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아니다 토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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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화. 아니다 토끼다
2023.07.24.
화려는 정말로 기가 막혔다. 그 스승은 대체 둥지를 몇 군데에 틀려고 하는 거지?
늘 온갖 사람과 손을 잡고 그를 배반한 스승에게 이번에는 손잡는 후보가 늘어났다. 한 사람을 줄기차게 배신하는 건 재미가 없어졌나? 그래서 여러 명을 동시에 배반하기로 한 건가?
“전하. 제가 정보를 중간에 흐트러뜨릴까요?”
청양은 화려의 심기가 불편해진 걸 알아차리고 눈치껏 물었다. 그는 얼른 손수건을 꺼내서 주군의 손등에 튄 먹물을 콕콕 찍어 닦아냈다.
화려는 청양이 손수건을 도로 거두자 두 토막이 난 먹을 내려놓고 이마를 감쌌다.
“그래라. 용정이 자기가 찾는 여인이 요화가 아니라 다른 여인인 걸로 착각하도록 해라.”
“요씨 가문과 관련이 있단 건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요씨 가문에는 지금 찾아와 있는 사촌 소저들이 한가득하지.”
화려가 그렇게 말한 것만으로도 청양은 대번에 알아들었다. 화려의 지시를 받은 후 그는 요씨 가문에 이미 손을 뻗은 뒤였다.
청양은 요씨 가문 사촌 소저들의 이름과 얼굴, 나이까지 하나하나 알고 있었다.
“요 가주 첫째 동생의 이소저와 사소저, 오소저가 야망이 넘칩니다. 하지만 이소저는 정실부인 소생이니 그 야망에 외국 관료가 눈에 차진 않을 겁니다. 그리고 오소저는 엇비슷한 나이로 보이지 않으니 용정이 속지 않을 겁니다.”
“다른 쪽은?”
“요 가주 둘째 동생과 셋째 동생들도 적녀들은 야망 때문에 용정을 노리진 않을 겁니다.”
화려는 입꼬리를 미묘하게 올렸다. 용정도 꽤 좋은 가문 출신이었지만 요씨 가문 적녀들이라면 좋은 가문인 것만으로는 먼 외국으로 시집가려 들지 않을 것이다. 용정을 사모하게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요 가주 둘째 동생 쪽에서는 칠소저가 괜찮을 듯합니다. 셋째 동생은 첩이 없어 모두 적녀들뿐입니다.”
청양은 화려의 눈치를 살피고서 덧붙였다.
“첫째 동생 쪽 사소저와 둘째 동생 쪽 칠소저 모두에게 미끼를 던지겠습니다.”
* * *
저 자식은 진짜 주기적으로 심사가 뒤틀리나.
수업 날이 되어 찾아갔더니 제자의 심기가 또 가라앉아 있었다.
“안색이 아주 좋으십니다, 스승님.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는지요.”
웃으면서 말을 거는데 입꼬리만 올라가 있고 눈은 조금도 웃지 않는 모양새인 것이, 아무리 봐도 시비였다.
“날씨가 좋아서요.”
대꾸하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하였지만 나는 예의 바르게 굴었다.
“전하를 뵈니 그것도 좋고요.”
“마음에도 없는 말을 잘하십니다.”
“전하는 소신이 무슨 말을 했다 하면 늘 꼬아 들으시는군요.”
제자는 웃더니 벼루에 물을 붓고서 몽땅한 먹을 꺼내 갈기 시작했다.
“먹이 참 작네요.”
꼭 전하의 좁쌀만 한 속내처럼요. 라고 말하면 날 일찍 죽이려 들려나.
“네. 어제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어서요. 놀라서 부러뜨리고 말았습니다.”
“무슨 이야기요?”
나는 내 자리에 앉아 서랍을 열면서 물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뭐. 원체 자주 대답을 무시당하는지라 나는 그러려니 하고서 서책을 꺼냈다.
그러고서 앞을 보니 웬걸. 제자는 나를 희한하기 짝이 없는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내 이야기인가. 무슨 이야기기에 저렇게 쳐다보는 거야?
“왜 그러세요?”
좀 신경 쓰여서 묻자 제자의 입꼬리가 뒤틀려 올라갔다. 역시 내 얘기구나!
‘혹시 내가 용정을 구해준 일을 전해 들었나……?’
그럴지도. 하지만 뭐. 어쩌겠어. 어차피 제자는 그 정도로는 날 의심하고 있는걸. 하지만 신중하게 굴기 위해 지금도 가만히 기다리는 거잖아.
“수업이나 하지요.”
