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마음이 넓은 남자
이제는 완전히 보름달이 휘영청 떠오른 밤하늘.
광공해와 대기오염으로 제대로 된 별이 안 보이던 전생 서울의 밤하늘과는 달리 별빛이 말 그대로 쏟아지는 아름다운 중세 무림의 밤하늘 아래. 나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땔감과 마른 풀을 모아서 부싯돌로 모닥불을 피운 뒤에 휴대용 냄비를 위에 올렸다.
근처 냇가에서 길어온 맑은 물에 손질한 살무사를 넣어 끓였다.
원래 진정한 생사탕(生蛇湯)은 어떤 양념도, 부가 재료도 없이 뱀만 청수(淸水)에 푹 삶아서 고아 만드는 것이다.
그래야 약효가 제대로 우러나오는 법.
생사탕 재료로는 독이 없는 뱀보다는 독사가 훨씬 낫다. 약독동원의 원리에 따라 지속적으로 열을 가해 독기는 날리고 양기만 취하기 때문이었다.
‘현대 한국의 건강원에서도 독사의 독이 뱀탕에서는 약이 된다고 그랬었지.’
나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휴대용 솥 안을 나뭇가지로 뒤적였다.
보글보글.
맑은 뱀탕이 밤하늘 아래 끓으면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단백질이 익는 고소한 냄새가 퍼졌다.
뱀을 지지리도 싫어하던 사형이었지만, 막상 뱀탕에서 고기 익는 냄새가 피어오르자 마음이 달라진 모양인지 그의 눈길이 힐끔힐끔 뱀탕 쪽으로 향했다.
꿀꺽.
사형이 마른침을 삼켰다.
공동파는 가난한 문파였기에, 고기 구경을 하기 힘들었다.
오늘 잡아서 먹은 잉어도 거의 2주 만에 먹는 동물성 단백질이었으니, 사형의 눈에는 이 뱀탕이 산해진미(山海珍味)처럼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제. 이거, 우리끼리 먹어도 괜찮을까?”
유진휘가 무릎을 양팔로 끌어안은 채, 모닥불의 열기로 인해 빨개진 뺨을 들어 올리며 내게 말했다.
모닥불의 열기로 만들어진 홍조 때문에 그의 잘생긴 얼굴은 쓸데없이 상기되어 있었다.
주어가 생략되었지만, 유진휘의 말은 사부는 놔두고 우리끼리 이걸 먹어도 괜찮냐는 뜻이리라.
지난 3개월 동안의 공동파 생활에서 나는 유진휘가 전생에 습득했던 정보대로 사부인 전영을 부모처럼 극진히 모시며 공경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 하여, 원래부터 무림에서 사제관계는 부모와 임금을 모시는 관계와도 같았으니 사부는 곧 부모처럼 공경하고 모셔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 이 무림 세계의 보편적인 윤리 의식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상은 높고 현실은 시궁창인 것처럼, 이 세상에는 남보다 못한 사제관계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전영과 유진휘는 그런 사제관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평가하자면 전생에서 둘은 아주 이상적인 사제관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자기 혼자 고기를 먹는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거다.
‘사부한테 이걸 준다고?’
하지만 나는 달랐다.
사형이야 어쩔 수 없이 지분을 타의에 의해 내주었으니, 생사탕을 나눠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부는?
천금(千金)보다 귀한 생사탕이었다. 사제관계라고 해서 함부로 나눠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물론 이런 속내를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처럼 죄책감이 가득한 눈동자로 이쪽을 바라보는 사형에게 곧이곧대로 말할 정도로 나는 멍청하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사형제 사이의 우애(友愛)······. 를 다지기 위해 함께 음식을 해서 나눠 먹었다는 사실을 알면 사부님께서는 오히려 기뻐하실 겁니다.”
나는 사형에게 우애(友愛)를 들먹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는 공동파 생활 동안, 나는 사형과 사부의 성격과 성향을 완벽히 파악해놓은 상태였다.
