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 허서 (34/85)


34. 허서
2022.09.03.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하! 아니지. 네가 나래일 리가 없지. 하하하.”

하얀 범이 머리에 손을 대고 하하하, 웃는 모습을, 주안은 멍하니 올려다봤다.

하얀 범의 행동에는 어딘지 모르게 연극배우 같은 구석이 있었다.

“그런데 왜…….”

하얀 범이 다시 킁킁거렸다.

“나래 냄새가 나지?”

“나래를…… 알아?”

“당연히 알지. 그 애가 얼마나 강하고 얼마나 특이했는데. 몇 년 전부터 인간 꼬마가 귀엽다면서…… 아! 네가 그놈이구나.”

하얀 범이 주안의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주안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하얀 범의 노란 눈동자에는 살기가 없었다. 그는 그저 신기하고 재미있다는 듯, 주안의 얼굴을 살펴보기만 했다.

그런 하얀 범이 정말로 인간처럼 보여서, 주안은 당혹스러웠다.

나쁜 범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나래처럼 인간을 좋아하고, 거의 인간에 가까운 범들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최근 만난 범들이 너무 악독해서 잊고 있었다.

나래와 범을 같은 종족이라고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하얀 범은 정말이지, 인간 같다.

이 범이 정말로 인간을 잡아먹을까?

그렇게 살육하고 고문하며, 인간을 괴롭힐까?

“나래가 널 알게 된 후로, 늘 네 얘기뿐이었지. 요만하고 귀엽다나?”

하얀 범이 손가락 한마디 크기를 만들어 보였다.

“그렇게까지 작았던 적은 없는데…….”

주안이 가까스로 내뱉은 말에, 하얀 범이 껄껄껄 웃었다. 이번에도 마치 연극배우처럼 과장된 웃음이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주,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주안.”

“오, 그래. 주안. 그런 이름이었지. 나는 허서라고 하는데, 나래가 널 만나서 내 얘기를 하진 않았느냐?”

“……않았는데.”

“이럴 수가! 나래가 범 중에 제일 좋아하는 게 난데…….”

주안은 범의 표정이 이렇게 다양할 수도 있다는 걸, 새삼스레 알게 되었다.

나래는 잘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지만, 주안에게 나래는 ‘범’이 아닌 연인이었다.

“그래서, 나래는 어디 있지?”

허서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아무래도 허서는 나래와 상당히 친한 사이인 듯했다.

그에게 나래의 죽음을 말하기가 쉽지 않아서 한참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말했다.

“나래는…… 죽었어.”

“뭐?”

허서가 벌떡 일어났다.

흉흉하게 퍼지는 그의 살기에, 주안도 얼른 몸을 일으켰다.

뼈 마디마디가 부서질 듯 아팠다.

지금껏 다정했던 허서의 눈동자가 차게 가라앉았다.

“설마…… 네놈이 죽였나?”

“그럴 리가 없잖아.”

“아니, 방금 너는 우리와 같은 힘을 사용했지. 나래를 죽이고 그 힘을 빼앗은 거냐?”

“……범을 죽이면 그 힘을 빼앗을 수 있어?”

“그거야……!”

거기까지 말하고 허서가 입을 다물었다.

살기로 가득했던 그의 노란색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없지.”

“응. 그럴 수 없는 게 당연하잖아.”

“그럼 왜 네가 범의 힘을 사용하지? 설마…… 잡종이냐?”

잡종.

표리도 제하를 보며 ‘잡종’이라고 했었다.

“아니야. 나도 어떻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어. 나래가 날 지키다가 죽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주안은 자신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이 안에 나래가 있었어.”

“……그거, 그, 무슨 드라마에서 그런 말을 하던데. 그 안에 너 있다고.”

이제야 주안은 허서가 왜 가끔씩 연극적인 태도를 보이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허서는 TV를 많이 보나 보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깨달음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째서, 범을 앞에 뒀는데도 이렇게까지 긴장이 안 되는 걸까?

