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선즙필승(先汁必勝)
사형을 만난 나는 속으로 흠칫 놀랐다.
원래 이 시간은 사부도 사형도 모두 자는 시간이다.
모두의 수면시간이라는 사실을 미리 체크해뒀기에 내가 몰래 나가 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몰래 운동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낮에는 수련과 잡일 때문에 바빠서 개인 트레이닝을 할 여가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영은 고리타분할 정도로 원리원칙을 칼처럼 지키는 성격.
내가 필요 이상의 수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영이 안다면?
과유불급, 지나친 수련은 오히려 몸에 해가 된다며 내게 몇 시간이고 잔소리를 퍼부을 게 분명했다.
그 이후 추가 수련은 당연히 금지당할 거고.
그런 꼴을 보느니 차라리 자는 시간을 쪼개서 몰래 운동하는 편이 효율적이다.
전영이 시키는 수련만 해서는 몸짱이, 정력왕이, 색도의 일대종사가 될 수 없다.
고작해야 강호에 널린 평범하게 몸 그럭저럭 괜찮은 고수밖에 될 수 없겠지.
평범한 고수라니.
그런 끔찍한 미래는 사양이다.
생각만 해도 손발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나는 참아냈다.
‘그래서는 안 돼! 평범하게 좋은 몸으로는 사형을 제치고 절세미녀의 여심(女心)을 쟁취할 수 없어!’
그러니까 평범한 외공 수련으로는 안 된다.
한계 그 이상의 수행을 해야 한다.
그래야 여인들이 보기만 해도 반한다는, 신화 속 남신(男神)을 조각한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처럼 궁극의 육체미(肉體美)가 흘러넘치는 짐승남의 근골을 완성할 수 있다.
심폐 지구력 향상을 통해 정력 증진도 도모할 수 있다.
안 되면 되게 하라 정신으로 그렇게 계속한 야간 구보였는데.
두 달 넘게 그랬기에 살짝 안심했던 것이 화근이었나?
‘빌어먹을, 내게 일년의 내공이라도 있었다면 기감으로 사형의 기척을 감지했을 텐데.’
내공의 효능은 단순히 사용자에게 초인적인 힘을 부여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내공이 늘어나고 심법의 화후가 깊어질수록 기를 끌어올리면 오감이 예민해지는 건 물론, 자연스럽게 기감(氣感)이라고 불리는 여섯 번째 감각, 육감, 식스 센스도 활성화된다.
그리고 무림에서 이 기감이 가장 자주 사용되는 상황이 바로 인기척이나 기습을 감지할 때였다.
현대식으로 표현하자면 기감은 내공을 전파처럼 주변에 퍼뜨려 대상을 탐지하는 내공 레이더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지금 나는 토납법만 익히고 있는 상태.
전생에 내가 아무리 날고 기는 현경의 고수였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생.
내공 한 줌 없는 지금의 몸으로는 전생에 뭐가 됐던 내공의 파생 기능인 기감의 사용이 불가능했다.
그랬기에 나는 사형의 기척을 감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상황은 이미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이기에 되돌릴 수 없다.
고지식한 사부가 아닌 협상의 여지가 있는 사형에게 들킨 상황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최악은 아니야.’
나는 사형의 앞에 멈춰 선 뒤에 숨을 고른 뒤에 차분한 목소리와 침착한 표정으로 말했다.
“좋은 밤입니다. 사형. 오늘따라 달이 밝아 잠도 오지 않은 데다가 불민한 사제는 평소 늘 수행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에 스스로 추가 수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정론에 가까운 답변.
하지만 나는 사형이 이 정도로 물러서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가 내 말에 답할 내용은······.
내 말을 들은 사형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그의 고운 입술이 열렸다.
“하지만 사제. 사부님이 육신의 한계를 넘어선 수련은 오히려 몸에 해가 된다고 하셨어. 무공을 향한 사제의 마음은 잘 알겠지만, 그렇게 추가 수련을 한다고 해서 내공 입문이 더 빨라지는 건 아니야. 그러니까 이런 무리한 수련은 그만뒀으면 좋겠어.”
사형이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게 된 게 걱정하는 표정마저 우수와 고뇌로 가득 들어찬 미남자 같다.
빌어먹을.
얼굴 차이 봐라.
실시간으로 오징어가 되는 엿 같은 기분이다.
아무튼 사형의 대답은 내가 예상했던 기출 문제 그대로 나왔다.
