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미안해.
(21/85)
21.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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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미안해.
2022.06.04.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아직 운영 중인 병원을 간신히 찾았다.
크지 않은 개인 병원의 나이 든 의사는, 피칠갑을 하고 찾아온 7명의 모습에 놀란 듯했지만, ‘범 사냥꾼’이라고 하자 말없이 병실 하나를 내주었다.
“여기는 나밖에 없어서, 제대로 치료받으려면 큰 병원으로 가야 할 거요.”
따로 수술실이 있는 병원이 아니라서, 응급처치 수준의 치료만 받을 수 있었다.
복부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도건은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고, 범을 잡아먹었다는 남자는 아직도 깨어나지 못했다.
제하는 자신의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총알이 관통했었는데…….’
의사가 치료를 위해 제하의 상의를 걷었을 때, 배에는 약간의 상처만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욱신거리는 통증은 아직 남아 있고, 피를 많이 흘려서 기력이 좀 떨어지긴 했지만, 총을 맞은 것 같은 고통은 이미 사라졌다.
‘내 몸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강한 범들은 상처를 빠르게 치료하는 능력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다.
‘하지만 난 아니었는데…….’
처음 인왕산에서 후포에게 당했을 때는, 한참을 앓았다.
상처가 완전히 낫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고 보니, 요새는 다쳐도 상처가 좀 빨리 낫는 것 같긴 했어. 하지만…… 이렇게 이상할 정도로 빨리 낫진 않았는데.’
제하는 최근 자신이 비약적으로 강해지는 걸 느꼈다. 성장하는 속도가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건 제하뿐이 아니라 하루나 도건, 주안도 마찬가지였다.
환과 세인은 이번에 합류한 거라서, 그들의 성장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지금 자신과 일행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범바위 결계가 깨지고 범들이 등장하면서부터, 신시가 좀 달라지고 있기는 해.’
범 사냥꾼들처럼 강한 힘을 가진 인간들이 등장했고, 능력을 끌어올리는 무기들이 나타났다.
‘이것도 그 영향인 걸까? 결계가 깨져서 내 몸에 흐르는 범의 피가 반응하는 걸까? 아니면…….’
제하는 병실 안에 있는 면면을 돌아봤다.
‘저들을 만나면서 더 강해지고 있는 걸까?’
만남이 특별한 하루야 그렇다 쳐도, 다른 일행을 처음 만나는 순간 느낀 그 친밀감은 무언가 이상했다.
보육원 시절에도, 성인이 되어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에도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그런 기분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이 사람들이 필요해.’
아니, 필요한 게 아니다.
‘이 사람들이 내 곁에 있어야만 해.’
그런 강력한 확신.
심지어 오늘 처음 보는, 범 잡아먹었다는 남자에게까지 그런 기분을 느꼈다.
“제하야. 좀 괜찮아?”
주안이 침대 옆에서 제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너무 괜찮아서 이상할 정도야.”
제하가 상의를 위로 올려서 자신의 상처를 보여줬다.
“거의 아물었어.”
제하의 말에, 호수를 제외한 모두가 제하의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심지어 도건까지도 배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며 다가와 제하의 배를 살펴보는 통에, 제하는 민망해졌다.
“아니, 그렇게들 자세하게 보진 마시고…….”
제하가 얼굴을 붉히며 상의를 내리려 하자, 세인이 억지로 잡아서 상의를 올렸다.
“왜? 좀 보자.”
“넌 그냥 그 이상한 털뭉치나 계속 가지고 놀지 그래?”
세인은 병원에 온 후로도 계속 잿빛 털뭉치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제하의 지적에 세인이 머쓱한 듯 털뭉치를 집어넣고, 허리를 굽혀 제하의 배를 관찰했다.
이러다가 아주 얼굴을 배에 집어넣겠다.
“야, 좀…….”
“와, 진짜네. 진짜 거의 아물었네. 정말로 총알이 관통한 거 맞아? 살짝 스쳤는데, 네가 엄살 부린 거 아니고?”
제하가 세인을 지그시 노려보자, 세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왜? 괜찮아. 엄살 좀 부려도 이 형님은 다 이해해줄 수 있단다.”
“뭐만 하면 자기 지키라고 하는 겁쟁이 주제에.”
“너와 달리 이 몸은 국가적인 재원이라서.”
제하와 세인이 티격태격하는 동안에도, 묵묵히 제하의 상처를 살펴보던 주안이 입을 열었다.
“범의 능력이야.”
모두가 주안을 돌아봤다.
“범의 능력 중에 상처를 빠르게 치료하는 능력이 있거든.”
제하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자신의 아버지가 범이라는 걸, 아직 일행에게 알리지 못했다. 일행은 다들 범에게 좋지 않은 일을 당했다.
그런 사람들에게 범의 피가 반쯤 섞였다는 걸 말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술렁이는 제하의 눈동자를 지그시 응시하며, 주안이 말했다.
“내 연인이 범이거든. 그것도 상당히 강한 범. 그래서 알아.”
경악과 혼란의 침묵이 흘렀다.
다들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그 놀라운 사실을 담담하게 고백하는 주안을 응시했다.
가까스로 정신 차린 도건이 주안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어, 뭐…… 범이라고 해서 다 나쁜 건 아니니까는……. 내 동생들을 죽인 범이 네 여친인 것도 아니고……. 음…… 그렇지?”