어째서, 범과 싸운 후인데도 TV 드라마 대사 따위를 떠올리는 걸까?

어째서…….

‘나는 저 범이 밉지 않은 걸까?’

허서가 다가왔다.

“누가 나래를 죽였지? 범 사냥꾼이냐?”

주안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불티라는 범이 죽였어. 문신이 있는…….”

허서의 경악한 표정이 주안의 말을 끊었다.

주안은 허서가 왜 이렇게까지 놀라는지 알 수 없었다.

인간을 좋아하는 범들은 죽이기로 한 것 아니었나?

그렇다면 나래는 가장 먼저 죽여야 할 범이었다. 인간을 좋아할 뿐 아니라, 사랑까지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허서의 표정을 보면, 범이 범을 죽이는 일 따위는 절대 일어나지 않고, 결코 일어나서도 안 될 일인 것 같았다.

“하, 하, 하.”

이윽고 허서가 관자놀이에 손을 대고 어색하게 웃었다.

“재미있는 농담이었어. 깜빡 속을 뻔했네.”

“아니, 정말이야. 불티가 나래를 죽였어. 아니지. 불티가 날 죽이려 했는데, 나래가 날 지키다가 죽은 거지.”

허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거짓말 마! 불티가 왜 나래를 죽여? 그 두 녀석은 친했다고!”

“……그래? 죽일 때 보니까 그렇지도 않던데.”

“아니, 아니,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불티가 나래를 죽일 리가 없어.”

혼란에 빠져서 고개를 젓는 허서를, 주안은 묵묵히 응시했다. 유독 하얀 얼굴 위의 새하얀 머리카락이 슬프게 흔들렸다.

이윽고 허서의 손이 올라가 그의 눈을 덮었다. 그는 잠시 그 자세로 멈춰 있었다.

주안은 그가 울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비록 흐르는 눈물은 없을지라도, 그의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윽고 그의 입술 사이로 갈라지고 쉰 음성이 흘러나왔다.

“나래가 죽었다고.”

“응.”

“불티가 죽였다고.”

“응.”

“……하아. 불티, 이 미친놈이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지?”

“미친 짓이야? 불티가 나래를 죽인 게?”

“당연하지!”

허서가 버럭 외치며 다가와서, 주안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우리는 절대로 동족을 죽이지 않아!”

“인간을 좋아하는 범은 죽이는 거 아니었어?”

“누가 그래?”

“불티.”

“하!”

허서가 기막힌 듯 숨을 토해내며 주안을 거칠게 내려놨다.

분노해서인지, 허서의 머리 위로 하얀색 호랑이 귀가 나타났다.

그의 눈매가 가늘고 흉포해지며, 그의 송곳니가 입술 밖으로 삐져나왔다.

“불티, 이 미친놈을 잡으러 가야겠군! 너, 불티가 어디 있는 줄 알아?”

“나도 알고 싶어.”

크르르르-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가 골목을 채웠다.

허서는 콧등을 찡그리고 주안을 노려보다가, 검지로 주안의 뒤쪽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아까 허서와 하라가 잡아먹으려 했던 남자가 기절해 있었다.

허서와 주안이 싸우는 도중에 도망치려다가, 허서의 발길질에 당해서 쓰러진 것이다.

“그놈은 아까 어떤 여자를 덮치려다가, 우리한테 들킨 놈이야.”

“어?”

“우리 범들은 싫다는 여인을 억지로 덮치지 않지. 너희 인간은 어떠냐?”

말문이 막힌 주안을 보며 히죽 웃은 허서는, 검은 안개와 함께 주안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제 이 골목에 남은 건 주안과 기절한 남자뿐이었다.

주안은 깨어날 것 같지 않은 남자를 흘끔 돌아본 후, 바닥에 떨어진 창을 집어 든 후 천천히 골목을 빠져나갔다.

골목을 완전히 벗어난 후, 주안은 자신의 창을 내려다봤다. 창 손잡이가 완전히 너덜너덜해졌다.

