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닿지 못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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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화. 닿지 못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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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화. 닿지 못한 마음
2023.09.07.
그 말을 듣자마자 머리가 멍해졌다. 또 죽일 거냐고?
“전하.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반사적으로 대꾸하긴 하지만 뇌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얼얼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경계심이 가득한 표정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전하?”
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청양이 들어왔다. 청양은 사발 조각을 밟을 뻔하다가 비틀거리며 멈추었다.
“전하. 제가 이국사께 약을 대신 전해 달라고 부탁드렸는데…… 혹시 무슨 일이 있습니까?”
사발 깨지는 소리를 듣고 들어온 모양이다.
청양은 조각을 발로 밀어 치우고는 나와 제자를 번갈아 보았다. 있는 줄도 몰랐던 하인이 빗자루를 들고 들어왔다.
“내가 실수로 쳐버렸다.”
그 짧은 사이 제자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대답했다.
“전하께서요?”
“그래.”
제자는 길게 설명하는 대신 침상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한쪽 무릎만 세우고 앉았다.
“약을 다시 만들어 오겠습니다. 약을 잘 드셔야지요.”
청양도 더 물어보는 대신 하인을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하인도 사발 조각을 깨끗이 치우자마자 밖으로 나갔다.
나는 우두커니 선 채 제자의 눈치만 살폈다. 제자는 눈을 감고 호흡하다가 천천히 눈꺼풀을 올렸다.
눈이 마주쳤으나 그는 바로 입을 열지 않았다. 제자는 한동안 나를 빤히 보기만 했다.
나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제자에게도 내가 두려운 존재라는 걸 처음 알았다. 아니, 이전에도 알았지만 실감할 수 없었다.
“제자가 스승님을 놀라게 했군요. 괜찮으신지요?”
먼저 입을 연 건 제자였다. 그의 목소리는 그가 다정한 척 굴 때 나오는 목소리였다.
말이 나오지 않아서 고개만 끄덕이자 제자가 짧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들어가서 쉬시지요.”
“전하. 식은땀이 나요.”
“괜찮습니다.”
“의원을 불러올까요?”
“되었습니다. 이미 초감에게 진료를 받아 약을 챙겨왔습니다.”
제자의 눈길이 하인이 미처 닦지 못한 약으로 향했다. 나는 계속 서 있기만 했다.
“아직도 서 계십니까?”
새로 탕약을 만들어 온 청양이 놀라서 물어보는 걸 보니 꽤 오랫동안 서 있던 모양이다.
청양이 탕약을 건네자, 제자는 이번에는 제대로 받아서 마셨다. 그가 탕약을 한입에 다 털어놓자 청양이 얼른 빈 접시를 챙기며 작은 사탕을 건넸다.
제자는 사탕까지도 제대로 받아먹었다. 내가 탕약을 내미는 걸 보고 질색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청양은 나와 제자를 번갈아 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전하. 간호는 이국사에게 받으시겠습니까? 저는 이 앞에 있겠습니다.”
나도 얼른 나서서 동의했다.
“전하. 제가 간호해드릴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러나 제자는 단호하게 선을 긋고서 청양의 팔을 잡았다.
“네가 여기 있어라.”
청양은 목덜미가 벌게져서 나와 제자를 번갈아 살폈다. 민망한 듯했다.
나는…… 민망하진 않았다. 기분이 몹시 이상할 뿐.
“그러면 제가 저 앞에 있을까요?”
그래도 무언가 말을 해야 하긴 해서 아까 청양처럼 말하자, 제자는 눈을 감으며 말했다.
“스승님은 올라가서 쉬십시오.”
“하지만 전하가 이렇게 편찮으신걸요.”
“스승님이 거기 계시면 나으려다가도 다시 아플 겁니다.”
“!”
청양은 눈에 띌 정도로 삐걱거리다가 내게 말했다.
“전하께서 이국사가 곁에 있으면 신경 쓰여서 제대로 쉬기 어려우신가 봅니다. 올라가서 편히 쉬시지요, 대인.”
정말로 공들여서 포장해주는구나. 하지만 제자 본인이 싫다는데 내가 여기서 뭐라고 할까.
지금 제자는 상처받은 맹수 같았다. 자기 상처를 적에게 보일까 봐 평소보다 이를 날카롭게 세운 맹수 말이다.
“알았네. 전하, 그러면 전 방에 있을게요. 도움이 필요하면 부르세요.”
나는 순순히 물러나 2층에 있는 방으로 올라갔다. 다시 이불 안으로 들어갔으나 이미 열기는 식어 있었다.
‘추워…….’