구밀복검(口蜜腹劍)이 기본인, 자금성의 문무백관(文武百官)이 모인 조회(朝會)에서 나를 향해 웃는 얼굴로 날을 세웠던 동림당 대신 놈들에 비하면 사부와 사형은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순진한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전생의 정보와 현생의 경험을 총합해서 전영과 유진휘라는 두 인물의 전부를 파악하는 건 내게는 쉬운 일이었다.
‘유진휘도 전영도 사형제의 우애를 중요하게 여긴다.’
전영도 전영이지만, 유진휘가 특히 우애라는 말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했다.
비유하자면 유진휘가 나를 대하는 것은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동생을 귀여워하는 형 같은 느낌이었다.
정신적 나이가 환갑이 넘어가는 내가 고작 열네 살의 남자 놈에게 동생 취급을 받는 건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차라리 유진휘의 성별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면, 사형이 아니라 사저였다면!
얼마든지 귀여운 남동생이 되어 애교를 떨어줄 자신이 있었다.
미소녀 사저에게 애교를 부려서 쓰담쓰담 받는 상황이라니.
그야말로 업계 포상이 아닌가?
그래서 우애(友愛)라는 이름의 호감을 심어줘서 장차 장성한 뒤에 자연스럽게 좋은 관계로 발전했을 텐데.
하지만 안타깝게도 유진휘는 남자에다 사형이었다.
빌어먹을.
아무튼 유진휘는 이상적인 사형제 관계, 형제 같은 사형제 관계를 동경하고 있었다.
그러니 우애라는 마법의 말만 내뱉으면······.
“우애······. 으응······.”
저렇게 얼굴을 붉히면서, 몸을 꽈배기처럼 배배 꼬게 되는 것이다.
내 말을 들은 유진휘가 머릿속으로 어떤 상상을 하고 있을지는······. 궁금하지 않다.
남자 놈의 머릿속 따위는 열어봤자 소용이 없다.
내 뇌의 용량에는 남자 놈에게 할당할 자리 따위는 없었다.
“맞아. 우애를 다지는 것도 중요해. 사제와 나의 우애 말이야! 응. 사제의 말이 맞아. 역시 사제는 시야가 넓어. 대단해.”
사형이 웃으면서 내게 칭찬을 건넸다.
그날, 밤에 사형의 품에 강제로 구속당해 첫 포옹을 빼앗기고 치욕의 눈물을 흘린 이후.
사형은 별 쓸데없는 부분까지 내게 칭찬을 건네기 시작했다.
가령 밥을 먹고 있으면 ‘우리 사제는 먹는 모습도 복스러워서 좋아.’라고 하는 식이었다.
대체 밥 먹는 모습이 뭐가 좋다는 건지 그걸 왜 칭찬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
지금도 그렇다.
대체 시야가 뭐가 넓다는 건지.
‘부담스러운 걸 넘어서 수치스럽군.’
마치 고기를 뒤집어 굽는 걸 가지고 대단하다고 주인공에게 칭찬을 남발하는 이세계물 같다고 해야 할까?
사실 내가 떨어진 세계가 중세 무림이 아니라 중세 판타지였나?
아니 차라리 이세계물 쪽이 낫다. 이세계물에서 대게 그런 칭찬을 건네는 쪽은 미소녀 히로인이니까.
하지만 이 빌어먹을 중세 무림에서 나를 칭찬하는 건 시커먼 남자였다.
여자라면 모를까 남자의 칭찬 같은 건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다.
역시 중세 무림이 아니라 거유 미녀 엘프, 츤데레 금발 롤빵머리 공주기사, 고양이 귀 수인족 미소녀 노예가 넘치는 중세 판타지로 갔어야 했다.
판타지 세계는 환관도 없을 테니, 양물이 잘려서 고자가 될 일도 없었을 텐데.
환관 생각을 하니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나는 슬그머니 손을 뻗어 바지 위로 양물을 만졌다.
다행히 그곳은 전생과는 달리 가랑이 사이에 튼실하게 잘 붙어 있었다.
“아, 네······. 칭찬 감사합니다. 사형.”
나는 가랑이에서 손을 떼어내면서 속내와는 다르게 예의 바른 목소리로 사형에게 말했다.
