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나는 혼원검제를 보면서 입을 다물었다.
300년 전 인물이 살아있을 리 없다.
아무리 생사경의 고수라도 수명은 200년 정도가 한계니까.
전설대로 우화등선(羽化登仙)해서 신선이 된 혼원검제가 하계(下界)에 잠시 내려온 것이거나, 아니면 생전에 특수한 술법과 진법을 사용해서 사념 일부를 지상에 잔류시켜뒀던가, 둘 중 하나이다.
“그렇게 경계할 거 없네. 연자(緣者)여, 나는 혼원검제 본인이 아닌, 그의 잔류 사념에 불과하니까 말일세.”
검은 무복을 입은 중년인이 스스로 정체를 밝혔다.
신선이 실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신화시대 이후 그들이 하계에 직접 내려온 기록은 없다.
그러니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눈앞의 혼원검제는 특수한 술법과 진법을 통해 그가 생전에 남긴 잔류 사념이라는 사실이 좀 더 이치에 맞다.
실제로도 전설적인 고수들이 잔류 사념으로 안배를 남기는 경우가 많기에 더 그렇다.
자율적인 사고가 가능한 잔류 사념은 기관진식과는 달리 자체 판단을 통해 능동적으로 후인의 자격을 시험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눈앞의 혼원검제는 생전의 진짜 혼원검제가 기관장치와 기문진에 이어 설치한 안배의 마지막 보안 장치인 셈이었다.
“놀라지 않는군. 하긴, 오히려 놀라야 할 쪽은 나일지도 모르지. 정신세계라고는 하지만 심상무도의 경지에 오른 절대 고수가 여기에 올 줄은 몰랐으니 말일세.”
혼원검제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자네의 정신은 절대 고수면서 정작 육신과 내력은 아직 일류 수준에도 못 미치는군. 신체와 정신의 부조화······. 그리고 자네의 혼백(魂魄)에서 느껴지는 역천(逆天)의 힘······.”
혼원검제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내 혼백에서 역천의 힘이 감지된다는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내가 전생에 집행한 환생 대법은 옛 혈교의 사술(邪術) 중에서도 궁극에 이른 술법.
사망 직후 타인의 육신을 입고 환생하는 술법인 만큼, 역천(逆天)의 묘리가 깃들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비록 환생이 아닌 회귀를 해버리기는 했지만, 어쨌건 생사경의 고수가 남긴 잔류사념이라면 저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겠지.
그런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거요? 지금의 나는 분명한 공동파의 진산제자요. 무슨 문제라도 있소?”
나는 혼원검제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절대 정력이 탐나기는 한다.
하지만 나는 기분이 더러워진 상황이었다.
내 마음의 상처를 멋대로 후벼파고, 허상이지만 내 손으로 삼처사첩을 처리했다. 심지어 다시는 안 쓰고 싶었던 ‘그 쓰레기 내시 무공’까지 사용했다.
그렇게 찝찝한 기분으로 얻은 절대 정력이 대체 무슨 의미라는 말인가?
절대 정력을 얻고 싶기는 하지만, 인의(人義)를 저버리면서까지 추구하고 싶지는 않다.
아니면 사형에게 안배를 양도하던가.
상대방이 생사경의 고수이기는 하지만, 어차피 잔류 사념.
정신세계에서 나를 이길 수는 없다.
나와 혼원검제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얼굴은 중년이지만 탱탱한 아기 피부를 가진 그의 얼굴이 보였다.
더불어 폭넓은 검은 무복 아래 언뜻 비치는 탄탄한 그의 근육질 몸도.
혼원검제의 몸도 피부도, 내가 바라던 이상적인 알파 메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것이 궁극의 생명을 얻은 자의 몸인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저런 엄청난 생명력, 아니 정력이라니. 과연 절대 정력의 소유자답다.
역시 지금이라도 조금 굽힐까? 자존심이 밥 먹여주나?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그때.
“아니, 없네. 자네 말이 맞아. 자네한테서 본 파의 내력이 느껴지네. 자네는 분명히 본 파의 문도가 맞아.”
혼원검제가 고개를 저었다.
“이이제이(以夷制夷)라, 그래. 역리(逆理)를 상대하려면 이쪽도 역리(逆理)를 활용하는 것이 순리(純理)일지도 모르지. 역천의 힘과 선도(仙道)의 무학을 동시에 품고 있는 후인(後人)이라. 끌끌끌끌끌······. 재미있구만.”
