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너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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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너의 이름
2023.01.07.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김 일병을 삼킨 그것이 중얼거렸다.
“백일.”
그것은 자신이 가야 할 곳을 알았다.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몸이라서 까드득까드득 여러 번 고개를 움직인 후에야, 그것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림자에 숨어 느리게 이동한 그것이 도착한 곳은, 이살 타워의 꼭대기 층이었다.
그것은 꼭대기 층에 있는 것이 자신이 찾는 사람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잠시 대기했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왔다.
“그럼 회장님,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회장님이 계셔서 우리 신시가 이나마 버틸 수 있습니다. 정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경찰청장, 시의원 등 신시에서 주요 요직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지만, 지금 이 순간 함부로 나서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 그냥 알 수 있었다.
굽실거리던 사람들이 사라지자, 그것은 그림자에서 나와 꼭대기 층의 방문을 열고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이살 타워의 주인 환웅은, 소파에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서 그것을 응시했다.
그것은 환웅의 앞에 멈추더니, 무릎을 꿇고 앉아 환웅의 허벅지에 뺨을 기댔다.
“제게 이름을 주세요, 아버지.”
환웅이 미소 지으며, 그것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귀. 네게는 그 이름을 주마.”
+++
표리를 찾아보기로 한 후, 제하는 하루와 함께 표리가 살던 집에 가봤지만, 아무도 찾을 수 없었다.
수확 없이 본부로 돌아온 제하는, 나머지 일행이 둥글게 둘러앉아서 범의 눈썹을 노려보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저기, 다들 뭐 하는 거야?”
“재미있어 보이는구나. 나도 끼워다오.”
제하와 하루가 동시에 말했다.
“오, 제하. 왔어? 얼른 이리 와서 앉아.”
도건이 엉덩이를 움직여 제하와 하루가 앉을 공간을 마련해줬다.
하루는 신이 나서 자리에 앉았지만, 제하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천천히 가서 앉으며 물었다.
“뭐 하는 건데?”
“고민하는 거지, 뭐. 저 범의 눈썹으로 타배의 과거를 제대로 알아낼 수는 없을까 싶어서.”
“표리는 찾았어?”
환의 질문에 제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도 없더라고. 하루 말로는 원래 있던 물건들도 다 사라졌대. 아무래도 집을 옮긴 게 아닐까 싶어.”
표리를 못 찾았다는 말에도 다들 크게 실망하지 않는 걸 보니, 쉽게 찾을 수 없을 거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나 보다.
제하는 그들 사이에 놓여 있는 범의 눈썹을 응시했다.
타원형의 잿빛 털 뭉치.
제하는 아직도 저걸로 전생을 볼 수 있다는 걸, 그리고 7명의 전생이 모두 똑같다는 걸 믿기 어려웠다.
어떻게 7명의 전생이 똑같을 수 있는 걸까?
하지만 무턱대고 믿지 않기에는, 제하가 척살검을 쥐었을 때나 꿈에서 본 것들이 있었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주안도 꿈에서 제하와 같은 것을 봤다.
타배가 아닌 타배가 범들을 학살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타배의 기억.
그 후로 제하와 주안의 상처가 회복되는 속도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힘도 전보다 강해졌는데, 그 힘이 원할 때가 아니라 아무 때나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통에, 한동안은 본부 안의 물건을 부수고 다녔다.
하루가 더는 안 되겠다며, 제하와 주안을 붙들어놓고 앉아서 정신 수행을 시키지 않았다면, 가구를 전부 새로 사야 하는 사태가 벌어졌을 것이다.
하루가 시킨 정신 수행이 도움이 될까 싶었지만, 의외로 도움이 되었다.
제하와 주안은 깨닫지 못했지만, 힘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건, 두 사람이 범이나 괴물, 혹은 꿈에서 본 타배의 기억 같은 걸 떠올릴 때였다.
하루한테 어깨를 맞아가며 수행한 덕에, 힘을 어느 정도 안정시킬 수 있었다.
