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4화. 전에 만난 적이 있습니까? (154/159)


154화. 전에 만난 적이 있습니까?
2023.08.21.



 
제자가 미래에 날 죽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황제는 지금 당장 날 죽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손바닥에서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독을 삼킨 후의 고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황제 손에 죽으면 독살보단 다른 쪽이겠지. 굳이 하나하나 다 확인하고 싶진 않다. 하나도 안 궁금하다.


“이국사.”

거짓말하자.


“폐하. 순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소신은 앞서 다른 여러 가지 꿈을 꾼 다음에야 7황자님에 관한 꿈을 꾸었습니다.”

“즉, 여기 나온 게 이국사가 꾼 꿈의 순서이다?”

“중간중간 예지몽이 아닌 게 섞여 있겠지만 일단 순서는 그렇습니다, 폐하.”

황제가 문진을 문지르긴 하지만 일단 내 말을 끊진 않는다. 나는 손바닥의 땀을 옷에 닦으면서 온 힘을 다해 억울한 표정을 만들어냈다.


“폐하.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소신이 7황자님에 대해 꾼 꿈은 그리 좋은 내용이 아닙니다.”

“감옥에 가는 게 아니냐.”

“아닙니다. 7황자님이 1월에 말 타고 가시다가 낙마해 크게 다치는 꿈이었습니다.”

황제의 눈썹이 위로 씰룩 올라갔다.


“낙마?”

“예. 하지만 이 일은 제가 기억하기로 다른 사건이 터진 다음에야 일어날 일이었습니다. 폐하께서는 제게 1소황자님과 관련해서 예지몽 꾼 게 없는지 하문하셨지요. 소신이 어떻게 7황자님에 대한 일과 1소황자님에 대한 일을 연관 지어 생각하였겠습니까.”

침을 삼키지 않기 위해서 온 힘을 다했으나 쉽지 않았다. 나는 두 손을 모아 배꼽 부근에 대고서 황제가 제발 문진에서 손 좀 떼기를 기다렸다.

기도한 효과가 있었나. 마침내 황제가 문진에서 손을 치웠다. 그래도 안도하지 않고서 버티기를 한참.


“요요화.”

황제가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나를 다시 불렀다. 하지만 아까보다 누그러졌을 뿐 여전히 차가운 목소리였기에 나는 방심하지 않고 공손히 굴었다.


“예, 폐하.”

애쓰면서 가만히 있자니, 황제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집에 돌아가서 석류석 목걸이를 도로 보내도록 하라.”

그리고 뒤를 이은 명령은 너무 황당한 명령이었다.


“예? 석류석 목걸이요?”

나는 의아해서 되물었다.

황제의 선물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어쨌든 황제가 보내는 선물이기에, 받은 건 죄다 따로 모아두었고 물품이 뭔지도 기억한다. 하지만 개중에 석류석 목걸이는 없었다. 웬 석류석?


“아…… 혹시 홍옥 목걸이를 말씀하세요?”

잘 생각해보니 붉은 보석 목걸이가 하나 있긴 해서 나는 조심스럽게 황제의 실수를 정정해주었다.

그런데 웬걸. 정정하고서 보니 황제의 표정이 아까 이상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폐하? 혹여 소신이 말실수를 하였을까요?”

나는 기가 죽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뒤늦게 석류석이 진실을 상징하는 보석이란 말이 떠올라 소름이 돋았지만, 내가 이걸 바로 못 알아들어서 황제가 화난 것 같진 않은데.


“…….”

황제는 말없이 나를 유심히 보더니 나가라고 손짓했다. 이렇게 갑자기?

하지만 나가라는데 머물 수도 없었다. 나는 인사를 올리고 얼른 밖으로 나왔다.

내가 어전 밖으로 나오자마자 뒤에서 “송소우!” 하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번째 벼루가 깨지는 소리도.


‘아니, 왜 갑자기 더 화난 거지?’

 

* * *



“소주, 폐하께서 찾으세요.”

린화는 황후가 후궁들에게 ‘권한’ 서책을 팔랑팔랑 넘기다가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또?”

“네. 또요.”

사가 궁녀인 월채는 흐뭇하게 웃고서 린화가 일어나도록 부축해주었다. 월미가 얼른 새 옷을 챙겨 다가왔다.


“폐하께서 오늘 7황자랑 1황자 건으로 속상하셨잖아요. 마음이 좋지 않으니 소주가 생각나시나 봐요.”

월우는 소박한 머리 장식을 가져와 린화의 귓가에 꽂아주며 뿌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린화는 코웃음을 쳤으나 궁녀들이 치장해주는 대로 순순히 몸을 맡기고 있었다.


“소주, 그래도 폐하를 뵈면 조심하셔야 해요. 오늘 심기가 불편하시니 어디에서 화를 내실지 몰라요.”

