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포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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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포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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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포수 (1)
2022.08.13.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하루는 깊고 긴 잠을 잤다.
며칠이 지난 후에야, 굳게 감겨 있던 그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가며 잿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에어컨의 서늘한 바람이 하루의 머리칼을 스쳤다.
하루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가 거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반쯤 열린 문밖으로, 심각한 표정의 제하와 호수, 도건이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라면에 들어가는 달걀은 풀어헤치는 게 맛있다고 봐.”
제하의 말에 호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달걀은 라면이 거의 다 익어갈 때쯤 넣어서 그대로 익히는 게 최고야. 그걸 반으로 갈랐을 때, 반쯤 익은 노른자랑 면을 함께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 줄 알아?”
“오, 그건 좀 맛있겠네.”
도건의 말에 제하가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형…… 지금 호수 편드는 거야? 형도 지금까지 달걀을 풀어헤쳐서 먹었잖아.”
“아니, 뭐.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건 즐거운 일이니까.”
고작 라면에 들어가는 달걀 문제로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그들의 모습에, 하루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좋다,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저들은 무기를 잡고 사선에 뛰어들어 절박하게 싸우는 것보다, 저런 쓸데없는 문제로 다투는 게 어울리는 나이였다.
라면 끓이는 것, 어떤 영화가 재미있는지에 대한 것, 옷을 사는 것…….
그렇게 아무런 도움도 안 되지만, 그래도 함께 나누면 즐거운 문제들.
그런 이야기만 나누며 살 수 있는 세상이라면 좋을 텐데.
하루는 다시 눈을 감았다.
-“타배는 우리를 배신했어! 비열한 잡종.”
표리를 따라가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우리 일족은, 그리고 다른 일족들도, 전부 타배를 믿었지. 타배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더 안전한 신시를 위해 노력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우리의 장로님들은 모든 힘을 끌어모아서 그놈에게 축복까지 내려줬던 거야.”
하루는 이제 기억도 나지 않는 그때의 이야기가, 두두리 일족 사이에서는 대대로 전해지고 있었다.
-“우리는 그놈과 함께 싸웠지. 하지만 그놈은 전쟁에서 승리하자마자 우리를 버렸어. 곰족과 함께, 우리를 쫓아냈지.”
의문이 생겼다.
그래서 물었다.
-“인간들은 곰족의 후예다. 그런데 넌 인간을 위해 무기를 만들고 있지 않느냐?”
-“당시 타배가 곰족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알아? 범족에게서 곰족을 지켜주는 고맙고도 위대한 존재였어. 곰족이 아니라 타배족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였지.”
곰족은 보이지 않는 신보다 가까이에 있는 영웅을 믿게 되었다.
방어에 특화된 곰족과 달리, 범을 믿는 범족은 공격에 특화된 힘을 갖고 있었다.
혼혈인 타배는 그 두 힘을 모두 다, 완벽하게 갖춘 자였다.
그런 그가 곰족의 편에 섰다.
-“혼혈은 어느 한쪽의 힘만 갖고 태어나는데, 타배 그 잡종은 양쪽의 힘을 상급 수준으로, 완벽하게 갖고 태어났어. 그러면서도 아주 친절하고 다정하고 정의로운 척하고 다녀서, 처음에는 잡종이라고 무시하던 놈들까지도 그놈을 좋아하게 됐거든.”
범족도, 곰족도, 다른 일족들까지도 타배를 좋아하게 되었단다.
당시 수호자였던 후포보다도 타배의 인기가 더 높아졌기에, 그 전쟁에서 다들 타배의 편에 섰던 것이다.
하지만 타배는 배신했다.
전쟁이 끝나는 순간, 곰족을 제외한 다른 일족을 모두 신시 밖으로 쫓아냈다.
-“인제 그만 꺼져. 잡종 냄새가 묻은 놈이랑은 더 이상 할 얘기 없으니까.”
표리는 완고했다.
그러나 하루는 언젠가 이 증오로 가득한 두두리의 후손이 필요할 날이 올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설득했다.
그 아이들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그저 범들로부터 이 신시를 지키고 싶을 뿐이라고, 범들은 전쟁에 참여했던 너희를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 범들이 신시를 차지하면 너희 일족은 지금보다 더 살기 힘들어질 거라고.
표리는 망설이다가 자신이 만든 총을 하나 줬지만, 그뿐이었다.
함께 싸우자는 말에, 그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잡종을 치우면.”
그 완고한 태도에서, 그들 사이에 전해져온 이야기가 진실에 가깝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원래 상처를 준 이는 잊어도, 상처받은 이는 그 일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법이니까.
그렇다면 타배는 정말로 그토록 비열한 자였던 걸까?
기억이 온전치 않았다.
범의 눈썹을 가진 세인 역시 그들의 전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볼 수 있는 건 아닌 듯했다.
‘도대체 타배는 무슨 생각이었던 거지?’
세인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타배의 영혼을 가지고 태어난 듯했다.
‘하지만 나는 범바위인데…… 왜 내게서도 타배의 전생이 보이고, 왜 나 역시 타배의 기억이 있는 걸까?’
너무도 오랜 시간을 살아서 산산이 부서진 기억의 조각들.
세인을 만나면서, 아니, 어쩌면 7명이 모이면서부터 기억의 파편 속에서 내 것이 아닌 기억을 발견하곤 했다.
그것은 아마도 타배의 기억이리라.
모두가 같은 전생을 갖고 있다는 것도 이상한데, 범바위인 자신에게서도 그들과 같은 전생이 보인다는 건 더더욱 이상했다.
