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티끌 모아 태산
그렇게 내공에 입문하고 한 달이 흘렀다.
소양심법은 기본공이었지만, 역혈에 기반을 둔 심법답게 내공 쌓이는 속도가 다른 기본공보다 월등하게 빨랐다.
소양심법만큼 빠르게 내공을 축기하는 기초공은 같은 역혈의 심법인 마교의 마령심법(魔靈心法)과 실전 지향적인 황궁무공의 기초공인 연무진결(練武眞訣) 밖에 없었다.
전영이 다 몰락한 문파의 장문인인데도 일류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일정 경지까지는 빠르게 올라갈 수 있는 공동파 무공의 특징 때문이리라.
그래서 나는 한 달만에 상당한 내력을 얻을 수 있었다.
‘든든하군.’
전생의 대해(大海)와 같은 내공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 수준의 내공이었지만 내게는 한없이 든든했다.
궁극의 생명을 추구한다는 공동파 무학의 근본 원리대로 손톱만한 내공이라도 정력이 조금씩 나아지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음한지기(陰寒之氣) 같은 건 몇 갑자를 모아도 쓸모가 없다. 오히려 고자를 더 고자답게 만들 뿐이다.
버러지 내시 무공 같으니.
그렇기에 나는 요즘 기분이 좋았다.
저녁마다 하는 비밀 야간 구보에 사형이 따라붙는 것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사부님. 사형. 식사 시간입니다.”
주방 옆에 붙어있는 식당.
전성기 시절에는 수많은 제자가 같이 밥을 먹었을 걸로 추정되는 식당 내부는 대형 객잔처럼 팔선탁이 몇개나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공동파 문도는 단 셋뿐.
그나마 위생 관념이 없는 전근대 중국인들과는 달리, 깔끔한 현대인인 내가 주방이랑 식당을 깨끗이 청소해놔서 다행이었다.
오늘의 메뉴는 드물게도 풀떼기가 아니라 고기였다.
아쉽게도 짐승의 고기는 아니고 생선이었다.
계속 풀떼기만 먹는 거에 질린 내가 근처 냇가에서 말단 정보원 시절 몸으로 배운 식량 현지조달 요령을 떠올려가면서 직접 만든 통발을 통해 잡은 잉어.
‘장어나 잡힐 것이지 왜 잉어가 잡혀서는.’
나는 잉어를 보면서 속으로 투덜거렸다.
원래 내가 잡으려고 했던 물고기는 정력에 좋기로 유명한 생선인 장어였다.
군대 짬밥에서 콩나물이 많이 나오는 이유가 성욕 감퇴라는 루머도 있지 않은가?
군대처럼 나물만 먹다가는 정력이 줄어들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때문에 장어를 잡아서 몸보신 좀 하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상황을 피하려고 최대한 정력에 좋은 나물 위주로 채취하고 있지만, 불안한 건 불안한 거다.
고기를 못 먹기도 했고.
하지만 통발에는 걸리라는 장어는 안 걸리고 웬 엉뚱한 잉어만 걸려 있었다.
그래도 팔뚝만 한 잉어에 칼집을 낸 뒤에 야채, 간장소스와 함께 푹 찐, 내가 직접 만든 중국식 생선찜인 청증어(清蒸鱼)는 제법 맛이 있어 보였다.
‘그래, 슬슬 요리 수행도 해야지.’
맹자가 말하길 군자원포주(君子遠庖廚)라 하여 군자는 부엌과 푸줏간을 멀리하라는 구절에 따라 이 중세 무림의 가정에서는 남자가 요리를 안 하고 여자가 했다.
하지만 나는 미개한 중세 무림인이 아닌 세련된 21세기 현대 한국의 문명인.
21세기 현대 한국에서는 요리하는 섹시한 남자, 줄여서 요섹남이 인기였다.
이것은 중원 무림 역시 다르지 않을 터.
요리 실력을 길러서 요섹남이 된다면 부엌에는 발도 안 들이는 중원 무림의 남자들과 차별적인 매력을 보유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요리 역시 남자의 매력 중 하나였으니, 색도(色道)를 이루기 위해서는 가정적인 매력도 함양(涵養)해야 했다.
“사부님 먼저 드시지요.”
나는 생선 머리를 사부에게 공손하게 건네면서 말했다.
중국에서는 생선 머리를 윗사람에게 대접하는 것이 예의로 통했다.
맛도 없고 뼈만 많은 생선 대가리를 왜 어두일미(魚頭一味)랍시고 먹는 건지 이해가 안 가지만, 뭐 중국 문화가 그러니 나도 어쩔 수 없다.
“흠흠. 알겠다. 이 생선은 철수가 잡았다지? 사부를 위해서 이렇게 큰 잉어를 잡아 오다니, 여간 수고가 아닐 텐데 고생했구나.”
사부를 위해서 잡아 온 건 아니지만, 장어가 아닌 잉어가 잡혔으니 어쩔 수 없다.
사부가 멋대로 착각 멘트를 내뱉으면서 생선 머리에서 살을 발라서 먹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윗사람이 밥을 먹은 뒤에 아랫사람이 식사를 시작하는 것이 중국의 예의였다.
