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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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회동
2023.02.18.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범이 나타나서 인간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또 어느 날 갑자기 범이 습격을 멈췄다.
-“형님……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그리고 경태가 온 힘을 쥐어짜서 남긴 마지막 말.
-“불길해요……. 그러니까…… 형님…… 제발…… 제발 그저…… 살아남을 생각만…… 하세요…….”
그때는 경태가 죽는다는 생각에 흘려들었지만, 인제 와서야 경태가 한 말이 무겁게 다가왔다.
-“요새 범들 움직임이 좀 이상해요. 게다가 갑자기 실종되는 범 사냥꾼들도 늘어나고 있고요. 우리 호랑나비 중에도 갑자기 연락이 끊긴 녀석이 몇 명 있거든요.”
성진의 말을 듣고 착호를 공격하라고 하기 위해 경태를 불렀을 때도, 경태는 이상한 말을 했었다.
며칠 전에야 동철은 그때의 말이 떠올라서, 남아 있는 부하들에게 좀 알아보라고 시켰다.
말도 없이 그만둔 줄 알았던 호랑나비 팀원 중 상당수가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부하들은 말했다.
“경태, 그 멍청한 녀석도 눈치챈 걸, 나만 눈치 못 챘군.”
이 신시에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그 일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대장.”
동철은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부하가 동철에게 꾸벅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노크를 했는데 대답이 없으셔서, 혹시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들어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호랑나비를 떠나지 않고 머물러주는 부하들이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당연하다고 여겼을 일들이, 이제는 당연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동철의 불호령이 떨어질까 봐 어깨에 힘이 들어간 부하의 모습에 쓴웃음이 나왔다.
“그래, 무슨 일이냐?”
“아, 그것이……. 착호 녀석들이 묘한 걸 하는 것 같습니다.”
착호.
그 이름도 오랜만에 듣는다.
동철은 그날, 그러니까 동철의 세계에서 무언가가 무너져내린 그날, 죽어가는 경태를 짊어지고 찾아왔던 환을 떠올렸다.
동철이 부하들을 시켜 그들을 죽이라 했음에도, 그들은 일부러 경태를 이곳까지 데려다주었다.
경태의 죽음을 모르는 척하지 않았다.
“뭘 하고 있지?”
“제가 편의점에 가는 길이었는데, 갑자기 붙잡더니 범 사냥꾼이냐고 물어보면서 이런걸…….”
부하가 들고 있던 전단지를 내밀었다.
전단지에는 [범 사냥꾼들에게 알립니다.]라는 말로 시작되는 짤막한 내용의 공지가 쓰여 있었다.
범 사냥꾼들에게 알립니다.
작금의 사태에 대한 정보와 의견을 나누려고 합니다.
시간을 내어서 참석해주시기 바랍니다.
일시 : 1월 16일 오후 2시
장소 : 3구 구립 체육관 실내농구장
착호
작금의 사태라는 게 무엇을 말하는 건지, 어떤 의견을 나누고 싶은 건지, 공지만 봐서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동철은 착호가 왜 이런 방식으로 공지를 썼는지 알 것도 같았다.
‘정보가 알려지지 않았으면 하는 누군가가 있는 건가?’
그날 모인 범 사냥꾼들을 확인해보고, 중요한 정보를 말해도 좋을지 판단을 내린 후 얘기하려는 것이리라.
‘착호는 이 사태에 대해 아는 게 있는 건가?’
따지고 보면, ‘이 사태’라고 할 만한 일은 없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저 범의 습격이 줄어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며 좋아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철처럼 알려지지 않은 실종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걸 수상히 여기는 사람도 있으리라.
“대장, 어떡하실 겁니까?”
“글쎄.”
동철은 전단지를 책상 위에 내려놨다.
“생각을 좀 해봐야겠군.”
+++
제하는 하루의 말대로 인간들의 힘부터 모아보기로 했다.
딱히 범을 용서할 수 없어서는 아니었다.
언젠가는 후포를 향한 감정을 내리누르고 범과 협력해야만 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는 각오는 하고 있다.
다만, 인간끼리도 협력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범과 손을 잡을 수는 없는 일인 데다가, 어떤 식으로 범의 협력을 얻어야 좋을지도 알 수 없었다.
‘사실 우리 쪽도 아는 게 거의 없으니까…….’
다짜고짜 범을 찾아가서 “신시에 괴물이 있으니까 같이 협력해서 죽이자.”라고 말한다고, 그들이 오랜 세월 묵힌 원한을 거두고 함께 싸워줄 리는 없었다.
“타배는 배신하지 않았어. 가짜 타배가 한 거야.”라는 말을 쉽게 믿어줄 리도 없었다.
그러니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같은 범 사냥꾼들에게 괴물에 대한 정보를 주고, 그들이 아는 정보를 취합한 후, 협력하는 것뿐이었다.
모임 며칠 전부터 착호는 3구를 돌아다니며 괴물이 없는지 꼼꼼히 확인했다.
다행히 괴물처럼 보이는 건 없지만, 혹시 모를 일이기에 단단히 무장하고 3구 구립 체육관의 실내농구장에 와 있었다.
