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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눈송이 (61/85)


61. 눈송이
2023.03.11.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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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자 흘러들어오는 기억.

잊고 싶지만 도저히 잊히지 않는, 까마득히 먼 옛날의 풍경이 환웅을 에워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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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의 중심부에서 자라는 거대한 신단수.

사계절 내내 푸른 잎이 지지 않는, 웅장하고 고귀한 거목.

신시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신단수는 생명이자 힘의 근원이었다.

그 때문에 고귀한 종족일수록 신단수에서 가까운 곳에 살았다.

신시의 많은 종족 중, 신단수와 가장 가까이에 사는 이들은 곰족과 범족이었다.

그 외에도 두두리족, 백여우족, 길달족, 뱀족 등등 7개의 종족이 신시 안에서 곰족, 범족과 어우러져 살아갔다.

믿는 신에 따라 다른 힘을 가진 그들은, 서로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주기도 하고 도움을 받기도 하며, 큰 다툼 없이 평화롭게 지냈다.

그러나 신시에 발을 딛지 못하는 미약한 생명들도 존재했다.

‘그것’ 또한 그랬다.

언제 어떻게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어느 순간 갑자기 존재하게 된 그것.

어린아이 주먹만 한 크기, 하얗고 보송보송한 털을 가진 ‘그것’은 저 멀리에 보이는 웅장한 신단수를 경외하고 소망했다.

작은 몸을 데굴데굴 굴려, 본능처럼 신단수를 향해 나아갔지만, 강력한 힘으로 보호받는 신시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신시를 둘러싼 숲에서, 아름다운 신시 안의 풍경을 선망하는 것 외에 ‘그것’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자그마한 체구 탓에, 풀과 나무가 앞을 가려 그조차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어느 날엔가, 나무에 올라가서 신시를 제대로 구경할 요량으로 데굴데굴 몸을 굴리다가, 다른 놈들의 눈에 띄고 말았다.

“이게 뭐야? 이거, 방금 혼자 굴러갔지?”

“털뭉치겠지.”

“아니야. 방금 이거 혼자 굴러갔다니까? 저 나무에 올라가려는 것처럼.”

‘그것’보다는 크지만, 신시에 들어갈 만한 힘을 갖지는 못한 놈들.

그중 한 놈이 ‘그것’을 집어 올렸다.

‘그것’은 공포에 질렸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눈만 깜빡거리며, 그들이 그냥 놓아주기를 간절히 바랄 뿐.

하지만 ‘그것’의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충분히 강하지 못해서 신시에 들어가지 못한 그들에게 ‘그것’은 가지고 놀기 좋은 장난감이었다.

“이놈, 이것 봐봐. 이렇게 해도 안 죽는데?”

“파삭 눌려 죽을 것 같은 놈인데, 의외로 생명력은 질기네.”

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공격하지도 못하는 ‘그것’을, 그들은 마음껏 괴롭혔다.

‘그것’을 괴롭히며, 그들은 자신들이 약하다는 울분과 열등감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강함은 아무 힘도 없는 ‘그것’ 앞에서만이었을 뿐.

“뭣들 하냐?”

나무를 하러 나온 얼룩범의 한마디에, 그들은 ‘그것’을 버려두고 꽁지가 빠지게 도망쳤다.

간신히 괴롭힘에서 벗어난 ‘그것’은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 얼룩범 앞에서 알짱거렸지만, 얼룩범은 ‘그것’을 귀찮게 굴러다니는 털뭉치로만 생각했다.

“이건 또 뭐야?”

다가오는 ‘그것’을 신경질적으로 차버린 얼룩범은 손톱을 길게 빼내 나무 몇 그루를 베어낸 후, “흐어엉!” 하고 포효했다.

그러자 어딘가에서 얼룩범보다 큰 체구를 가진 갈색곰이 나타났다.

“왜?”

“이것 좀 같이 들자고.”

얼룩범이 턱짓으로 쓰러진 나무들을 가리켰다.

갈색곰이 코웃음을 쳤다.

“하이고. 이것도 혼자 못 드셔서 날 부르셨어?”

“네놈이 일도 안 하고 먹기만 하다가 살만 찔까 봐 일부러 움직일 기회를 좀 준 거거든?”

얼룩범과 갈색곰은 티격태격하면서도 사이좋게 나무를 나눠 들고 신시로 돌아갔다.

그들은 자기들이 짊어지고 가는 나무에 하얀 털뭉치가 하나 붙어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

신시에 들어갈 때 약간의 타격감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죽지 않고 무사히 신시의 경계 안에 들어올 수가 있었다.

‘나는 생각보다 강한가 봐.’

아까 놈들이 지독하게 괴롭히는데도 죽지 않았다.

‘힘은 없지만 생명력은 질긴가 봐. 그렇다면…….’

이 신시에서 살아갈 자격이 있는 거 아닐까?

이렇게나 강한 몸을 가졌다면, 범족이나 곰족과 다를 게 없지 않을까?

문득 떠오른 오만한 생각을, ‘그것’은 얼른 지웠다.

아까 얼룩범은 도끼도 없이 손톱만으로 나무를 베었다.

갈색곰은 힘든 기색도 없이 나무 몇 그루를 어깨에 짊어지고 걸었다.

‘나는 그냥 쉽게 죽지 않을 뿐. 곰이나 범만큼 강한 건 아니겠지. 그래도 신시 안에 들어왔으니, 차근차근 노력한다면 언젠가 신시의 일원이 될 수 있을 거야.’

