해하기 위해 남궁세가, 화산파, 청성파, 점창파의 최고수가 명예를 버리고 합공(合攻)을 취했을 때. 유진휘는 그들의 기습 합공을 단신으로 물리치는 기염까지 토했다.
‘하지만 천기도 읽고 회귀도 알아차린 혼원검제의 전언을 단순히 노망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어. 특히 전생에도 혼원비동이 무너졌다는 사실이 아주 거슬려.’
내 직감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내가 아는 미래에서는 유진휘도 이합신공을 복구하지 못했다. 이합신공이 세상에 나오는 일도 없었다. 그런데도 비동은 무너졌다.
만일 비동을 무너뜨린 게 혈세신마의 후예라면? 혼원검제의 독문무공이자 혈세신마에게 마지막 일격을 날린 개세절학인 이합신공과 혼원무극도를 없애기 위해 비동을 무너뜨렸다면? 전생에서 그들이 동창과 서창의 정보망이 닿지 않는, 이를테면 새외 멀리 숨어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둬야 할 지금 상황에서, 이합신공을 되찾았다고 섣불리 공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언제 그들의 마수가 뻗어올지 모르니까 말이다.
‘아직 절세미녀와 손도 못 잡아보고, 운우지락도 못 해봤는데 굳이 벌집을 쑤실 필요는 없지.’
흑막 놈들을 상대하는 건, 내가 공동파 무공의 극의에 도달해서 절대 정력을 얻은 뒤에 해도 늦지 않다.
아니 그때가 되면 오히려 환영이다.
놈들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사형과 함께 강호의 영웅으로 등극, 뭇 미녀들의 여심을 사로잡으면서 삼처사첩을 달성할 수 있을 테니까.
‘어머! 공자가 혈세신마의 후인을 처단한 강호 무림의 영웅인가요? 정말 기개가 헌앙하고 인물됨이 준수하군요!’
‘호호호호! 영웅답게 몸매가 탄탄하군요! 저는 호리호리한 유 공자보다는 남자다운 용태를 지닌 이 공자가 좀 더 취향이어요!’
‘영웅호색이라고 했어요. 저는 공자의 첩이라도 좋아요! 아니면 하룻밤의 사랑이라도! 제발 소첩을 받아주시어요!’
강호의 영웅인 나를 알아보는 절세미녀들! 하룻밤만 자도 좋다고 애원하면서 침상에 숨어들면서 눈물을 뿌리는 미녀들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일단 충분히 강해지고 절대 정력을 얻은 뒤에야 할 일이다.
아직 준비가 안 된 지금은 안 된다.
나는 양물이 아닌 이성으로 사고하는 뇌가 섹시한 남자.
순간의 정욕 때문에 일을 그르치지 않는다.
그러니 여기서는 이합신공을 숨겨야 한다.
하지만 이 말을 곧이곧대로 사부에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
나는 사부를 바라보면서 미리 생각해둔 변명을 말했다.
지금부터가 승부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