내 말에 유진휘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타닥타닥.
한밤중에 모닥불이 피어올랐다.
냄비 안에 담긴 뱀과 물이 펄펄 끓으면서 김이 풀풀 피어올랐다.
나는 나뭇가지로 냄비를 휘휘 저었다.
나뭇가지로 푹 찌르니 고기와 뼈가 분리될 정도로 흐물흐물하게 익은 내용물이 보였다.
좋아.
드디어 생사탕(生蛇湯)이 완성되었다.
“되었습니다. 사형.”
나는 챙겨온 짐에서 숟가락과 컵과 밥그릇 둘 모두로 사용될 수 있는 사발을 두 세트 꺼내서 한 세트는 사형에게 건넸다.
영약을 정제하려고 챙겨온 건데 이렇게 쓸 줄은 몰랐다.
“드시지요.”
“응. 잘 먹을게. 사제. 고마워.”
사형이 웃으면서 내게 사발과 숟가락을 받아갔다.
그가 생사탕을 한 숟갈 떠서 입 안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그대로 사발째로 생사탕을 퍼 올렸다.
흐물흐물해진 뱀고기와 기름이 둥둥 뜬 멀건 국물이 사발 안에 담겼다.
나는 그대로 후루룩 삼켰다.
양념, 향신료, 야채 등의 부가 재료는 일절 넣지 않은 탕이었으니 당연히 맛은 기대할 수 없었다.
비리고 싱거웠지만, 내게는 상관없었다.
“크으.”
생사탕의 약효가 퍼지면서 온몸에 화끈한 양기가 미약하게나가 감도는 게 느껴졌다.
그래.
이거지.
이걸 위해서 그 고생을 해가면서 생사탕을 끓인 거다.
보람이 있었다.
벌써 아랫도리가 울끈불끈 솟아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맛있어. 사제! 역시 사제의 요리 솜씨는 최고야! 몸이 벌써 후끈해! 나······. 남자한테 조, 좋은 탕인가 봐!”
맞은편에 앉은 사형이 얼굴을 반짝이면서 빨갛게 상기된 코와 뺨을 들고 내게 말했다.
남자에게 좋은 건 알아 가지고.
기껏 끓인 생사탕을 독식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쉬웠지만, 나는 미련을 빨리 털어 버렸다.
어쨌거나 이 넓은 공동산에 뱀이 아까 그놈 한마리만 있는 것도 아니고.
넘쳐나는 게 뱀이니 잡아다 끓여 먹으면 될 일이었다.
‘뱀뿐만이 아니지. 흐흐. 곰이랑 사슴, 말벌집도······.’
웅담(熊膽)과 녹용(鹿茸), 그리고 노봉방주(露蜂房酒)까지!
천하에 손꼽을 정도의 영산(靈山)인 공동산답게, 정력제의 재료가 널려 있으니 시간을 들여 하나하나 찾아 먹으면 될 일이었다.
내 공동산에 사는 모든 정력에 좋은 동물들의 씨를 말리리라.
나는 그렇게 다짐하면서 생사탕을 정신없이 퍼먹었다.
“사제, 좀 천천히 먹어. 체할라.”
사형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무시하고 계속 뱀탕을 들이마셨다.
먹을수록 몸이 후끈해지는 것이 아주 좋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뱀탕을 퍼먹은 탓일까? 냄비는 어느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잘 먹었습니다.”
“나도······. 하아.”
사형이 달뜬 한숨을 내뱉었다.
그의 뺨이 홍당무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더워······.”
사형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무복 앞섬을 손으로 잡아 펄럭였다.
3월의 공동산 밤 날씨는 추웠지만, 양기가 꽉꽉 들어찬 뱀탕을 먹은 탓에 사형의 몸이 후끈 달아오른 모양.
“으으······. 사제······. 나 몸이 뜨거워······. 왜 이렇게 덥지?”
사형이 그렇게 말하면서 앞섬을 펄럭이던 순간.
툭.
사형의 낡은 무복 앞섬이 풀어지면서 그대로 그의 상반신이 달빛 아래 드러났다.
