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범이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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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범이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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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범이 들어온다.
2022.03.26.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그는 청바지에 딱 달라붙는 검은 티셔츠를 입은, 체격이 좋은 사내였고, 팔뚝에 나비 문신이 있었다.
“네가 제하냐? 우리 동철 형님께서 좀 보자신다.”
사람을 만나러 온 것치고는 무례한 태도였다.
‘동철…….’
어디서 들은 이름 같아서 기억을 더듬다가, 호랑나비의 총대장이라는 걸 떠올렸다.
남자의 자신만만한 태도도 이해가 됐다. 호랑나비의 총대장이 만나자고 하는데, 싫다고 거절할 범 사냥꾼은 없을 것이다.
“싫은데.”
하지만 제하는 거절했다. 호랑나비 팀에 좋은 감정이 없었다.
“뭐라고?”
남자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두툼한 팔뚝에 힘줄이 불끈 올라오는 걸 보니, 한 대 때리고 싶은 걸 꾹 참는 듯했다.
호랑나비에는 이런 놈들밖에 없는 걸까?
이제는 팀이 아니라 ‘군’이라고 불릴 만큼 세력이 커졌다던데, 이런 놈들이 그렇게 많이 모여 있다는 걸 상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싫다고.”
“쬐끄만 게 요새 좀 잘 나간다고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모양인데…… 이 형님이 예의를 가르쳐주기 전에 조용히 따라와라, 엉?”
“가자.”
제하는 남자의 말을 무시하고 도건에게 말했다.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도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시당한 남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남자가 더는 참지 못하고 제하의 어깨를 잡는 순간.
휘익-!
터엉-!
남자의 몸이 공중에 붕 떠올라 빙글 돌아, 바닥에 떨어졌다.
남자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남자를 엎어치기로 내리꽂은 제하는, 그를 무심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당신도 예의는 없어 보이는데.”
“너……! 큭!”
제하가 발로 남자의 가슴팍을 세게 밟았다.
“볼일이 있는 쪽에서 찾아오는 게 매너 아냐? 그리고 동철이란 사람이 직접 와도 소용없을 거야. 난 당신 같은 사람들, 별로거든.”
+++
제하를 데려오라고 보낸 부하 경태의 보고에, 동철의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그 어린 새끼가 그딴 소리를 했다고?”
“네, 형님.”
“하!”
괜찮은 녀석이면 데려와서 잘 키워주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그렇게 버릇없는 놈이라면 앞으로 호랑나비 팀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만약 비슷한 놈들끼리 팀이라도 만들어서 호랑나비와 경쟁하려고 들면 귀찮아진다.
“얼른 없애버려야겠구만. 그렇지?”
+++
마로 일당은 지하 통로를 통해서 걸어갔다.
그들은 어깨에 오늘 잡은 인간들을 짊어지고 있었다.
인간들은 흐느끼고 비명을 질렀지만, 마로 일당은 개의치 않았다.
“여전히 기분 나쁜 곳이야.”
마로의 옆에서 걷던 불티가 투덜거렸다.
지하 통로는 규칙적으로 기분 나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무줄기, 아니 혈관 같은 것들이 지하 통로 여기저기에 뻗어 있었다.
“기분 좀 나쁘면 어때서.”
마로가 통로 중간에서 멈춰, 그 옆에 있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 문은 커다란 지하 감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건물 지하에 이런 곳이 있는 줄은 아무도 모를걸.”
넓은 지하 감옥에는 수십 개의 철창이 있었고, 철창마다 잡아 온 인간들이 가득했다.
잡혀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인간들은 어떻게든 탈출하기 위해 애쓰고, 오래전에 잡혀 온 인간들은 이제 절규할 힘도 없는 듯 축 늘어져 있었다.
마로 일당은 철창 중 하나에 오늘의 수확물을 밀어 넣었다.
“사, 살려줘요! 살려주세요!”
“저는 어린 딸이 있어요. 제발 좀 살려주세요. 여기서 본 건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게요!”
“나, 나는 국회의원이야! 날 내보내 준다면 도, 돈을 줄게. 원하는 만큼 줄 수 있어!”
