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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화. 여기서 뭐라고 말해야 하나 (157/159)


157화. 여기서 뭐라고 말해야 하나
2023.08.31.



 


“날 불렀습니까?”

속은 조마조마했지만 나는 모른 척 웃으면서 하녀에게 물었다. 하녀의 눈썹 양 끝이 위로 삐죽 올라갔다.


“초대장 없이 들어온 사람 맞죠?”

하녀가 항의하듯 물었다. 지나다니던 사람들이 그 소리에 이쪽을 힐긋거렸다. 3황자가 바로 곁에 있단 생각에 얼굴에 열기가 올라왔다.


“그럴 리가.”

나는 단호하게 말했지만, 초대장을 바로 꺼낼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 이름이니까.


“그럼 초대장을 보여주시지요. 계속 달아나니 의심스럽네요.”

하지만 여기서 초대장을 보이지 않으면 침입자라고 쫓겨나갈 판이었다. 3황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실은 이 공자는-.”

안 되겠던지 3황자가 나서려는 순간. 나는 얼른 초대장을 꺼내 내밀었다.

나는 여기 잔치 주인공이랑 사이 나쁜 유 가주의 부탁을 받고 온 거였다. 일이 잘못되었을 때 3황자가 곤란해지게 만들 수는 없었다.

초대장을 낚아채듯 가져간 하녀는 매 같은 눈길로 샅샅이 글씨를 확인해보고 인장까지 점검하고는 도로 초대장을 돌려주었다.


“초대받고 온 분이 맞네요. 왜 자꾸 달아나서 사람을 번거롭게 하십니까.”

“저 덩치 좋은 사람들이 험악하게 몰려오면 누구라도 달아날 걸세.”

내가 덩치들을 눈으로 가리키며 억울한 척 말하자 하녀는 그제야 표정이 조금 풀려서 돌아갔다. 덩치들이 흩어지자 구경하던 사람들도 흩어졌다.

하지만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초대장을 품 안에 느리게 넣으면서 3황자 쪽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머리 위에서 너털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조마조마해서 고개를 들자 3황자가 입가를 한 손으로 누르고 있었다.


“언제 이름을 바꿨는가?”

눈이 마주치자 그가 놀리는 투로 물었다. 실망한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정말 실망하지 않았을까? 그냥 내가 민망해하니까 저렇게 놀리는 걸까?


“전하. 저…… 저를 경멸하지 않으세요?”

부끄러워서 조심스럽게 묻자 3황자는 입에서 손을 떼고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뭐라고?”

대꾸하지 못하고서 옷자락만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3황자는 한참을 웃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대체 왜 그런 말을 하는 건가. 내가 왜 자네를 경멸하겠어?”

“다른 사람 초대장이잖아요…….”

“음. 좋은 행동은 아니지.”

그 말을 듣자마자 심장이 말린 대추만큼 쪼그라들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의 눈치만 보고 있자니 3황자가 다시 웃어댔다.


“그래도 자네를 경멸할 일은 아닌 거 같은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자네가 여기 와서 뭐 나쁜 일을 한 것도 아니지 않나.”

“그렇지요?”

그건 그렇다. 나는 그냥 사람 하나 알아보러 온 거고 나쁜 짓을 하러 온 건 아니다. 그 정보로 유 가주가 뭘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3황자가 지금 하는 말은 진심인가? 아니면 여기서 날 비난하기 힘드니 돌려 말해주는 걸까?


“하지만 좋은 행동은 분명 아니지. 다음엔 이러지 않는 게 좋겠네.”

……비난하기 힘드니 그냥 좋게 말해주는 건가 보다. 열기 때문에 귀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3황자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만 빠르게 끄덕였다.


“안 그럴게요. 되도록이요.”

“사정이 있었다고 생각하겠네. 자네는 나쁜 사람이 아니니까.”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코앞에 포도알이 담긴 접시가 내밀어졌다. 고개를 들자 3황자가 어디서 난 건지 과일 접시를 내게 내밀고 있었다.


“괜찮아요 전하.”

하지만 여기서 입에 뭐가 넘어갈 리가 없었다. 얼른 고개를 젓자 3황자는 접시를 지나가던 하인에게 건넸다.

나는 그에게 인사하고 다른 곳으로 가야 할지 어째야 할지 몰라서 그냥 멀뚱히 3황자를 쳐다보기만 했다.