너무 모범적이라서 이게 수능이었다면 역대급 물수능이라고 언론에 대서특필 되었을 정도.
‘그렇다고 사형의 말에 넘어갈 수는 없지.’
그의 말에 수긍한다면, 앞으로 나는 두 번 다시 밤에 야간 구보를 못 하게 될 것이다.
야간 구보를 못 한다면 당연히 정력 손실이 온다.
그럴 수는 없다.
어떻게 만들기 시작한 몸인데. 어떻게 증진한 정력인데.
여기서 알겠다고 되돌아서서 내일 또 나가다가 걸린다면?
사형은 곧바로 사부에게 이를 게 분명했고, 나는 빌어먹을 잔소리를 듣고 구보도 금지당하겠지.
그러니 여기서는 사형을 설득하기 위해 준비했던 연기를 시작할 차례다.
“······불민한 사제가 사형께 심려를 안겨드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추가 수련을 하는 건 내공 입문 때문이 아닙니다.”
내 말에 사형의 눈동자가 커졌다.
하긴, 13세의 어린아이라면 보통은 지루한 외공 단련은 빨리 끝내고 내공에 입문하기를 바라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했다.
하지만 나는 평범한 13세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내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사형을 향해 화두를 던졌다.
“사형과 저는 다릅니다.”
나는 눈물 연기 준비를 위해 슬픈 추억을 떠올리며 눈물샘을 자극했다.
전생에 난데없이 어려진 몸으로 중원 무림에 떨어졌던 시절, 빌어먹을 상인에게 팔려나가 고자 수술을 강제로 당했던 끔찍한 추억을 나는 머릿속으로 재생했다.
위생 따위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피 묻은 나무 수술대에서 고환과 음경이 잘렸던 기억!
그리고 잘린 부위 속으로 드러난 요도에 쇠꼬챙이가 꽂혔던 끔찍했던 기억이 떠오르자 조건반사적으로 눈물이 펑펑 솟았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칠 정도로 오성이 뛰어난 일대기재인 사형과는 달리 저는······. 하나를 가르치면 하나를 잊는 둔재입니다. 그런 둔재인 제가! 천재인 사형의 옆에 서려면······. 평범한 노력으로는 불가능하겠죠. 이렇게 뼈를 깎는 추가 수련이라도 하지 않으면! 사형의 옆은커녕 사형의 발끝조차 평생 닿을 수 없을 거란 말입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면서 사형에게 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서러움과 서운함, 천재인 사형에 대한 열등감과 둔재인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섞인 어린아이의 모습을 나는 훌륭하게 연기했다.
이 정도 연기력이라면 원래 세계에서는 천만 배우,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은 따놓은 당상이다.
“사, 사제······.”
내가 울자 사형이 당황한 목소리로 손을 휘저었다.
여기서 바로 울음을 그치면 안 된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13세 어린아이답게 서럽게 울었다.
“흑흑······. 천재인 사형은 평생 가도 둔재인 내 심정을 몰라······. 나 같은 사람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따라갈 수 없어······. 만약 내가 뒤처진다면, 그럼 여기서······. 쫓겨나서 다시 길거리에 나앉을지도 모른다고······.”
지금까지 나는 공동파에서 나이대에 맞지 않게 조숙한 캐릭터로 살아왔다.
그런 내가 울면서 그 나이대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인다?
평소 안 그러던 사람이 갑자기 그러면 당연히 당황하면서 내가 뭘 잘못한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그 상대가 고작 나보다 한 살 많은 어린아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아무리 미래의 천하제일인이라도 지금은 고작 열네 살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그런 그를 상대로 주도권을 잡는 건 식은 죽 먹기다.
전생에서 북경의 대신들과 조정에서 웃는 얼굴로 화려한 정치적 언변을 내뱉으면서 뒤에서는 서로 등에 칼을 꽂아댔던 경험과 비교하면 어린 사형을 상대하는 건 말 그대로 애들 장난 수준이다.
역시 선즙(先汁)은 필승(必勝)이다.
“사, 사제. 미안해. 내가 미안해······. 울지마 사제······.”
내가 주저앉아 우는 모습을 보는 사형의 표정에 미안함이 가득 차올랐다.
하지만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다.
“엉엉······. 사형······. 나 쫓겨나기 싫어······. 겨우 있을 곳을 찾았는데······. 나도 본 파의 자랑스러운 제자가 되고 싶어······. 흑흑······.”