“제가, 제가 도울게요. 여러분이 더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게 도울 수 있어요.”
아직 삶의 의지가 있는 인간들은 철창에 매달려, 마로 일당의 눈에 들기 위해 애썼다.
마로는 그게 참 좋았다.
이 인간들 때문에 인왕산 그 지독한 그림자의 세계에 갇혀, 일 년에 단 하루만 자유를 누리며 살아온 지 몇 년째인가. 헤아릴 수 없도록 까마득한 세월이었다.
범들을 그 지독한 세계에 밀어 넣은 인간들이, 이제는 마로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있다.
물론 마로는 그들을 살려줄 생각이 없었다.
-“인간이 싫을 거예요. 그렇죠?”
몇 달 전, 폐건물에서 마주친, 인간 같지 않은 묘한 인간은 마로에게 말했다.
-“당신들을 위해 근사한 장소를 마련해주지요. 대신 당신들이 날 위해 해줘야 할 게 하나 있어요.”
“하! 내가 왜 네놈을 위해 뭔가를 해줘야 하지? 너 따위는…… 크윽!”
마로는 그를 이길 수 없었다.
온 힘을 개방했는데도, 그의 옷자락 하나 상하게 할 수가 없었다.
입가를 가린 검은 부채 너머로 보이는 그의 눈동자는, 아무리 봐도 인간의 눈동자가 아니었다.
범의 것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대체 이놈은…….’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형태의 공포가 거대한 덩어리가 되어 마로를 짓눌러왔다.
“나는 당신의 분노를 이해하지요. 곰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범들이 얼마나 오랜 시간 고통을 받았을지…… 그것만 생각하면 눈가가 시큰해진답니다.”
마로가 눈을 부릅떴다.
그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아는 걸까?
몇천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 인간 중에는 그 일을 기억하는 이가 남아 있지 않았다.
시간이 멈춘 그림자의 공간에서 아득바득 살아온 범들만이, 그 처절한 전쟁과 패배, 동료가 흘린 피를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놀란 마로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는 그저 평화를 원할 뿐이에요.”
그의 요구는 단 하나였다.
안전한 장소를 제공할 테니, 그 장소를 인간들의 피로 채우라는 것.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던 마로에게, 그의 제안은 달갑기만 했다.
마로는 후포를 존경해왔지만, 지금 그의 방식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쁜 놈들 위주로만 잡아먹고, 애는 건드리지 말라니. 애고, 어른이고 인간인 건 마찬가지고, 인간들은 다 나쁜 놈들이라고!’
마로는 감옥 통로를 천천히 거닐며, 인간들의 애원과 절규와 흐느낌을 들었다.
그러다가 어느 철창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쓰러져서 죽을 날만 기다리거나, 철창을 붙들고 어떻게든 마로의 눈에 들려고 애쓰거나,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믿지 못하고 우는 사람들 사이에, 딱 한 명.
형형한 눈으로 벽을 노려보며 앉아 있는 남자가 있었다.
이곳에 잡혀 온 지 꽤 오래되어, 마로에게도 익숙한 남자였다.
“호수.”
마로가 부르는데도, 호수는 마로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이곳에 잡혀 올 때만 해도 다른 인간들처럼 나약한 모습을 보이던 호수는, 고문을 받으면 받을수록 망가지는 게 아니라 더 견고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고문을 받으며 살려달라고 부르짖더니, 이제는 작은 신음 정도만 흘릴 뿐, 이를 악물고 그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뎠다.
게다가 다른 인간들처럼 쉽게 죽지도 않고, 벌써 몇 달을 살아남았다.
마로는 그런 호수가 재미있었다. 호수가 얼마나 버틸지 궁금했다.
“나와라. 안 나오면, 알지?”
마로의 손톱이 근처에 있는 어린 여자아이를 가리켰다.
오랜 굶주림과 고문으로 죽어가는 아이였다.
어차피 죽을 아이, 내버리면 될 텐데도, 호수는 묵묵히 일어나서 철창으로 다가왔다.
