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서로를 의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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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화. 서로를 의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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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화. 서로를 의심하다
2023.08.28.
화려는 시간을 확인하고서 말했다.
“그래도 좀 더 기다려보겠다.”
분명 꿍꿍이가 있어서이겠지만, 이번 삶에서 스승은 그에게 잘 보이려 꽤 애쓰는 중이었다. 화려는 자신이 몸이 좋지 않단 말도 했으니 스승이 필시 올 거라고 믿었다.
“전하.”
그때 다른 전각 소속의 태감이 안으로 들어오더니 꾸벅 인사를 올리고서 말했다.
“이행위서가 전하께 말을 전해달라 하여 왔습니다. 요 이국사가 다리를 다쳐서 요양에 함께 가기 어렵다고 합니다.”
이행위서는 요요화의 부친이었다. 청양과 초감은 동시에 시선을 떨구었다. 조금 전 그들이 화려에게 ‘요요화가 외출하고 없다’라는 보고를 올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런 거짓 보고를 받게 된다니.
“그래.”
화려가 차갑게 대꾸하자 태감은 다시 인사를 올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들만 남은 공간에 차갑고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저…… 전하.”
초감은 용기를 내어 화려를 불러 보았으나 뒷말을 뱉을 수가 없었다. 이 와중에 뭐라고 하겠는가.
“청양.”
무거운 침묵을 뚫고 화려가 입을 열자 청양이 얼른 앞으로 나섰다.
“네, 전하.”
“너는 이번 요양에 따라올 필요 없다.”
“예?”
“스승님을 추적해라.”
“!”
* * *
‘제자한테 적당히 변명해두었으니 괜찮겠지?’
아버지에게 사람을 보내 말을 전해 달라고 부탁한 뒤. 나는 수왕주도로 떠날 채비를 했다.
“소가주님, 어디 가세요?”
시비인 월섬은 내가 짐을 싸자 곁을 왔다 갔다 돌아다니며 물었다.
“이틀 정도 외출하려고. 요즘 집에 있으려니 너무 머리가 아파서.”
“저도 짐을 쌀까요?”
“괜찮아.”
나는 떠날 채비를 빠르게 마친 다음 마차를 빌리고 마부를 고용해 올라탔다.
요 가주가 내게 부탁한 건 자기 숙적의 육순 잔치에 참가해서 ‘우항상’이란 사람이 있나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게 누군진 모르겠지만.
-그냥 직접 가시지 그래요?
쉬운 조건이긴 했지만 왜 굳이 내가 가야 하나 싶어서 묻자, 요 가주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놈 가문 사람들은 우리 가문 사람들 얼굴은 물론 고용인들 얼굴과 이름까지 다 파악하고 있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지만요.
뭐. 전에 춤추는 일에 비하면 어렵진 않았다. 그 ‘우항상’이 어떤 사람인지 요 가주 본인도 모르는 문제가 있긴 했지만.
* * *
다음날 이른 새벽에 수왕주도에 도착한 뒤. 나는 객잔에 자리를 잡고 한숨 푹 쉰 다음 좋은 가문 공자가 공들여 차려입은 행색을 했다.
이후 잔치가 시작될 시간을 기다리다가 약간 시간이 지난 다음에 그 숙적 가문을 찾아갔다. 미리 얻어둔 초대장을 건네자 문지기들은 바로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나는 뒷짐을 지고서 ‘당연히 이런 자리엔 내가 초대받아야지!’ 하는 건방진 태도로 안쪽으로 들어갔다.
일부러 조금 늦은 시간에 찾아왔기에 안쪽에서는 악기 소리와 사람들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음식 냄새도 강하게 풍겨왔다.
사람들이 어찌나 많이 초대되었던지 중문이 활짝 열려 있고 그곳까지도 초대받은 손님들이 밀려 나와 있었다.
많은 이들이 와 있기에 날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안도하고서 더욱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 음식부터 가지러 갔다.
그런데 접시를 챙겨서 음식을 덜고 있자니 누군가 맞은편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다리가 많이 아프신 모양입니다.”
“!”
돼지고기를 덜다가 휙 고개를 들어 보니, 제자가 빈 접시를 손에 들고 빙그레 웃고 서 있었다.
“전-.”
내가 반사적으로 ‘전하’라고 부르려고 하자 제자가 다른 손으로 내 입을 살짝 막았다가 뗐다. ‘전하’라고 부르지 말란 소리구나.
“제자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고쳐 부르자 제자는 비치된 긴 젓가락으로 과일을 그릇에 덜면서 빈정거렸다.