현대가 아닌 중세 중국이라면 더더욱 예의범절을 따졌고.
그 모습을 본 나는 곧바로 고슬고슬한 밥을 한술 떴다.
전생이나 현생이나 하얀 쌀밥을 보니 침이 고이는 느낌이었다.
내가 젓가락을 들어 잉어를 먹으려고 하던 그때.
“사제. 자. 여기.”
유진휘가 젓가락을 들어서 내 밥숟가락 위에 정성스럽게 뼈를 발라낸 잉어 살코기를 올려놓았다.
그가 나를 보면서 배시시 웃었다.
언제나 그렇듯 민감한 내 후각에는 그의 들꽃 향기가 스쳐 지나갔다.
아니 남자가 남자에게 생선 가시를 발라서 살코기를 밥숟가락 위에 얹어준다고?
숟가락이 수전증 온 사람처럼 바들바들 떨렸다.
‘아, 안돼······! 빌어먹을······!!’
생선찜의 뼈를 발라줄 수 있는 사람은 절세미녀뿐이다.
그렇게 정했었다.
운치 좋은 주루의 꼭대기층을 통째로 빌려서, 고급 생선찜을 두고 절세미녀가 젓가락으로 살코기를 하나하나 발라서 내 입안에 상공, 아~하세요 하고 먹여주는 것이 내 버킷 리스트 중 하나였다.
그런데 지금, 사형이 또다시 내 버킷 리스트를 하나 파괴한 것이다.
시커먼 남자 따위가! 내게 생선 뼈를 발라주다니!
내 첫 추억이 또다시 더럽혀졌다.
나는 치밀어오르는 분루를 속으로 삼켰다.
“사제? 표정이 왜 그래? 혹시 어디 아파?”
사형이 나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쓸데없이 잘생긴 사형의 얼굴에 수심이 차올랐다.
“아닙니다. 사형. 우제(愚弟)를 위해서 사형이 손수 생선의 가시를 발라서 살코기만 얹어주는 고생을 감수한 것이 기쁘면서도 황송해서 그렇습니다. 앞으로 생선은 제가 직접 가시를 발라 먹을 테니, 사형께서 고생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재빠르게 당신이 그런 일 한 건 고맙지만, 앞으로는 내가 할 테니 안 해도 된다는 말을 완곡어법으로 전달하면서 입 안에 밥숟가락을 집어넣었다.
간장 양념과 야채, 그리고 쌀밥의 식감이 어우러진 잉어찜은 쓸데없이 맛있었다.
“으응. 아니야. 고생이랄 것도 없지. 사제를 위해서라면 가시 정도는 얼마든지 더 발라줄 수 있어. 자, 여기. 더 먹어. 사제는 쑥쑥 자랄 나이니까 많이 먹고 빨리 커야지.”
하지만 이 빌어먹을 정도로 눈치가 없는 사형은 계속해서 생선 가시를 발라서 살코기를 내 밥그릇과 숟가락에 얹어주었다.
“허허허.”
그 굴욕적인 광경을 은근히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는 사부는 덤이었다.
그렇게 나는 손을 부르르 떨면서 쓸데없이 화기애애하면서 치욕적인 점심시간을 마무리해야 했다.
*
굴욕적인 점심 식사가 끝난 뒤.
사형과 나는 나물 채집을 위해 본산을 나섰다.
공동파는 다 망해가는 문파답게 재정 상태가 동네 구멍가게만도 못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대부분 식재료는 산에서 나물을 채집하거나 덫을 놓아 짐승을 잡아 충당하는 실정이었다.
공동파 산하에 있는 객잔이 딱 하나 아랫마을에 있기는 하지만, 거기서 바치는 기부금만으로 모든 생활을 충당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따라서 나와 사형은 공동파의 원활한 식생활을 위해 하루 일과 중에 일부 시간을 공동산에서 식재료를 채집하는데 보냈다.
내가 통발을 만든 시간 역시 그 시간을 활용한 것이다.
“핫! 사제! 잘 따라와!”
사형이 극성에 이른 공동파의 기초 보신경(步身輕)인 소양보(小陽步)를 펼치면서 산등성이를 질주했다.
나는 사형을 따라 소양보를 운용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늘 나물을 뜯는, 본산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산등성이였다.
공동파에 입문한 지도 어느덧 3개월이 다 되어가는 지금, 4월에 접어든 공동산에는 봄이 찾아왔다.
그래서인지 들판에는 산나물이 한가득이었다.
사형이 망태기에 나물을 뜯어 넣었다.
나는 사형을 따라 주변을 훑어봤다.
“찾았군.”
내가 찾은 나물은 민들레.
현대에서나 중원에서나 길가에 잡초였지만, 나는 이 민들레의 진정한 효능을 알고 있었다.
‘민들레는 정력에 좋지.’
민들레에는 미약하지만, 정력을 강화해주는 효능이 있었다.
산나물 중에 어떤 나물과 약초가 정력에 좋은 건지 정도는 이미 줄줄 꿰고 있었다.
나는 민들레를 비롯해서 정력에 좋은 약초와 나물을 망태기 안에 그득그득 넣었다.
