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검성(劍聖) 유진휘
“계십니까?”
공동파 입구를 통과한 내가 마주한 건 검은 무복을 입고 검을 찬 중년의 무인.
현 공동파의 장문인, 복마검객(伏魔劍客) 전영.
훗날 검성의 사부로 유명해지는 무인이었다.
“······어린아이?”
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크흠흠.
역태극이 새겨진 낡은 검정 무복을 입은 전영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내게 말했다.
“난 공동파의 장문인인 전영이라고 한다. 이 겨울에 본 파에는 무슨 일로 왔느냐?”
그의 말에 나는 포권을 취하면서 말했다.
“저 이철수, 대공동파를 평소에 흠모해왔습니다. 그래서 당당히 공동파에 정식으로 입문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습니다.”
초롱초롱.
나는 표정 연기를 통해 최대한 정파를 동경하는 치기어린 어린 소년의 모습을 연기했다.
내 말을 들은 전영이 나를 살핀다.
“······입문을 원한다고?”
“네! 꼭 입문하게 해주십시오!”
나는 그 자리에서 전영의 옷자락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흐음······.”
전영이 내 팔뚝을 만지면서 맥을 짚어본다.
사내가 내 몸을 만지다니.
불쾌하기 짝이 없지만, 제자로 들일 인재의 무재와 근골을 살펴보는 건 장문인으로서 당연한 일이기에 일단은 참았다.
“······.”
나와 전영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아무리 다 망해가는 문파라도 제자를 새로 받아들이는 일은 신중해야 할 일.
그러니 고민하는 거겠지.
하지만 그 고민은 그리 길지 않을 거다.
지금 공동파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으니까.
“양친께서는 계신가?”
전영의 말에 나는 어두운 표정을 연기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뇨, 산적의 습격을 받아서 그만······.”
나는 슬픈 목소리와 함께 눈물 연기를 하면서 미리 생각해둔 스토리를 풀어냈다.
화전민이었다가 산적의 습격을 받아 부모가 죽고 마을이 불탔다.
그 과정에서 무공을 배워 부모의 원수를 갚고자 결심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이야기꾼의 말을 듣고 동경했던 공동파에 입문을 원한다.
“······그런 사정이 있었군. 좋다. 원래는 입문 이전에 여러 과정이 필요하지만, 본 파의 사정이 그리 좋지 않고 네 자질도 충분한 관계로 전부 생략하고 입문을 허락하겠다. 이철수라고 했느냐?”
예상대로 전영의 입에서 입문 허가가 떨어졌다.
사실 내력도 없는 어린아이가 산세가 험한 공동산 꼭대기에 있는 공동파를 찾아왔다는 것만으로도 기본적인 자질은 이미 보장된 셈이었다.
자질이 없다면 진작 나가떨어졌을 테니까.
“네!”
“따라오너라.”
전영이 몸을 돌린다.
그를 따라 공동파 내부를 걷는다.
과거에는 화려했던, 지금은 다 쓰러져 가는 낡은 전각들이 보였다. 마교의 침공 당시에 불타서 건물 터만 남아 방치되고 있는 을씨년스러운 내부 모습이 시야에 펼쳐졌다.
흉가나 다름없는 으스스한 모습. 그렇게 공동파 내부를 얼마간 걷자 마침내 멀쩡한 전각이 하나 나타났다.
“이곳은 공동파의 조사이신 광성자님과 중시조인 비홍자님을 위시한 선조님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주천검부(周天劍府)다.”
주천검부.
그렇게 쓰인 현판이 걸린 전각 안으로 나는 전영을 따라 들어갔다.
주천검부 내부에는 공동파가 배출한 역대 장문인과 중요 인물의 위패가 모셔진 제단이 있었다.
전영이 화섭자를 가지고 제단 앞에 놓인 향에 불을 붙였다. 그가 자리에 앉아 내게 말했다.
“지금부터 너와 정식으로 사제의 연을 맺는 의식을 하겠다. 배사지례를 하거라. 조사인 광성자님의 위패에 세 번, 내 선사(先師)님의 위패에 세 번, 그리고 내게 세 번. 총 아홉 번 절하면 된다.”
배사지례(拜師之禮).
다르게는 구배지례(九拜之禮)라고도 불리는 이 의식은 무협소설에 나온 것처럼 사제의 연을 맺고 문파에 입문하기 위한 의식이었다.
