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우리의 만남은 내가 고르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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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화. 우리의 만남은 내가 고르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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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화. 우리의 만남은 내가 고르는 대로
2023.07.17.
창밖을 보니 깜깜하다.
“아직 밤 같은데.”
“이른 새벽이에요.”
그러니까 밤이잖아. 일단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왜 싸우시는데?”
“가면서 말씀드릴게요.”
월섬이 피풍의를 건네주고서 등롱을 챙겨 들었다.
“전 수길댁한테 들었어요. 수길댁은 복도에 있다가 그냥 들었고요.”
밖으로 나가자 겨울 같은 찬바람이 불어 등롱불이 흔들렸다.
“말해봐. 무슨 일인데?”
* * *
“아니, 이게 그렇게 화낼 일입니까?”
요 가주는 주전자를 가져다 빈 잔에 물을 콸콸 들이부었다.
“난 화내지 않았어요. 불쾌하다고 말한 거죠.”
“그게 화내는 거잖아요!”
“화는 당신이 내는 게 화예요. 목소리를 낮춰요.”
사흠은 침착하게 말하면서 서늘한 눈으로 요 가주가 물 마시는 걸 지켜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물잔을 뒤에서 퍽 쳐버리고 싶었다.
“아니, 내가 조카들 좀 좋은 데 시집가게 해주겠다는 게 대체 그렇게 화낼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애들은 당신에게도 조카예요.”
“우리 요화랑 린화는 서방님이나 올케들에게 도움받은 적이 없어요. 자기들이 혼자서 모든 걸 해냈죠.”
“지금은 우리가 도움을 주지만 나중엔 받을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설령 그러지 못한다고 해도 무슨 상관인데요? 그 아이들은 내 형제의 아이들입니다. 내 자식만큼은 못해도 자식 다음으로 예쁜 아이들이란 말입니다.”
요 가주가 다시 주전자를 집으려 손을 뻗자 사흠은 한발 앞서 주전자를 뺏어갔다.
요 가주는 어이가 없어서 아내를 쳐다보았다.
“뭐 하는 건가요?”
“물 좀 그만 마셔요.”
“괜히 화풀이하지 말아요. 아니, 대체 왜 화가 나는 겁니까. 내 조카들이 좋은 데 시집가면 우리 집에 문제가 생기나요? 소가주 자리가 먼 친척에게로 넘어가면 우리 형제의 아이들은 이전처럼 보살핌을 받지 못해요.”
요 가주는 요화의 남장이 알려진 뒤 조카들에게 오던 혼담이 반의반으로 줄었단 이야기를 떠올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다가 요화와 린화가 황제에게 총애를 받게 되자 슬슬 다시 혼담이 이전처럼 잘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인데. 대체 아내가 왜 싫어하는지 그는 진심으로 이해 가지 않았다.
“내가 가주 자리에 있을 때 조카들을 미리미리 좋은 데로 시집 보내면 좋잖아요.”
“글쎄요.”
사흠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요 가주는 화가 나서 언성을 높였다.
“당신도 당신 오라비가 곤란해졌을 때 당신 조카들을 데려와 입양하자고 했잖습니까.”
“하지만 입양하지 않았지요. 당신이 반대해서요.”
“어쨌든 위험을 무릅쓰고 데리고 있었습니다.”
“데리고 있기야 나도 지금 시조카들을 데리고 있잖아요.”
사흠은 조카 조카 노래를 불러대는 남편이 꼴 보기 싫어서 눈살을 구겼다. 내 조카들은 데려왔을 때 그렇게 눈치를 주더니. 자기 조카들은 좋은 데 시집 보낼 생각에 이렇게 좋아한다고?
“애들 부모가 없어서 우리가 보호자인 상황이라면 응당 우리가 나서야죠. 그런 게 아닌데 왜 우리가 나서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우리가 나서긴요. 그냥 중간에서 선만 대어 주는 겁니다. 나서긴 뭘 나서요. 당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해도 됩니다.”
요 가주의 목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다. 그는 뺏듯이 아내에게서 주전자를 낚아챘다.
사흠은 남편의 얼굴이 분노로 벌겋게 변하자 억울한 마음이 치밀어 눈물을 글썽였다.
“내 딸들은 고생고생해서 자리 잡았는데. 당신 조카들은 내 딸 덕을 이렇게 쉽게 보다니. 재주는 내 딸들이 부리고 콩고물은 당신 조카들이 받아먹는 건가요?”
요 가주는 입을 벌리고서 아내를 쳐다보았고, 사흠도 서운해서 남편을 쳐다보았다.
사흠은 요 가주가 도움도 안 되는 동생과 조카를 왜 저렇게 챙기는지 이해하기 어려웠고, 요 가주는 자기 피붙이에게 좋은 혼처 자리를 알아봐 줄 뿐인데 아내가 왜 저렇게 싫어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 * *
“아무 도움도 안 되는 동생이랑 그 식솔들 좀 빨리 돌아가라 해요.”
