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걸어 다니는 심마
통로 안쪽.
천연 동굴에서 흐르는 맑은 물이 고여 만들어진 연못.
얼음장처럼 차가우면서도 투명한 물 안에 그녀가 있었다.
유진휘.
공동파의 장문제자이자 이철수의 사형인 그녀는 지금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으로 연못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천장에는 빛을 발하는 야명주가 박혀 있어 어둡지 않았다.
‘다행이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부에게 거둬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쭉 남장한 몸으로 살아왔다.
강호 무림에서는 여인이 아닌 사내가 되어야 무시당하지 않고 힘든 일도 덜 겪으니, 사문의 재건을 위해서는 남장해야한다는 사부의 지론 때문이었다.
유진휘는 사부를 진심으로 따랐기에, 사부의 남장 지시에도 아무 불만 없이 따랐다.
그리고 사제를 지켜주지 못한 그때, 그녀는 사내로서 살리라 다짐했었다.
사제가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남자 사형으로.
‘사제, 분명 이상하게 생각했겠지?’
하지만 다짐과는 달리 유진휘의 마음은 조금씩, 본인도 모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천애고아였던 그녀는 중원의 다른 어린아이들이 으레 그런 것처럼 강호 무림을 동경했다.
천하를 오시하는 고수가 되고 싶었다.
뒷골목이라는 밑바닥 환경에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렇기에 그녀는 또한 이야기에서 나오던 의좋은 사형제지간을 동경했다.
공동파에 입문하면서 부모님 같은 사부는 생겼지만, 형제자매 같은 사형제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공동파의 제자는 줄곧 그녀 혼자였다.
7세에 공동파에 입문한 그녀가 14세가 될 때까지, 7년의 세월 동안.
그렇기에 사제가 들어왔을 때 기뻤다.
그동안 동경하고 바랐던 형제자매 같은 사형제가 생겨서, 우애를 나누고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동생이 생겼다는 사실에 유진휘는 순수하게 기뻐했다.
이야기로만 듣던 의좋은 사형제가, 든든한 사형이 되고 싶었다.
‘내가 진짜 남자였다면, 사제와 같이 목욕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는 남자가 아닌, 남장여자였기 때문에.
소중한 사제와 남자 대 남자로서 목욕하면서 등을 밀어줄 수도 없었다.
유진휘의 눈길이 아래로 깔렸다.
수면 아래에는 달덩이처럼 한 쌍의 새하얀 수밀도(水蜜桃)가 있었다.
원래도 봉곳 나와 있던 가슴이었지만, 미타성수를 취하고 벌모세수를 겪은 뒤에 조금 더 커졌던 것이다.
물방울을 닮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형태의 가슴이었지만 유진휘에게는 거추장스러운 지방 덩어리일 뿐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신체 곡선도 조금 더 여성스러워졌다.
북해의 눈처럼 새하야면서도 탱탱한 그녀의 피부와 남장을 풀고 여인의 모습이 된 그녀의 모습은 아직 앳되었지만, 세상 모든 여인이 질투할 만큼 어마어마한 미(美)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전부 음기를 몸에 받아들이면서 그녀의 몸이 성숙해지며 생겨난 변화였다.
하지만 유진휘는 투명한 물에 비쳐 보이는 그녀의 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제랑 함께하고 싶었는데······.’
남자 사형제들끼리는 같이 목욕하며 유대를 다지기도 한다고 들었다.
나체의 교류야말로 사내들이 가장 빠르게 친해지는 방법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렇기에 그녀 역시 보통의 사형제들처럼 함께 목욕하며 사제와 빠르게 친해지고 싶었다.
어쩌면 사제도 사형과의 혼욕을 기대했을지도 몰랐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진짜 남자가 아니었고, 사제와 함께 목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제가 말을 걸었을 때 선수를 쳐서 혼욕을 거절했다.
다행히 사제는 그냥 넘어가 주었다.
그때, 들판에서 붕대를 감은 그녀의 가슴팍을 봤을 때처럼.
‘······아냐, 사제라면 그렇게 생각 안 했을지도 몰라.’
유진휘가 다시 고개를 저으며 방금 생각을 부정했다.