나는 전영이 시키는 대로 조사의 위패에 세 번, 사조의 위패에 세 번, 그리고 전영에게 세 번.
총 아홉 번의 절을 했다.
배사지례가 끝나자 전영이 손에 든 문도첩에 붓을 들고 슥슥 내 이름을 써넣었다.
“좋다. 이제부터 너는 본 파의 제자다.”
전영이 옅게 웃으면서 말한다.
문도첩에 내 이름이 올랐으니, 그의 말대로 지금부터 나는 공동파 정식 제자였다.
운우지락과 삼처사첩을 향한 내 첫 번째 목표가 드디어 달성되는 순간이었다.
“본 파의 규율을 알려주기 전에 미리 말해두자면, 나한테는 너 말고 다른 제자. 사사롭게는 너한테는 사형이자 본 파에는 장문제자가 되는 아이가 있다.”
전영이 내게 말한다.
사형이라.
나는 그가 말하는 장문제자가 누군지 아주 잘 알고 있다.
검성(劍聖) 유진휘.
달리 불리는 이름은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
몰락한 공동파를 재건, 구파일방의 수좌로 올려놓은 희대의 기재.
내가 다른 문파 다 제끼고 굳이 다 망해가는 공동파에 온 이유도 검성 유진휘 코인을 저점에서 풀매수하기 위해서였다.
“사형이요?”
나는 모르는 척 순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래. 네 사형의 이름은 유진휘라고 한······.”
“사부님!”
전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컥하고 전각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온다.
“저 왔······. 어라?”
같은 남자가 봐도 잘생긴 외모.
유진휘의 나이는 지금의 나보다 한 살 많다. 내가 열세 살이니 유진휘는 이제 열네 살인 셈이다.
그런데도 벌써 얼굴에 빛이 감도는 듯한, 전생과 현생을 합쳐 만난 모든 미남을 합쳐도 발끝에도 못 미칠 수준으로 잘생긴, 가히 천하의 모든 미(美)를 합친 듯한 미소년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 그가 바로 미래의 검성 유진휘.
앞으로 내 사형이 될 사람이었다.
심지어 속눈썹도 기생오라비처럼 쓸데없이 길고 탐스러웠다.
‘아니, 사람이 좀 적당히 잘생겨야지. 씨발. 더럽게 잘생겼네.’
안 그래도 내 외모는 결코 미남이라고 할 수 없는, 평범한 수준이었다.
그저 그런 외모를 영웅이라는 명성으로 커버하기 위해 공동파에 들어온 나였다.
그런데 이렇게 기생오래비처럼 더럽게 잘생긴 남자랑 내가 사형제랍시고 붙어 다닌다?
여자들 눈에는 내가 남자가 아닌 오징어로 보일 게 분명했다.
벌써 머릿속에서 미래의 나와 유진휘가 겪을 빌어먹을 상황이 자연스럽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 소협. 호호호호. 사형 분한테 인사라도 전해줄 수 있나요?’
‘이 소협. 유 대협은 요즘 어떻게 지내나요?’
내게 몰려드는 절세미인들.
하지만 목표는 내가 아닌 저 빌어먹을 사형 유진휘다.
나에게는 아무런 관심 없이, 오직 유진휘의 안부와 관심만을 위해 나를 찾는 여자들.
지나치게 잘생긴 사형 때문에 남자 취급도 받지 못하는 나.
‘정말 끔찍한, 도래해서는 안 되는 미래군.’
유진휘가 잘생겼다는 정보는 정보 수집과 용모파기를 통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전생에서 공무 때문에 그를 몇 번 대면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유진휘는 나와 만날 때는 물론 평소에도 얼굴을 전부 가리는 그물망 달린 삿갓을 착용하고 다녔다.
덕분에 전생에도 나는 그의 실물을 본 적이 없었다.
전생의 내 경지라면 안력(眼力)을 돋우면 그물망을 뚫고 실물을 보는 것도 가능했었다. 하지만 남자 얼굴을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확인하지 않았다. 어차피 유진휘의 맨얼굴 용모파기를 이미 확인하기도 했고, 그걸로 충분하다 생각했었다.
‘그때 미리 확인했어야 했어!’
나는 전생의 병신 같은 나를 원망했다.
아무튼 유진휘의 외모에 대해 전생의 내가 알고 있던 정보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그의 잘생긴 외모 때문에 강호행 당시 수많은 여난(女難)이 발생했다는 것. 그래서 그는 여난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는 그물망 삿갓을 쓰고 다녔다.