“튼튼하셨다면 수왕주도가 아니라 더 먼 곳으로 놀러 가셨을 텐데. 다리가 많이 아픈 듯해 안타깝군요.”
“그러는 전, 제자님이야말로 지왕주도로 가신다면서요? 요양지를 빨리도 바꾸시네요?”
“다리 다친 사람이 몇 시진 만에 이곳으로 오는 것보다야 쉽지요.”
“처음부터 요양은 생각도 안 하셨던 거죠?”
“저라면 미안해서라도 입을 다물고 있겠습니다.”
“하지만 미안하지 않은걸요.”
제자가 든 접시에 과일이 한 뼘만큼 쌓였다. 날 계속 노려보면서 과일을 덜어대서 그런다. 이걸 알려줘야 하나.
조심조심 그의 그릇을 손으로 가리키자, 제자는 그제야 음식 덜던 걸 멈추더니 과일이 쌓인 접시를 지나가던 사람에게 건넸다.
“어이쿠 감사합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얼결에 과일 접시를 받아 가자, 제자는 새 접시에 다시 음식을 덜면서 나를 흉흉하게 쳐다보았다.
계속 음식이나 덜라지. 나는 얼른 그 자리를 피해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속이 콩닥거려서 제자와 더 말을 나눌 수가 없었다.
나는 계속해서 안쪽으로 들어가면서도 제자가 쫓아오지 않나 계속해서 뒤돌아보았다. 다행히 제자는 쫓아오지 않았다.
인적이 거의 없는 후원까지 들어온 뒤에야 나는 긴 의자에 앉아서 가져온 음식을 먹었다. 하지만 속은 여전히 갑갑했다.
‘제자가 저기서 돌아다니는데 대체 어떻게 유 가주가 말한 사람을 찾지?’
내가 누군가를 찾고 돌아다니면 제자가 거기에 관심을 보일 거고, 그러면 내가 그냥 여기에 온 게 아니라 은신처 때문에 온 걸 알게 될지도 모른다.
은신처에 대한 일은 유 가주와 나만의 비밀이었다. 제자가 알게 할 수 없었다.
“저 사람! 저 사람!”
그런데 음식을 반 정도 먹었을 무렵. 이곳 하녀로 추정되는 여자가 무장한 무인들을 이끌고 이쪽으로 오는 게 보였다.
내 얘기가 아닐 거라고 여겼으나 여자는 정확히 내 쪽을 가리켰다.
“저 사람 침입자 같아!”
“!”
* * *
“각오는 했지만 황제의 총애만큼 덧없는 것도 없구나.”
린화가 꽃나무들을 손으로 훑으며 중얼거리자 사가 궁녀인 월미는 눈물이 나올 뻔했다.
린화가 뭔가 모략을 세우다가 당했거나, 아니면 다른 후궁 때문에 궁지에 몰렸다면 이렇게 기가 막히지도 않을 터였다. 그러나 동복 언니의 말실수 때문에 이 지경이 되다니.
“소주는 분명 물건을 보냈잖아요. 대체 어디로 간 걸까요?”
“내가 보낸 물건이 사라진 건지, 내가 받은 물건이 전부가 아니었는지 모를 일이지. 내명부 물품 목록을 내게 보여주지 않으니까.”
“황후 마마께 보여달라고 여쭈면 어떨까요?”
“황후는 진실에 관심이 없어. 황후도 내가 폐하의 총애를 잃은 걸 좋아하고 있으니까. 내 해명을 들을 생각도 없이 무조건 결론을 내고 치워버렸잖아.”
월미는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떨구었다. 요 가주는 첩을 두지 않았고 바깥에서 사고를 치지도 않았기에 린화에겐 이복형제자매가 없었다.
게다가 요 가주 부부는 린화를 애지중지해서 집안에서 그녀는 황녀처럼 자라났다. 다른 명문세가 소저들도 린화와 굳이 싸우려 들지 않았다.
싸울 상대가 요화뿐이었던 린화는 이런 계략이나 다툼에는 익숙하지 못했다.
“요 귀인?”
그때 커다란 바위에 앉아 있던 청년이 몸을 일으키며 린화에게 아는 척 말을 걸었다.
“난 공자…….”
월미는 아차 싶었으나 린화는 이미 난균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소식을 들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난균의 질문을 듣자마자 린화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더니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었다.
월미는 안색이 파래져서 황급히 돌아섰다. 심장이 쿵쿵 무섭게 떨렸다. 이런 만남이 반복되는 건…… 안 될 거 같은데.