그가 웃었다.
무협소설 볼 때도 생각한 거지만 저 끌끌끌 하는 웃음소리는 대체 왜 내는 건지 모르겠다.
전생에서 만난 자칭 무림 명숙이라는 자들도 저렇게 웃는 걸 보면 무슨 암묵의 룰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무림에서 늙으면 다 저렇게 웃게 되나?
그래도 호호호 같은 내시 웃음보다는 듣기 좋다.
빌어먹을 변태 내시 새끼들 같으니. 대체 왜 그렇게 변태처럼 웃어대는거지?
아무튼 혼원검제의 의미심장한 말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역리인지 뭔지를 상대하려면, 마찬가지로 역천의 힘을 가지고 있는 내가 필요하다는 것.
결국은 나에게 무학을 전수해주겠다는 말이다.
아니, 어쩌면 내가 아니면 안 될지도 모른다.
그 말인즉, 칼자루가 내게 넘어왔다는 뜻이다.
내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절대 정력을 얻을 기회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알았으면 빨리 무학을 전수해주십시오. 선조님.”
“자네는 왜 그렇게까지 정력을 얻고 싶은 건가?”
혼원검제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삼처사첩과 주지육림에서 운우지락? 그런 단순하고 저급한 육욕(肉慾)의 충족이라는 불순한 목적으로 선도(仙道)와 유불선(儒佛仙)의 삼교합일(三敎合一)을 추구하는 본 파의 진산절학을 사용하겠다는 건가?”
혼원검제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놀랍도록 침착했다.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하긴 잔류 사념으로서 기문진의 시련을 주관했을 테니, 내가 어떤 트라우마와 욕망을 가지고 있는지 봤겠지.
이 정도는 예상 범주 내였다.
하지만.
“불순한 목적이 아니오.”
나는 성욕에 미친 원숭이도 아니고, 색마도 아니다.
“음양의 교합이야말로 자연의 원리이자 도가에서 추구하는 방중술(房中術)의 일부요. 방중술 또한 선도(仙道)에 이르는 도가(道家)의 정통 수행 방법이오. 나는 욕망에 휘둘리는 색마(色魔)가 아니오. 하지만 욕망을 억누르는 수도자도 될 수 없소. 내가 추구하는 색도는 욕망의 올바른 발산이오. 수행자의 욕망을 올바르게 발산하여 음양이기의 조화를 통해 득도(得道)를 추구하는 것. 그것이 내 궁극적인 목적이오.”
내가 추구하는 색도는 여심(女心)을 쟁취해서 절세미녀를 극락으로 보내는 것.
나와 상대방 모두의 심신(心身)이 만족하는 운우지락(雲雨之樂)이다.
원숭이처럼 단순한 육체적 쾌락, 테크닉만을 추구하는 사마외도(邪魔外道)의 색공과는 결이 다르다.
이러한 색도의 가르침은 도가에서 이르는 방중술(房中術)의 수행과도 일치하는 면이 있다.
방중술(房中術)은 운우지락을 통한 음양이기의 조화로 선도(仙道)를 수행하는 방법이었으니까.
“하지만 삼처사첩은 너무 많은 것 아닌가? 음양이기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한 명의 처만으로도 충분해. 난교(亂攪)는 욕망의 올바른 발산이 아닌 욕망의 방종(放縱)에 불과해. 사마외도(邪魔外道)의 방식이야.”
“하지만 내 양기가 한 명의 처로 감당 불가능할 정도로 너무 많다면? 그것이야말로 음양이 조화롭지 못한 것이 아니오?”
내 말에 혼원검제가 살짝 헛바람을 삼켰다.
당황한 모양.
그가 살짝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그건······. 하지만 처가 여러 명이면 투기(妬忌) 때문에 바람 잘 날이 없을 걸세.”
“그럴 일은 없소.”
나는 혼원검제의 말에 딱 잘라 부정했다.
“어찌 그리 장담하는가?”
내 말에 혼원검제가 다시 물었다.
투기.
질투를 뜻한다.
그가 뜻하는 건 단순한 질투가 아닐 것이다.
일곱 명의 절세미녀를 거느리는 데 필연적으로 따르는 여러 고충을 투기라는 단어 하나에 집약해서 말한 것이다.
혼원검제는 지금 네가 하렘을 감당 가능하냐고 묻는 것이다.