두 번째는 용모파기로 그려진 그의 초상화였다.
솔직히 용모파기도 엄청 미남이었다. 그래서 실물도 잘생겼을 거라고 예상은 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충격이다.
확실하다. 전생에 봤던 용모파기는 유진휘의 실물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굳이 퍼센트로 따지자면 1% 정도?
아무리 저점 풀매수라지만 솔직히 이거 좀 아닌 거 같은데.
이미 배사지례 해버린 거 무를 수도 없고.
돌겠네.
“사부님. 이 아이는 누구인가요?”
“아, 소개해주지. 방금 본문에 입문한, 네 사제가 될 이철수라는 아이란다. 인사하거라.”
“사제라고요?”
전영의 말을 들은 유진휘의 눈동자가 커진다.
“사제! 만나서 반가워! 난 유진휘. 앞으로 네 사형이 될 사람이야.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형제처럼 편하게 대해!”
유진휘가 신난 표정으로 내게 인사한다.
유진휘.
놈은 기록대로 성격마저 친절하고 좋았다.
훌륭한 인품과 잘생긴 외모에 하늘이 내린 재능까지.
그야말로 비현실적으로 완벽한, 무협소설 주인공 같은 인간이 바로 유진휘였다.
나는 유진휘를 바라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제발 거기는 3cm. 제발.’
내 머릿속 정보에 유진휘의 양물 크기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대물이 아니기를, 제발 양물만은 작기를 바랐다.
인간적으로 저 스펙에 거기까지 크면 솔직히 밸붕이지.
*
“처음 뵙겠습니다. 사형.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낡은 옷을 입은 조금 날카로운 인상의 소년.
이철수가 유진휘를 향해 예의 바른 목소리로 포권하며 인사한다.
사형과 사제가 서로 인사하고, 친분을 트는 모습을 본 전영이 흐뭇하게 웃는다.
‘역시 철수를 제자로 잘 받아들인 것 같아. 휘아 혼자서만 키우기는 좀 그랬지.’
유진휘.
전영 본인이 강호를 유람하던 10년 전, 뒷골목에서 주워온 고아 출신의 제자.
다 죽어가던 유진휘를 불쌍히 여겨 공동파의 제자로 들인 전영은 이윽고 유진휘가 하나를 가르치면 백을 아는 천재 중의 천재이자 천무지체의 소유자임을 깨달았다.
50년 전의 정마대전 이후 옛 영화를 잃고 영락한 공동파.
공동파의 후예인 전영에게 유진휘는 남은 전인이라고는 오로지 자신뿐인, 문파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울 수준으로 몰락한 사문을 재건할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렇기에 전영은 유진휘를 물심양면으로 보살피며 정성스럽게 가르쳤다.
그래야 공동파를 세운 조사인 광성자 님과 정마대전 당시 스러져간 선대의 무인들에게 부끄럽지 않고 당당할 수 있다.
‘앞으로 무림에 나가면 또래 사내들과 자주 부딪혀야 할 터. 그러니 강호로 나가기 전에 휘아는 또래 사내인 사제와의 교류를 통해 남장을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는 법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할 필요가 있어.’
그렇다.
유진휘는 남장여자였다.
여자인 유진휘에게 남자 같은 이름을 새로 지어주고, 남장여자로 키운 것도 그녀가 공동파의 유일한 희망이었기 때문이었다.
강호 무림에서는 여인의 몸보다 사내의 몸이 훨씬 인정받기 유리하다.
그러니 사문의 재건을 위해서라도 유진휘는 여인이 아닌 사내여야 했다.
앞으로 또래 사내인 사제도 들어왔으니, 유진휘는 남장을 들키지 않기 위해 더 조심할 터.
게다가 한 명보다는 두 명의 제자가 낫다.
그가 맥을 짚어본바 이철수의 자질은 수재는 아니지만, 둔재도 아니었다. 거기에 어린아이의 몸으로 내공도 없이 본산이 있는 취병봉까지 홀로 등산한 것을 보면 끈기도 제법이었다.
그러니 희대의 기재인 유진휘를 보좌할 정도는 될 터.
전영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두 사형제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본 파의 미래가 실로 밝군. 이제야 선사(先師)를 뵐 염치가 있겠어.’
허허허.
전영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철수가 공동파에 입문한 첫날 있었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