월채가 조심스레 당부했으나 린화도 그쯤은 알고 있었다. 린화는 채비가 끝나자 바로 황제의 서재로 찾아갔다. 송 태감이 린화를 보자 묘한 표정으로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서재 안으로 들어간 린화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바닥에 박살 난 벼루 조각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방 안에서 상처 없이 홀로 우아하게 서 있는 건 황제뿐이었다.


“폐하……?”

놀란 린화가 작은 목소리로 부르자 황제가 서가를 보고 서 있다가 천천히 돌아섰다. 린화는 심장이 떨렸으나 용기를 가지고 조심조심 다가갔다.


“폐하. 신첩을 부르셨다고요. 어심이 불편해 보이십니다. 괜찮으세요?”

“요린화.”

“네, 폐하.”

“짐이 몇 가지 하사품은 너희 자매에게 짝을 맞추어 내렸지.”

“예…….”

린화도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황제가 두 쌍으로 된 선물을 보낼 때면 린화는 사람을 시켜 집으로 선물을 보냈고, 그편에 부모님에게 보낼 편지를 같이 보냈다. 그런데 황제가 왜 갑자기 그 일을 꺼내지?


“한데 왜 요요화가 받지 못한 하사품이 있는 거지?”

“예?”

린화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가 다급히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폐하. 신첩도 모르는 일입니다. 신첩은 폐하께서 보내주신 하사품은 모두 언니에게 그대로 보냈습니다.”

“요요화는 짐이 뭘 보냈는지조차 모르고 있던데.”

“폐하가 뭘 보냈는지 확인하지 않아서 그럴 겁니다. 언니는 원래 물건을 세심하게 살피지 않습니다, 폐하!”

“너는 입궁하기 전에는 13황자와 요요화의 혼담 소문을 퍼트리고, 입궁한 뒤에는 네 언니가 남장했단 이야기를 퍼트렸지.”

“폐하! 아닙니다! 제가 아니에요!”

린화는 창백하게 질려서 다급히 외쳤다.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7황자와 1황자 건으로 화난 황제가 왜 갑자기 그녀에게 화풀이를 한단 말인가.

혼담 소문은 그녀가 퍼트린 게 아니었고, 남장 이야기도 그녀가 시작하긴 했으나 혼자만의 잘못이 아니었다. 하사품에 관한 건 영문도 알 수 없었다.


“실망이구나. 가끔씩 언니와 나누어 가지라고 한 쌍의 물건을 보내긴 했지만 짐이 보낸 하사품은 거의 다 네 것이었다. 그런데 몇 개 나누어 가지라고 보낸 것조차 다 나누지 않느냐.”

“폐하, 신첩은 아닙니다. 신첩은 처음 듣는 이야기에요. 뭔가, 뭔가 오해가 있던 모양입니다.”

“이미 내무부 장부를 다 확인해 보았다.”

“폐하……!”

“물러가라.”

냉랭한 황명이 떨어지자 송 태감이 다가와 꿇어앉은 린화를 부축해 일으켜주었다.


“가시지요.”

린화는 송 태감에게 기댄 채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멍한 기분이 서서히 가시자 점차 그 자리를 분노가 차지하기 시작했다. 황제는 요요화가 그녀를 통해 받은 하사품에 대해 모르고 있다고 했다. 분명 황제가 한 쌍씩 보낸 물건은 모두 그대로 보냈는데도!


“요요화…… 개 같은 자식. 어떻게,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있어?”

“소주. 소주. 괜찮으세요? 왜 그러세요?”

“괜찮지 않아! 요요화가 폐하께 거짓을 고해서 미움을 샀어!”

“예?”

“내가 자기 하사품을 중간에서 강탈한다고 말했다고! 폐하는 날 완전히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해!”

“소주는 하나도 빼돌린 물건이 없잖아요! 말도 안 돼요!”

월채는 놀라서 외치다가 주위를 둘러보고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중간에서 누가 나쁜 계략을 꾸민 게 아닐까요?”

 

* * *



“과연 머리가 비상하군. 큰 도움이 되었네.”

황후는 인자한 얼굴로 인사치레를 했다. 용정은 맞은편 탁자에 앉아 차를 홀짝이며 가볍게 웃었다.


“황후 마마께서 영민하신 거지요. 소인이 무얼 하였다고요.”

“겸양은.”

황후는 만족스레 웃으면서 용정을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용정이 막내딸과 나이대만 맞았다면 사위로 삼고 싶을 정도였다.


“지내기에 부족한 점은 없는가? 무엇이든 말해보게.”

“당장은 없습니다. 나중에 요요화를 잡아갈 수 있게만 해주시면 됩니다.”

