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저만 스승님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149/159)
149화. 저만 스승님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149/159)
149화. 저만 스승님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2023.08.03.
“요 이국사는 대체 내게 무슨 원한이 있는 거냐!”
매끈한 걸상에 문진이 떨어지며 듣기 싫은 쾅 소리를 냈다.
벽에 붙어선 태감들은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찔했다. 그들은 1황자를 힐긋거리며 생각했다. 우리 전하가 폐하의 머리는 안 닮고 성질머리만 닮으셨구나.
“고정하시옵소서.”
“고정하라니! 고정하게 되었느냐? 요 이국사는 우리와 원한 맺은 일도 없으면서 어마마마와 나, 넷째를 괴롭히고 있어. 독한 여인 같으니라고!”
1황자는 주먹을 꽉 쥐고서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측근 태감이 얼른 진정에 좋은 차를 가져가 빈 찻잔에 따라주었다. 1황자는 차를 마시고 싶지도 않아서 신경질적으로 몸을 의자 등받이에 기대었다.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 마음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겠어요?”
1황자비는 발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오며 차갑게 대꾸했다. 1황자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돌렸다. 1황자비는 그래도 꿋꿋하게 그의 걸상 앞까지 걸어왔다.
“요요화는 그냥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화를 내고 있을 게 아니라 무언가 수를 내야지요.”
1황자비는 우아하게 가까워져 오며 걸상 근처 의자에 앉았다. 측근 태감이 얼른 새 찻잔을 가져와 그녀 앞에도 놓았다.
1황자는 주먹을 쥐고서 고개를 돌렸다. 평소 그는 아내가 자랑스러웠다. 아둔하단 말을 듣는 자신과 달리 1황자비는 영리하고 기민했다. 그는 아내의 걸음걸이만 보아도 마음이 뿌듯해졌다.
하지만 일이 꼬이고 나자 1황자는 그런 마음이 싹 사라지면서 배 깊숙한 곳에서부터 불만이 마구 끓어올랐다.
“왜 그렇게 보나요?”
이를 눈치챈 1황자비가 묻자 1황자는 싸늘하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요요화가 우리와 원한 산 일이 없다고 말하고서 당신을 보니 생각이 났습니다.”
“생각나다니요?”
“당신이 요요화를 계속 불러서 괴롭혔지 않습니까.”
“전하!”
1황자비가 충격받은 표정으로 외치자 1황자는 그녀와 눈도 맞추지 못하고서 물었다.
“내가 틀린 말 하였습니까? 돌아오자마자 아직 혼례를 치르지도 않은 예비 동서들을 불러 모아서 기강을 잡으려 하고, 1소황자를 빼앗긴 후엔 요요화를 불러서 또 괴롭히려 시도했지요. 일이 터지기 전엔 늘 당신이 요요화를 괴롭히려 들었습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아요! 그런 거라면 다른 동서들은 왜 가만히 있는데요? 내가 동서들을 불러 기강을 잡아서 동서들에게 해가 갔나요? 오히려 우리 아들이 아팠어요! 당신 동생이 독을 먹고 의식 없는 게 내 탓인가요? 아니요, 당신 동생이 제멋대로 복수해주겠다고 설치다가 그런 거잖아요!”
“뭐라고요? 지금 쓰러진 애한테 그딴 식으로 말해야 합니까!”
“그딴 식? 내 말이 그딴 식이라고요?”
1황자와 1황자비가 언성을 높여 싸우자 태감들은 불똥이 튈까 봐 몸을 움츠렸다.
“두 분 전하.”
그때 끄트머리에 서 있던 태감 하나가 슬며시 앞으로 나아갔다. 용기 있는 부름에 1황자와 1황자비가 싸움을 잠깐 멈추고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냐.”
1황자는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아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태감은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서 허리를 숙였다.
“일전에 두 분 전하께서 요 귀인과 난균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지요.”
태감의 말을 듣자 부부는 모두 같은 걸 떠올리고 흠칫했다. 맞다. 난균을 이용해서 요화린화 자매들에게 쓴맛을 보여줄 계획이었다.
이후 여러 가지 다른 이들이 터지면서 그 계획을 미루다가 미루다가 잊어버렸지만 말이다.
부부는 같은 생각을 하고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1황자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지시했다.
“난균을 부른 다음 요 귀인과 대화원에서 마주치도록 유도해라!”
* * *
“누구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으십니까?”