그렇게 드러난 사형의 중성적이고 호리호리하면서 남자답게 평평한 상반신에는······. 붕대가 속옷처럼 칭칭 감겨 있었다.
사형과 내 눈이 마주쳤다.
사형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꺄, 꺄아아아아아아아아!!”
뾰족한 비명이 들판을 울렸다.
사형이 붉어진 얼굴로 양팔로 붕대가 감긴 가슴을 가리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보, 보지마! 사제! 누, 눈 돌려!”
사형이 말을 더듬었다.
왜 저러지?
남자끼리 상반신 좀 볼 수도 있지.
자기는 아까 내 상의 탈의 실컷 해놓고 이제 와서?
물론 남자의 상반신 따위를 자세하게 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상의 탈의를 보고 그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내 기억에 저장될 수 있는 상반신은 오직 미녀의 탐스러운 수밀도뿐이다. 남자의 가슴 따위는 필요 없다.
남자의 갑빠 따위를 기억에 남기지 않기 위해 나는 대충 지나가듯 일부러 의식적으로 사형의 모습을 안 보려 애썼다. 그래서 나는 사형의 상반신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 그래도 사형의 상반신은 그리 특이할 거 없었다.
남자치고 지나치게 호리호리한, 중성적인 체형이기는 했지만 그건 원래 전생에서도 그랬었던 거였고.
굳이 이상한 걸 꼽자면 붕대인데.
잠깐, 중성적인 체형에다······. 가슴에 붕대?
설마······.
‘여유증?’
여유증.
여성형 유방이라고도 불리는 질병을 앓고 있다면, 사형이 저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현대에 있던 시절 내 친구 중 하나가 여유증이 있었는데 여름에 반팔 티셔츠를 입을 때마다 유두가 자꾸 도드라지게 튀어나와서 보기가 정말로 역겨웠었지.
그 친구는 결국 니플 밴드를 붙여서 꼭지를 가릴 수밖에 없었고, 나중에 취직한 뒤에 여유증 수술을 성형외과에서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이 중세 무림에는 현대 공학의 정수인 니플 밴드도, 현대 의학의 총아인 여유증 수술도 없었다.
그러니 여유증을 가리기 위해서는 저렇게 붕대로 감는 것이 최선일 테지. 나도 경험해봐서 알고 있었다.
‘염병할 병신 쓰레기 내시 무공!’
여유증 하니까 또 전생의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다.
‘그 내시 무공’은 부작용이 수없이 많았지만, 그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화후가 깊어질수록 음기가 쌓여 체형이 여인의 몸처럼 변한다는 거였다.
그렇다. 여인의 몸처럼 변한다는 사실에서 눈치챘겠지만, 여유증이 바로 ‘그 내시 무공’의 부작용이었다.
그래서 전생에 규화보전을 배운 환관들은 하나같이 여유증을 가리기 위해 의복 아래 가슴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여유증이 원래 없는 튼실한 몸이었다가 규화보전을 배우면서 여유증이 생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현경의 경지에 도달해서 규화보전의 부작용을 완전히 극복하며 여유증은 사라졌지만, 하도 오래 몸에 감고 있어서였던 건지 아직도 가슴에 압박 붕대의 감촉이 남은 느낌이었다.
나는 고개를 털어 끔찍한 기억을 지워냈다. 나는 이제 고자도 아니고 여유증도 아니다.
아무튼 아까 남자에 좋은 거에 유난히 눈동자를 빛내던 사형의 모습을 나는 기억했다.
여기는 아직 남자는 남자다워야 한다는 마초이즘적 사고방식이 지배하는 중세 무림.
그런데 여유증을 앓고 있으니, 남자에 집착하는 것도, 지나치게 수치스러워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마초이즘이 없는 현대에도 남자가 여유증 때문에 티셔츠에서 꼭지가 툭 튀어나온 상태로 돌아다니면 비호감이라고 뒤에서 욕을 하는데 하물며 편견이 가득한 중세 무림에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나는 사형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내 가슴팍을 바라보았다.
여유증 따위는 없는, 탄탄하고 넓은 남자의 가슴이 달빛 아래 비쳤다.