“예.”
그런데 수업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전하.”
문 너머에서 운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운귀가 또 뭘 보고하러 왔나?
전에는 한 번 놀랐지만 그래도 두 번째 일이기에 나는 놀라는 대신 서책 한 장을 넘겼다.
“6황자 전하와 하 낭자께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운귀는 들어오지 않고 뜻밖의 말을 고했다. 6황자? 6황자 정혼녀? 둘이 여길 왔다고?
나와 제자는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았다. 제자는 6황자 예비부부가 날 찾아온 거라 여기는 눈치였다. 물론 아니다.
“들어오시지요.”
제자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도 허락하는 말을 했다. 그러자 문이 열리더니 그 눈치 없는 6황자 정혼녀가 통통 튀는 공처럼 들어와 13황자에게 빠른 속도로 인사를 올렸다.
“13황자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그러더니 정혼녀는 곧장 날 돌아보며 두 팔을 벌렸다.
“동서! 내가 왔어요!”
동서? 벌써 동서야? 전에 봤을 땐 그래도 이국사라 불렀잖아?
내가 안기지 않았는데도 6황자 정혼녀는 알아서 내 곁에 오더니 혼자 날 끌어안고 까르르 웃었다.
“우리 완전히 한 쌍인 거 같아. 그렇죠?”
아니, 그쪽은 6황자랑 한 쌍이잖아.
그 사이 6황자도 안으로 들어와 13황자에게 말하고 있었다.
“열셋째. 봄꽃이 아주 화창하게 피었는데. 그 어두칙칙한 성격으로는 보나 마나 꽃놀이도 안 했겠지.”
아니, 시비를 걸고 있는 건가.
“예.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우리 넷이 꽃구경이나 하러 가지. 하 낭자가 요 이국사와 함께 놀고 싶다고 졸라서 말이야. 우리 하 낭자가 요 이국사와 아주 친해졌거든.”
아니, 그런 일은 아직 없는데요. 제자가 나를 힐긋 쳐다보았고 나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안 친해 안 친해.
어쨌든 제자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진 않겠지. 제자는 지금 기분이 아주 나빠 보이고, 무엇보다 이를 드러내지 않을 때도 하기 싫은 건 안 하고 버텼으니까.
“그러지요.”
그런데 뜻밖에도 제자는 그렇게 말하고서 몸을 일으켰다.
“잘 됐어요!”
6황자 정혼녀는 박수를 치며 맑게 웃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가장 말단인 나는 윗선이 하자는 대로 해야겠지…….
결국 힘없이 몸을 일으키는데, 뜻밖에도 6황자 정혼녀가 내 손을 잡으며 또 입을 열었다.
“아니, 이럴 게 아니라 동서랑 나랑 간식을 조금 만드는 게 어때요?”
“전 요리를 못하는데요…… 형님.”
낭자나 소저라고 부르자니 6황녀 정혼녀가 민망할 듯해서 나는 어색하게 6황자 정혼녀의 호칭에 맞춰주었다.
“내가 잘해. 동서는 돕기만 해줘요.”
6황자 정혼녀는 자신만만하게 말하더니 6황자를 돌아보며 물었다.
“전하, 괜찮지요?”
“궁녀들에게 시키지요.”
6황자가 웃으면서 권했으나 6황자 정혼녀는 고개를 젓더니 나를 살짝 잡아당겼다. 6황자 정혼녀의 발랄한 걸음걸이는 월무궁 부엌 안에 들어가자 우뚝 멈추었다.
“세상에. 이게 부엌이야?”
6항자 정혼녀는 하도 안 써서 반들반들한 솥 바닥을 입을 벌리고 바라보더니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요리 재료를 찾았다.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월무궁 궁인들이 내팽개친 부엌에 뭐가 제대로 있을 리가 없었다.
“동서, 동서. 전하는 그럼 평소에 뭘 드시고 사는 거예요? 혹시…… 물만? 전하가 구박을 받는다고 들었는데. 먹을거리조차 못 받는 형편인 거예요?”
“글쎄요. 저도 전하 식생활은 몰라서요.”
솔직하게 대답하고 6황자 정혼녀가 거기에 무어라 대꾸하려던 찰나. 문가에 커다란 그림자가 나타났다. 제자였다. 제자 뒤에는 얼결에 따라온 표정의 6황자가 서 있었다.
“아니 이건 부엌이 아니라 빈방인데?”
6황자도 13황자 부엌은 처음인지 눈이 휘둥그레져서 두리번거렸다.