평소처럼 수업을 하다가 휴식 시간에 잠깐 한숨을 내쉬었을 뿐인데, 제자가 눈치 좋게도 바로 물어왔다. 내가 용정 연락 기다리는 걸 어찌 알고 저러지?
“그럴 리가요.”
나는 공손하게 대답하고서 산책 핑계를 대고 잠깐 밖으로 나갔다.
전에 제자가 설치했다가 뜯어낸 금사연석 의자가 생각나 그쪽으로 가보니, 의자는 다시 돌아와 있었다.
제자 말처럼 섬세한 세공이 테두리에 생겨난 걸 보니 홧김에 뜯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면 홧김에 뜯었다가 세공까지 맡겼거나.
여기 앉아도 되겠지? 주저하다가 그 위에 앉자 제자가 서재 밖으로 나오더니 대번에 이쪽으로 걸어왔다.
“스승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가까이 다가온 제자는 내 옆에 나란히 앉으면서 물었다. 그와 내 무릎이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지자 심장이 펄떡거렸다. 나는 제자와 닿지 않도록 내 무릎을 가운데로 얼른 모았다.
“아무 일 없어요.”
“…….”
제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금사연석 장식을 일부러 쳐다보고 있다가 슬쩍 제자 표정을 살폈다. 그는 무표정한 채 내 무릎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제자와는 옷도 닿기 싫으십니까. 제 옷이 닿으면 스승님 바지가 더러워지기라도 합니까.”
나왔다 이 과도한 해석!
“전하는 왜 항상 그렇게 말을 이상하게 하세요?”
“스승님이 제자와 무릎이 닿을세라 싹 피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린 아직 혼인한 사이가 아니니 그러지요.”
제자가 무어라 더 말하려는 듯해서 나는 무릎을 그의 무릎에 찰싹 가져다 댔다. 자!
“이러면 됐어요?”
그러고서 묻자 제자는 잠시 침묵하더니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예.”
됐다고? 진짜로 이러고 있자고?
“전하는 이상하세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대놓고 투덜거릴 수도 없어서 그렇게 한쪽 무릎만 그에게 붙이고 있기를 한참. 너무 어색해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제자가 갑자기 말했다.
“제자는 스승님 편입니다.”
나는 반쯤 일어났다가 놀라서 도로 앉았다.
“예?”
갑자기 무슨 이야기야? 황당해서 쳐다보자 제자가 몸을 일으키더니 내 손을 잡고 일어나도록 당겨주었다.
얼결에 손을 잡고 일어나자 그가 무슨 오물 피하듯 내 손에서 자기 손을 빼내고서 차갑게 말했다.
“말 그대로입니다. 이 세상에 스승님 편은 제자 하나뿐입니다.”
반대 아니고……?
“전 가족도 많고 친구도 많은데요 전하.”
“가족도 친구도 영원하지 않지요.”
“그럼 전하랑 저도 영원할 거란 보장은 없잖아요.”
“제자를 배신하시겠다고요?”
얘는 머리도 좋은 애가 왜 항상 결과를 저렇게 멀리 잡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나와 관련될 때만.
“그럴 리가요. 소신은 전하의 스승인걸요.”
“아내이기도 합니다.”
아직 아닌데. 하지만 적당히 융통성 있게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자니, 제자가 서재 쪽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며칠 전엔 스승님이 여섯째 형님이 한 요리만 먹어서 투기하였습니다.”
“예?”
“많이 속상해서 조금 화를 낸 것이니 부디 마음에 담아두지 마시지요.”
“조금 속상해서 많이 화를 낸 게 아니고요?”
소름이 돋아서 묻자 제자는 대답 대신 서재로 걸어갔다. 그 뒤를 졸졸 쫓아가자 제자는 서재 문을 열고서 나더러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제자리로 돌아가 앉자,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서책을 펼쳤다. 그 덕택에 내 마음만 또 술렁거렸다.
소름 돋게 갑자기 왜 또 사근사근해진 거지? 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야?
* * *
“꿍꿍이가 없을 리가 없지.”
린화는 교비의 궁녀가 물러나자 가소롭단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교비가 소주를 대화원으로 불러서 할 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요?”
린화의 사가 궁녀인 월미는 황제가 보내온 이름 특이한 과일을 가져와 중앙이 패인 접시에 내려놓았다.
“불러서 잡심부름을 시키거나 쓴소리를 하거나 하겠지. 아주 웃기지도 않아. 자기가 아직도 총애받는 후궁인 줄 아나보다.”