그때의 사제가 했던 말을 그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사제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그의 말을 유진휘가 떠올린 순간.
화악.
유진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두근.
그녀의 심장이 고동치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그렇지만 기분 좋은 간질거림이 그녀의 마음을 헤집었다.
음기를 흡수한 탓에, 이제 막 사춘기의 초입에 들어선 유진휘는 지금 마음에서 솟아오르는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으으······.’
첨벙.
유진휘가 수면에 비치는 본인의 모습을 향해 손을 내리쳤다.
연못의 차가운 물이 뜨겁게 달아오른 그녀의 뺨에 튀었다.
‘사제라면······.’
어쩌면, 지금의 나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유진휘가 고개를 저었다.
사문의 재건을 위해서라면 사내로 살아야 한다.
사제를 위해서 사내로 살겠다.
그 대명제가 유진휘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유진휘의 얼굴이 입술까지 연못에 잠겼다.
부글부글.
그녀의 입 앞에 기포가 떠올랐다.
사문을 위해서, 사제를 위해서 사내로 지내기로 다짐했다. 그러니 사제에게 여인의 몸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사제는 그녀에게 소중한 사제였다.
단순한 동생이 아니었다.
미타성수를 복용했을 때도, 사제의 조언이 없었더라면 기혈이 폭주해서 폐인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제는 동생인 주제에, 사형인 그녀를 배려하고 그녀에게 영약도 양보해주었다.
그는 스스로를 돌보지 않았다.
‘그러니까······. 사제를 돌볼 사람은 천하에 오직 나뿐이야.’
그를 책임질 사람도 오직 나뿐이다.
그러니 지금 이렇게 그를 생각하면서 두근대는 심장도······. 그를 평생 돌보기로 결심한 나에게는 당연한 감정이다.
그것이 사형제의 우애니까.
그리고 사제를 돌보기 위해서는 연약한 아녀자로는 안 된다. 사내로서 살아야 한다.
유진휘는 그렇게 다짐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촤르륵.
화용월태(花容月態)의 자태가 야명주의 불빛 아래 선명히 드러났다.
체온 때문에 분홍색으로 달아오른 새하얀 피부와 고운 어깨선과 허리선, 촉촉한 나신에 야명주의 불빛이 비쳤다.
그녀는 세탁을 완료해서 깨끗해진 무복과 붕대에 내력을 주입해서 바짝 말린 뒤 붕대를 칭칭감았다.
탐스러운 한 쌍의 새하얀 수밀도(水蜜桃)가 붕대에 짓눌리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압박 붕대로 평평해진 가슴을 확인한 유진휘가 옷을 입기 시작했다.
품이 넓은 검은 무복 위에 장포까지 걸치고 축골공과 역용술을 운용하자 그녀의 아름다운 곡선은 의복 아래로 모습을 감췄고 용모도 중성적인 남자의 모습으로 변했다.
‘남자 무복이라 다행이야······.’
유교(儒敎)가 지배하는 중원이었다.
아무리 공맹(孔孟)의 가르침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무림인이라더라도 몸매와 살결을 그대로 드러내는 의복은 창기(倡妓)나 입는 천하고 음란한 옷이라 여겨져 기피되었다.
무복이건 도포건 남녀 할 것 없이 품을 넉넉하게 입는 것이 보통이었다.
특히 유진휘의 경우 만약을 대비해서 품이 살짝 넉넉한 남자 무복을 입고 다녔는데, 덕분에 그녀의 몸매는 의복에 완벽히 가려졌다.
‘냄새는 다 날아갔겠지?’
옷을 전부 입고 사내의 모습으로 탈바꿈한 유진휘는 팔뚝에 고운 얼굴을 묻고 냄새를 맡아 보았다.
다행히 노폐물의 악취는 전부 날아간 지 오래였다
평소 같은 들꽃 향기가 그녀의 코 끝을 스쳤다.
이 정도면 사제에게 폐를 안 끼칠 수 있으리라.
목욕을 마무리한 유진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연못을 나섰다.
*
그렇게 청각을 차단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기감에 인기척이 감지되었다.