“하아. 무기를 또 구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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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안과 헤어졌던 골목으로 돌아가던 도건은, 반쯤 부러진 창을 들고 걸어오는 주안과 마주쳤다.

주안은 도건보다는 상태가 나았지만, 얼굴이나 팔에 상처가 많았다.

“살아 있네.”

도건의 말에 주안이 빙그레 웃었다.

“너도.”

주안이 허서의 목을 가져오지 않은 걸 보면, 아무래도 저쪽 싸움에서 이긴 건 허서인 것 같다.

하라의 말대로였다.

-“네 동료라면 걱정하지 마. 허서는 아무 인간이나 죽이지 않으니까.”

-“아무 인간이라니……? 그럼 어떤 인간을 죽이는데?”

-“글쎄. 어떤 인간을 죽일까?”

하라는 도건을 죽이지 않았다.

도건은 죽음을 각오하고 눈을 감았지만, 하라는 도건의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말했다.

-“나는 비겁한 배신자는 싫어하지만, 당당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녀석은 싫어하지 않지. 집에나 가라, 꼬맹아. 늦은 밤에 돌아다니다가 호랑이랑 마주치지 말고.”

살려주겠다는데, 굳이 죽여달라고 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도건은 황급히 일어나서 주안에게 달려가려고 했다.

그런 도건의 등에 대고, 하라가 그리 말한 것이다.

허서는 아무 인간이나 죽이지 않는다고.

도건은 흘끔 주안의 표정을 살폈다. 주안은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도건 역시 마음이 복잡했기에, 평소처럼 주안에게 농담을 건넬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그들은 각자의 생각에 빠져 내내 침묵을 지켰다.

+++

마로는 7층 건물의 옥상에서 불티를 발견했다.

불티는 옥상 난간 위에 서서 멀리에 보이는 이살 타워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로도 훌쩍 불티의 옆에 올라가서 섰다.

“뭐 하냐?”

“저거 말이야.”

불티의 검지가 이살 타워의 중심에 있는 거대한 나무를 가리켰다.

이살 타워는 그 나무를 감싸듯이 세워져 있어서, 멀리서 보면 나무를 위한 거대한 온실처럼 보였다.

“옛날에 우리 신시에 있었던 신단수랑 비슷하지 않아?”

“흥, 그럴 리가. 저건 하잘것없는 인간 놈이 취미 삼아서 만든, 기분 나쁜 나무일 뿐이야.”

“그리고 우리는 그 하잘것없는 인간 놈에게 빌붙어서 살고 있지.”

불티의 자조적인 말을 들은 마로가 콧등에 주름을 잡았다.

불티는 백화점 지하의 싸움에서 범 사냥꾼들에게 큰 상처를 입은 후, 생각이 많아졌다.

“빌붙은 게 아니라 공생하는 거다, 불티. 공생.”

“공생이라면 그놈이나 우리나 서로 얻는 게 있어야 하잖아. 우리야 몸을 숨기고 마음껏 인간을 갖고 놀 장소를 얻을 수 있어서 좋지만, 그놈은 이런 짓으로 얻는 게 뭐지?”

그에 대해서는 마로도 할 말이 없었다.

환웅.

신시를 지배한 인간.

그는 부유하고 많은 인간의 존경을 받는, 부족한 게 없는 사내였다. 게다가 이상할 정도로 강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왜 인간들을 잡아다가 한곳에 모아 피 흘려 죽게 해달라는 요구를 한 걸까?

“처음에는 우리처럼 인간을 싫어할 이유가 있나 싶었거든. 그런데 인간들을 위해서 이것저것 만들어내는 걸 보면, 또 그렇지도 않단 말이지.”

처음에 인왕산에서 내려왔을 때만 해도, 인간들을 향한 분노가 눈 앞을 가려서 그저 인간들을 학살해 죽여야 한다는 열망뿐이었다.

하지만 실컷 인간을 죽이고 나자, 심장을 태울 것처럼 들끓던 분노도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분노가 있던 자리에, 의문이 들어섰다.

‘환웅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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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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