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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참을 수 없는 것 (1) (56/85)


56. 참을 수 없는 것 (1)
2023.02.04.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제하는 지금도 울지 않는다.

하지만 하루의 눈에는 제하가 주저앉아 펑펑 우는 것처럼 보였다.

오래전 손님 오는 날 결계 밖으로 나온 후포에게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도망친 어린 소년이, 제 부모의 시신을 앞에 두고 절규하는 것처럼 보였다.

“알아. 뭔지 알 수도 없는 위험한 상대를 두고서 이런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고민하는 내가 한심…….”

“제하야.”

하루는 변명하듯 말하는 제하를 끌어안았다.

그 어린 소년이 제 슬픔 꾹꾹 눌러 참는 걸,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제하가 신시를 위해 희생할 필요는 없었다.

제하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그저 부모를 잃은, 안타까운 아이일 뿐이었다.

“한심하지 않다. 너는 한심하지 않아, 제하야. 그게 왜 한심한 일이냐. 신시를 구하고 싶다는 마음도, 남을 구하겠다는 결심도, 결국 다 사사로운 감정에서 시작된 것을.”

하루는 제하의 등을 토닥거렸다.

오래전, 인왕산 범바위 앞에서 행복하게 웃을 줄도 알았던 소년의 등을, 애정을 담아 두드리며 말했다.

“미워하고 싶으면 미워해도 된다. 미운 것이 당연하지. 미워하거라. 나도 함께 미워해 주마. 굳이 범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겠느냐. 인간들의 힘부터 모으자. 그러면 된다. 그래, 그러면 되지.”

하루의 음성이 바람결을 타고 내려가, 바로 아래에 있는 호수의 창문을 통해 들어갔다.

아까부터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소리를 듣던 호수는 한숨을 삼켰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못 들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지만, 범의 힘을 갖게 된 호수의 귀에는 그들의 대화가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들려왔다.

‘제하야…….’

호수는 제하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 제하도 피해자였지.’

제하의 아버지가 범이라는 건 중요하지 않다.

제하에게 아버지는 그저 아버지일 테니까.

그 아버지를, 후포가 죽였다.

범의 대장이 제하의 원수인 것이다.

그런데도 제하는 범과 힘을 합치려 했다.

신시를 지키기 위해, 사적인 복수심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난 그런 애한테 무슨 소리를 지껄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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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살 타워는 신시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고, 또한 가장 깊은 건물이기도 했다.

주차장은 지하 15층까지지만, 그보다 더 깊은 지하층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이살 타워 가장 깊은 지하층은 육중한 철문으로 막혀 있었다.

환웅은 가장 높은 층에서 가장 깊은 층까지 이어지는, 환웅만이 탈 수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맞은편에 보이는 철문에 다가가서 손바닥을 대자, 철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철문 안에는 관 같은 것들이 여기저기로 규칙 없이 뻗어 있었다.

그 관들은 이살 타워 중심에 감싸여 있는 신단수에서 내린 뿌리로, 그 뿌리는 대부분 신시 전 지역에 뻗어 나가 있었다.

착호가 A 백화점 지하에서 목격한 관도, 바로 신단수의 뿌리였다.

뿌리 중 일부는 밖으로 뻗어 나가지 않고 이살 타워 지하에 아무렇게나 뻗어 있었는데, 그 끝에는 벌레의 알처럼 둥글고 반투명한 것들이 잔뜩 맺혀 있었다.

반투명한 껍데기 안에는 기괴하게 생긴 생물들이 자라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거의 완성되어서 발끝을 꿈틀꿈틀 움직이는 것들도 있었다.

“내 아이들.”

환웅은 넓은 부화실에 가득한 알들을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내 사랑스러운 아이들.”

환웅이 행하는 모든 것이 바로 이 아이들을 자라게 하기 위해서였다.

환웅의 살을 내어서 만든 알.

생명이 없는 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생명력이 넘치는 것을 제물로 바쳐야만 했다.

그 생명력 넘치는 것이 막 흘린 혈액이라는 걸, 환웅은 아주 오래전에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환웅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이 신시를 만들고 신단수를 세웠다.

신시는 바로 환웅의 아이들을 위한, 거대한 식량 창고였다.

사실은 결계가 깨져서 범들이 등장하기 전부터, 환웅은 은밀하게 인간을 죽여서 피를 뿌려 신단수에 양분을 제공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정체를 드러낼 수가 없기에, 실종이나 살인으로 위장할 수 있을 만큼만 죽일 수밖에 없었다.

환웅은 인간들이 위기의 순간에 어떤 힘을 낼 수 있는지 아주 잘 알았기에,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인간들을 자극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게다가 알을 만들어내느라 힘을 많이 소진한 상태이기도 했다.

“멍청한 범들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요.”

그러던 때에 범의 등장은 환웅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범이 신시에 내려왔다는 걸 알게 된 순간, 모든 계획이 세워졌다.

범을 이용하자. 그때처럼.

범들은 아주 잘해주었다.

범들이 죽인 인간이 흘린 피는 땅에 스며들어, 그 속에 뻗어 있는 신단수 뿌리의 양분이 되었다.

몇 달에 한 번씩만 부화하던 환웅의 아이들은 한 달에 몇 명씩 생명을 얻어서 알껍데기를 깨고 나왔다.

그 아이들이 어둠을 타고 돌아다니며 인간들을 마구잡이로 죽여도, 인간들은 그걸 전부 범의 탓으로 돌렸다.

“그런데…….”

환웅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왜일까요?”

며칠 전에 내려왔을 때와 알의 수가 비슷하다.

