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사람
“후우.”
나는 들끓던 흥분과 혈기, 그리고 남자의 자존심을 가라앉혔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
과거 석가모니가 마야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나자마자 자리에서 우뚝 일어서서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걷고 난 후에 천지를 가리키며 선언했다는 말.
말 그대로 부처님께서는 비범하게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선언하면서 중생을 구제하여 생로병사에서 해탈하게 할 것이라 선언한 것이다.
비록 나는 부처님처럼 위대한 성인도 아니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포부를 지니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회귀한 뒤에 선언하고 싶었다.
이번 생에는 고자라서 하고 싶어도 못 했던 전생과는 달리 오로지 내 욕망을 위해 살겠다고.
오직 나만을 위해 살겠다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소리치자 속이 후련해진 나는 관도 주변에 앉은 뒤에 죽은 중년 상인의 봇짐을 뒤져 육포를 꺼내 씹었다.
질겅질겅.
질기고 짠 육포가 입 안에서 부서진다.
“이제 좀 낫군.”
영양소가 공급되자 조금 나아진 기분.
나는 묵직한 아랫도리의 기분 좋은 덜렁거림을 느끼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세웠다.
위대한 부처님을 본받아 선언을 거창하게 지른 나였다.
이제 어떻게 살 것인지, 내 인생의 계획을 진지하게 그려야 했다.
운우지락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인류 최대의 미스터리다.
남자라면 고자가 아닌 이상, 아니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고자라 할지라도 이에 대해 고찰하고 고뇌했을 것이 분명하다.
지금 비록 신체 연령이 12세긴 하지만, 내가 조금만 노력한다면 돈 몇 푼은 어렵지 않게 벌 수 있고 그 돈으로 기루를 간다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단순한 쾌락은 필요 없어.’
하지만 나는 현대인.
게다가 성매매를 싫어하는, 지극히 현대적인 도덕관념과 윤리를 갖춘 사람이었다.
성매매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싫어한다.
애정과 사랑이 담기지 않은, 단순히 서로 육체적 쾌락만 나누는 관계 따위는 싫다.
그렇다면 진정한 쾌락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환생 대법 준비 기간 동안 나는 지고의 쾌락이란 무엇인가를 냉철한 이성을 통해 깊이 탐구하고 사유하였다.
그 결과 내가 생각하는 가장 합리적인 해답을 도출할 수 있었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사람이 낫다.’
이 격언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돼지가 아무리 배불러도 돼지는 돼지일 뿐 결코 사람이 될 수 없다.
양적 쾌락이 아닌 질적 쾌락을 추구해야 한다.
단순한 쾌락, 양만 많은 의미 없는 쾌락 따위는 필요 없다.
질적으로 뛰어난 쾌락, 극상의 쾌락이자 지고의 쾌락, 상호 간에 정신적 교류와 육체적 쾌락을 교환하는 관계야말로 내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색도(色道)인 것이다.
진정한 색도를 추구하는 내 입장에서 기루는 오직 양만 추구하는 저급한 쾌락인 것이다.
나는 결코 그런 싸구려 운우지락을 추구할 생각이 없었다.
내 소중한 동정을 아무렇게나 버릴 생각도 없었다.
나는 절대 배부른 돼지가 될 생각이 없었다.
배고픈 사람, 아니 배부른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단순한 육체적인 관계는 필요 없어. 육체적, 정신적 애정을 함께 서로 나누는 관계, 그것도 상대가 절세미녀, 경국지색이어야만 해.’
날 사랑해주는 절세미녀와 서로 애정을 주고받는 관계.
단순한 육체적 쾌락이 아닌, 서로의 정신적인 만족과 사랑도 함께 추구하는 관계.
그것이야말로 내가 추구하는 색도였다.
나 혼자 즐기면 아무 의미가 없다.
상대방까지 즐겨야 한다.
상대방이 나를 사랑해야 한다.