문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작은 편이었으나 밖이 너무 고요하다 보니 귀 기울이기면 충분히 들을 정도였다.
“아이고 소가주님.”
수길댁이 문 너머에서 왔다 갔다 이동하다가 나를 보자 다급히 달려왔다.
“내가 가볼게.”
내 팔을 잡는 수길댁의 손등을 두드리고서 나는 내당 문 앞으로 걸어갔다.
“다 들려요.”
부모님을 부를 것도 없이 밖에서 그렇게 말하자 안쪽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
속으로 셋을 세자 문이 드르륵 열리며 아버지와 어머니의 당황한 표정이 드러났다.
“두 분 다 목소리가 크시네요. 싸우는 거 잘 들었어요. 건강하시니 기쁘네요.”
어머니는 이마를 짚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와서 어딘가로 가버렸다.
아버지는 목 뒤를 주무르면서 계단 가로 나와 씩씩거리다가 물었다.
“많이 컸니?”
* * *
“형님과 형수님 싸우는 소리가 가관이었다는군요.”
요화의 둘째 숙모인 조비영은 본가에서 보낸 서신을 확인하다 말고서 고개를 들었다.
원래 그녀는 가문을 살펴야 해서 가주 저택으로 오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남편과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자 아예 자신도 이곳으로 와버렸다. 가문 일은 서신을 통해 처리하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인 요모화은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오더니 그녀의 옆자리에 털썩 앉으며 눈살을 구겼다.
“두 분이 이 시간에 싸우던가요?”
“아니요. 새벽에요. 밤인가? 하여튼 목소리가 크게 들리도록 싸우고 있답니다.”
사실 아주 큰 목소리는 아니었고 귀 기울여 듣지 않는다면 알아듣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요모화는 어린 시절 이곳에서 성장했기에 종복 중 가까운 이들이 많았다. 그들 중엔 가주 부부가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 귀띔해 줄 이들이 몇 있었다.
조비영은 서신을 내리고 남편을 보았다.
“무슨 일로 싸웠길래 이렇게 화가 났어요?”
요모화는 친한 종복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를 전하고는 탁자를 쾅 소리가 나게 내리쳤다.
“우리 형제들은 요화 일을 돕기 위해서 먼 거리를 마다치 않고 달려온 건데. 일이 생각처럼 잘 해결되지 않는다고 해서 형수님이 어떻게 우리한테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조비영은 대꾸하지 않고 다시 서신을 내려다보았다.
“형수님 때문에 형님과 사이가 멀어지겠습니다.”
요모화는 짜증스럽게 덧붙이고서 턱을 괴었다.
“아니, 그보다 소가주 후보란 자들은 왜 하나같이 아무 말이 없을까요? 그자들이 말을 하든가 행동을 하든가 해야 우리도 대비하던가 대응을 할 텐데요.”
* * *
요요화를 대신할 요씨 가문 소가주 후보들은 여럿 있었지만,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그들은 쉬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처음에는 요씨 가족들이 똘똘 뭉쳐 있기 때문이었다. 후보가 여럿인 상황에서 함부로 나섰다가 요씨 가족들이 있는 가산을 모조리 나누어 꿀꺽해 버리면 허울뿐인 소가주 자리를 차지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다음으로 후보들이 나서지 않은 건 요화 린화 자매가 황제에게 총애받는단 이야기 때문이었다. 이 상황에서 소가주 자리를 노리고 다가갔다가 괜히 불똥이 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들도 초조해지고 있었다. 특히 요 가주 숙조부의 아들인 요소모는 미리 수도까지 올라와 있었기에 더욱 초조한 마음이 급했다.
“나리. 나리.”
그때 그가 데려온 심부름꾼 하나가 급히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반으로 접힌 종이를 내밀었다.
“나리. 어떤 사람이 나리께 이걸 전하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 어떤 사람이 누구인데?”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꼭 전하라고 했습니다.”
요소모는 그걸 모르면서 왜 서신을 받아 오냐고 화를 내려다가 서신 위쪽에 찍힌 인장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어떤 인장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주 섬세하고 화려했다. 평범한 민가에서 가지고 있을 만한 인장이 아니었다.
요소모는 눈살을 구기고서 서신을 펼쳤다.
“이건……!”
그의 눈이 커다래졌다. 서신 안에는 요씨 가문의 불화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요소모는 서신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이걸 누가 전하라 했느냐?”
“정말로 잘 모르겠습니다. 뒤에서 말을 걸더니 이걸 주고서 가버렸어요. 사람이 많았던지라 누가 준 건지 아예 짐작도 안 갑니다.”
심부름꾼은 요소모의 눈치를 살폈다.
요소모는 서신을 넣은 주머니를 쓰다듬으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누구지? 누군데 이런 사실을 내게 알려주지?