* * *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1층으로 내려가다 보니 제자는 깊게 잠들어 있었다. 청양은 침대 가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가 문을 열자마자 바로 일어섰다.
“요 대인. 일찍 일어나셨네요.”
“전하는?”
“열이 잘 내려가지 않습니다.”
“역시 의원을 불러야 하지 않을까?”
“괜찮습니다. 눈에 띄는 게 싫다고 요양 오신걸요.”
회귀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나? 모르겠다. 제자가 이를 드러내고 반강제로 내가 그의 편에 합류하기 전에는 난 제자에게 그리 관심이 없었다.
“식사를 차려드릴까요?”
“아니. 내가 해오겠네.”
“대인께서요?”
“전하가 내 간호는 싫다지 않나.”
청양이 밤중 일이 떠올랐는지 멋쩍게 웃었다.
나는 부엌으로 가서 쌀을 한 바가지 푼 다음 물과 계란, 소금 약간을 넣고 죽을 만들었다. 접시에 죽 두 그릇을 담아 방으로 가져가자 청양이 얼른 일어나 쟁반을 받아주었다.
“전하께서 깨시면 드시라 하고. 한 그릇은 자네가 먹게.”
“하나는 제 겁니까? 대인은요?”
“나는 안 아프니 밖에서 소면 사 먹고 오겠네.”
청양은 픽 웃고서 그러라고 했다.
“아. 혹시 돈은 챙겨 오셨습니까? 은자를 좀 드릴까요?”
“괜찮네. 그리고 난 소면 먹고 나서 근처 절에 들렀다 올 테니까. 전하가 혹시 찾거든 알려주게.”
“절이요?”
“전하가 많이 편찮으신 거 같아서.”
청양은 좀 혼란스러워하는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안다. 곁에서 보면 우리 사이는 정말 이상해 보일 거야.
나는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소면을 사는 대신 곧장 근처에 있다는 절로 올라갔다.
낮은 산에 있는 절에는 이른 아침이라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나는 일반 사람들도 갈 수 있는 구역이 어디 있나 확인한 다음 그곳에 가서 불상을 바라보았다.
청양에게는 제자가 아파서 절에 오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전혀 아니다. 내가 절에 온 건 그냥…… 제자나 나의 회귀가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제자가 의식이 흐려진 사이 잠깐 드러낸 그 감정이 너무 혼란스러워서.
하지만 고요한 불상을 바라보아도 답이 바로 나오진 않았다. 아침 절의 맑고 신비로운 공기가 참 좋단 생각만 들 뿐.
그래도 처음 여기 왔을 때보다는 마음이 좀 차분해졌다. 나는 가져온 은자를 불전함에 넣은 뒤 절을 하고 마당으로 나왔다.
그러고서 돌아가려는데 대문 옆에 있는 좌판에 귀여운 동물상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거 뭐예요?”
“영혼을 위로해주는 동물상이랍니다.”
절에서 일하는 듯한 여자가 웃으며 설명해주었다. 나는 고민하다가 작은 토끼 장식 하나를 샀다. 제자에게 이걸 주면 기분이 좀 풀리려나?
서신이라도 한 장 같이 써서 주는 게 낫나? 토 선생이 주는 선물이라고 하고 주면 좋아할까?
‘애가 무서운 소인배이긴 한데 그래도 귀여운 구석은 있어. 가끔 희한한 걸 좋아한단 말이지.’
그런데 토끼상을 살피며 산길을 내려가는데 뒤통수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 * *
“전하. 일어나셨습니까?”
화려가 눈을 뜨자 청양이 퀭한 낯빛으로 물었다.
“시간이……?”
“아직 오시말입니다.”
“너무 오래 잤군.”
중얼거리던 화려는 옆의 탁자에 놓인 죽그릇 두 개를 발견했다. 청양은 화려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얼른 설명했다.
“요 이국사가 전하를 위해 만들어 온 겁니다. 제 것도 만들어 주셨는데 전하를 두고 혼자 먹기는 좀 그래서 그냥 두기만 했습니다.”
“……스승님이?”
“네. 데워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죽을 드셔야 약을 먹지요.”
일어서려는 청양에게 화려는 고개를 젓고 손을 내밀었다.
“되었다. 약만 가져와라. 죽은 식은 채 먹어도 된다.”
“묘시말에 가져온 건데요, 전하. 많이 차가울 겁니다.”
“상관없다.”
청양이 죽그릇을 주자 화려는 숟가락을 쥐고 한참을 망설이다 먹었다. 한 입을 먹자 마자 황자의 얼굴이 완전히 구겨지는 걸 보며, 청양은 자신은 저 죽을 먹지 않기로 결심했다.