물론 현대의 도덕관념이라면 일부일처제를 따라 상대는 무조건 한 명이어야 하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여기는 현대 대한민국이 아닌, 무법천지 중세 무림 랜드.
능력 있는 남자라면 삼처사첩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시대.
그런데 굳이 일부일처만을 고집할 생각은 없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다.
나는 현대인이지만 동시에 50년 동안 중원에서 살아온 중원인이기도 했다.
나 이철수, 이제 남자의 자존심을 되찾았기에 욕망에 충실하리라 결심했다.
게다가 나는 전생에 무려 50년의 세월을 고자로 살아오지 않았는가?
50년 동안 못 해본 나인데, 이제 와서 고작 한 명과의 운우지락으로 만족하라고?
‘그건 안 돼.’
그럴 수 없다.
기왕 남자의 자존심을 되찾았으니, 색도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실컷 여러 미녀들과 사랑을 나눌 것이다.
물론 상대가 원하지 않는 관계를 맺을 생각은 없다.
오는 여자는 막지 않고, 가는 여자는 무조건 못 떠나게 붙잡는다.
그래서 나만을 사랑하는 절세미녀들로 삼처사첩을 구축하고 주지육림에서 운우지락을 즐기며 지낸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추구하는 궁극의 색도!
내 인생의 최종목적!
남자의 자존심을 되찾았다면, 하렘왕 정도는 목표로 해야 하지 않겠는가?
‘삼처사첩! 주지육림! 운우지락!’
삼처사첩과 주지육림, 그리고 운우지락.
색도의 궁극적 지향점을 세운 나는 자리에 걸터앉아 다시 육포를 오물오물 씹었다.
환생 대법 준비 기간 동안 나는 색도에 대한 고찰뿐만 아니라 환생 이후 내 남자의 삶에 대한 로드맵도 구체적으로 짜놓았다.
환생 대법은 시전 시점 기준으로 미래의 타인에게 대상자의 혼을 전이시키는 술법.
대법이 성공했다면 나는 미래의 누군가의 몸, 그것도 육체적으로 이미 죽은 타인의 육체로 환생해서 되살아났을 것이다.
당연하지만 환생할 육체를 고른다는 건 불가능하다.
레전더리 등급의 육체인 남궁세가 망나니에 빙의한다면 정말 좋겠지만, 노멀 등급 육체인 길가에 죽어가는 부랑자의 몸으로 환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환생할 육체의 신분과 지위가 어떻건 수월하게 색도를 수행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춰놨었다.
‘그게 무덤이었지.’
그 수단이 바로 내 무덤이었다.
사례태감 양국공 이철수의 묘.
나는 새도 떨어뜨릴 권력을 사용해 일부러 호화로운 무덤을 만들고, 부장품이라는 명목으로 보물은 물론 절세의 무공 비급과 영약까지 넣었다.
거기에 내가 아니면 파해가 불가능한 기관진식 설치는 덤이었다.
환생한 미래의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기연을 내 손으로 직접 준비한 것이다.
원래라면 환생하자마자 북경 근처에 만들어진 내 무덤을 찾은 뒤에 안에 매장된 각종 보물과 영약, 무공 비급을 챙겨서 강호 무림에 당당하게 신진 고수로 출도했을 것이다.
계획은 완벽했다.
문제는.
‘그런데 환생이 아닌 회귀를 해버렸네?’
내가 미래가 아닌 과거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미래의 나를 위해 과거의 내가 남겼던 유산인 이철수의 무덤은 지금 시점에서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내가 만들어둔 안배는 사라졌다.
‘그렇다면 로드맵을 처음부터 다시 짜야겠군.’
하지만 당황은 없었다.
무덤은 사라졌지만, 나에게는 회귀자만 가질 수 있는 미래 정보라는, 어쩌면 내가 전생에 만든 안배보다 더 강력한 특전이 주어졌으니까.
게다가 전생의 나는 중원 최고, 최강의 정보기관인 동창과 서창의 수장.
앞으로 50년 동안 일어날 거의 모든 사건을 나는 전부 알고 있다.
