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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화. 속이고 속이고 속이고 (148/159)


148화. 속이고 속이고 속이고
2023.07.31.



 
집으로 천천히 걸어가면서 나는 용정을 어떻게 되돌려받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내가 찾아가서 진실을 밝혀?


‘안 돼. 그놈은 의심이 많아. 내가 스스로 밝히면 내 의도를 알아낼지도 몰라. 그러면 고맙다고 인사하고 그냥 피해버리겠지. 용정이 스스로 자기가 깨달은 걸 알아차리게 해야 해.’

인적 드문 거리를 홀로 생각에 잠겨 걸어가고 있자니 주위 여기저기에서 많은 시선이 느껴졌다. 보통 무림인들, 그것도 사파나 오가는 거리를 여자가 혼자 오가니 그렇겠지.


‘용정은 의심이 많은 인간이다. 은인을 찾고서도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다면 몇 번이고 점검할 거야. 그 기회를 노려야 해.’

사파 거리를 빠져나가기 직전 마침내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다시 왔던 길을 뛰어갔다.

* * *

다음날은 싸락눈이 새벽부터 계속해서 내렸다. 용정은 호화로운 다루 한 층을 빌린 다음 그곳에서 자신의 은인이 오기를 기다렸다.

약속한 시각이 다 되어갈 즈음 두툼한 털피풍의를 걸친 여자가 계단을 올라왔다. 희미하게 어른어른한 환상과 얼추 비슷한 인상의 여인이었다.

용정이 몸을 일으키자 여인은 쑥스러운 미소를 짓고서 다가왔다.


“먼저 오셨네요. 일부러 빨리 왔는데 먼저 오셨을 줄 몰랐어요.”

여인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서 눈을 내리깔았다. 전에 객잔에서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부끄러움이 많아 보였다.


“제가 초대하였으니 당연히 먼저 와야지요.”

용정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고서 중앙 자리를 가리켰다.


“앉으세요.”

“사람이 아무도 없네요?”

“주위에서 누가 시끄럽게 떠드는 걸 싫어해서요.”

고작 그런 이유로 이 한 층을 다 빌렸단 말인가? 한 끼 먹기도 비싸다는 이 다루의 한 층을? 요 가주 둘째 동생의 7소저인 요미화는 용정을 동그래진 눈으로 쳐다보았다.

요씨 가문은 가산이 풍족한 명문가였지만 아무래도 그녀는 첩의 딸이었기에 적녀인 이복자매들만큼 부유하게 자라진 못했다. 먹는 것, 장신구, 옷감 등은 모두 고가의 좋은 상등품이었으나 따로 용돈이 적기 때문이었다.


“이쪽으로 앉아요.”

용정이 의자를 빼주자 요미화는 얼굴이 붉어져서 자리에 앉았다.

용정은 그제야 자기도 맞은편에 앉고서 입구 부근에 선 점소이를 불렀다.


“먹고 싶은 게 있나요?”

용정이 묻자 요미화는 고개를 저었다.


“요 소저가 이곳 사람이잖아요. 나한테 추천해주어야 하지 않나요?”

용정이 웃는 얼굴로 농담하자 요미화는 입가를 가리고서 눈으로만 따라 웃었다.


“그러네요.”

그녀의 모습은 절대로 거짓말을 할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용정은 자신이 몇 가지 음식을 주문했다.

점소이가 주문 판을 챙겨 나가자 용정은 맞은편의 ‘은인’을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다정해 보이는 눈빛 안으로 용정은 요미화를 샅샅이 분석하고 있었다.


“일전엔 절 구해줘서 고맙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걸요.”

“바로 가버리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요.”

“오래 자리를 비우기 어려웠어요.”

용정은 조금도 그녀를 의심하는 티를 내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아쉬워서 한 말이니 신경 쓰지 말아요.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고 떠나는 바람에 대체 어느 귀인이 날 구하고 그냥 가버렸나 궁금했거든요.”

“사과해야 할 일은 아니지요?”

요미화가 부끄러워하면서도 농담하자 용정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요.”

그러는 사이 점소이는 먼저 완성한 요리 세 가지를 먼저 가져와 두 사람 사이에 놓고 앞 접시 하나씩을 앞에 놓아주었다.

요미화는 점소이가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동안 용정을 힐긋거렸다. 그가 보내는 따뜻한 눈빛이 그녀를 기쁘게 했다. 모험을 한 보람이 있구나!

그녀는 용정을 구한 진짜 은인이 요요화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불량배들이 자주 오간다는 거리에 혼자 들어가서 누군가를 구할 만한 요씨 가문 사람이라면 요요화 정도뿐이었다.