나는 그의 질문에 피식 웃었다.
“왜 웃지?”
“그야 어이가 없으니까.”
나는 혼원검제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애초에 삼처사첩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면, 꿈조차 꾸지 않았소. 왕관을 쓰려면 무게를 견뎌야 하는 법. 절세미녀 일곱의 여심(女心)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그녀들을 책임지려면 우선 나 자신이 그만한 그릇을 지닌 대장부(大丈夫)가 되어야 하지 않겠소? 나는 그런 남자가 될 것이오. 그다음에 당당하게 그녀들의 여심(女心)을 사로잡아 삼처사첩을 이루고 상호 동의 하에 모두의 심신(心身)을 만족시키는 궁극의 운우지락(雲雨之樂)을 즐길 것이요.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을 이루겠지.”
나는 진심으로 혼원검제를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책임지지 않을 거라면,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삼처사첩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만한 자격이 필요한 법.
여심(女心)을 쟁취해서 그녀들 모두가 침상 위에서 만족하는 조운모우(朝雲暮雨)의 극의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선 나 자신이 대장부(大丈夫), 그러니까 알파 메일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기꺼이 그러할 것이다.
절세미녀들의 여심을 얻기 위해서, 삼처사첩을 위해서.
그리고 섹스를 위해서.
“그건······. 이론적으로나 가능한 일일세.”
“안 할 거라면 말도 안 꺼냈소.”
“······무모하군. 하긴, 역리를 상대하려면 그런 면도 필요하겠지.”
내 말에 혼원검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무학을 전수받는다면 자네가 평생에 걸쳐 깨달은 심상무도를 버려야 할지도 모르네. 그래도 하겠다는 건가?”
혼원검제가 내게 물었다.
“상관없소.”
“심상무도는 한 무인이 평생에 걸쳐 완성한 깨달음의 정수, 소우주의 발현일세. 그걸 포기해도 상관없다는 건가?”
그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의 말이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깨달음의 정수, 소우주의 발현이라고?
물론 일편빙심은 훌륭한 심상무도다.
환골탈태를 통한 운우지락을 이루고자 하는 내 순수한 마음이 무도로 화한 성명절기다.
하지만 결국 환골탈태를 통해 양물을 복원한다는 방법은 실패했다.
따라서 일편빙심도 결국 실패작이다.
게다가 일편빙심의 바탕이 된 무학은 이름조차 언급하기 싫은 ‘그 고자 전용 무공’이 아닌가?
고자였던 전생이라면 모를까 양물도 멀쩡히 달린 현생에서 규화보전 같은 쓰레기 무공을 사용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전혀. 아무 미련도 없소. 오히려 난 공동파의 무학을 통해 궁극의 생명을 이루는데 더 관심이 있소. 그를 위해서라면 여태껏 쌓아온 심상무도 따위는 아무 가치도 없지.”
현경의 경지도, 심후한 내공도, 심상무도도 절대 정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끌끌끌끌, 평생의 무학마저 버릴 수 있는 각오라니. 보통내기가 아니구만. 좋네. 합격일세.”
혼원검제가 웃었다.
그가 검은 무복 소매를 펄럭이며 양팔을 벌렸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보여주겠네. 본 파 무학의 극의이자, 자네한테 전수할 궁극의 무학······. 혼원무극도(混元無極圖)를······!”
혼원검제의 말이 끝난 순간.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그를 중심으로 압도적인 기세가 피어올라 하늘 위로 솟았다.
혼원검제가 더없이 부드러운 자세로, 하늘을 가리키는 오른손과 땅을 가리키던 왼손을 역태극을 그리며 교차했다.
그 순간.
쿠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
굉음과 함께 문자 그대로 천지(天地)가 뒤집혔다.
내 머리 위에는 대지가, 발아래에는 끝없이 무한한 천공이 자리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물이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고, 자연지기의 흐름이 거꾸로 흘렀다.
모든 것이 거꾸로 뒤집힌 세상에서 홀로 똑바로 선 혼원검제가 웃었다.
“이것이 혼원무극도. 음양전도의 묘리를 대우주에 펼치는 공동파 무공의 극의일세.”
나는 혼원검제와 뒤집힌 세상을 바라보면서 마주 웃었다.
천지를 뒤집을 정도로 압도적인 정력이라니.
역시 공동파에 입문하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