‘내가 여인들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부와 명예가 필요하다.’
나는 자기 객관화를 꽤 잘하는 편이었다.
내가 잘생겼다면 색도를 충분히 이룰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내 용모는 빈말로도 미남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못생긴 수준도 아닌, 그냥 평범한, 아니 어떻게 보면 눈매가 날카로워서 약간 사나운 양아치 같은 인상이었다.
그런 내가 절세미인의 호감을 얻고, 나아가 삼처사첩과 운우지락을 즐겨서 궁극의 색도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부와 명예가 필요했다.
‘영웅호색, 영웅은 삼처사첩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
그 말을 거꾸로 뒤집어보자면, 영웅 정도 되어야 삼처사첩이 가능하다는 말도 된다.
그러니까 나는 삼처사첩과 운우지락을 즐기기 위해, 먼저 영웅이 될 필요가 있었다.
색도를 이루기 위한 수단, 그것이 나에게는 부와 명예였던 것이다.
영웅이라고 불릴 정도의 부와 명예가 있다면, 여인들 역시 내게 호감을 가질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 거지보다는, 부자에 명예로운 남자가 좀 더 끌리는 건 당연한 이치니까.
그렇다면 부와 명예를 얻고 영웅이 될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데, 지금의 내게는 세 가지 정도 방법이 있었다.
1. 군문에 투신해서 군인으로 전공을 쌓아 승진해서 명예와 부를 얻어 미녀들의 호감을 유도한다.
2. 과거에 합격, 정계에 진출해서 관료로서 명예와 부를 얻어 미녀들의 호감을 유도한다.
3. 강호 무림에 투신, 강호행을 통해 명성을 쌓고 부를 얻어 미녀들의 호감을 유도한다.
세 갈래 선택지.
게임으로 치면 1차 전직과도 같은, 가장 중요한 관문이었다.
전직은 되돌릴 수 없다.
그러니 선택지 역시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
군인이냐 관료냐 무림인이냐.
내 선택은.
‘당연히 무림인을 선택해야지.’
무림인이었다.
‘군인은 안 돼. 지금 나는 병사로 입대해야 하는데 입대해봤자 남자밖에 없고 전방 뺑뺑이 돌면서 이민족들이랑 매일매일 싸워야 하잖아. 군공 올려서 승진하기도 오래 걸리고.’
무엇보다 현대에 있을 때 군생활 해 봐서 아는데 21세기 선진병영이라고 자랑하는 대한민국 군대도 좆같은 점이 차고 넘쳤다.
그런데 뭐? 인권 개념도 없는 중세 무림 랜드의 군대?
전생에 환관이었던 시절 군대 관련 소문만 들었는데도 이 미개한 중세 무림 군대의 부조리 수준은 상상을 초월하게 끔찍했다.
게다가 기껏 남자의 자존심을 되찾았는데, 여인의 향기조차 맡을 수 없는, 시꺼먼 남자만 우글거리는 빌어먹을 군대에 다시 입대할 수는 없다.
재입대라니.
꿈에 나올까 무섭다.
‘관료도 안 돼. 북경 명문가 선비들 카르텔 뚫는 시간이 얼만데.’
과거시험에 합격하는 것 자체는 그렇게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
문제는 승진이었다.
북경의 명문가들이 형성한 고인물 카르텔은 견고했다.
카르텔을 뚫는 건 불가능한 게 아니지만, 시간이 엄청나게 걸릴 게 분명하다.
내가 고위 관료에 등극하는 건 빨라봤자 30대, 늦으면 40대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여기는 유교를 섬기는 중세 무림 유교 랜드.
모든 관료는 곧 선비였다.
기껏 환생했는데 40살이 되기까지 선비처럼 생활하면서 욕망을 절제한다?
그건 안 된다. 불가능이다.
그러니까 무림이었다.
강한 무공과 미래 정보를 조합한다면 빠르게 무명을 쌓고 강호의 후기지수 취급을 받을 수 있었다.