그런 소망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 작아서 존재감이 전혀 없었다.

도울 일이 없을까 여기저기 기웃거려도, “이거 뭐야?”, “누가 여기에 털을 흘리고 갔어?”, “저거 쓸어내.” 따위의 취급을 받는 게 고작이었다.

간혹 ‘그것’이 생명체라는 걸 깨달은 이들은 콧방귀를 뀌었다.

“이런 게 왜 신시에 있지?”

“여기서 태어났나? 누가 흘린 털뭉치가 생명을 얻었나?”

“이것 봐, 발로 차면 털이 파르르 떨려.”

“야, 불쌍하니까 그러지 마.”

“불쌍하긴 뭐가 불쌍해? 이건 지가 아픈 줄도 모를걸.”

“아프니까 털이 떨리겠지.”

“그냥 반사적으로 떠는 거야. 이런 게 무슨 아픔을 알아?”

“그런가?”

‘그것’이 받는 대우는, 신시 밖에서나 안에서나 달라진 게 없었다.

하찮은 생명체를 존중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너희는 운이 좋아서 그렇게 태어난 거고, 나는 운이 나빠서 이렇게 태어난 것뿐이야.

그런데 왜 나를 그렇게 대우하지? 나는 그저 태어나서 존재할 뿐인데, 왜 그렇게 비웃고 괴롭히는 거야?

단지 강해서? 너희는 강하고 나는 약하니까? 그래서 이런 식으로 대하는 거야?

그렇다면 나도 강해지면 너희를 그렇게 대해도 돼?

그래, 그렇구나. 그게 강자의 특권이구나. 강하면 약한 놈들을 그렇게 함부로 대해도 되는구나. 강하다는 건 그런 거고, 약하다는 건 이런 거구나.

그저 순수하게 신시를 열망하던 하얀 마음에 검은 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번화가에서는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변두리에서는 짐승들에게 쫓기는 생활을 하면서도, ‘그것’은 신시를 떠나지 않았다.

신단수가 내뿜는 생명력으로 가득한 신시는 몹시도 매혹적이어서, 아무리 괴롭힘을 당하더라도 떠나고 싶지 않았다.

한 번 떠나면 두 번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 해. 그리고…… 저 신단수를 내 것으로 만들겠어.’

굴러다니는 솜뭉치처럼 보이는 생명 안에서 싹튼 소망은 야망이 되었다.

+++

운명의 만남이 있던 그 날.

‘그것’은 언제나처럼 늑대에게 쫓기며, 자신의 야망을 이룰 방법을 찾아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때.

“캐앵!”

늑대가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굴러가는 걸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거대한 체구의 사내가 늑대가 있던 자리에 서 있었고, 방금 전까지 ‘그것’을 쫓아오던 늑대는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중이었다.

‘그것’은 눈을 깜빡거리며 거대한 사내를 올려다봤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회갈색 머리칼에, 호박색 눈동자를 가진 그는, 반듯한 이마에 오뚝하고 큰 코, 그리고 가늘고 길어서 매서워 보이는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사내가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기를 바랐지만, 사내의 시선은 정확하게 ‘그것’을 향해 있었다.

사내가 발을 떼자, ‘그것’이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러자 사내는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러더니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쭈쭈쭈. 이리 와.”

매서운 외모와 다르게 목소리는 나직하고 부드러웠다.

누군가 자신에게 그토록 다정한 눈빛과 목소리를 내주는 게 처음이었기에, ‘그것’은 저도 모르게 사내를 향해 통통통 달려갔다.

그리고 사내의 커다란 손바닥 위에 톡 올라섰다.

사내는 ‘그것’을 향해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귀엽구나. 이 근처에 사느냐?”

‘그것’이 그렇다고 하듯 통통 뛰었다.

“나는 타배라고 하는데. 네 이름은 뭐지?”

“…….”

“아, 말을 못 하나? 그럼 내가 이름을 지어줄까?”

“…….”

“너는 하얗고 귀여우니 눈송이가 좋겠다.”

눈송이.

‘그것’에게 이름이 생겼다.

하지만 ‘그것’은 그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무 연약해 보이는 이름이다.

“이곳은 위험하니, 나와 함께 가는 게 좋겠구나. 어때? 나랑 같이 살겠느냐?”

이제 눈송이가 된 ‘그것’은 잠시 망설이다가 통통 뛰었다.

그렇게 눈송이는 타배와 함께 신시를 살아가게 되었다.

.
.

“눈송이…….”

환웅의 입에서 서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런 이름을 가졌을 때도 있었지요.”

환웅의 콧등에 신경질적인 주름이 생겼다.

“짜증 나.”

아무 힘도 없었던 그때만 떠올리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힘이 없기에 당해야만 했던 수모를 잊고 싶은데, 모래알처럼 박힌 기억들을 전부 지울 수가 없었다.

“이 땅에 너희가 존재하는 한…….”

환웅은 부채를 움켜쥐었다.

“그 기억은 평생 나와 함께하겠지.”

그러니 지워버려야만 한다.

이 땅에서 내게 수모를 주었던 그 버러지 같은 놈들을 모조리 없애야만 한다.

그리고 이 땅을.

“내 아이들로 채워야지.”

그때는 갖지 못했던.

“내 가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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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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