하지만 요미화는 자신이 요요화에게 미안할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요화에겐 어차피 정혼자가 있지 않은가. 용정을 구하고 굳이 말없이 간 걸 보면 자기 정체를 드러낼 마음이 없단 뜻일 터였다.

남의 것을 가로채면 도둑질이지만 남이 버린 걸 줍는 건 도둑질이 아니지 않을까? 요미화는 언니도 이 일을 안다면 필시 이해해주리라 확신했다.


“음식이 입에 맞았으면 좋겠군요.”

점소이가 물러나자 용정이 작은 국자로 음식을 덜어 그녀의 앞에 한가득 덜어주었다.


“전 가리는 음식이 없어요.”

“다행입니다.”

용정은 자신의 앞 접시에도 요리를 덜면서 덧붙였다.


“하긴. 그날 주문해서 먹고 간 음식을 보니 가리는 음식이 전혀 없어 보이긴 했습니다.”

요미화는 뜨거운 오징어를 집어 후 후 불다가 흠칫했다. 그날 주문해서 먹고 간 음식?

그 객잔에서 보내온 점소이는 그런 이야기는 없었다. 그녀가 구한 사람이 자기 은인을 찾고 있다, 좋은 집안의 점잖은 공자 같다, 객잔 식당에서 만나는 것이니 안심해도 좋다는 둥의 이야기를 했을 뿐이었다.

대체 요요화가 그날 뭘 먹었지? 그 객잔에서 뭘 팔더라? 하지만 당시 그 객잔에서는 용정의 얼굴을 쳐다보느라 음식을 볼 여유 따위가 없었다.

요미화는 쑥스럽게 웃는 거로 대답을 대신하고서 식사에 열중하는 척했다. 대답하기 곤란하다면 피해 버리면 그만이지.

그런 요미화를 용정은 미소 띤 눈으로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이 사람이 아니군.

* * *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신 뒤. 요미화는 요씨 가문임을 수놓은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으면서 용정을 곁눈질했다. 이제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할까?

일전에 그는 은혜를 갚고 싶다고 말했다. 은혜를 어떻게 갚고 싶단 걸까? 요미화는 그가 자신에게 반하기를 원했다. 그녀는 아름답기로 소문난 요씨 가문 여식들 중에서도 손꼽히게 아름다운 편이었다.

하지만 그가 꼭 자신에게 반하지 않더라도 상관없었다. 다른 방식이라도 은혜를 갚기만 하면 되었다. 작든 크든 그건 이득일 테니까.


“오늘 맛있게 잘 먹었어요, 용 공자. 초대해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저도 여러 가지 이야기를 잘 들어서 좋았습니다.”

용정은 그렇게만 말하고서 몸을 일으켰다. 요미화는 얼결에 따라 일어났다.


“그럼 이만 갈까요? 바로 집으로 가실 겁니까?”

용정의 질문을 듣고서도 요미화는 그가 하는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다루 밖으로 나와서야 요미화는 용정이 이대로 자신과 헤어질 생각이란 걸 알아차렸다.

은혜는? 은혜 갚기는? 요미화는 당황해서 용정을 보았다. 용정은 그녀가 타고 온 마차 마부를 부르고 있었다. 마부가 다가오자 용정이 마부에게 동전을 쥐여주었다.


“낭자를 잘 바래다 드려라.”

“물론이지요.”

뜻밖의 수확에 마부는 돈을 넣으면서 쾌활하게 대답했다.

요미화는 멀뚱멀뚱 용정을 쳐다보았다. 진짜 이대로 그냥 헤어질 셈이야? 어떻게 은혜를 갚을 거란 말도 없이?


“낭자? 마차에 안 탑니까?”

요미화가 주저하고 서 있자 용정이 물었다. 요미화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기색이었다.

요미화는 망설였다. 농담조로 어떻게 은혜를 갚을 거냐고 물어볼까? 식사 대접이 은혜 갚는 거였다고 하면 어쩌지?


“낭자?”

요미화가 주저하고 있자 용정이 다시 물었다. 요미화는 화려한 다루와 그곳을 오가는 부유해 보이는 손님들, 그리고 그 다루 한 층을 통째로 빌린 용정의 씀씀이를 떠올려보았다.

그녀의 이복언니라면 이런 일들에 전혀 감동받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첩의 자식이었다.


“낭자?”

용정이 무언가 이상한 걸 느낀 듯 눈살을 구기며 불렀다. 요미화는 용기를 가지고 생글 웃으며 말했다.


“용 공자. 혹시 마음에 둔 여인이 있나요?”

대범한 질문에 요미화가 마차에 오르기를 기다리던 마부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쳐다보았다.

용정 역시 이 가짜 은인이 얼른 돌아가기만을 기다리다가 눈썹을 찡그렸다.