앞으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면서도, 호수의 얼굴에는 그 어떤 표정도 나타나지 않았다.
+++
7구에 있는 샛별 유치원은 아직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신시의 ‘왕’이나 다름없는 환웅은, 시민이 일상을 잃지 않아야 희망도 있는 거라며, 이 혼란이 끝나는 날까지 시민들을 위해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겠다고 했다. 정부조차 어떻게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유치원, 학교 등 미성년자가 모이는 곳은 환웅이 개인적으로 고용한 경비원들이 보초를 서줬다. 경비원 중에는 ‘범 사냥꾼’도 한 명씩 끼어 있었다.
대형 쇼핑몰이나 학원가, 상점가 등에도 환웅이 고용한 경비원과 범 사냥꾼이 돌아다니기에, 신시의 시민들은 그나마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었다.
“5구에도 범이 나타나기 시작했네요.”
아이들의 낮잠 시간, TV로 뉴스를 보던 유치원 교사 해영이 말했다.
“그렇다더라고요. 이번에는 10명이나 사라졌다던데…….”
“요새는 이상하게 죽는 사람보다 실종되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지 않아요?”
“실종이 더 무서워요. 사라진 사람들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요? 무슨 짓을 당하는지도 모르겠고…….”
“만약 끔찍한 짓을 당하는 거라면, 차라리 그 자리에서 죽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어요.”
같은 유치원 교사인 지혜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일상을 유지하는 게 정말 좋은 일일까요? 범을 잡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는 하는데, 구시가지 쪽은 하나, 하나 망하고 있잖아요. 6구에 사는 사람들은 벌써 피난 준비를 하는 모양이에요. 군대에서 함부로 이동하지 말라고 막고 있는 것 같지만.”
“정부는 왜 사람들을 이동하지 못하게 하는 거죠? 위험할 것 같으면 도망치는 게 당연하잖아요.”
“높으신 분들 뜻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요? 그나마 환웅 님이라도 계시니 이러고 버티는 거지.”
“그러게 말이에요. 환웅 님 안 계셨으면 우리 신시는 어땠을지…… 어휴.”
거기까지 얘기했을 때였다.
“범이다!”
“막아!”
“그, 그쪽……! 크아아아아악!”
“으악! 저기…… 아, 안 돼애애애!”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타앙-!
탕-!
총성이 울리고, 온갖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치원 교사들은 벌떡 일어났다.
“으아아아아앙!”
“엄마아아아!”
“아아앙!”
소란 때문에 잠에서 깬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자기 한 몸 살자고 도망치는 교사도 있었고,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교실로 달려가는 교사도 있었다.
해영도 그런 교사 중 한 명이었다.
해영이 들어가자, 아이들이 울면서 해영에게 달려왔다. 그런 와중에도 밖에서는 비명과 싸우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해영은 덜덜 떨면서도 아이들을 보듬어 안았다.
“괘, 괜찮아. 괜찮아. 경찰 아저씨들이 지켜줄 거야. 괜찮아.”
“으하아아앙! 엄마…… 엄마아아아!”
“아아아앙!”
아이들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해영이야말로 울고 싶었다.
쨍그랑-!
그때, 교실 창문이 깨지며, 호리호리한 인영이 안으로 들어왔다.
인간이 아니라는 걸, 해영은 보는 순간 알았다.
머리 쪽에 달린 뾰족한 귀, 히죽 웃는 입술 사이로 보이는 날카로운 송곳니, 길게 자란 손톱.
‘범……!’
처음 보는 범을 감상할 겨를은 없었다.
해영은 두 팔을 벌려, 어떻게든 아이들을 품에 안으려고 노력했다.
“시끄러운 것들.”
범이 으르렁거리듯 말하며 다가왔다.
“그, 그러지 마세요……!”
해영이 아이들을 뒤로 보내고 앞으로 나서서 두 팔을 벌렸다.
“아, 아이들이잖아요. 아직…… 아직 애기들이잖아요.”
“흥!”
범이 콧방귀를 뀌었을 때였다.
범이 들어온 창문으로, 한 남자가 조용히 들어오고 있었다.
-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