아니, 이 말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불화 내용이나 가족 관계 등이 놀라울 정도로 세세하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점검을 해야 했다. 하지만 만일 이 내용이 옳다면……!
* * *
부모님 싸움을 가까스로 말리긴 했지만 하루가 지나가도록 여전히 두 분 사이의 냉랭한 분위기는 풀리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회귀 전 두 분은 이렇게 자주 싸우지 않았다. 그런데 회귀 후에는 싸우는 일이 좀 잦아진 거 같단 말이지…….
‘린화가 후궁이 되어서 그런가? 아니면 내 남장이 밝혀져서 부모님이 초조해지신 건가.’
어쨌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집 안에 있자니 숨이 콱콱 막혀서, 나는 적당히 핑계를 대고 혼자 집을 빠져나왔다.
그러고서 대로를 돌아다니다가 골목으로 들어가 인적 드문 거리를 거닐었다.
필첩을 황제에게 빼앗겼으니 필첩2를 새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번에는 종이가 아니라 내 머리 안에.
그런데 사파 무림인들이 자주 오간다는 골목을 걸어가고 있자니, 어느 골목 안쪽에서 뭔가를 걷어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맞고 있나?’
아무리 들어도 누구를 마구 때리는 소리였다. 하지만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똑같은 소리를 들으면서도 지나가기만 할 뿐이었다.
‘자주 있는 일인가?’
하지만 내겐 자주 겪는 일이 아니었기에, 나는 슬쩍 소리 나는 쪽으로 가보았다.
역시나. 한 무리의 무뢰배들이 누군가를 둘러싸고 마구 발로 걷어차고 있었다. 발길질 당하는 이는 소리도 내지 않고 두 팔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돌 몇 개를 챙긴 다음 기척을 죽이고 지붕 위에 올라가서 나와 정면 쪽에 선 이를 향해 돌을 던졌다.
퍽 소리가 나며 무뢰배가 머리를 감싸고 물러나자 다른 이들이 사람을 때리는 걸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며 외쳤다.
“누구냐!”
대답 대신 나는 다른 방향으로 다시 돌을 던져 다른 사람을 맞췄다. 또 퍽 소리가 나며 돌에 맞은 무뢰배가 기우뚱 넘어갔다.
“누구냐!”
소리 내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자 무뢰배들은 욕을 뱉으면서 어딘가로 가버렸다. 그들이 사라지는 걸 확인한 다음 나는 지붕 아래로 내려갔다.
“괜찮아요?”
가까이 다가가 웅크린 이의 팔을 툭툭 치자, 맞고 있던 사람이 그제야 얼굴에서 팔을 내리며 고개를 들었다.
‘어! 이 사람!’
그런데 드러난 얼굴이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회귀 전 제자의 측근 전략가였고 회귀 후에는 황후가 먼저 데려간…… 용정.
‘보문 공주가 죽었잖아. 아직 여기 남아 있었나?’
뜻밖에 그를 만난 데 놀라서 잠시 멍하니 있는 사이. 용정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머리를 떨구었다.
“저기? 이보세요?”
툭툭 쳐보았으나 용정은 의식을 잃은 뒤였다. 기절했나 봐! 이를 어쩌지? 근처 의원에 데려다주어야 하나?
그래야겠다. 두고 가면 또 그 무뢰배들이 올 거 같아.
그 순간. 퍼뜩 다른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니…… 아니야. 좋은 기회일지도 몰라. 제자가 용정을 자기 패로 쓰지 않는다면 내가 용정과 가까워져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기절한 용정의 상태를 살핀 다음 의방이 아니라 근처 객잔으로 들어가 방을 하나 잡았다.
그 뒤 용정이 바로 깨어나지 않으리란 걸 확인한 다음, 의방에는 혼자 가서 약을 지어왔다.
이후 물 한 대야와 수건을 얻은 다음 수건을 물에 참방참방 담그면서 용정이 깨어나길 기다렸다.
“으음…….”
마침내 용정이 희미하게 신음을 흘릴 즈음. 나는 머리카락을 풀어서 귀 뒤로 넘긴 다음 물을 흠뻑 머금은 물수건에서 물기를 짜 그의 이마에 올렸다.
그러자 용정이 천천히 눈을 떴다. 나는 제자가 인정한 예쁜 눈을 열심히 드러내며 수심에 잠긴 표정을 꾸며냈다.
“누구…… 낭자……?”
그러다가 용정이 완전히 눈을 뜨고 날 쳐다볼 즈음. 나는 수건 너머로 그의 머리 혈 자리를 꽉 눌러서 다시 재웠다.
“윽.”
용정이 눈을 뜨다가 도로 기절한 걸 확인한 다음, 나는 내 이름이 새겨진 손수건에 물을 적셔 그의 침상 옆자리에 두었다.
‘이자는 궁금한 건 절대 못 참는 성격이지. 이러고 가면 누가 자기를 구했나 알아서 찾아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