환웅은 무표정하게 부화실 천장에서부터 불규칙하게 휘어져 내려온 뿌리 사이를 천천히 거닐었다.

완성되기 직전의 알 앞에서 멈춘 환웅은 그 알을 손으로 쓰다듬다가 돌연 모습을 바꾸었다.

검은 머리칼이 금발로, 갸름한 턱선이 넓고 단단하게, 호리호리한 육체가 약간 살집이 있는 남성의 것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 모습은 환웅에게 이름을 받은 비익이 얼마 전에 먹어치운 범 사냥꾼이다.

포식한 대상으로 변신하는 능력은 환웅의 것으로, 아이들에게 자신의 힘을 주었기에 그들과 연결되어 있는 환웅은 그들이 섭취한 대상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이름 받은 아이들에 한하여.

아직 괴물의 모습인 아이들과는 연결이 강하지 않아서, 명령을 따르게 하는 게 고작이었다.

환웅은 범 사냥꾼으로 변신한 채로 이살 타워를 벗어나, 불티와 마로에게 빌려준 건물로 향했다.

약속대로라면 지금쯤 이 건물은 인간들의 비명과 그들이 흘린 피비린내로 가득해야 했다.

그것이 환웅과 마로의 계약이었다.

인간을 마음껏 괴롭힐 장소를 줄 테니, 그곳에서 그들이 흘리는 피가 끊이지 않게 해라.

고통과 절망, 증오 같은 감정에 휩싸인 인간이 흘리는 피는, 아주 양질의 양분이 되었다.

그 피에 담긴 어둠이 짙을수록, 그 피를 받아들인 아이들은 더욱 강해졌다.

‘그런데…….’

환웅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

“왜 텅 빈 걸까요?”

지하 감옥이 텅 비어 있었다.

“또 범 사냥꾼들이 와서 구해준 걸까요?”

환웅은 바닥에 떨어진 자물쇠를 집어 들었다.

날카롭게 그은 자국.

범 발톱이다.

“흐응…….”

환웅은 다른 자물쇠도 일일이 주워서 확인했다.

범 발톱, 범 발톱, 범 발톱.

그 모든 자물쇠를 잘라버린 게 범 발톱이라는 걸 확인할 때마다, 환웅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환웅은 마지막 자물쇠를 집어 올려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불현듯 기분 나쁜 기억이 떠올랐다.

-“이건 또 뭐야? 이거, 살아 있는 거야? 오, 살아 있네. 야, 이리 와봐. 이거 살아 있어.”

-“푸핫. 이게 뭐야? 짐승은 아닌 것 같은데…….”

-“야, 야. 도망친다.”

-“제까짓 게 도망쳐 봤자지. 응? 이것도 통증을 느끼나? 때려보자.”

-“오, 아파하는 것 같은데?”

-“아냐, 그냥 부르르 떠는 거겠지. 이런 게 무슨 통증 같은 걸 느끼겠어?”

작고 힘이 없기에 무시당했던 시절의 기억.

경멸과 조롱으로 가득한 눈동자들과 무자비한 괴롭힘, 비웃음.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그저 존재했을 뿐인데, 그저 작게 태어났을 뿐인데!

환웅이 아득 이를 갈았다.

최근 몇백 년간 잊고 있던, 까마득한 옛날의 기억이 환웅의 안에서 늪처럼 번졌다.

“너희들은 나를 또 무시하는군.”

지금까지의 부드러운 음성과 다른, 더 낮고 갈기갈기 찢긴 것 같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 몸과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 이딴 식으로 날 무시해?”

환웅의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그의 몸에서 스멀스멀 냉기가 흘러나왔다.

시퍼런 냉기가 지하 감옥 전체에 퍼져나갔다.

벽에 서리가 끼고 쩌적, 쩌적 갈라지기 시작했다.

환웅은 느릿하게 눈을 감고 천천히 심호흡하며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노력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지.’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어도, 무시당한 분노는 참기 어려웠다.

그러나 참아야 한다.

아직 열매를 맺은 아이들이 많지 않다.

씨앗을 잔뜩 뿌려뒀는데 수확할 것이 별로 없는 상황에서 섣불리 움직이는 것은 좋지 않다.

환웅은 충분히 강하지만, 자신의 강함을 믿고 무분별하게 행동하지 않을 냉정함이 있었다.

아이들이 전부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환웅이 살을 내서 뿌려서 심은 씨앗들이 하나하나 이름을 받아, 이 신시를 채울 때까지.

환웅은 냉기를 거둬들였다.

그리고 이름 받은 아이들에게 전했다.

“마로와 불티를 산 채로 잡아 오너라.”

+++

마로는 가로등 위에 팔짱을 끼고 서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체구가 큰 남자 한 명이 골목을 걸어가는 중이었다.

한 달도 넘게 인간을 먹지 않았다.

반드시 인간을 먹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오랜 세월 그림자의 세계에 갇혀 있느라 빼앗긴 힘을 되찾기 위해서는 정기적으로 인간을 섭취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 먹어야 한다.

‘그래, 먹자.’

마로가 손톱을 빼내려다가 멈칫했다.

-“감사합니다.”

지하 감옥에서 굳이 마로를 찾아와 감사 인사를 하던 여자아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성가신 인간 아이는 그냥 도망쳐도 되는데 굳이 인사를 하러 와서, 왜 사람 마음을 술렁거리게 만드는가.

마로는 살짝 길어졌던 손톱을 집어넣고 도로 팔짱을 끼었다.

그때, 마로의 뒤로 순식간에 다가온 거대한 인영이 마로를 찍어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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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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