‘흐흐흐, 검성 유진휘가 여유증이란 말이지?’
역시 세상은 공평했다.
하늘은 사형에게 그야말로 완벽한 미남의 얼굴을 주었으나, 남자답지 못한 몸과 여유증이라는 천형(天刑)을 주었다.
그러니 반드시 양물도 3cm여야 한다.
반면에 나는? 전생과는 달리 떡 벌어진 어깨와 탄탄한 가슴까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외공 수행에 몰두한 결과 내가 추구하는 궁극의 육체미의 형태가 점차 몸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내 거기는 젤크 운동을 반복한 끝에 원래 대물이 더 대물이 되고 있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사, 사제에······. 미안해. 이제 돌아봐도 괜찮아.”
사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상의를 수습해서 다시 앞섬을 제대로 여민 사형의 모습이 보였다.
사형의 얼굴에는 아직 수치로 인한 홍조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추태를 보였네······. 미안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사형.”
사형의 소심한 목소리에 나는 웃음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완벽한 사형의 여유증이라는 약점을 찾은 나는 지금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물론 사형의 더러운 남자 가슴 따위의 기억은 진작에 뇌리에서 삭제한지 오래였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사형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그가 우물쭈물하면서, 손가락을 꼼지락대면서 내게 말했다.
“저기, 사제······. 혹시······. 나 이상하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
이상하다?
여유증을 말하는 건가?
물론 현대인의 감수성을 지닌 나는 여유증이 보기 싫을 뿐이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여기서 굳이 내 입으로 이상하다고 말할 이유도 없었고.
어쨌거나 나는 지금 무척 기분이 좋았다.
드디어 완벽한 미남인 사형에게 내가 비교 우위를 가져갈 수 있는 분야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역시 궁극의 육체미야말로 사형을 매력으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아니. 괜찮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사형. 저는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형제 사이니까요.”
나는 마법의 사형제 사이라는 말을 넣으면서 말했다.
내 말을 들은 유진휘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해졌다.
“으, 응! 맞아! 사형제 사이니까······. 맞아······.”
유진휘가 사형제 사이라는 말을 몇 번 되새기면서 심호흡했다.
“좋아! 고마워! 사제. 추태를 보였는데도, 괜찮다고 해줘서. 이제 시간 많이 늦었지? 사부님께서 걱정하실라. 빨리 본산으로 돌아가자.”
사형이 배시시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본산이라.
나는 오늘 거기 갈 생각이 없었다.
광성단혈에 가서 기연과 영약을 취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네, 사형. 제가 길을 안내하겠습니다.”
내가 길 안내를 맡아야 했다.
본산으로 가는 척, 실수인 척, 길을 잃어버린 척하면서 기연이 도사리는 광성단혈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응! 고마워. 사제.”
사형이 의심 한 점 없는 순진한 목소리와 눈빛으로 내게 답했다.
나는 사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모닥불과 생사탕을 먹고 남은 식기를 정리했다.
이제 든든하게 뱀탕으로 정력도 보충했으니, 다음은 드디어 기연과 영약을 탈취하러 갈 시간이었다.
*
그렇게 새벽의 공동산을 나는 사형과 함께 계속 헤맸고.
“사제. 여, 여기가 어디야? 본산은 아닌 것 같은데······.”
마침내 도착했다.
내 뒤에 있는 사형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시야에 들어온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 아래 난 동굴을 바라봤다.
광성단혈(廣成丹穴).
어스름한 새벽빛을 삼키는 검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이 동굴이야말로 상고시대, 공동파의 개파조사로 전해지는 선인 광성자가 도를 수행했다는 신화, 그리고 300년 전 천하제일인이었던 혼원검제(混元劍帝) 무극자(武極子)가 등선했다는 전설이 함께 전해지는 동혈이었다.
그와 함께 전생의 유진휘가 복용한 정체 모를 영약과 공동파의 실전된 절학이라는 기연이 잠든 곳.
마침내 내 진짜 목적지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이제 영약을 먹어 정력, 아니 내력을 보충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