“으응…… 마, 맞아. 범이 다 나쁘지는 않지. 인간 중에도 범만큼 나쁜 놈들 많잖아. 아까 제하를 총으로 쏜 놈도 그렇고.”
세인이 도건을 거들었다.
하지만 환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동생의 죽음을 확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증오스러운 범을 옹호하는 말 따위는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려심이 많은 주안은 그런 환의 기분을 이해하는 듯, 슬픈 미소를 지었다.
환은 미간을 좁히고 고개를 숙였다.
“미안, 나는…….”
“아니, 환아. 사과하지 마. 네 마음, 이해해.”
“……응. 그래도 미안.”
“어차피 이해받지 못할 사랑이었어.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는 사랑이었고. 그리고…… 누구도 슬퍼해 주지 않는 죽음이지.”
“어?”
환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내 여자친구는 죽었어. 날 지키기 위해서, 범과 싸우다가 죽었지. 그런데 참 우습지?”
주안이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연인인 나래가 죽어갈 때, 그녀의 뺨을 쓰다듬던 느낌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어릴 때 우연히 마주친 후, 일 년에 딱 하루만 만날 수 있었던 나래.
이제야 비로소 매일 같이 있을 수 있을 거라고, 꿈만 꾸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래는 죽었다.
“나는 그 애를 위해 해준 게 하나도 없는데, 그 애는 나한테 자기 힘을 남겨주고 갔어.”
그제야 그 자리에 있던 모두는, 주안이 어떻게 그렇게 범처럼 움직일 수 있었는지 깨달았다.
범의 힘을 넘겨받는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없어서 헛소리로 치부할 만한 말이지만, 이상한 경험을 한 번씩은 해본 그들이기에 주안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주안은 그녀를 떠올리는 듯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주안의 침착한 눈동자가 다시 제하에게로 향했다.
“범의 힘이야. 그것도 상당히 강한 범의 힘.”
다시 모두의 시선이 제하의 복부로 모였다.
제하는 이불을 끌어 올려 자신의 배를 가리며 말했다.
“아버지가 범이었어.”
주안은 자신의 연인이 범이었다는 걸 당당하게 고백했다.
제하의 아버지 또한 제하를 지키다가 죽었다.
그런데도 아버지의 존재를 감추려 했다는 사실이 창피했다.
“어머니는 결계를 지키는 무녀였고.”
제하는 음력 1월 16일, 손님이 오는 날이자 부모님의 기일인 그날.
인왕산에서 벌어진 일을 차분하게 설명했다.
제하의 이야기가 끝난 후에도 다들 입을 열지 못했다.
범의 세계와 인간 세계의 결계를 지키는 무녀가 있었고, 그 무녀가 범과 결혼했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결계를 깨뜨렸다.
그리하여 이 신시에 범들이 날뛰게 되었다.
물론 그건 제하의 탓이 아니다. 제하는 그저 후포라는 범의 계략에 빠진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벌어진 일이 너무 심각했기에, 다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하염없이 제하의 얼굴만 쳐다봤다.
“네가…… 결계를 깼다고……?”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네가 결계를!”
파앗-!
검고 큰 그림자가, 제하를 둘러싼 일행을 뛰어넘어 제하를 덮쳤다.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은 제하의 복부를, 상대의 무릎이 찍어눌렀다.
“크윽!”
예상치 못한 공격에, 제하는 방어할 틈이 없었다.
상대는 제하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너 때문에…….”
범을 잡아먹은 남자.
지금껏 기절해 있던 그가 깨어났을 줄은 몰랐다.
범처럼 노란 그의 눈동자가 증오로 물들었다.
“너 때문에 내가 무슨 짓을 당한 줄 알아?”
그의 송곳니가 길어졌다.
“내가 무슨 짓을 당했는지 아느냐고!”
그의 등에서 격렬한 분노가 터져 나오는 통에, 아무도 그를 말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놈들한테 찢기고 뜯기면서, 얼마나 죽고 싶었는지! 그런데 또 얼마나 살고 싶었는지! 네놈이 아느냐고!”
제하는 자신과 비슷한 눈동자 색을 가진 그가 내지르는 분노에 맞설 수 없었다.
‘나 때문이야.’
후포의 탓으로 돌리려 해도,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인왕산 사건 이후, 제하는 표현하지 않았을 뿐, 지독한 죄책감에 시달려왔다.
죽어가는 사람들, 점차 폐허가 되어가는 도시를 볼 때마다, 절규하고 싶었다.
미안해요. 죄송합니다. 나 때문이에요.
내가 좀 더 일찍 알았다면.
내가 부모님의 죽음에 대해 좀 더 궁금해했더라면.
내가 좀 더 강했더라면.
내가 좀 더 똑똑해서 놈들의 계략을 빨리 눈치챘더라면.
이 도시는 평화로웠을 텐데.
범 때문에 죽는 사람도, 가족과 친구, 연인을 잃는 사람도 없었을 텐데.
나만 아니었다면.
오래전 그날, 내 부모님이 날 구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때 부모님과 함께 나도 죽었더라면.
이 신시에 이토록 잔혹한 슬픔이 내려앉는 일은 없었을 텐데.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제하의 호박색 눈동자가 그를, 세인을, 도건을, 환을, 주안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루에게 한참 머물렀다가 다시 호수에게 고정되었다.
“미안해.”
아주 약간이라도, 이 진심이 전해졌으면 좋겠다.
내 진심 따위가 그들을 위로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미안해, 정말로.”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