드디어 사형의 목욕이 끝난 것이다.
‘오래 씻네. 남자치고는.’
벌모세수 때문인가?
그런 것치고는 오래 씻는다.
아니면 설마······.
‘사형의 몸에서 항상 나는 들꽃 향기가······.’
그게 선천적인 재능이 아닌 후천적인 노력으로 만들어낸 향기란 말인가?
내가 정립한 매력의 기초이자 색도의 묘리인 청결을 설마 사형은 이 나이부터 실천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나는 나도 모르게 모골이 송연해졌다.
여유증 때문에 잠시 느슨해졌던 사형에 대한 경계심이 바짝 조여졌다.
청결을 실천하다니······. 그렇게 잘 생겼으면 노력하지 않아도 될 텐데.
하늘이 내린 잘생긴 얼굴이라는 재능에 노력까지 겸비할 줄이야.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의도적이건 아니건 간에, 사형은 역시 강적(强敵)이었다.
더 불안한 것은.
‘사형의 노력이 여인을 향하건 남자를 향하건, 어느 쪽이건 문제야.’
여인을 향한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내 라이벌이 될 것이다.
저 얼굴에 노력까지 더한다면 사형은 그야말로 완전무결의 미남자가 되어 모든 미녀의 마음을 독점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내 삼처사첩의 꿈은 물 건너가는 거고.
물론 전생에 정인 하나 없이 평생 독신이었던 사형 행보로 보았을 때는 가능성이 낮기는 했지만······.
아예 0%는 아니었기에 경계할 필요성이 있었다.
하지만 여인에 관심이 없다면? 남색(男色)에 관심이 있다면?
그건 그야말로 재앙이다.
내가 제발 남색가들에게 인기가 없는 타입이기를 바라야만 했다.
생각할수록 답이 안 나온다.
사실 답이 없는 문제다.
‘정신 차려라. 이철수. 심마(心魔)에 빠지면 안 돼.’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사형의 매력이 뭐 어떻단 말인가?
사형은 사형이고 나는 나다.
이미 이 얼굴로 태어난 걸 어쩌겠는가? 성형수술도 없는 중세 무림에서?
그러니 주어진 여건에서 최대한 노력해야 했다.
그리하여 나만의 길, 나만의 색도를 걸어서 여심을 사로잡아 경국지색(傾國之色)으로 삼처사첩을 구축하면 되는 일이다.
본디 남자의 매력은 자신감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던가?
스스로에게 자신이 있고,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알아야 비로소 타인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타인을 사랑할 줄 알아야 여심을 사로잡아서 뜨겁게 조운모우(朝雲暮雨)를 나눌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추구하는 색도였다.
그렇게 내가 심마를 털어내면서 스스로의 색도를 다잡고 있던 그때.
쿡.
내 어깨를 누군가 찔렀다.
“사제!”
곧이어 사형의 잘생긴 웃는 얼굴이 내 시야에 나타났다.
“나 다 씻었어! 이제 사제 차례야!”
드디어 나온 건가?
심마 극복에 집중했던 탓일까? 사형의 기척을 놓쳐버렸다.
“알겠습니다. 사형. 그럼 씻고 오겠습니다.”
나는 어깨와 가슴을 쫙 펴고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당당하게 말했다.
좋아.
앞으로는 나의 색도를 개척하는 거다.
내가 그렇게 다짐한 그때.
내 어깨를 편 모습을 본 사형이 배시시 요염하게 웃었다.
환하게 웃는 그의 미소는 남녀노소(男女老少) 모두를 홀릴 정도로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살인 미소였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기다릴게!”
얼굴 자체가 치트키인 사형의 치명적인 살인 미소를 보니 다시 자신이 조금 없어졌다.
저걸 대체 어떻게 이기라고?
생태계 교란종이 따로 없다.
걸어 다니는 심마(心魔) 같으니라고.
다시 어깨를 살짝 움츠린 나는 사형의 배웅을 받으면서, 비누가 든 죽통과 수건을 챙겨 통로 안으로 향했다.
*
얼음장 같은 동굴 연못에서 꼼꼼하게 비누를 발라가면서 목욕을 끝내고, 내력으로 뽀송뽀송하게 말린 무복을 입은 뒤.
