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구일신 일일신 우일신(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현경의 경지는 심득으로 소우주를 완성하는 것.
그리고 전설로만 언급되는 생사경의 경지는 완성된 소우주를 대우주(大宇宙)에 투영해서 이치를 바꾸는 것이다.
생사경의 경지부터는 기록만 살펴보자면 산을 부수고, 하늘을 갈라버리는 등 무공이 아닌 천재지변(天災地變)의 영역에 이른다.
솔직히 기록이 과장된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혼원검제가 진짜로 기록대로 천지를 뒤집는 걸 보니 아무래도 하늘을 가르니 땅을 뒤흔드니 하는 말도 안 되는 기록이 전부 사실이었던 모양.
“내가 창안한 이합신공의 극의에 도달하면 혼원무극도를 깨달을 수 있다.”
나를 바라보면서 혼원검제가 말했다.
“역천의 혼백과 선도의 무학을 함께 품은 연자여, 천하의 어둠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역천의 흉성(凶星)은 반드시 다시 떠오를 것이다. 더 자세히 말해주고 싶어도 천기(天氣)에 위배되어서 말해줄 수 없구나. 연자여, 그날까지 이합신공의 수련에 정진하도록 하여라.”
혼원검제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내게 있어 보이는 말을 늘어놓은 그때.
그그그그그.
굉음과 함께 세계가 무너지면서 나는 눈을 떴다.
“헉.”
나도 모르게 헛바람을 삼켰다.
가물가물하던 시야가 또렷해지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천장에 박힌 야명주.
그리고 작은 동공과 야명주 불빛 아래 비치는 석조 제단 위에 올려진 작은 석함이었다.
‘저기에 이합신공이 있겠군.’
이합신공.
300년 전 혼원검제가 창안한 그의 독문무공.
혼원검제 사후 대대로 공동파 장문인과 장문제자에게만 전해졌던 신공절학인 이합신공은 50년 전 공동혈사에서 다른 절학과 마찬가지로 마교에 의해 실전되었다.
이합신공의 효능은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카운터.
음양전도의 묘리를 이용해서 힘의 방향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기록에 따르면 아인슈타인과 뉴턴, 하이젠베르크를 경악시키고 현대 과학의 정수인 물리법칙조차 모독하는 신공절학이 바로 이합신공이었다.
물론 진짜 물리법칙조차 모독하는 사상 최대의 천재가 된 건 창안자인 혼원검제 한 명뿐이고, 후대 공동파 장문인과 장문제자들의 성취는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
어쨌건 이합신공은 최상승 절학인 만큼 당연히 이합신공을 배우기 위해서는 아래 단계에 해당하는 내가기공을 대성해야만 했다.
‘현원태양기, 혼원태음기, 혼원일기공을 대성해야 입문할 수 있다고 그랬었지.’
현원태양기는 상승의 양강기공, 혼원태음기는 상승의 음한기공, 혼원일기공은 음양전도를 이루는 역혈기공이다.
셋 모두 전생의 사형이 얻거나 복원했지만, 이합신공만큼은 천무지체였던 사형도 끝내 복원해내지 못했었다.
그렇다.
천재 중의 천재인 사형조차 복원해내지 못한, 생사경의 무인이 창안한 독문무공.
천지를 뒤집는 절대 정력으로 향하는 길이 저 조그마한 석함 안에 있다니.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 선물로 게임기를 받았을 때보다 더 설레는 기분이었다.
‘흐흐흐, 이것만 얻으면······.’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칠주야 동안 삼처사첩과 함께 운우지락(雲雨之樂)을 즐기고도 불기둥이 고개 숙이지 않을 정도로 강철 같은 정력!
그런 정력을 소유하고 싶다는 내 소망이 바로 저기에 담겨 있었다.
두근두근.
내가 떨리는 손을 뻗어 석함을 열려고 한 그때.
“사제? 어디 있어? 사제!”
뒤에서 기척과 함께 사형의 목소리가 울렸다.
울먹이는 목소리.
잠깐, 설마?
아니지?
사형과의 신체 접촉은 더 이상은 사양······.
내 생각이 거기까지 이어진 그때.
“사제에!!”
꽈악.
사형이 뒤에서부터 나를 습격하면서 껴안았다.