“내가 저걸로 전생을 봤을 때, 타배는 그냥 영웅이었거든. 그런데 너희가 본 건, 또 다른 타배가 있는 거잖아. 범들을 학살한 타배. 아무래도 저게 보여주는 전생이 불완전한 것 같은데…… 저걸로 전생만 제대로 볼 수 있으면, 범이랑 곰이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확실하게 알 수 있지 않을까?”
세인의 말대로 범의 눈썹이 제대로 움직여준다면, 굳이 표리를 찾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모여 앉아 있다고 해서, 범의 눈썹을 제대로 다룰 만한 묘안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한동안 미간을 모은 채, 범의 눈썹을 노려봤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불현듯 포수가 울렸다.
최근에는 울리는 일이 거의 없는 포수 알람에, 그들은 반사적으로 일어나서 무기를 쥐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본부를 뛰어나가, 포수에 표시된 위치로 달려갔다.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는 호수와 주안이 가장 먼저 도착했고, 그다음에 제하와 하루가 도착했다.
포수에 표시된 위치는 커다란 상가 건물 뒤의 주차장.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호수는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있다.
저번에 호랑나비가 착호를 죽이기 위해 포수를 사용했을 때.
“함정일지도 몰라.”
호수가 작게 속삭이며, 사슬을 손에 감고 주위를 경계했다.
나중에 도착한 환과 세인, 도건이 숨을 몰아쉬었다.
세인이 물었다.
“뭐야? 어디 있어? 벌써 끝났어?”
“아무도 없었어.”
제하의 말에 세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뭐? 또 함정인 거 아냐?”
그들에게 같은 인간인 호랑나비 사냥꾼들이 함정을 파서 죽이려 했던 일은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다.
환도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일곱 명이 등을 붙이고 둥글게 서서 사방을 확인하던 중에, 주안이 말했다.
“피 냄새가 나. 한번 잘 맡아봐봐.”
그 말에 다들 냄새를 맡으려고 코를 킁킁거렸다.
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희미하긴 한데…… 피 냄새 같은 게 나.”
공기 중에 불길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도건이 어딘가로 걸어가더니 바닥을 가리켰다.
“피.”
다들 그리로 몰려가서 도건이 가리킨 곳을 확인했다.
점점이 떨어진 핏방울.
몇 방울 되지 않아서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그냥 넘어갈 수준의 흔적이었다.
“함정이 아니야. 뭔가 있었어.”
세인이 도건을 돌아봤다.
“범일까?”
“범이 아니면 뭐겠냐?”
제하가 중얼거렸다.
“괴물일 수도 있어. 지금 이 신시에서 사람을 죽이는 건 범뿐만이 아니야.”
괴물을 상대해본 주안과 하루의 눈빛은 무겁게 가라앉았지만, 호수와 세인, 환과 도건은 아직 괴물을 본 적이 없기에 그리 긴장한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곰의 힘까지 깨어나서 전보다 훨씬 강해진 제하와 주안이 왜 저렇게 긴장하는지 의아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근처를 둘러봤지만 핏자국 외에는 더 이상 발견한 것이 없었다.
혹시나 해서 상가 1층의 경비실에 찾아가 봤지만, 경비원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고 했다.
“CCTV에 찍힌 건 없나요?”
주안의 질문에 경비원은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주차장 쪽 CCTV는 고장 난 지 오래라서…….”
아무 소득 없이 본부로 돌아가는 길에, 제하가 말했다.
“요새 범들이 인간을 습격하는 일이 줄었잖아. 예전에는 뉴스나 인터넷 방송에도 범이 습격하는 장면을 찍어서 내보내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그것도 뚝 끊겼고.”
도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확실히 끊기기는 했지. 그런데도 실종자가 계속 생긴다는 얘기가 있는데…… 방금 전의 상황이 그런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네. 범들이 방식을 바꾼 건가? 인간을 괴롭히지 않고 순식간에 먹어치우는 방식으로?”
