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도망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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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도망자 (1)
2023.03.18.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늦은 밤, 신시 1구의 폐가.
끼이이익-
오랫동안 관리하지 않은 현관문이 불쾌한 소리를 내며 열리자, 제하는 검 손잡이를 쥐었다.
“어휴, 진짜 뭐 하나 사려면 한참을 나가야 하네.”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세인의 것이라는 걸 확인한 후에야, 제하는 긴장을 풀고 검에서 손을 뗐다.
먹을 걸 사러 나갔던 세인과 호수가 돌아왔다.
세인과 호수는 양손에 커다란 편의점 봉투를 여러 개 들고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서 일단 살 수 있는 만큼 사 왔어. 이럴 때는 얼굴이 알려진 게 진짜 별로야. 연예인들도 이런 기분인가?”
세인이 푹 눌러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미안하다, 나 때문에.”
제하의 말에 호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왜 너 때문이야? 네가 한 짓 아니라며?”
“아! 내가 툴툴거려서 그래? 너한테 눈치 주려고 한 거 아니었어. 네 탓이라고 생각 안 해!”
“제하가 눈치를 볼만하지. 네가 좀 투덜거리냐?”
“아, 그래. 그럼 내 탓으로 하자. 다 내 탓이다, 내 탓.”
세인이 두 손을 살짝 들어 올리고 말했다.
기분을 풀어주려고 노력하는 그들을 보며, 제하는 일주일 전의 일을 떠올렸다.
.
.
“제하야. 저거, 너 아니야?”
세인의 질문을 받은 후에도 제하는 한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제하의 눈에도 불티를 고문하는 남자가 자신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검은 머리카락, 넓은 어깨와 훤칠한 키, 그리고 불티의 목을 베어낸 검은색 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불티를 고문하고 죽인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제하는 뻣뻣하게 굳은 채로 휴대폰 안의 영상을 노려봤다.
영상 속의 불티는 그야말로 처참했다.
증오하는 범인데도, 불쌍하다는 마음이 들 만큼 끔찍한 꼴을 당했다.
불티에게 연인을 잃은 주안도, 가족을 잃은 환도, 경악과 동정에 물든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이건…….”
자신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제 목소리처럼 들리지 않았다.
“이건…… 대체…… 누구지……?”
나인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인가?
자기 자신조차 의심스러워서 흘러나온 질문.
“이건 제하가 아니다.”
오히려 단호한 건 하루였다.
“아니, 물론 제하가 아니겠지. 나도 제하라고 생각한 건 아니거든. 그런데 너무 제하 같으니까 나도 모르게 물어본 거지.”
세인도.
“당연히 제하일 리가 없지. 제하가 저런 짓을 하겠냐?”
도건도.
제하보다 더 제하를 믿었다.
그래서 제하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한번 영상을 확인했다.
“이건 내가 아니야. 하지만…… 저놈이 들고 있는 척살검은…….”
제하는 허리에 찬 검집을 확인했다.
척살검은 그 안에 얌전하게 들어가 있었다.
도건이 말했다.
“새까만 검 같은 거야 얼마든지 꾸며서 만들 수 있지. 아무래도 네 얼굴이 알려져 있으니까, 너랑 비슷한 체구면 너인 척하는 건 일도 아니야.”
“왜 나인 척하고 저런 짓을 하는데?”
“그거야…….”
“이간질시키려고.”
대답을 한 건, 주안이었다.
주안은 새까만 눈동자를 제하에게 고정시키고 말했다.
“누군가 우리랑 범을 이간질시키려고 하고 있어.”
“대체 누가…….”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야.”
지금껏 조용히 있던 환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그런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거처를 옮겨야 해.”
“아, 그래. 그래야겠다.”
도건도 환의 말에 동의했다.
어리둥절하게 올려다보는 제하에게 환이 설명했다.
“이 영상만 두고 봐봐. 우리는 이게 네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걸 너라고 생각할 거야. 너는 범을 죽였어. 그것도 아주 끔찍하게 고문하고 죽였지.”
“…….”
“범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그제야 제하도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범들은 영상 속의 남자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아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제하에 대해 잘 모르니, 제하가 한 짓이라고 철석같이 믿으리라.
“우리 본부가 놈들에게 알려져 있는 건 아니지만,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어. 우리가 이 근처에서 활동하니까. 놈들이 찾기 전에 도망쳐야 해. 지금 당장은 도망치는 게 좋겠어.”
.
.
그래서 도망쳤다.
이미 폐허가 된 1구에서 3구 사이의 폐가를 전전하며 지내는 중이다.
그동안 상황은 더 좋지 않게 흘러갔다.
불티 고문 영상이 여기저기 퍼지고, 대부분의 인간이 영상 속의 남자가 한 짓을 옹호했다.
-제하, 파이팅!
-제하가 신시를 살린다.
-우리 영웅! 범 따위 다 고문해서 죽여버려!
-범 잡으러 갈 파티 구합니다.
인터넷은 뜨거웠다.
범을 향한 적대감과 증오는 쭉 있어 왔지만, 그 영상이 기폭제가 되어 숨죽이고 있던 사람들이 감정을 폭발시키게 만들었다.
최근에 범의 습격이 줄었다는 건,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되지 못했다.
범은 갑자기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졌으니, 언제 또 나타날지 모를 일.