기감으로 감지한 순간 몸을 자연스럽게 피하려고 했지만, 미처 피하지 못했다.
사형의 기습이 더 빨랐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천무지체 같으니.
내 배후를 급습한 사형이 양팔로 내 허리를 감싸고 깍지까지 끼면서 나를 끌어안았다.
교과서적인 백허그였다.
정면 포옹도 모자라서, 이제는 백허그까지 사형에게 강탈당하다니.
손이 부르르 떨렸다.
시야가 살짝 흐려졌다. 눈물이 찔끔 흘렀다.
아직 절세미녀와 운우지락은커녕 손도 한 번 못 잡아봤는데! 어째서 이렇게 끈적한 스킨십을 남자인 사형과 계속 해야 한단 말인가?
빌어먹을.
내가 사형의 백허그에서 벗어나려던 그때.
“사제, 나 무서웠어. 갑자기 사제도 사부님도 전부······. 사라지고······. 본산도 불타서······. 또 옛날처럼 나 홀로 남겨지는 악몽을 꿔서······.”
사형이 나를 더 꽈악 끌어안으면서 몸을 파르르 떨었다.
“흑, 흑······.”
내 등이 축축해졌다.
사형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주륵.
뺨을 타고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치욕의 눈물이었다.
내 등이 남자의 눈물 따위로 더럽혀지다니! 아까부터 떨리고 있던 손이 더 심하게 떨렸다.
내 첫 백허그는 절세미녀의 것이어야만 했다.
내가 떠나려고 하자, 그녀가 피폐한 모습으로 후회하면서 ‘가가, 가지 마세요! 소첩은 가가 없이는 이제는 못 사는 몸이어요!’라고 외치면서 집착하는 모습.
그러면서 그녀가 나를 뒤에서 꼬옥 끌어안으면서 내 등에 옥루(玉淚)를 묻히는 모습이야말로 내가 꿈꾸던 이상향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잔인했다.
남자 따위가 내 백허그를 앗아간 것으로도 모자라, 사내의 눈물 따위를 등으로 받아내야 하다니.
이런 잔혹한 현실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사제······. 사제는 괜찮아······?”
사형이 흐느끼면서 물었다.
나는 프로레슬러처럼 내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고 있는 그의 깍지를 금나수의 묘리를 응용해 자연스럽게 풀어냈다.
마침내 사형의 백허그에서 해방된 나는 살짝 떨어져서 사형과의 안전거리를 유지하면서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기문진을 통과했어?”
얼마나 운 건지 눈덩이가 빨갛게 부어오른 얼굴로 내게 말하는 사형.
보통 얼굴이 아무리 잘생겨도 울면 미모가 어느 정도 망가져야 정상이다. 그런데 저 빌어먹을 사형은 우는 얼굴에도 비장미가 깃들어 쓸데없이 잘생겨 보였다.
마치 전설적인 미남 배우인 알랭 들롱이 눈물 연기를 하는 모습을 보는 느낌이었다.
알랭 들롱의 외모는 송옥(宋玉)과 반안(潘安)을 합친 것보다 더 대단해서, 그냥 길거리를 걷고 있어도 그의 외모에 반한 레스토랑에서 공짜로 밥을 주고, 옷가게에서 공짜로 옷을 줬다고 했다.
지금의 사형은 그런 알랭 들롱을 초월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포목점과 객잔은 물론, 저잣거리 전체를 외모로만 털어먹을 수 있을 정도.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외모면 우는 모습까지 영화의 한 장면이지?
역시 걸어 다니는 심마(心魔)다운 외모다.
심지어 미타성수 때문인지 규화보전의 성취가 깊어졌던 전생의 나랑 비슷한 몸처럼 변해서 더 기분이 묘하다.
나는 사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예, 통과했습니다.”
내가 혼원검제의 잔류 사념과 색도에 관한 진지한 대담을 나눈 뒤에 시련을 통과했을 때까지도 사형은 기문진에서 헤매고 있던 모양.
그러니 악몽 이야기를 한 거겠지.
“······사제는 나보다 강하구나······. 대단해. 사제······. 나는······. 사형인데······. 사제를 지켜줘야 하는데······.”
