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탕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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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화. 탕약
2023.09.04.
‘역시 답은 하나겠지.’
내가 여기서 3황자를 편들어봤자 나나 3황자 모두에게 좋지 않을 거야. 회귀 전엔 3황자를 내버려 둔 제자가 이번에는 3황자를 싫어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전하. 죄송해요. 제가 너무 무신경했습니다. 저는 전하의 정혼녀이니 행동을 더 조심했어야 하는데요.”
제자의 팔을 잡고서 최대한 조곤조곤하게 말하자 제자가 가늘어진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전하 전하. 그래도 여기서 다시 전하를 뵈니 참 좋네요.”
그의 눈동자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나는 모른 척 배시시 웃었다.
“좋아하시는 분이 절 보고 달아나십니까? 그래놓고 형님과는 딱 붙어서 음식도 사 먹고 좋은 시간을 보내시는군요.”
“좋은 시간이라니요. 그렇지 않아요 전하. 전하랑 있는 시간이 제겐 좋은 시간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노력을 하는데도 제자는 영 반응이 없었다.
“글쎄요. 스승님 말씀을 어디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쪼잔하기 짝이 없는 소인배 같으니라고.
“전하. 전하는 제 정혼자이고 우리는 부부가 될 사이잖아요. 전하, 우리 저기 저 쪼그만 배를 타고 같이 딱 붙어서 뱃놀이해요. 배가 작으니 핑계로 붙어 있기 좋겠어요.”
제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그쪽으로 순순히 걸어갔다. 제자의 팔을 잡은 터라 나도 자연스럽게 따라 걷게 되었다.
3황자에게 작별 인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제자가 약간 내리누른 분노를 다시 뿜을 게 뻔했다.
나는 그냥 한 말인데. 화려는 정말로 배를 빌려서 나를 태웠다. 나만 태울까 봐 걱정했으나 자기도 올라탄 그는 바로 노를 빠르게 저어 배를 육지에서 멀리 보내버렸다.
배가 정말로 워낙 작았기에 나는 두 무릎을 끌어안아야 했다. 아니면 내 표현대로 제자놈과 꼭 붙어 있게 될 테니까.
그러다가 힐긋 아까 나와 3황자가 서 있던 쪽을 보려는 순간. 노가 내 눈앞에 나타나며 물살이 얼굴로 떨어졌다.
“으악!”
졸지에 물벼락을 맞고 놀라서 쳐다보자, 제자가 짜증 나는 미소를 짓고서 물었다.
“여기서 스승님이 셋째 형님을 바라보면 기껏 넘어가 드린 효과가 없지요.”
“안 봤어요 전하. 그냥 경치를 보려 한 거예요.”
“셋째 형님 얼굴이 경치이긴 하지요.”
기가 막혀라. 나는 대답 대신 손수건을 꺼냈다. 하지만 손수건도 흠뻑 젖어 있어서 얼굴 물기를 닦기 힘들어 보였다.
그래도 강에 대고 손수건 물기를 꾹꾹 짜고 있자니, 제자가 자기 손수건을 툭 내 무릎으로 던졌다.
“이걸로 닦으시지요.”
“병도 주시고 약도 주시네요. 참으로 감사합니다, 전하.”
“그래야 할 겁니다. 제자가 약까지 주는 경우는 드무니까요.”
“…….”
말을 왜 저렇게 무섭게 해. 나는 속으로만 구시렁거리면서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냈다. 하지만 이미 물에 폭삭 젖어버린 옷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감기 걸리면 어쩌지? 걱정하며 슬쩍 쳐다보았으나 제자는 고의인지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에라이 소인배 같으니라고.
“투기 좀 그만 부리세요 전하.”
“제자가 투기하고 있단 걸 인지는 하시니 다행이군요.”
“투기도 뭐가 있을 때 해야지요. 저랑 3황자 전하는 아무 사이도 아닌데 투기하시면 이상하잖아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요?”
제자가 내 말을 조금도 믿지 않는 눈으로 쳐다본다. 하긴. 제자는 내가 3황자를 사모한 일을 알고 있지.
나는 더 대꾸하는 대신 그의 손수건만 만지작거렸다. 손수건이 제자라 생각하고 패대기치면 저놈이 가만히 안 있겠지?
“우리는 공식적으로 정혼한 사이이니 자신감을 가지셔요 전하.”
“정혼을 해도 깨지고 혼인을 해도 갈라서는 사람들이 넘칩니다. 사람 일이 어떻게 풀릴지 알고 박쥐 같은 스승님을 믿으란 겁니까?”
너무하네! 그럼 평생 의심하면서 살 거냐?