13황자는 그러거나 말거나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스승님. 제자는 스승님 요리를 먹고 싶지 않으니 그만 나오시지요. 먹을거리는 궁녀들에게 간식을 가져오게 하면 됩니다.”
그 말에 예비 6황자 부부가 왈칵 감정이 치솟는 표정으로 13황자를 바라보았다. 13황자가 먹을 게 하나도 없어서 저렇게 말한다고 착각한 표정들이었다.
“열셋째. 너 뭐 먹고 지내느냐.”
제자는 6황자의 질문을 무시했다.
여기에 나는 무어라 대응해야 할지 몰라 멀뚱히 있자, 제자가 한숨을 내쉬고서 말했다.
“부엌이 비어 있다고 굶고 지내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제가 스승님 요리를 먹고 싶지 않은 건…… 아니, 아닙니다. 제가 하 낭자와 요리를 하겠으니 스승님은 밖에서 기다리시지요.”
“뭐?”
그 말에 6황자가 황당하단 투로 되물었다. 6황자 정혼녀도 얼떨떨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놀라지 않았다. 놀랄 리가. 제자가 왜 저렇게 나오는지 방금 눈치챘는데. 내가 ‘자기만’을 위해 만드는 요리에는 독이 있을지도 모르니 먹기 싫단 거 아냐.
“어쩜. 13황자 전하께선 동서를 참으로 어여삐 여기시네요.”
그러나 이를 모르는 6황자 정혼녀는 감동 받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제자는 오해를 정정하지 않았고, 나도 나서지 못했다.
“좋아. 그러면 이렇게 하지.”
대신 6황자가 밝게 웃으며 제안했다.
“열셋째. 우리가 소풍 간식을 싸고 하 낭자와 요 이국사는 밖에서 기다리게 하지.”
“좋습니다.”
제자는 내 손이 안 닿기만 하면 된다는 듯 고고하게 대답했다.
* * *
내무부에서 재료를 가져와 두 황자가 뭔가를 하는 동안 6황자 정혼녀는 나와 제자가 수업하는 방에 의자를 두고 앉아 있었다.
6황자 정혼녀는 실실 웃으면서 연신 나를 쳐다보다가, 내가 가만히 있자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13황자께선 동서가 너무 좋으신가 봐요.”
하이고.
“우리 6황자께서도 다정하고 친절한 성품이지만 요리를 해준다거나 하진 않으시거든요. 그런데 13황자께선 바로 동서에게 요리해 줄 거라고 말씀하시네요.”
사정을 모르면 이렇게도 보이는구나. 기가 차다. 제자놈은 그냥 내가 하는 요리에는 독이 들어 있을 거라고 여겨서 그런 것뿐인데.
하지만 생각해보니 반대도 마찬가지 아닌가. 제자도 내 음식에 독을 넣을 수 있다. 설마 제자가 6황자를 옆에 두고 그러진 않겠지?
“동서, 동서. 대체 어떻게 전하를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있는 거예요? 비결이 있어요?”
그러나 이런 사정을 모르는 6황자 정혼녀는 눈을 반짝이면서 내게 물었다. 뭔가 달콤하고 듣기 간지러운 그런 연애담을 듣고 싶은 표정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할 말이 뭐가 있겠나.
하지만 솔직하게 ‘우리 그렇게 안 가까운 사이에요’라고 말하기에는 이미 나와 13황자는 공식적으로 연모하는 사이였기에 나는 적당히 둘러댔다.
“별거 없어요. 먼저 반하는 사람이 지는 거죠.”
“13황자 전하가 동서한테 먼저 반한 거예요?”
“그거야 저도 모르지요. 하지만 지금 누가 누굴 더 좋아하는지는 확실해요. 전하가 절 더 많이 좋아하세요.”
“우와. 정말 멋지다! 비결은 정말 없어요? 그래도 전하가 동서를 더 좋아하게 된 비결이나 계기가 있지 않을까요?”
“얼굴이죠 얼굴. 전하는 제 얼굴만 보면 끔뻑 넘어가시거든요.”
“와!”
“전하는 제가 눈만 요렇게 초롱초롱하게 뜨고 보면요, 귀여운 토끼 같다고 하세요. 제가 진짜 예쁜 건지 전하 눈에 콩깍지가 낀 건진 모르겠지만요.”
사실은 내내 박쥐라 불러대지만 그거야 나와 제자만 아는 일이지. 아무렇게나 둘러대고 있자니 6황자 정혼녀가 감탄하다가 내 어깨 너머를 보며 웃었다.
“전하, 동서와 이렇게 사이가 좋다니 정말 좋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