“갑자기 그런 건 왜 묻습니까?”

“전 공자가 마음에 들어요.”

요미화의 입가에 자신만만하면서도 아름다운 미소가 올라오자 주위를 지나가던 사내들이 잠시 넋을 놓고 그녀를 보았다.

요미화는 용정의 반응을 기대하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용정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가 기대한 말이 아니었다.


“낭자는 사기꾼이 되기엔 부족하군요.”

 

 


“네?”

사기란 단어에 요미화의 눈이 커다래졌다. 무슨 말이지? 혹시…… 내가 자기 은인이 아니란 걸 아나? 알고서 저러나?


“그게 무슨 소리인지…….”

그래도 한번 발뺌해보자 용정이 가까이 다가서더니 허리를 조금 숙였다.


“절 속인 건 괜찮습니다. 하지만 너무 티 나는 건 재미없네요.”

“!”

요미화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용정은 예의 있게 인사를 건네고 자신이 타고 온 마차에 올라탔다. 그가 탄 마차가 먼저 사라지자 요미화는 이를 갈며 마차에 올라탔다.


‘언니가 구하고 왜 그냥 가버렸는지 알겠네! 순 이상한 놈이잖아!’

 

* * *

요미화와 헤어진 용정은 다시 자신이 발견된 객잔으로 갔고, 그 객잔을 통해 ‘은인’이 의원을 불러 주었단 의방으로 가보았다.


‘이렇게까지 찾아야 하나?’

용정은 의방으로 걸어가면서 잠깐 자신의 행동을 점검했다. 사실 요미화가 가짜 은인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진짜 은인은 그를 두고 가버렸고, 그가 사람을 보내 찾아도 나오지 않았다.

요미화는 어쨌든 은인의 사촌 자매였다. 돈도 돌려주었고 이만큼 찾으려 했고 요미화에게 잘 대접하기까지 했으니 도리는 다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른아른 떠오를 듯 말 듯 하는 은인의 얼굴이 자꾸 신경 쓰였다. 그게 문제였다. 안 봐도 상관은 없는데 보고 싶었다.


‘하여튼 이놈의 호기심.’

용정은 고개를 젓고서 결국 의방 안으로 들어갔다.

의방 주인은 그의 설명을 듣자 “아아. 기억납니다.”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도 찾아와서 고맙단 말까지 하고 간걸요. 정말 착한 소저였지요.”

“혹시 그 소저가 누구인지 압니까? 요씨 가문 사람인 건 알아냈는데 그 집에 소저들이 많아서요.”

“그럼요. 누군지 확실히 알지요.”

의방 주인은 빙그레 웃으며 이 사람이 오기 일각 전 먼저 나타난 남자를 떠올렸다. 인상이 흐릿한 그 남자는 꽤 많은 돈을 주면서 이런 상황을 정확히 예측한 뒤, 은인을 찾는 사내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시켰다.


“요씨 가문의 도화 소저입니다. 요 가주 첫째 동생의 넷째딸이지요.”

 

* * *

청양에게 용정이 은인을 요도화라 착각하게 만들었단 보고를 들으며 화려는 붓을 내려놓았다.


“잘했다. 하지만 방심하지 말아야 한다. 그자는 이미 한번 요미화가 가짜란 걸 알아보았으니까.”

“이번엔 알아보지 못할 겁니다. 당시 정황에 대해서도 전부 다 전했으니까요.”

화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일이 잘 풀렸는데도 화려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전하. 요 이국사를 속이는 게 신경 쓰이십니까?”

의아한 청양이 묻자 화려는 고개를 저었다. 스승은 사기꾼 중의 왕과 같은 사람인데, 그런 사람을 속이는 게 신경 쓰일 리가.

화려가 기분 나쁜 건 스승이 어제 의방과 객잔을 찾아다니면서 용정에게 자신을 알리려 애썼단 점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용정과 가까워지고 싶단 거지.’

그 생각을 하자마자 화려는 심장이 비틀리는 느낌을 받았다. 기분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스승이 혼자서 그러고 있어도 기분이 나쁜데, 심지어 용정 그자도 스승을 찾고 있었다.

분명 사심이 있었다. 사심이 없다면 그냥 요씨 가문에 보답으로 괜찮은 답례품을 구해 보내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답례품을 보내지 않고 사람을 찾고 있다. 분명 용정 그놈이 스승에게 반해서 사심을 품은 게 틀림없었다. 감히……!

청양은 주군의 낯빛이 점점 더 회색으로 변해가는 걸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왜 맨날 혼자 화내고 혼자 상처받으시는지……?


“청양.”

“네, 전하.”

“난균을 투입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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