‘흐흐흐흐. 진합태산(塵合泰山)이라고 이것들을 꾸준히 복용하면 내 정력도······.’
물론 대단한 효능을 지닌 약초는 아니다.
고작해야 미약한 효과밖에 없을 뿐이었다.
전설에나 나오는 만년화리(萬年火鯉)의 내단이나 만년지극혈보(萬年至極血寶) 같은 양강의 영약이 아니라면 획기적인 정력 상승은 기대할 수 없다.
물론 그것들이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지만, 아직 강호 출도도 하지 않는 지금 상황에서는 얻으러 가기가 어려웠다.
어차피 전생에서도 내가 찾기 전까지는 얌전히 그 자리에 있던 영약들이니, 굳이 바쁘게 찾으러 갈 필요는 없겠지.
어쨌거나 지금의 내 나이는 열셋.
앞으로 약관의 나이까지 7년 동안 꾸준히 정력에 좋은 약초와 나물을 섭취한다면 대기만성(大器晩成)하여 궁극의 정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원대한 야망을 품은 채로 나물들을 뜯었다.
바로 그때.
“꺄아아아아아악! 사, 사제! 사제!!”
사형의 높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왜 저러지?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팔뚝보다 더 굵은 사이즈의 살무사가 삼각형 머리를 쳐들고 혀를 날름 내밀면서 사형과 대치하고 있었다.
공동산은 천하의 영기(靈氣)가 모이는 삼교일치의 영산. 당연히 미물 중에서 저렇게 영기를 축적해서 보통 사이즈보다 커진 괴물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구렁이보다 더 큰 살무사 역시 그래서 등장한 것이리라.
저 살무사가 지금보다 더 많은 영기를 흡수해서 사이즈가 커져서 몸 안에 내단이 생기면 이제 묵린혈망(墨鱗血蟒) 같은 영물(靈物)이 되는 거다.
안타깝게도 눈앞의 살무사는 영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일반적인 살무사도 아니었다. 놈은 영물과 미물 그 사이 어딘가의 과도기에 속한 상태였다.
그런데 잠깐, 살무사?
뱀?
츄릅.
나는 입 안에 고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오늘 무슨 날인가?
뱀이라니.
‘뱀은······. 정력에 좋다!’
건강원 단골 메뉴 중 하나가 바로 뱀탕과 뱀술이지 않던가?
안 그래도 오늘은 단순한 식재료 채집만으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전생의 기록에 따르면, 검성 유진휘는 강호 출도 전 공동파에서 수행하던 시절 우연히 길을 잃어버리고 공동산을 헤매다 전설로만 전해지던 광성단혈(廣成丹穴)에 이르렀다.
그는 여기에서 실전된 공동파의 비전절학 일부를 되찾고, 영약을 찾아 복용하였다고 한다.
그 영약이 무엇인지는 기록에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건 나도 이제 슬슬 영약을 복용해서 내공을 늘릴 시간이었다.
전생의 기록에서 본 유진휘의 강호 출도가 머지않았으니 말이다.
“사제! 배, 뱀이야! 그것도 독사! 위험하다고! 사제, 내, 내가 지켜줄 테니······.”
사형이 쉿쉿 소리 내면서 고개를 쳐드는 살무사를 보면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검을 빼 들었다.
사형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유진휘가 뱀을 무서워했나?
전생의 기록에도 나오지 않던 정보였다.
무슨 남자가 뱀을 무서워해? 하긴 뭐 남자라도 징그러운 거 싫어하는 성격이면 뱀 무서워할 수도 있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덜덜 떠는 사형과 대형 살무사 사이에 끼어들어 검을 빼 들었다.
“사형은 뒤에서 쉬고 계십시오. 저 독물(毒物)은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사제! 하지만! 내, 내가······. 사제를······.”
“사형. 제 실력이 안 미더울 수도 있겠지만, 가끔은 이 우제(愚弟)를 믿어 주십시오. 사형. 사형께서 수고롭게 검을 들 필요 없이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나는 사형에게 비장한 목소리와 말투로 말했다.
모처럼 나타난 정력제를 넘겨준다?
어림도 없지.
영물도 못 된 살무사라지만, 엄연히 영기를 피륙에 품고 있는 보통 이상의 짐승이었다.
뱀탕으로 만들어서 살점 하나하나 전부 씹어 삼켜서 내 정력으로 바꿔야 했다.
뱀술도 좋기는 했지만, 뱀술은 숙성 기간이 필요하니 즉시 복용 가능한 탕이 좋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저 살무사를 잡아야 했다.
그래야 내 거라고 주장할 권리가 있으니까.
나와 마주친 사형의 눈동자에서 떨림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가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뺨을 붉혔다.
뺨에 홍조? 아니 왜 저래?
진짜 게이인가?
나는 그에게서 한 발짝 떨어졌다.
“응, 알았어. 사제. 대신 위험에 처하면 내가 도와줄게.”
그가 수줍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았어.
나는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검을 들고 살무사를 바라보며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아 적셨다.
흐흐.
영약 파밍 전 먹을 저녁 메뉴는 정력에 좋은 뱀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