“그거 의처증이에요 전하. 그리고 박쥐라니요. 이젠 토끼라 부르기로 합의한 줄 알았는데요.”
제자는 입을 벌리고 쳐다보더니 노를 내려놓고 자기 이마를 짚었다. 나는 그 틈을 타서 열심히 눈을 빛내고 있다가 그가 손을 내리자마자 온 힘을 다해 공들여 웃었다.
제자는 어째 더 화나 보였지만.
“미소를 무기처럼 사용하지 마시지요 토 선생.”
토끼라 부르는 거랑 토 선생이라 부르는 건 어감이 너무 차이가 난다. 토 선생은 전혀 귀엽게 들리지 않는다.
“토 선생이라 부르면 그냥 성이 토씨인 사람 같은데요 전하.”
“박쥐가 요구 사항이 점점 많아지는군요.”
작게 구시렁거리다가 옆을 보니 어느새 근처가 뭍이었다. 싸우느라 돌아온 줄도 몰랐네. 뭍에서 최대한 멀리 배를 보내더니. 왜 바로 돌아왔지?
의아해서 쳐다보자 제자가 배에서 먼저 내리더니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을 잡고 배에서 내리자, 제자가 자기 겉옷을 벗어 내게 덮어주었다.
“전하? 우리 화해한 건가요?”
“꿈 깨시지요. 감기 걸릴까 봐 덮어드렸을 뿐입니다.”
단호하게 말한 제자는 따라오란 말도 없이 걸어갔다. 이에 슬쩍 뒤로 물러나자 제자가 귀신같이 알아차리고서 휙 뒤돌아보았다.
어쩔 수 없이 뒤에서 졸졸 따라가자, 제자는 무난한 검은 마차가 세워진 곳에 멈춰 섰다.
“안에서 옷을 갈아입으세요.”
그러고는 마차 문을 열어주며 지시했다.
“옷이 없는데요?”
제자는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눈으로 마차 안을 가리켰다. 뜻밖에도 마차 안에는 어디서 구해온 건지 새 옷과 신발까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언제 구한 거야?’
그러고보니 청양도 제자 근처에 있었지. 배 위에서 제자가 청양에게 표시를 보냈을까?
의아하지만 일단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옷을 들어 올리자 매끄러운 천이 흘러 내리듯 손에서 미끄러졌다. 아주 부드러운 천이었다.
갑자기 구한 것치고는 값비싼 옷감이네? 지금은 돈도 없으면서 어떻게 이런 걸 구했을까?
‘여인 옷이야.’
흥. 자기도 안다 이거지. 내가 남장을 풀면 그리 예쁜 걸 아는 거야.
일단 준비된 옷으로 갈아입고 마차 문을 두드리자 제자가 밖에서 문을 열어주더니, 곧장 자기가 올라탔다.
제자가 타자마자 마차는 이동하기 시작했다.
‘아…… 내 은신처! 유 가주가 말한 사람을 아직 찾지 못했는데!’
당황해서 창문을 쳐다보았지만 창문에 내린 검은 휘장 탓에 밖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억울하고 황당해서 제자를 쳐다보았으나 그는 눈을 감고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내 은신처…… 내 은신처……!
* * *
마차는 조금 잘사는 상인의 집 같은 곳에서 멈추었다. 요화는 2층 방을 쓰게 되었고, 화려의 방은 문가에 있는 1층이었다.
청양이 차를 타 화려의 방에 들어갔을 땐 화려는 창틀에 걸터앉아 무표정하게 있었다.
“전하. 차를 좀 드시지요. 초감이 수시로 이 차를 드시면 좋을 거라 했습니다. 약차랍니다.”
화려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스승님은?”
“꿀물을 가져다드렸습니다. 혹시 몰라서 손난로도 가져다드렸고요. 지금은 차를 마시면서 주군 욕을 하고 계십니다.”
“…….”
청양은 화려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었다. 너무 솔직하게 보고드렸나?
하지만 화려는 요화에 관한 일이라면 조금도 개인적인 견해를 섞지 말고 그대로 전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화려는 불쾌한 듯 눈살을 구겼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대신 무거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유 가주에게 알려라. 스승님이 은신처 구하는 일을 돕지 말라고. 유 가주의 신용이 있으니 이미 준 것까지 회수하라곤 않겠다. 하지만 이 이상은 돕지 말라고 해라.”
“예. 그러겠습니다.”
“그리고 셋째 형님은…….”
화려의 목소리가 점점 사라지면서 그의 눈살이 구겨졌다. 아까는 스승과 3황자가 둘이서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게 화가 나서 깊이 생각하지 못했는데. 생각해보니 의아했다.