청양은 얼른 부엌으로 가서 초감이 준 약재를 물에 풀었다. 약재를 팔팔 끓여 가져가자 화려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죽을 먹고 있었다.
“전하. 요 대인이 죽에 독이라도 탔습니까?”
보자마자 이 소리가 대번에 나갈 정도였다.
“이번은 아니구나.”
화려는 묘하게 대답하더니 빈 죽그릇을 내밀고 약사발을 받았다. 화려가 약을 다 먹고 빈 사발을 건네자 청양은 빈 그릇을 하나로 포개 들었다.
그러고서 나가려는데 뒤에서 화려가 “청양.” 하고 그를 불렀다. 청양이 돌아보자 화려가 눈으로 죽그릇을 가리키며 물었다.
“스승님은?”
“근처 절에 가셨습니다. 전하를 위해 기도하시려나 봅니다.”
화려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기도는 무슨. 달아난 거겠지.”
“예? 그럴 리가요.”
청양은 웃으면서 대답하고서 부엌으로 간 다음 요화가 준 죽을 딱 한 숟가락만 먹어보았다.
“!”
청양은 영혼이 잠깐 몸을 빠져나갔다가 돌아오는 걸 느끼고서 치를 떨었다. 독 한 방울 쓰지 않고도 독살이 가능하다 싶을 정도로 맛없었다.
청양은 속으로 사죄하며 자신의 몫인 죽은 전부 버려버렸다.
그동안 화려는 청양이 주고 간 사탕을 씹어 먹으면서 자신이 탕약 사발을 깼을 때 스승의 표정을 되새겼다.
화려는 조금 궁금해졌다. 스승은 왜 그런 표정을 했을까? 그가 자신을 죽일 거냐고 물었을 때 스승이 보인 표정은 그가 삶을 반복해 사는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이었다.
화려는 스승이 절에 갔다가 돌아오면 왜 그런 표정을 했는지 물어보기로 했다. 그는 스승에 관해서는 무엇이든 다 알아야 했다.
그러나 한 시진이 더 지나도 스승은 돌아오지 않았다.
청양은 시간을 두어 번 확인하다가 미시말이 되자 쩔쩔매기 시작했다.
“절에 사람을 보내 볼까요?”
화려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되었다. 내가 무어라 했나. 스승님은 이미 달아나고 없을 거다.”
“여기서 달아나서 어디로 가신다고요?”
“집으로 돌아갔겠지.”
화려는 차갑게 내뱉고서 침상 기둥을 붙잡고 일어났다. 청양이 얼른 그를 부축했다.
“스승님은 오지 않을 거다. 우리는 요양지로 이동하자.”
“좀 더 쉬시지 않고요? 어제 무리하시는 바람에 바로 탈이 나셨잖습니까.”
화려는 고개를 젓고서 땀으로 젖은 옷을 벗었다.
네 시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면 스승은 이미 달아나고 없는 게 맞았다. 그는 스승이 달아난 곳에서 미련스럽게 돌아오기를 기다릴 마음 따위는 더이상 없었다.
청양은 얼른 따뜻한 물에 수건을 담가서 가져와 화려의 몸을 닦은 뒤 새 옷을 가져와 화려가 입는 걸 도와주었다.
떠날 준비를 마치고 나니 반 시진이 지났으나 그때도 요화는 여전히 오지 않았다. 화려는 미련 없이 마차에 올라탔다.
그러나 마차가 그 마을 밖을 떠나기 전. 숲길을 지나갈 때 화려가 마차 벽을 두드렸다.
“네, 전하.”
청양이 창문을 열자 화려가 산길을 힐긋 보더니 차갑게 말했다.
“잠깐 절에 들렀다 가지.”
청양은 눈물이 나올 뻔했다. 전하. 요 대인이 거기 없을 걸 알면서 왜 굳이 가시려는 겁니까?
다행히 그가 울기 전 화려가 창문을 탕 소리 나게 닫아 버렸다.
“저쪽으로 가자.”
청양이 마부에게 지시하자 마부는 마차 방향을 바꾸었다. 워낙 낮은 산인 데다 산 중턱에 있는 절로 이어지는 널찍한 길이 있기에 마차를 타고서도 충분히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청양의 예상과 달리 화려는 요화가 절에 있을 거라 예상한 게 아니었다. 그는 단지 스승이 달아나기 전에 자기가 말한 대로 절에 들르기라도 했나 궁금할 뿐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절에는 수많은 사람이 와 있었으나 개중 스승은 없었다.
청양이 몇 바퀴나 절을 돌아보며 요요화의 행색을 말하고 물었으나 그녀를 보았단 사람은 없었다.
이야기를 들은 화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지시했다.
“내려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