“가지.”

뜻밖에도 3황자는 접시를 맡기자마자 내게로 와서 말했다.


“예에? 예?”

무슨 말인가 알아듣지 못하고 더듬더듬 되묻자 3황자가 눈으로 문을 가리켰다. 따라 나오란 건가?


“썩 꺼지란 말씀이신가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묻자 3황자는 너털웃음을 터트리고서 앞서 걸어갔다. 일단 따라오란 뜻 같아서 굼벵이처럼 따라갔다.

나는 3황자가 대문 밖으로 내가 나가면 문지기에게 문을 걸어 잠그라 하고 자기만 들어가리라 여겼다. 아니면 잘 가라고 작별 인사를 하거나.


“전, 전하가 왜 저랑 같이 나오세요?”

그러나 3황자는 나와 함께 문밖으로 나와주었다.


“자네가 불편해하는 거 같아서 나오자고 했다네.”

내가 불편한 건 전하가 앞에 있어서인데요……! 속으로만 외치고서 그를 보고 있자니, 3황자가 대로를 손으로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겠나? 제법 번화한 거리가 있다네. 마차에서 보니 맛있는 음식을 여러 가지 파는 거 같던데.”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자 3황자가 우아한 걸음걸이로 그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호위 하나 안 데려가나?

당황스러운 마음과 감격하는 마음이 동시에 치밀었다. 회귀 전엔 3황자와 이렇게 단둘이서 거리를 걸어본 적도 없는데!

나는 부푼 마음을 애써 드러내지 않으면서 3황자를 졸졸 쫓아갔다. 3황자를 쫓아가고 있자니 주위에 무슨 가게가 있는지 누가 돌아다니는지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기라네.”

3황자가 멈춰서서 어느 노점상을 가리키고서야 나는 우리가 여러 가지 음식을 파는 거리에 들어왔단 걸 알아차렸다.

3황자가 가리킨 노점상은 꿀을 바른 과일을 파는 곳이었다.


“맛있어 보이지 않나?”

3황자는 그렇게 묻더니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노점상 주인에게 다짜고짜 돈을 내밀었다.

노점상 주인은 3황자가 내민 은색 동전을 보고 당황하더니, 과일을 종이로 수북하게 싸서 건네주었다. 3황자는 그걸 그대로 내게 내밀었다.


“자. 이거 먹게. 자네가 좋아할 거 같은데.”

“제가 애입니까?”

입술이 히죽 올라가려고 해서 나는 괜히 불만스럽게 말했다. 3황자는 나무 꼬챙이에 과일을 집어서 내게 건넸다.

나는 얼른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서 과일을 조금씩 베어 먹었다. 아주 달고 맛있었다. 예전에 내가 직접 사 먹을 때는 이 정도로 맛있지 않았는데.

하나를 순식간에 다 먹어 치우고서 보자 3황자가 하나를 더 내밀었다.


“전, 아니, 공자님은 안 드세요?”

가게 주인이 옆에 있으니 전하라고 부르면 안 되지. 여기서 내가 3황자를 전하라고 부르면 가게 주인이 기절할 만큼 놀랄 거다.


“난 자네가 먹는 모습만 봐도 배부르니 많이 먹게.”

“아이고머니나. 둘이 무슨 사입니까?”

가게 주인은 전하라고 안 불러도 이미 놀란 것 같지만.

3황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민망해서 그가 건넨 과일을 잡고 다시 입에 넣었다. 그러고서 열심히 먹고 있을 때였다. 3황자가 비틀거리는가 싶더니 가슴을 짚고서 거세게 기침하기 시작했다.


“공자님!”

놀라서 그를 부축했으나 3황자는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기침했다. 사레에 걸린 것처럼 괴로워 보이는 기침이었다.


“공자님! 공자님! 괜찮으세요? 의원에게 갈까요?”

놀라서 물었으나 3황자는 기침하면서도 계속 고개를 젓기만 했다. 나는 3황자를 감싸고서 기댈 수 있는 벽으로 다가갔다.

3황자는 벽을 짚고서 한참을 기침한 후에야 가까스로 허리를 펴며 머쓱하게 웃었다.


“자네를 놀라게 했군.”

“괜찮으세요……?”