* * *
‘분명 제자가 나에 대해 이른 거야.’
나는 그릇을 든 채 자연스럽게 이동하듯 의자에서 일어나 사람들 틈으로 들어갔다.
‘이런 곳에서 조급하게 뛰면 더욱 눈에 띌 거야.’
나는 최대한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고서 발만 빠르게 했다. 젠장. 나쁜 제자 같으니라고. 자기도 꾀병 부렸고 나도 꾀병 부렸는데 왜 저렇게 화내는 거야?
“저기! 거기요! 거기 그쪽! 꽃무늬 겉옷 입은 공자! 잠시만요!”
꽃무늬가 하나둘이냐.
그런데 뒤에서 들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빠르게 걸어가는 내 팔을 누군가 확 잡았다. 뿌리치려고 돌아봤다가 나는 놀라서 휘청였다.
“전하……?”
전하는 전하인데, 이번엔 3황자였다.
“전하는 또 왜 여기 계세요?”
제자를 여기서 만난 이상으로 당혹스러운 만남이었다. 저절로 질문이 나가자, 3황자가 내가 균형을 잡고 서도록 도와주었다.
그러고는 무어라 대답을 하려다가 날 쫓던 이들이 우르르 달려오자 나를 자기 몸으로 가려주었다.
몸이 약하다지만 3황자는 뼈대 자체가 넓었기에 내 몸을 충분히 가려줄 수 있었다. 옷자락은 조금 보였겠지만 이런 옷은 여기저기 많으니까.
날 쫓던 이들이 우르르 사라지자 3황자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여전히 날 가리고 선 채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서로 대답할까?”
“!”
* * *
스승이 간 쪽은 완전히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후원이었다. 그곳에 들어가면 어떻게든 도로 이쪽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에 화려는 스승을 무리해서 쫓아가는 대신 과일을 한 입 한 입 씹어 삼키면서 스승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대체 무슨 머리를 또 어떻게 굴렸기에 여기에 나타난 건지 반드시 물어보아야 했다.
‘혹시 은신처를 구하러 온 건가?’
오늘 육순 잔치의 주인공인 남 가주는 유 가주와 숙적이기도 하지만 치열한 경쟁자이기도 했다. 유 가주가 하는 일은 남 가주도 모두 했다. 스승이 이쪽에 은신처를 구하러 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때 스승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화려는 생각하길 멈추고 우선 일어났다. 그런데 스승의 속도가 심상치 않았다.
접시를 손에 들고는 있었지만 위장용인 듯 음식을 먹지 않았고,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걷는 속도가 남들보다 빨랐다.
역시나. 뒤쪽을 쳐다보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스승을 쫓고 있었다.
“청양.”
화려가 작은 목소리로 부르자, 손님들 사이에 섞여 들어가 있던 청양이 추격자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들어가 그들을 흩어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갑자기 빨리 오니 그렇잖아요!”
“알았으니 비켜요!”
“그쪽도 사과해야지요!”
청양이 잠깐 시비를 걸었으나 무인들은 그를 무시하고서 다시 추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졌기에 화려는 뒷짐을 지고 스승이 간 쪽으로 걸어갔다.
스승은 이대로 밖으로 나갈 테니 쫓아 나갈 생각이었다.
“?”
그런데 스승은 나가지 않았다. 오히려 어느 사내와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심지어 그 사내는…….
‘셋째 형님?’
* * *
3황자의 제안에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같이 대답하자니. 3황자만 대답하고 나는 듣기만 하면 안 되는 걸까.
“요 공자?”
그가 장난치듯 나를 그렇게 부르자, 이러면 안 된단 생각을 하면서도 귀와 목덜미가 뜨끈뜨끈해졌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가 먼저 말씀해주세요.”
아니면 내가 왜 여기에 왔는지 술술 다 말해버릴 것 같았다. 젠장.
“오늘은 내 지기의 백부의 생일이라네.”
3황자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이야기해주었다. 그는 나와 달리 떳떳했다.
“자네는?”
하지만 나는 둘러댈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어중간한 거짓말을 했다가는 들통이 날 테고. 완전히 사실을 말할 수도 없어.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꽃무늬 공자.”라고 불렀다. 고개를 돌리자 날 침입자라고 우기던 하녀가 화난 얼굴로 서 있었다.
아차 싶었지만 하녀와 그녀가 몰고 다니던 무인들은 이미 근처에 서 있었다.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보는데 멀지 않은 곳에 제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이쪽을 쳐다보는 게 보였다.
‘역시 제자가 날 찔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