최근 범의 습격이 줄면서, 범 때문에 초토화된 지역을 재정비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다행히 3구는 아직 비어 있어서 별문제 없이 체육관을 사용할 수 있었다.
체육관 주위를 둘러보고 온 환이 제하의 옆에 서서, 앞에 줄 맞춰 늘어놓은 의자를 보며 물었다.
“몇 명이나 올까?’
“글쎄. 전단지 천 장을 만들었고, 그중 반 정도를 뿌렸으니…… 그래도 200명은 넘게 오지 않을까?”
“그 정도로 될까?”
“몇 명이 오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몇 명이나 우리의 말을 믿어줄지가 중요하지.”
환의 말에 대답한 건 하루였다.
“하긴. 믿어주는 사람이 많아야, 괴물에 대한 정보도 빠르게 퍼져나갈 테니까.”
괴물이 은밀하게 움직이고 신속하게 인간을 죽여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괴물에 대한 정보가 이상할 정도로 퍼지지 않았다.
범에 대해서는 그렇게 떠들어댔었는데, 괴물에 대해 떠들어대는 사람은 없었다.
끼이이-
오랫동안 관리하지 않아서 녹슨 체육관 문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첫 번째 범 사냥꾼인 줄 알고 돌아봤는데, 도건이다.
도건이 총으로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농구장을 가로질러 걸어왔다.
“곧 2시인데 아무도 안 왔네.”
2시가 약속이면 그전에 몇 명쯤은 도착해야 하는 법인데, 농구장에는 착호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오겠지.”
환은 그리 말하면서도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래, 뭐. 오겠지. 그럼 난 나가서 농구장 주변을 돌아볼게. 너희가 고생 좀 해라.”
범 사냥꾼들과 대화를 하는 건 하루와 제하, 환으로 정했다.
모두가 밀폐된 공간에 모여 있을 때 습격이 있으면 위험하기에, 나머지 일행은 밖에서 둘러보며 습격에 대비하기로 했다.
도건이 나간 후에도 한동안 농구장은 민망할 정도로 조용했다.
2시가 지나고, 2시 5분이 지나고, 2시 10분이 될 무렵.
끼이이이익-
체육관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뒤로 몇 명의 남녀가 따라 들어왔다.
가장 앞장서서 들어오는 사내의 모습을 확인한 제하가 눈을 부릅떴다.
‘동철……?’
절대 오지 않을 줄 알았던 사람이 이곳에 왔다.
아니, 어쩌면 반드시 올 것 같았던 사람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동철은 늘 제하를 눈엣가시처럼 여겼으니, 지금이 착호를 치기에 좋은 기회라고 여겼으리라.
환도 그렇게 생각한 듯, 활을 쥔 손에 힘을 줬다.
동철과 그의 부하들은 저벅저벅 농구장을 걸어왔다.
제하는 그가 가까이 다가와서 시비를 걸 줄 알았다.
하지만 동철 일행은 시비를 거는 대신, 제하와 가장 가까운 곳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동철이 고개를 들어 제하를 올려다봤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제하는 그가 시비를 걸러 온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설마…… 정말로 정보를 나누려고 온 건가?’
들리는 얘기로는 호랑나비 인원이 상당히 많이 줄었다고 하니, 정말로 정보를 알고 싶어서 온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제하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잠시 후 또 농구장 문이 열리며 5명 정도 되는 범 사냥꾼들이 들어왔다.
“이야, 착호를 이런 데서 다 보네.”
“요새 착호도 일 없죠? 어머, 호랑나비도 와 있었네.”
“어이구, 동철 형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들이 호랑나비와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또 한 무리의 범 사냥꾼들이 들어왔다.
2시 30분, 농구장에는 80명 정도 되는 범 사냥꾼들이 모였다.
제하의 예상보다 훨씬 적은 수였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하루의 말대로 믿어주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가 중요하다.
제하는 이 모임을 열기로 했을 때부터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오늘 이렇게 모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착호의 제하라고 합니다. 오늘 이렇게 모이자고 한 이유는, 여러분께 알리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범 사냥꾼들을 쭉 둘러봤다.
그들은 말없이 제하가 정보를 내놓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하는 담백하지만 무게감이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신시에, 무언가 있습니다.”
+++
번쩍-!
불티는 눈을 떴다.
“크윽…….”
머리와 얼굴, 그리고 팔에 끔찍한 통증이 느껴졌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제야 자신이 의자에 묶여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게……?’
기억이 혼란을 일으켜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없었다.
잠시 기억을 더듬은 후에야,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무언가와의 싸움에서 졌다는 걸 떠올렸다.
“제길……!”
불티는 욕설을 뇌까리며 팔에 힘을 줬지만.
“으아아아악!”
팔 전체를 불로 지지는 것 같은 통증 때문에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저런……. 많이 아프지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티는 눈을 부릅뜨고 정면을 노려봤다.
크고 어두운 방, 그림자가 진 구석에 무언가가 있었다.
“환웅…….”
불티가 으르렁거리듯 이름을 부르자, 그림자 속에서 환웅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나처럼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 눈가를 여유롭게 휜 채 사박사박 걸어왔다.
이윽고 불티의 앞에 선 환웅이 부채를 내리며 싱긋 웃었다.
“우리, 서로 나눌 이야기가 있지요?”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