거기에 용봉지회에 참여해서 파란을 일으킨다면?
영웅이 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20대의 나이에 삼처사첩을 이루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호호호호호.”
입에서 웃음이 절로 흐른 그때.
나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리면서 손을 입으로 가렸다가 흠칫 떨며 고개를 저었다.
주륵.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제 거기도 멀쩡한데 하남자 같은 소심한 내시 웃음이라니!
50년을 환관으로 살았던 탓일까? 염병할 습관이 들고 말았다.
절세미녀들 앞에서 전생처럼 호호호 내시 웃음소리를 낸다? 다들 날 남자가 아닌 병신으로 볼 거다.
그럴 수는 없다.
내 목표인 삼처사첩을 거느리는 상남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런 사소한 습관부터 고쳐야 한다.
“흐흐흐흐, 하하하하하하하!”
나는 입을 가린 손을 떼어내고 어깨와 가슴을 쫙 편 채로 내시 웃음이 아닌, 영웅호걸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그래. 이제야 좀 마음에 든다.
고자가 아닌 상남자라면 이래야 맞다.
내 시야에 장밋빛 미래가 펼쳐졌다.
20대에 삼처사첩이라니!
벌써 눈앞에 절세미녀들이 아른거리는 기분이었다.
불끈.
바지 안의 흑염룡이 용트림을 한다.
‘무림 하니까, 때마침 내가 몸담기 딱 좋은 문파가 하나 생각나는군요, 아니 생각나는군.’
나는 마음속 독백부터 고쳤다.
이제 더 이상 환관 말투를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절세미녀와 정을 통해 삼처사첩을 구축하려면 마음부터 고자가 아닌 남자로 새로 태어나야 했다.
50년 묵은 고자 습관을 전부 고치고 상남자의 마음가짐을 가져야 했다.
그것이야말로 색도를 향한 위대한 첫 걸음이었다.
머릿속에 있는 미래 정보를 뒤지다가 입문하기 딱 좋은 문파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공동파(崆峒派).’
공동파.
과거 구파일방의 일좌를 차지했었던 명문대파지만,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있었던 정마대전에서 천마가 이끄는 마교의 선봉대에게 멸문에 가까운 타격을 받은 문파.
정마대전의 상처 때문에 지금은 구파일방의 자리에서도 쫓겨나 그 세가 초라해진 공동파지만, 나는 공동파의 미래를 알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5년 뒤, 무너진 공동파를 재건하고, 뒤이어 천하제일문으로 만들 기재가 강호에 출도한다는 사실을.
검성 유진휘.
미래의 정파제일인인 그의 사문이 바로 공동파였다는 사실을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유진휘가 강호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사고의 중심이었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의 명성이 아주 빠르게 퍼졌다는 사실도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전형적인 몰락 문파 재건물 무협소설 주인공 같은 인물.
그가 바로 유진휘였다.
공동파에 입문한 뒤 검성 유진휘를 이용, 강호의 평지풍파를 모두 해결하면서 공동파, 아니 나아가서 정파 무림의 막후 실권자로 등극할 수만 있다면.
삼처사첩을 이룰 수단인 권력, 재력, 명예 전부 내 손에 들어올 게 분명했다.
그 살벌한 황궁의 정치판에서도 모든 경쟁자를 찍어 누르고 최종 승자가 되었던 나였다.
정파 무림의 비선실세가 되는 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공동파에는 검성 유진휘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있었다.
‘미래의 백도제일화도 공동파 소속이었지.’
백도제일화.
정파 무림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녀가 바로 공동파 출신이었다.
목적과 수단, 방법을 모두 정한 나는 웃음을 흘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모든 것은 내 삼처사첩을 위하여.”
나는 나지막하게 목표를 되새기면서, 죽은 상인의 보따리를 챙겨 관도를 나섰다.
아랫도리에 전생에서는 느낄 수 없던, 기분 좋은 묵직함이 느껴진다.
목표는 감숙성 공동산.
내 삼처사첩 계획의 핵심이 될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