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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증오의 끝 (2) (73/85)


73. 증오의 끝 (2)
2023.06.03.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옥엽은 후포가 바닥에 쓰러지기 전에 받아들고 나서야, 범 사냥꾼들이 자신을 막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옥엽은 고개를 들어서 제 앞에 서 있는 제하를 올려다봤다.

제하는 왜인지 ‘타배’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의 눈은 아버지인 풍래와 많이 닮았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좁은 골목에 이토록 많은 사람이 있는데도 숨소리마저 희미할 정도로 고요했다.

그 묵직하고 슬픈 적막을 깬 건 제하의 목소리였다.

“나는 불티를 고문하지도, 죽이지도 않았어.”

옥엽 역시 그럴 거라고 확신했다.

제하의 말 때문이 아니라 그의 맑은 눈동자를 마주했을 때부터 알았다.

하지만 마음이 흔들리는 이유는 ‘타배’ 때문이었다.

타배 역시 제하처럼 맑고 깊은 눈동자를 갖고 있었지만, 범족을 잔혹하게 학살했다.

옥엽의 흔들림을 눈치챈 듯 제하가 한마디 더 덧붙였다.

“범족을 학살한 건 타배가 아니야.”

“타배였어.”

“그 영상 속의 남자도 나처럼 보였지.”

옥엽은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 영상 속의 남자는 척살검을 갖고 있었고 제하와 똑같은 뒷모습이었다.

그런데 제하가 아니다.

만약 그때, 그 잔혹한 타배도 지금과 마찬가지 상황이었다면?

경악에 두 눈을 부릅뜨는 옥엽을 내려다보며 제하가 쓴웃음을 지었다.

“범족도 인간도 서로 싸우고 죽였어. 그리고 저건.”

제하가 검지로 부글부글 끓기 시작한 지네 괴물의 사체를 가리켰다.

“범족과 인간을 가리지 않고 잡아먹고 있지.”

“…….”

제하가 고개를 들었다.

검은 머리칼이 제하의 눈을 덮어서 옥엽은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꾹 움켜쥐는 그의 주먹에서 그의 슬픈 갈등이 전해졌다.

“나도 당신들이. 특히 그 사람이 싫어.”

제하는 후포를 ‘사람’이라고 말했다.

“정말 싫어.”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제하는 옥엽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발을 옮겼고, 착호와 범 사냥꾼들도 그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옥엽은 제하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괴물이 우리의 적이야.

+++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있던 환웅이 번쩍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가 어둡게 빛났다.

“또…….”

지귀가 죽었다.

또 다른 아이도 죽었다.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환웅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무표정했지만 그의 전신에서 격한 분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가 너무 내버려 뒀나?”

아이들을 만드느라 힘을 거의 소진한 탓에 쉽게 나설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아이들이 인간과 범을 먹고 충분한 힘을 기를 때까지는, 인간과 범의 갈등을 부추겨서 그들의 수를 줄일 계획이었다.

인간과 범이 흘린 피는 땅에 스며들어 자라나는 아이들의 양분이 될 테니 일석이조였다.

그런데 범과 인간은 날이 갈수록 서로를 죽이지 않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잘 키운 아이들이 둘이나 동시에 죽었다.

좋지 않다.

불길했다.

충분한 준비가 끝날 때까지 환웅은 제 정체를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 승리가 확실해졌을 때 모두에게 보여줄 생각이었다.

너희가 그토록 무시하던 존재가 바로 이곳에서 너희를 내려다보고 있다.

어떠하냐? 있는지도 모를 만큼 무의미했던 존재의 발아래에 엎드려야만 하는 기분은.

하지만 생각과 다르게 흘러가는 범과 인간의 움직임이 환웅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아니, 아니, 아니.”

환웅은 검은 부채를 펼쳐 들고 살살 흔들며 섣부르게 움직이려는 자신을 다독였다.

“다른 방법이 있지요.”

돈을 좋아하는 인간들을 아우르면서 범족의 마음까지 얻을 수 있는 방법.

그 방법이 떠오르자마자 환웅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한 무리의 기자들이 이살 타워를 방문했다.

+++

허서가 끙끙거리며 본부에 들어갔을 때, 마로는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허서는 마로가 아직도 불티의 영상을 보고 있나 싶어서 흘끔 TV를 확인했다.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난 다쳤다.”

허서가 마로의 옆에 앉아서 자신의 잘린 팔을 휘둘러 보이며 말했다.

넋이 나간 듯 정면을 보고 있던 마로가 허서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속 시끄럽게 하지 말고 팔이나 붙여.”

“배가 고파서 잘 붙을까 모르겠네.”

인간을 먹은 지 오래된 허서는 전보다 훨씬 약해진 상태였다.

“이제는 말이야. 내가 괴물인지, 범인지 모르겠다니까?”

허서는 잘린 팔을 붙이려고 시도하며 말했다.

“생각해보면 인간은 곰족이잖아. 그런데 나는 곰족을 먹어야만 힘이 나. 옛날이었다면 이런 걸 상상이나 할 수 있겠냐?”

“…….”

“제길…… 신단수만 있었어도…….”

범족과 곰족의 힘은 신단수에서 흘러나왔다.