‘전생은 그렇다 쳐도…….’
하루는 여전히 라면에 넣는 달걀을 두고 심각한 토론을 펼치는 일행을 응시했다.
‘저 애들한테 표리에게 들은 말을 어떻게 전하지?’
저들은 타배를 범과 싸운 영웅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사실은 곰족의 부흥을 위해 범족과 다른 종족을 쫓아낸, 천인공노할 작자라는 걸 알게 된다면?
그래도 저들이 지금처럼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범들과의 전쟁을 계속할까?
혹시 타배의 기억이 온전히 떠올라, 그의 유지를 이어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타배의 유지…….’
만약 이 신시에 인간만 있었다면, 타배의 유지를 잇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인간은 곰족의 후예니까, 인간을 위해 범과 싸우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제 신시에 표리처럼, 다른 종족으로부터 이어진, 조금 다른 모습의 생명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만약 타배의 유지가 곰족 이외의 모든 것을 신시에서 지우는 거라면…….
“하루야?”
마침 돌아본 제하와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하루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이제야 깬 거야? 야, 인마. 너, 얼마나 잔 줄 알아?”
“그러냐.”
“그러냐, 가 아니야. 난 네가 다시 바위로 돌아가는 줄 알았다고.”
가까이 다가오는 제하를 보며, 하루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침대 옆에 멈춘 제하가 하루를 향해 손을 뻗었다.
길고 모양 좋은 손가락이 하루의 잿빛 머리카락을 사륵, 걷어 올렸다.
“너, 무슨 일 있어?”
걱정스레 묻는 선량한 호박색 눈동자를, 하루는 가만히 응시하다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 일도 없다. 그냥 피곤했을 뿐이야.”
+++
긴 장마가 끝나고 더운 여름이 시작된 8월의 어느 날.
이살 그룹에서 시민을 위해 앱을 하나 개발해 무료로 배포했다.
‘포수’라는 이름을 붙인 이 앱은, 일반 시민과 범 사냥꾼들이 모두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일반 시민이 알림을 보내면 가까운 곳에 있는 범 사냥꾼들에게 자동으로 위치를 전해주었다.
“범과 마주쳤을 때, 혹은 범일 것 같다 싶은 수상한 자를 발견했을 때, 여러분은 휴대전화의 이 전원 버튼을 딱 세 번만 누르면 되지요.”
앱을 발표하는 날, 환웅은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 말했다.
부채 뒤에 감춰진 입술이 잔혹한 미소를 띠고 있다는 걸, 아무도 몰랐다.
“그러면 가까운 곳에 있는 범 사냥꾼들이 여러분을 구하러 달려와 줄 거랍니다. 아, 이건 범 사냥꾼들에게도 도움이 되지요. 혼자서 싸우기 힘들다 싶을 때, 전원 버튼을 딱 세 번 누르면 되니까요.”
앱을 켤 필요도 없었다.
휴대전화에 앱을 설치하는 순간, 휴대전화 기능과 연동되어 버튼만 누르면 곧바로 알림을 보낼 수 있었다.
기자회견을 끝내고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온 환웅은, 커다란 창문 밖으로 펼쳐진 신시를 내려다봤다.
독수리 같지만, 독수리가 아닌 기묘한 생물이 날아와 환웅의 어깨에 앉았다.
환웅은 독수리의 머리를 살살 긁어주며 중얼거렸다.
“이 앱은 모두가 사용할 거예요. 다들 어떻게든 살고 싶을 테니까.”
“키이이이.”
독수리가 보채듯 기괴한 소리를 내자, 환웅이 싱긋 웃었다.
“조금만 기다려요. 곧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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앱 ‘포수’의 배포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시에 사는 시민 대부분과 범 사냥꾼들의 휴대전화에 ‘포수’가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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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수, 써본 사람?
⌞나, 써봄. 대박.
⌞정말 바로 옴?
⌞ㅇㅇ 바로 옴. 덕분에 목숨 구함.
환웅, 진짜 대단하지 않음? 나 같으면 돈 주고 팔 텐데.
⌞맞음. 이살에서 제일 먼저 개발해서 다행인 듯.
⌞다른 기업이었으면 범 사냥꾼들에게는 무료로 배포하고, 일반 시민에게는 돈 주고 팔았을 거예요. 아니면 매달 이용료를 받든가.
⌞맞아요. 우리처럼 힘없는 시민들은, 이용료를 내서라도 범 사냥꾼을 바로바로 부르고 싶어 할 테니까요.
⌞앱에 광고도 없는 거 앎? 환웅 말로는 광고 같은 거 붙이면 앱 느려질까 봐 안 붙였다고 함.
⌞우리 환웅 님, 적게 일하고 많이 버셔야 할 텐데. 이렇게 나눠주기만 해서 어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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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시민들은 ‘포수’ 앱에 열광했다.
그건 범 사냥꾼들도 마찬가지였다.
범들은 빠르게 나타났다가 빠르게 사라져서, 범 사냥꾼들이 도착했을 때는 상황이 다 끝난 후일 때가 많았다.
하지만 ‘포수’ 덕분에, 전보다 실적이 좋아졌다.
알림이 울리면 눌러서 위치를 확인하고, 그곳으로 달려가기만 하면 됐다.
근처에 있는 범 사냥꾼 여럿에게 동시에 알림이 가기 때문에, 여럿이 힘을 합쳐 범과 싸울 수 있어서 상처를 입거나 사망하는 일도 줄었다.
사람들은 ‘포수’가 완벽한 앱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랬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