용정은 빙그레 웃고서 화음에서만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태월 폐하께서 요요화에게 많이 진노하셨거든요.”

 

* * *

황후와 차를 마시고 나온 용정은 겉으로는 태연히 걸어갔으나 속으로는 의아함을 느꼈다.

요린화 건은 그가 의도한 대로 정확하게 나아갔다. 하지만 1황자 건이 조금 이상했다.

일은 잘 진행됐다. 아니, 오히려 그가 계획한 이상일 정도였다. 용정이 의아해하는 점도 이 부분이었다.


‘나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행동한 누군가가 하나 더 있었다. 하지만 철저하게 자기를 숨겼어.’

그런데 막 걸어가는 도중. 용정은 가물가물 낯이 익은 듯한 여인을 발견하고 멈추어 섰다. 어디서 보았나 생각해보던 용정은 곧 요도화를 떠올렸다.


‘요 낭자와 닮았군. ……저자가 요요화인가?’

그 순간. 우두커니 서 있던 사내 복장 여인이 고개를 돌렸다. 용정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상하게도 여인과 눈이 마주치자 목 뒤가 한 대 맞은 것처럼 욱신거렸다.

* * *

황제에게 찝찝하게 혼난 이후. 걸어갈 정신도 들지 않아서 대화원을 한참 방황했다.

가까스로 정문 부근까지 걸어가긴 했지만 나는 커다란 나무가에 멈추어 서서 하염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다.

석류석은 진실을 상징하지. 황제가 석류석 목걸이를 되돌려 보내라고 한 건 내 변명을 다 믿지 않는단 뜻일 거야. 하지만 벌을 내리진 않았으니 내 변명을 전부 거짓이라 여기진 않는단 거겠지.

문제는 이다음이었다. 왜 목걸이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화를 냈지? 대체 왜?

그런데 이쪽을 빤히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제자인가 싶어서 돌아보았는데, 뜻밖에도 제자가 아니라 용정이었다.


‘왜 쳐다보지?’

얼굴을 알긴 하지만 아는 척을 하기 애매해진 터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기를 잠시. 결국 그냥 눈인사만 하고 고개를 돌리려는데, 의외로 용정이 내게로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잠시. 실례합니다.”

“예?”

“혹시 요 이국사가 아닙니까?”

나도 똑같이 ‘용 대인 아니세요?’ 해야 하나?


“그런데요?”

얼결에 모른 척하고서 멀뚱멀뚱 서있자니, 용정이 기묘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웃으며 자신을 가리켰다.


“태월에서 온 용정이라고 합니다. 황후 마마의 객으로 궁중을 오가고 있지요.”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용 대인이셨군요.”

그런데 왜 갑자기 날 찾아와서 말을 걸지? 내가 자기를 구해준 것도 모르고 있으면서? 아. 혹시 내가 은인인 게 생각나서 다가왔나?


“요 이국사. 아직 관직도 낮고 힘도 없는데. 여기저기 적을 많이 만들었더군요.”

아니구나. 느릿하게 다가온 용정이 내게 한 말은 오히려 시비와 협박에 가깝게 들렸다.


“태월 황제께서 요 이국사에게 화가 많이 났습니다. 금이야 옥이야 기른 공주님이 한낱 말단 관리 때문에 자결하기까지 했으니. 화가 날 만도 하지요.”

용정은 뒷짐을 지고 서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협박하듯 계속 말해댔다. 내 사촌 도화와 여러 번 만나는 듯했지만, 도화 때문에 날 두둔할 마음은 없어 보였다.


‘역시 도화가 내 밥상을 가져가게 두어선 안 됐어.’

“청정차를 마시면 화가 가라앉을 거예요.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좋거든요.”

속으로는 혀를 차면서도 나는 친절하게 권해주었다. 용정은 빙그레 소리 없이 웃었다.


“폐하의 진노를 가라앉히기에는 차보다 요 대인이 낫겠지요. 요 대인을 데려가면 폐하의 진노가 가라앉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건 모르겠고. 공주님이 누구를 닮았는지는 알겠네요. 태월 황가 사람들은 다들 남 탓을 잘하나 봐요.”

공주와 태월 황제를 한번에 묶어서 건드려 보았으나 용정은 무엄하다고 화내는 대신 웃기만 했다.

더 말을 섞을 필요가 없는 듯해서 나는 꾸벅 인사만 재차 했다. 그러고서 인사하느라 빠져나온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걸어가는데 뒤에서 용정이 또 불렀다.


 


“요 대인. 잠시만.”

“또 왜요?”

그런데 뭐야. 내가 돌아서는 사이에 용정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용정은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왜 저러나 뚫어져라 보고 있자니, 그가 한참 만에야 물었다.


“요 이국사. 혹시 나랑…… 전에 만난 적이 있습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