사형이 말을 하다 말고 다시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히끅······. 그런데······. 지키지 못했어······. 기문진도······.”
사형이 말끝을 흐렸지만, 뒤에 나올 말이 뭔지는 짐작이 갔다.
사형은 지금 내가 사제니까 본인이 나를 지켜야 한다는 쓸데없는 강박관념에 구속된 상황.
나는 기문진을 통과했는데, 본인은 통과를 못 했으니 나를 지킬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서 저렇게 울고 있는 거겠지.
안 봐도 뻔하다.
뭐 사형의 정신력이 모자라서 기문진을 통과 못 한 건 아니다.
미래의 천하제일인이다. 고작 이 정도 기문진을 통과 못 하는 건 말도 안 된다.
단지 내가 너무 빨랐을 뿐이다.
‘심상무도로 기문진 자체를 박살 냈으니······.’
무협소설 클리셰가 다 그렇듯, 트라우마와 욕망을 자극하는 기문진 통과의 정석은 기문진이 보여주는 환상을 간파하고 이겨내는 것.
하지만 나는 정석을 따르지 않고, 심상무도를 통해 힘으로 부숴버렸다.
그러니 혼원검제가 특이하다는 이야기를 한 거고.
만약 내가 심상무도를 안 쓰고 정석대로 기문진 통과를 시도했다면, 사형이 나보다 더 빨리 통과했을 것이다.
“······사제······. 나는······.”
“이런 일로 울 필요 없습니다. 사형.”
나는 계속 질질 짜는 사형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절세가인의 옥구슬 같은 아름다운 눈물이라면 모를까, 남자의 눈물 따위는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그러니 여기서는 사형의 눈물을 빨리 멈추게 해야 했다.
나는 한숨을 쉬면서 주머니에서 어차피 버리려던 헝겊을 꺼내 사형에게 건넸다.
내가 쓰는 수건도 아니고, 헝겊 정도는 상관없겠지.
“사제······?”
사형이 빨갛게 부어오른 눈으로 나와 헝겊을 번갈아가면서 바라봤다.
뭐야.
그 빌어먹을 눈동자.
사형의 눈길이 내 전신을 훑자 소름이 쫙 돋았다.
손이 부르르 떨렸다.
왜 저렇게 게이처럼 끈적한 눈빛으로 날 보는 거지?
정말 준비해뒀던 말을 하는 게 맞을까?
사형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해졌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내심 기대하는 눈빛. 저렇게 바라보면 이제 무를 수도 없다.
이거 뭔가 잘못되어가는 거 같은데.
‘아니야.’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이 정도 말은 해도 괜찮을지도 몰랐다. 그래, 진정한 사내대장부가 되려면 말 하나하나에 너무 벌벌 떨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지금 한마디를 안 해놓으면,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사형이 저런 모습을 보일 텐데 그건 더 버틸 수가 없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지금 치욕을 한꺼번에 당하는 것이 나중에 계속 치욕 당하는 것보다 낫다.
결심한 나는 사형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꼭 사형만 저를 지켜줄 필요는 없습니다. 가끔은 제가 사형을 지켜야 할 때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서로 의지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형제의······. 우애······. 니까요······.”
나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간신히 웃는 얼굴을 유지하면서 말했다.
그래.
이대로 계속 울게 놔두는 것보다는, 사형이 껌뻑 죽는 사형제의 우애를 들먹여서라도 빌어먹을 울음을 멈추는 쪽이 낫다.
“사제······.”
내 말에 사형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해졌다.
“그러니까 그만 좀 우십시오. 사내가 대체 왜 그렇게 눈물이 많습니까?”
나는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남자가 왜 저렇게 울보인지 모르겠다. 제발 좀 그만 울라고. 안 보고 싶으니까.
내 말을 들은 사형이 옅게 웃었다.
그가 내가 내민 헝겊을 조심스럽게 받아들고는, 눈물을 닦으면서 말했다.
“사제의 말이 맞아. 서로 의지하는 것이 진정한 사형제의 우애······. 잊고 있었어. 미안해······. 사제. 그리고 고마워······. 날 일깨워줘서. 응. 일방적인 관계는 좋지 않아. 때로는······. 사제한테 의지할 때도 있어야겠지.”