3황자는 소리 없이 미소 짓고서 하늘을 한 번 보았다. 그러더니 벽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그만 들어가야겠군. 약을 먹어야 할 거 같네. 자네도 다시 저 안으로 가야 하나? 같이 온 사람이 있나?”

“혼자 왔어요. 저기까지 같이 가드릴게요.”

“혼자 왔다고? 여기까지?”

“원래도 혼자 잘 다닌걸요.”

나는 3황자를 부축하기 위해 그에게 손을 뻗었다. 3황자는 기침할 때와 달리 나를 바로 붙잡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전하. 급한 상황이잖아요.”

갑갑해서 재촉하자 3황자는 그제야 내 어깨에 살짝 팔을 얹었다.


“너무 붙어 있군요.”

그러나 옆에서 들린 날카로운 목소리에 3황자는 바로 손을 내렸다. 하지만 나는 3황자에게 괜찮다고 말하지 못했다. 옆에서 들린 목소리가…… 제자 목소리 같아서였다.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게 좋지 않겠는지요? 형님. 스승님.”

계속 피할 수는 없어서 고개를 돌리니 역시나. 제자가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순식간에 코앞으로 다가온 제자는 세 걸음 거리를 두고 서더니, 더 다가오지 않고 내게 손을 뻗었다. 손은 왜?


“스승님. 이쪽으로 오시지요.”

“!”

부르면 바로 그쪽으로 가면 될 테지만 이상하게 다리가 잘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을 기침하느라 혼자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3황자를 두고 저쪽으로 가버리면 3황자는 바닥에 주저앉을지도 몰랐다. 지금 허리도 잘 못 펴는걸. 하지만 제자가 부르니 안 갈 수도 없고…….


“스승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머뭇거리자 제자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어서요.”

그의 목소리는 경고하는 것처럼 들렸다. 두려움이 치밀어 오르면서 당장 제자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꾹 새어 나왔다. 결국 제자에게 가기로 마음을 먹는 순간.


“가보게.”

보기 답답했는지 뒤에서 3황자가 작은 목소리로 권했다. 나는 얼른 제자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나 자기가 오라고 해놓고서 제자는 내가 오자마자 손을 휙 내렸다. 그의 표정은 아까 이상으로 불쾌해 보였다.

제자는 나를 한번 서늘하게 쳐다보더니 3황자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셋째 형님. 스승님은 제 정혼녀입니다.”

“안단다.”

“아셨군요. 제 스승님께 갈 방향까지 정해주시기에 모르는 줄 알았지 뭡니까.”

“네가 불쾌했다면 미안하구나. 하지만 네가 그렇게 무서운 목소리로 부르니 이국사가 가질 못하는 게 아니냐.”

“제 목소리가 무서웠나요? 정혼녀가 외간 사내와 꼭 붙어 다니면서 사이좋게 간식을 나누어 사 먹는 모습을 보아서 그런 모양입니다, 형님.”

3황자와 제자가 말을 한마디씩 주고받을 때마다 등뼈에 금이 하나씩 가는 느낌이다. 나는 나무토막처럼 선 채 3황자와 제자를 번갈아 쳐다보기만 했다.

머릿속이 빠르고 요란스럽게 굴러갔다. 제자가 어디서부터 본 거지? 간식 이야기하는 거 보니 계속 따라다닌 거 같은데?

간식 이야기가 나오자 3황자도 조금 당황했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침묵했다. 3황자는 그 상태로 몇 호흡을 가만히 있고 난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괜한 짓을 하는 바람에 이국사에게도 폐가 되고 너도 화나게 했구나. 모두 내 탓이니 화내지 말거라.”

그러나 제자의 표정은 3황자의 사과에 더욱 구겨졌다. 3황자가 순순히 사과까지 하는데도 제자는 한 대 맞은 표정이었다.


“형님이 제 정혼녀를 대신해 사과하는 모양새라 듣기 거북하네요.”

“!”

저래서 화가 났구나. 이번에는 3황자도 입을 아예 꽉 닫고 미간을 찡그렸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제자가 화를 풀지 않으리란 걸 짐작한 듯했다.

제자는 제자대로 3황자를 눈도 거의 깜빡이지 않고 쳐다보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멀지 않은 곳에서 청양이 담 뒤에 숨어 이쪽을 쳐다보다가 머리를 숨겼다.

내가 나서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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