나는 깔끔하게 청결해진 모습으로 목욕탕에서 나와 비동으로 돌아왔다.
“사제, 다 씻었구나?”
혼원비동은 말이 비동이지 은거지답게 생활 공간이 그리 넓지는 않았다.
딱 두세 명이 같이 살면 적당한 정도?
천장에 박힌 야명주가 시야에 들어왔다.
저게 다 얼마짜린데. 빼다 팔면 공동파 재정 걱정은 한 몇년동안은 안 해도 될 정도다.
아무래도 전대 천하제일인답게 혼원검제가 돈지랄을 해도 좀 많이 한 모양이다.
하긴 천하제일인 정도면 야명주로 아주 방을 도배해도 돈이 남을 테지.
오히려 혼원검제가 기록을 지워준 덕분에 마교의 손길을 피했으니, 어쩌면 저 야명주야말로 선대의 고수가 미래의 우리를 향해 남겨둔 비상금은 아닐까?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사제. 비급서 전부 정리했어.”
사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로 된 의자에 앉은 사형이 탁자 위의 무공서를 정리했다.
비급서 위에는 용사비등(龍蛇飛騰)한 서체로 무공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건 아까 내가 들춰봤던 삼음진결(三陰眞訣)이고 그 옆은 칠살검(七殺劍) 완전판, 거기에 현천검(玄天劍)과 행운유수(行雲流水), 복마대력수(伏魔大力手), 건양지(乾陽指)와 곤음지(坤陰指)까지 총 일곱······.’
비급서는 총 일곱 권이었다.
잠깐 일곱 권?
나는 표정이 굳었다.
“사제,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사형이 걱정스러운 목소리와 표정으로 내게 되물었다.
“정말 이 일곱 권이 끝입니까?”
“응. 전부 뒤져봤는데 이게 끝이야. 그래도 실전된 무학이 본 파의 품으로 다시 돌아와서 기쁜걸.”
내 질문에 사형이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아니, 일곱 권이면 안 된다.
전생에 유진휘가 혼원비동에서 얻은 공동파의 절학은 일곱 개가 아닌 여덟 개였다.
잃어버린 여덟 번째 절학.
그것은······.
“복마검법은 없었습니까?”
내 말에 사형이 고개를 저었다.
없었다고?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회귀 전, 전생의 사형은 분명 여기서 복마검법을 얻었었다. 동창의 정보가 틀릴 리가 없으니 여기에 복마검법이 잠들어 있는 것은 틀림없이 자명한 진실······.
그러니 반드시 여기서 복마검법의 구결을 얻어야 앞으로의 일이 수월해졌다.
‘그렇다면 혼원검제는 복마검법을 비급서가 아닌 다른 형태로 남겼다는 말이군.’
전대 고수가 비동을 만들고 후인(後人)에게 절학을 전할 때, 무공서가 아닌 다른 형태로 남기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었다.
석벽에 무공의 투로를 새긴다던가, 아니면 구결을 암호로 만들어 남긴다던가, 그것도 아니면 특수한 기물에 남긴 잔류사념으로 전수하거나.
아니면 특정한 심법으로 쌓은 내력에만 반응하는 기관장치에 구결을 숨기는 경우도 있었다.
확실히 여기 있는 일곱 무공과는 달리 복마검법은 공동파를 대표하는 진산절기.
아무나 가져갈 수 있는 비급서의 형태보다는, 다른 형태로 구결을 남기는 쪽이 보안에는 더 유리했다.
그렇다면 생사경의 무인이었던 혼원검제가 취한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그렇게 머리를 맹렬하게 회전하면서 뭔가 단서를 찾기 위해 사형에게서 시선을 떼려던 그때.
“복마검법은 없었어. 하지만 복마검법으로 추정되는 검흔(劍痕)은 발견했어.”
사형의 말에 나는 생각을 멈췄다.
그걸 발견했다고?
“그 검흔은 어디 있습니까?”
“따라와.”
내 말에 사형은 자리에서 일어섰고, 나는 그를 따라 움직였다.
그렇게 우리가 도착한 장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