“셋째 형님은 몸이 좋지 않아서 궁중 연회에도 불참하는 일이 많지. 그런데 왜 여기까지 내려왔을까.”
* * *
해가 저물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잔칫집에 머물렀다. 하인들은 먼 곳에서 온 손님들을 부축해 객방으로 안내했다.
하지만 육순 잔치의 주인공인 남 가주는 사람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는 새하얀 의복을 입은 눈 같은 사내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이것입니다.”
남 가주는 심복이 건넨 나무 상자를 사내에게 건넸다. 3황자는 상자를 받아 뚜껑을 조금 열어보았다.
“조심해서 사용하셔야 합니다. 위험하니까요.”
남 가주는 3황자의 표정을 살피며 다급히 덧붙였다. 3황자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상자 뚜껑을 닫았다.
“그러겠네. 구하기 어려웠을 텐데. 고맙네.”
* * *
청양이 가져다준 꿀차를 마시고 손난로를 끌어안은 채 이불 안에서 시간을 보내자 완전히 몸이 따뜻해지면서 잠이 몰려왔다.
그 상태로 잠시 잠들었던 것 같다. 잠깐 존 것 같은데 눈을 감았다 떠보니 그림자가 방 안을 다 뒤덮고 있었다.
손난로에서는 거의 열기가 식어 있었지만 이불 안은 따뜻했다. 나는 밖으로 나가지 않고 계속 거기 머물렀다.
어차피 지금 나가도 유 가주의 의뢰는 이미 실패했다. 육순 잔치를 사흘 밤낮을 열진 않을 테니까.
‘정말. 내 일을 열심히도 방해하는구나.’
그 생각을 하자 뭔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나는 이불을 확 걷고서 도로 일어났다. 육순 잔치에는 돌아갈 수 없지만 제자와 보름에서 한 달가량을 같이 보낼 생각도 없었다.
‘어차피 아프지도 않잖아. 꾀병은 혼자 실컷 부리라지.’
나는 코웃음을 치고서 계단을 살금살금 내려갔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 버릴 셈이었다. 아침이 돼서 내가 집에 가고 없단 걸 알게 되면 반응이 어떨까?
“?”
그런데 막 문을 나가려고 보니 문 옆의 방에서 희미한 신음이 들려왔다. 뭐지?
‘에이. 아냐. 악몽이라도 꾸겠지.’
잠깐 치미는 호기심을 누르고서 나는 나가는 문을 조심조심 열었다.
“…….”
하지만 문을 닫으려고 보니 방에서 들리는 신음이 몹시 신경 쓰였다.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혹시라도 암살자가 나타난 거면 어쩌지?
결국, 고민 끝에 도로 들어와서 방문을 살그머니 옆으로 밀어보았다. 그러자 침상에 누운 제자의 모습이 천천히 드러났다. 제자는 오만상을 찡그리고 신음하고 있었다.
‘이게 웬일이야?’
뒤로 물러났다가 도로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니 식은땀으로 그의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전하. 전하. 괜찮으세요?”
어깨를 살짝 흔들어 보았으나 제자는 대답하지도 못했다. 진짜 아픈 거였어?!
“독에 당하셨습니다.”
당황해서 계속 제자를 흔들고 있자니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자 청양이 문가에 탕약이 든 그릇을 들고 서 있었다. 그릇 위로 김이 올라왔다.
“독이라고?”
“네.”
“어디서?”
“궁전에서요.”
“정말인가?!”
“그렇지요.”
“누가 독을 썼는지는? 모르고?”
청양은 어깨를 으쓱하고서 탕약을 가져와 내게 건넸다.
“이국사께서 드리면 되겠습니다.”
“뭐?”
청양은 그 말만 남기고서 쏙 나가 문을 닫아버렸다.
“잠시만-!”
따라 나가려 했으나 탕약이 넘칠 듯 담겨 있어서 급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나는 약간 일으켰던 몸을 도로 앉히고서 당황해서 갈색 약만 내려다보았다.
젠장. 제자한테 약을 먹이라고? 의식이 없는데 어떻게?
“스승님……?”
그때 마침 제자가 의식을 조금 찾았는지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다행이다 싶어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제자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 놀란 표정에 덩달아 놀라서 나는 얼른 입을 열었다.
“아. 전하. 이거-.”
그러나 탕약을 청양이 주고 갔다고 설명하기도 전에 제자가 약사발을 쳐버렸다. 쨍그랑 소리가 나며 그릇이 산산이 부서졌다.
이불 위까지 튄 사발 조각을 잡고서 쳐다보자 제자가 뒤로 물러나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또 죽이시려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