곰족은 신단수가 없는 세계에 살면서 그에 적응해왔지만 범족은 아니었다.

시간이 멈춘 그림자의 세계에 있던 범족에게는 신단수가 흘려보내던 고대의 힘이 필요했다.

그 때문에 고대의 힘을 미약하게나마 가진 인간을 먹어야만 체력을 회복할 수가 있었다.

“우리도 그냥 컵라면이나 빵 같은 거나 먹으면서 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안 그러냐, 마로?”

허서는 마로의 관심을 불티로부터 돌리기 위해 아무 말이나 쏟아냈다.

이윽고 옥엽이 후포를 부축해서 돌아왔다.

후포의 혈향이 방 안을 가득 채웠는데도 마로의 눈동자는 여전히 TV 속, 이살 그룹의 환웅에게 꽂혀 있었다.

“주군! 옥엽, 무슨 일이냐?”

허서가 반만 붙어서 덜렁거리는 팔을 흔들며 달려갔다.

[물론 제하도 우리 인간들을 위해 그 불쌍하고 가련한 범을 그렇게 고문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다름 아닌 인간. 인간이 넘어야 할 선이라는 게 있답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허서의 목소리와 환웅의 목소리가 섞였다.

옥엽이 후포를 침대에 내려놓으며 아까 벌어진 일을 설명하는 동안에도, 환웅은 미미한 미소를 띤 채로 계속해서 말했다.

[복수심 때문에, 증오 때문에, 잔혹한 살생을 범하는 걸 못 본 척 넘어간다면, 작은 일에도 분노하여 상대를 죽이려는 사람들이 늘어나지요. 그렇게 세상은 무법지대가 되어가는 것이랍니다. 제하는 범을 죽일지언정 고문을 해서는 안 됐던 거지요. 용납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졌어요.]

허서는 옥엽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눈은 TV로 향해 있었다.

[제하가 또 그렇게 범을 고문하고 죽인다면 우리가 괴물이 되어버릴 터. 그리하여 나, 이 환웅은 아주 오랜 고민과 슬픔 속에서 결단을 내렸습니다.]

옥엽도 설명을 멈추고 TV를 보았다.

[제하.]

제하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약간 흐트러진 듯한 검은 머리칼, 갸름하고 작은 얼굴에 조화롭게 자리 잡은 눈코입.

짙은 눈썹 아래의 선량한 눈매, 입가에 어색한 미소를 띤 제하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청년으로 보였다.

[이 남자를 지명수배하겠습니다. 여차하면 죽여도 좋지요. 현상금은 얼마로 할까요? 한…… 50억?]

그 순간, 마로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마로의 어깨에서 검은 안개가 예리하게 흘러나오다가 움직임을 멈췄다.

마로의 입술이 열리고 음산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늦었다.”

뭐가 늦었다는 거지?

허서와 옥엽이 그에 대해 묻기도 전에 마로가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다가왔다.

침대 옆에 서 있는 허서와 옥엽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 마로는 후포만을 응시했다.

“주군!”

마로가 후포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주군! 일어나십시오! 지금 주무실 때가 아닙니다!”

마로의 기세에 넋을 잃고 있던 옥엽이 마로의 손목을 붙잡고 으르렁거렸다.

“뭐 하는 거야, 마로! 주군께서는 크게 다치셨어!”

마로는 성가신 듯 옥엽의 손을 털어내더니 검지 손톱을 길게 뽑아서 제 팔목을 그었다.

허서가 당황해서 외쳤다.

“마로!”

마로는 들리지 않는 듯 후포의 턱을 잡아서 입을 벌리더니 그 위로 자신의 팔을 가져갔다.

팔뚝을 타고 흐른 붉은 선혈이 후포의 입안으로 뚝뚝 떨어졌다.

당혹감에 젖어 있던 옥엽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마로를 말리려 했지만, 마로가 두 눈을 부릅뜨고 옥엽을 노려봤다.

“필요한 일이다.”

옥엽은 마로가 미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제 동생을 잃더니 머리가 어떻게 됐나 보다.

옥엽이 허서를 쳐다보자 허서가 검지로 관자놀이 주위를 빙글빙글 돌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불쌍하니 하고 싶은 대로 놔두라는 의미였다.

옥엽은 아랫입술을 질근 씹었다.

제하와의 일 때문에도 마음이 복잡한데 마로까지 이렇게 되다니.

지금껏 해온 모든 일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며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그때 후포가 작은 신음을 내며 정신을 차렸다.

입안에 맴도는 혈향이 동족의 것이라는 걸 깨달은 후포가 손을 휘둘러 마로의 팔을 쳐냈다.

번쩍 뜬 두 눈은 지금껏 기절해 있었던 사람답지 않게 흉흉했다.

“뭐 하는 짓이냐, 마로.”

“제하가 아닙니다, 주군.”

“뭐?”

“제 아우를 고문하고 죽인 건 제하가 아닙니다.”

후포가 눈을 감았다.

마로는 자신의 주군이 몹시 지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육체의 고됨보다는 마음이 무너져가고 있는 것이리라.

지금 하려는 말은 주군의 마음을 지금보다 더 흔들어놓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숨길 수도 없는 일.

불티는 죽어가는 순간에도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니 전해야만 한다.

마로는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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