나는 혀 짧은 소리를 내가면서 더 서럽게 울었다.
그런 나를 보던 사형의 잘생긴 얼굴에 더욱 당황한 감정과 미안한 감정이 가득 차올랐다.
그래.
사형의 얼굴을 보아하니 이 정도가 딱 좋다.
두 달간 지내면서 느낀 건데, 사형은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유형의 인물이었다.
전생에 그물망 달린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던 이유가 잘생겨서가 아니라 얼굴 표정으로 감정과 생각이 너무 쉽게 읽혀서가 아닐까 싶을 정도.
그러니 사형의 얼굴미터로 봐서 지금쯤 눈물 연기를 멈춰야 최대한의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렇게 내가 눈물 연기를 수습하려던 그때.
꼬옥.
갑작스럽게 사형이 나를 끌어안았다.
아니 뭐야.
얘 왜 이래?
왜 갑자기 포옹하고 난리야?
나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버둥댔지만, 그럴수록 사형의 팔이 나를 더 강하게 구속했다.
팔도 여자처럼 얇으면서 대체 저런 괴력이 어디서 나오는 거지.
설마 내공 쓰고 있는 건가?
빌어먹을.
다른 건 몰라도 남자와의 포옹이라니! 내 퍼스트 허그를 남자가 가져가다니!
이럴 수는 없다.
첫 번째 포옹은 반드시 절세미녀와 하기로 결정한 나였다. 그런데 남자에게 빼앗기다니!
그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은은한 들꽃 향기가 예민한 후각을 자극했다.
거기에 사형의 품 안은 쓸데없이 감촉이 부드럽고 체온이 따뜻한 덕분에 기분이 좋아서, 지금까지 머릿속으로만 수없이 상상했던 여인의 품 같아서 더 기분 나빴다.
“흑······. 흐윽······.”
연기가 아닌 진짜 서러운 감정에서 흘러나온 뜨거운 눈물이 뺨을 적셨다.
사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사형이 왜 나를 끌어안았는지는 알 것 같다.
아직 어린 소년에 불과한 사형의 심리를 추측해보자면, 자기보다 한 살 어린 동생이 서럽게 계속 펑펑 우는 상황에서 어떻게 달래주지? 하고 당황해서 뇌정지가 온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나를 달래주려고 끌어안았으리라.
하지만 감성적으로는 이 포옹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럴 수는 없다.
어떻게 지켜온 첫 포옹인데······.
첫 번째 포옹은 무조건 서로 정을 통한 절세미녀와 하기로 결정했는데······.
어떻게······. 남자 따위가······.
내 포옹을······.
서럽다.
빌어먹게도 서럽다.
벗어나고 싶어도, 빌어먹을 사형이 내 몸을 단단히 옭아매고 있어서 그럴 수 없다.
첫 포옹을 꽃내음 나는 남자에게 빼앗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사형의 품에 안긴 채로 분노와 허탈한 눈물을 줄줄 흘리는 것뿐이었다.
“사제. 괜찮아. 괜찮아. 울지마. 뚝해. 내가 미안해.”
사형이 나를 안은 채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목소리가 쓸데없이 중성적인 미성(美聲)이라 더 빡쳤다.
“······울지마······. 내가 잘못했어······. 나, 사제가 말하기 전까지 사제가 그런 고민을 품고 있을 줄은 몰랐어.”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이면서 등을 조용하게 토닥였다.
그의 말이 맞다.
눈물을 멈춰야 했다.
그래야 이 빌어먹을 남자의 포옹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한 번 쏟아진 진짜 눈물은 애석하게도 멈추지 않고 최루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이게 전부 내가 연기를 너무 잘해서, 너무 과한 효과를 발휘해서 생긴 일이었다.
설마 사형이 나를 여기서 안을 줄은 몰랐다.
“어흑흑흑······. 시발······.”
나는 사형의 품에 강제로 안긴 채로 울면서 한국어로 욕을 내뱉으며 생각했다.
보통 빌드업을 잘해놓은 선즙은 대부분 필승이지만.
너무 빌드업을 잘해서 지나치게 강해진 선즙은 오히려 더욱 참혹한 패배를 불러온다는 사실을.
인생 2회차에서야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렇게 그날 나는 사형에게 50년 넘게 간직했던 순정(純情)을 빼앗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