그럴 때, ‘제하’가 범을 무장 해제시켜놓고 마음껏 고문했다는 건, 인간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저것 봐. 저 무시무시한 범이 제하 한 사람에게 꼼짝도 못 하고 당하잖아. 우리 인간도 저렇게 강할 수 있다고!
사람들이 ‘제하’를 신처럼 추앙하는 건, 제하에게 조금도 기쁜 일이 아니었다.
제하가 어두운 표정으로 앉아서 식탁만 노려보고 있자, 세인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봉투에서 초콜릿을 꺼냈다.
“단것 좀 먹어.”
제하는 무심코 초콜릿을 받아 포장지를 뜯으며 말했다.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한 걸까?”
그 영상을 본 후, 수도 없이 되풀이한 질문.
하지만 아무도 그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이에 대한 답은 알았다.
범과 제하, 나아가 범과 인간 사이를 이간질시키려고.
하지만 대체 왜?
“우리 인간이랑 범을 이간질시켜서 얻는 게 뭘까?”
“역시 이 싸움을 길게 끌고 싶은 거 아니겠어?”
제하의 맞은편에 앉아서 초콜릿을 우물거리며, 세인이 답했다.
호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길게 끌고 싶은 거지. 그런데 대체 누가? 왜? 무엇 때문에?”
“하. 그걸 모른다는 게 문제지. 그것만 알면 당장 찾아가서 죽여버리면 되는 일인데.”
“세인이 너는 그렇게 말해놓고 범 한 마리도 못 죽이잖아.”
“나도 할 때는 하거든?”
호수와 세인이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시끄러웠는지, 방에서 자던 다른 일행들이 밖으로 나왔다.
“어, 뭐야. 나 없이 야식이야?”
“도건이 너도 초콜릿 먹을래?”
세인이 자기가 먹던 초콜릿을 내밀자, 도건이 그 손을 밀어내고 봉투를 뒤져서 컵라면을 하나 꺼냈다.
“컵라면 먹을래.”
“여기 수도 안 나와. 가스도 안 나오고.”
“그럼 컵라면은 왜 사 온 거냐? 사람 설레게.”
“생으로 먹어.”
“컵라면을 생으로 먹으라고?”
“얼마나 맛있는데. 일반 라면 생으로 먹는 것보다 훨씬 바삭바삭하고 맛있어.”
“아, 그래?”
도건이 컵라면 포장을 벗겨 생라면을 조각낸 후, 거기에 라면 스프를 뿌렸다.
한 조각 입에 넣고 아삭아삭 씹던 도건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세인을 돌아봤다.
세인이 ‘그렇지?’ 하는 우쭐한 눈빛을 지었다.
“와, 컵라면도 생으로 먹으니까 맛있네.”
“그렇다니까. 내가 없는 소리 하는 거 봤어?”
“어디 나도 먹어보자.”
주안이 손을 뻗자, 도건이 주안의 손등을 툭 때렸다.
“네 거 먹어. 나는 내 몫을 다 먹고 싶으니까.”
“치사하긴.”
“나랑 나눠 먹자.”
환이 컵라면 하나를 꺼내면서 말했다.
전기가 끊겨 전등을 켤 수 없어서 촛불 몇 개를 켜놓은 폐가.
그 어두컴컴한 곳에서도 평소처럼 행동하는 동료들을 보자, 제하는 술렁거리는 마음이 조금은 차분하게 가라앉는 걸 느꼈다.
만약 이들이 없었다면, 이렇게 평정심을 유지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때, 하루가 제하의 입에 불쑥 라면 조각을 넣어줬다.
반사적으로 라면을 받아먹는 제하를 보며, 하루가 물었다.
“걱정되느냐.”
“넌 걱정 안 돼?”
“그저 이제 무얼 해야 할지 고민될 뿐이지.”
하루가 담담히 흘린 말에, 제하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었다.
다음에 뭘 해야 할지.
그래, 지금 중요한 건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이런 곳에 틀어박혀 영상을 올린 게 누군지 고민한다고 해도 지금 알고 있는 것 이상의 것을 알아내지는 못할 것이다.
“하루 너는 늘 그렇게 콕 집는 얘기를 잘하더라.”
“그야 나는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온 고귀하고도…….”
“아, 그래, 그래.”
제하는 건성으로 대꾸하며 휴대폰을 켰다.
불티 고문 영상이 나온 후, 제하의 번호를 아는 범 사냥꾼들에게서 어떻게 된 일인지 묻는 전화와 메시지가 끊임없이 들어오는 바람에 휴대폰을 꺼둔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휴대폰을 켜자마자 그동안 쌓여 있던 메시지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 영상 어떻게 된 거냐? 제하 너 맞아?]
[제하 님, 왜 연락이 안 돼요?]
[전화 좀 받아봐.]
[범이 제하 씨 찾아다니는 것 같아. 아까 착호 본부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던 범을 봤거든.]
[방금 어떤 사람이 제하 씨 사진 보여주면서 이 사람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냐고 묻더라고요. 인간처럼 생기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범 같아서 모른다고 했어요.]
역시 범들은 제하를 찾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범들이 또다시 인간 사냥을 시작하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제하는 희망을 느꼈다.
그때.
쿠카아아아아-!
건물이 무너졌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