사형이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환하게 웃는 사형의 모습은 정말 쓸데없이 기생오라비처럼 잘생겨 보였다.
빌어먹을, 나는 속으로 투덜대면서 등을 돌리며 안전거리를 유지했다.
사형의 눈빛이 수상하다. 평소보다 안전거리를 더 벌려야 했다.
나는 한 발짝 사형에게서 더 떨어지면서 말했다.
“그거면 됐습니다. 이제 혼원검제 선조님의 안배를 취해서 이만 비동을 나갑시다. 사부님께서 걱정하시겠습니다.”
“응!”
사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사태가 좀 수습이 된 모양. 앞으로 저렇게 내 앞에서 질질 짜는 일도 이제는 없겠지.
그래야만 한다.
뭐,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사형의 우는 모습이 마치 계집아이같군.’
물론 사형은 멋있고, 우는 모습조차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21세기 주말 8시 드라마 남주처럼 잘 울고 예쁜 꽃미남형이라고 할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기는 21세기 현대 한국이 아닌 18세기 이세계 명나라.
‘자고로 이 시대 여인들은 상남자, 알파 메일한테 마음이 끌리는 법이지.’
유교 탈레반 월드 중세 무림의 이상적인 미남상과 사형은 조금 거리가 있었다.
사형이 워낙 외모가 사기라서 별다른 흠은 아니겠지만. 어쨌건 여유증에 이어 사형의 약점을 또 하나 알아낸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자, 그럼 절대 정력의 비결을 좀 열어볼까.
나는 속으로 콧노래를 부르면서 석함의 뚜껑을 열었다.
함 안에는 고풍스러운 서체로 이합신공(離合神功)이라고 적힌 서책이 들어 있었다.
나는 이합신공 비급서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오래된 책이다.
거칠게 다뤘다가 손상이라도 가면 큰일이었다.
색도의 일대종사를 향한 길에 큰 도움이 될 광세절학이니 소중히 다뤄야 한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조심스럽게 봇짐에 이합신공의 비급서를 넣은 그때.
그그그그그그그그.
비동 전체가 흔들렸다.
“사, 사제?! 비동이······!”
사형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와 동시에 제단 뒤의 석벽이 열렸다.
천장에 금이 가면서 돌가루가 흘러내렸다.
이거 뻔하다.
비급을 챙긴 뒤에 비동이 무너지도록 기관장치를 해놓은 게 틀림없다.
나는 무너지는 비동 속에서, 다리에 내력을 불어넣은 뒤에 훌쩍 뛰어서 천장의 야명주를 뽑아냈다.
갈 때 가더라도 야명주는 챙겨야지.
저게 다 돈이다, 돈.
“침착하고 절 따라오십시오. 사형.”
“응······.”
야명주를 챙긴 나는 사형을 데리고 제단 뒤에 열린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콰과과과과과과과과!
곧이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면서 무너져 내린 돌더미로 통로가 막혔다.
나는 완전히 무너진 비동을 뒤로 한 채로, 야명주와 이합신공이 든 봇짐을 소중하게 끌어안으면서 앞장섰다.
움찔.
그 와중에도 나는 치골미골근을 움직이면서 케겔 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대학(大學)에서 이르길, 구일신 일일신 우일신(苟日新 日日新 又日新)이라 하였다.
진짜 하루를 새롭게 하려면, 날마다 새롭게 하고, 또 나날이 새롭게 하라는 뜻의 격언으로, 은나라 탕왕의 세숫대야에 새겨진 명언이라 하여 탕지반명(湯之盤銘)이라고도 하는 구절이다.
오늘에 만족해서 안주하지 말고 매일 새롭게 꾸준히 단련해서 더 발전하라는 뜻의 격언인데, 정력도 이와 같다.
오늘의 정력에 만족해서 안주해서는 안 된다. 매일매일 케겔 운동, 젤크 운동, 정력제 복용, 마보(馬步)를 통한 하체 트레이닝, 외공 훈련을 빼놓지 말고 반복해야 한다.
그렇다면 궁극의 알파 메일로 대기만성(大器晩成)할 수 있으리라.
나는 그렇게 다짐하면서 사형과 함께 비동을 빠져나왔다.
이제 공동파 본산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