월미가 사과를 깎는 동안 린화는 동그란 대나무 부채를 살살 흔들었다.
“그래도 조심해서 대하세요 소주. 교비에겐 아들도 있고 딸도 있고 손자도 있잖아요.”
“아들과 며느리는 폐하께 밉보였고 딸은 의식이 없고 손자도 원비가 데려가서 방치 중인데 뭘.”
월미는 린화를 쳐다보며 더 말하려다가 과도에 손가락을 베고 말았다. 노란 과일 위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자 월미가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린화는 교비 이야기를 하는데 월미가 피를 보이자 괜히 찝찝해졌다.
“가지 말까?”
“어떻게 그러겠어요. 적절한 핑계가 없으면 거부하기 어렵잖아요. 어쨌든 아직 상대는 비니까요.”
“그렇긴 하지만…….”
월미가 손을 치료하러 간 사이 다른 사가 궁녀인 월채가 들어와 린화가 옷 갈아입는 걸 도와주었다.
결국 린화는 다친 월미를 두고 월채와 함께 대화원으로 갔다. 하지만 가면서도 여전히 꺼림칙했다.
“교비가 무어라 하든 그냥 순순히 네 네 해버리고 마세요 소주. 그리고 소주가 교비마마의 초대를 받고 간 걸 다른 궁녀와 태감들에게 다 이야기해 두었으니 소주가 빨리 오지 않으시면 바로 사람을 보낼 거예요.”
린화는 보석과 엮어 늘어뜨린 머리카락 끝을 톡톡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나도 품계가 올라갔으면 좋겠어. 거절할 땐 확실하게 거절하게 말이야.”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은 어느새 대화원 안쪽에 도착했다. 약속한 쪽으로 가보 교비는 이미 도착해서 꽃을 구경하고 있었다.
“왔는가.”
교비는 미소 지으면서 린화에게 말을 걸었다. 린화가 다가가자 교비는 가느다란 나무에 방울방울 달린 꽃망울을 바라보며 웃었다.
“봄이 되니 날씨도 좋고 바람도 좋아서 불렀네. 봄이 오면 춘심이 흔들리지 않는가.”
교비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하고 상냥해서 흑심을 품고 부른 사람 같지 않았다.
하지만 린화는 오래 지낸 후궁은 아니지만 갓 들어온 후궁도 아니었다. 궁중에는 웃는 얼굴로 비수를 휘두르는 이들이 많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지요. 어심까지 같이 흔들리면 안 될 텐데요.”
린화가 입가를 가리며 웃자 교비 뒤에 선 궁녀들이 움찔해서 노려보았다. 린화는 그래도 미소를 잃지 않고서 교비를 빤히 보기만 했다.
요요화랑 똑같은 것. 교비는 속으로 욕을 뱉었으나 겉으로는 미소를 유지한 채 이리 오라고 린화를 불렀다.
그리고 한동안 얘기를 나누다가 린화에게 부탁했다.
“요 귀인. 내가 아까 약속 장소로 오는 길에 아주 예쁜 노란 꽃이 핀 걸 보았는데. 괜찮다면 요 귀인이 그걸로 꽃다발을 만들어 주겠나?”
역시. 심부름시키며 놀려먹으려고 불렀군. 린화는 속으로 생각했으나 거절할 명목이 없기에 알겠다고 일어났다.
요요화는 1황자비가 나무로 장난감을 만들란 지시를 내리자 ‘나는 폐하의 신하이지 내명부 사람이 아닙니다’ 핑계를 대고 물러났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명부 사람이기에 교비의 지시를 이유 없이 거절하긴 힘들었다.
나중에 폐하께 말씀드려야지. 린화는 속으로 다짐하며 교비가 말한 장소로 찬찬히 걸어갔다.
교비가 말한 장소에 도착한 요화는 더위를 식히기 위해 손수건을 꺼냈다. 손수건으로 목덜미를 닦고 있자니 사방에서 풍기는 꽃향기가 아주 좋기는 했다.
린화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노랗게 늘어진 꽃 더미 사이로 한 사내를 발견하고 놀라 외쳤다.
“누구냐!”
두리번거리며 걸어가던 사내가 멈칫하더니 잠시 뒤 뜻밖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린화 낭자?”
“무엄합니다!”
월채가 버럭 외치자 곧 그 사내가 꽃 더미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꽃보다도 더 고운 사내의 등장에 린화는 입을 다물었다. 그와 혼인할 뻔했던 남자, 난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