환의 말에 제하가 고개를 저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범이 아닐 수도 있어. 저기 있던 사람이 괴물을 봤고, 습관적으로 포수를 눌렀는데 도망칠 기회도 없이 잡아먹혔을 가능성.”
“하긴. 꼭 범이 나타날 때만 포수를 누르라는 법은 없으니까. 괴물 같은 걸 보면 자연스럽게 포수를 눌러서 도움을 청하겠지.”
제하의 심각한 표정과 달리, 세인의 표정은 평화로웠다.
괴물과 싸워본 적이 없기에,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모르는 것이다.
“다들 잘 들어. 괴물은 정말로 강해.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공격을 해올지 짐작도 할 수 없고. 괴물마다 전부 다른 능력을 가진 것 같거든. 그러니까 포수가 울렸을 때, 전처럼 시간 되는 사람끼리 달려갈 생각하지 마. 절대로 그러면 안 돼.”
제하가 걸음을 멈추고 일행을 돌아봤다.
“반드시 우리 일곱 명이 같이 다녀야 해. 반, 드, 시.”
제하의 절박한 표정보다도 그들을 더 섬뜩하게 만든 건 주안의 중얼거림이었다.
“그런다고 이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범을 만나서 싸운 것도 아닌데, 본부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렇게 본부 앞에 도착했을 때, 반가운 손님이 찾아와 있었다.
+++
연희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고 자신의 동생인 연우를 꽉 끌어안았다.
이제 7살인 연우는 엄마가 보고 싶다며 내내 울었는데, 그 소리는 철창 안에 갇힌 사람들을 짜증 나게 했다.
같은 철창에 있던 사람들은 욕설을 뇌까리며 연희에게 눈치를 줬다.
연희도 이제 고작 13살이었지만, 여기서 사람들에게 밉보이면 어떤 취급을 받을지는 눈치껏 알 수 있었다.
“울지 마, 연우야. 울지 마.”
연희는 몇 번이나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누나아아. 엄마…… 엄마 보고 싶어어어어.”
“아, 거 좀! 누구는 엄마 안 보고 싶나? 입 좀 닥쳐!”
아버지뻘의 남자가 버럭 외치는 소리에, 연희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다들 배고픔과 두려움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범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와서 갇혀 있는 사람을 한 명 끄집어내 끔찍한 고문을 하곤 했다.
고문을 받고도 살아남으면 도로 철창에 집어넣었고, 죽어버리면 그 자리에서 먹어치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며칠 전부터 그런 일이 끊겼다.
범들이 찾아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마냥 기뻐할 수도 없는 일이, 이대로 가다가는 다 굶어 죽게 생겼다.
물 한 모금, 밥 한 숟가락 먹지 못한 사람들은 점점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덜컹-!
그때, 오랜만에 지하 감옥의 문이 열렸다.
잿빛 범과 노란 범이 터벅터벅 걸어 들어오는 모습에, 다들 숨을 죽였다.
어린 연우도 범들이 나타났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 울음을 멈추고 연희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두 범은 제일 가까이에 있는 철창을 두 손으로 잡았는데, 그게 하필이면 연희와 연우가 있는 철창이었다.
연희는 연우를 꽉 끌어안고 몸을 움츠렸다.
“하, 씨. 배고파 죽겠는데, 뭔 상황을 지켜보라는 거야? 야, 뭐로 먹을래?”
“아무거나 하나 꺼내.”
노란 범이 철창 안쪽을 들여다보며 짓궂은 눈빛을 지었다.
“이봐, 인간들. 네놈들이 골라봐라. 우리가 누구를 먹어야 배불리 먹을 수 있을까?”
연우에게 욕설을 내뱉었던 남자가 얼른 대답했다.
“거, 거기! 그 꼬맹이를 드세요! 거기, 범님 가까이에 있는 그 녀석이요!”
남자의 손가락이 제 동생을 가리킨다는 걸 깨달은 연희가 연우를 안은 팔에 힘을 주고 눈을 질끈 감았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