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3화. 총애받는 이국사 (143/159)


143화. 총애받는 이국사
2023.07.13.



“하나로는 부족해.”

화려는 표정 변화 없이 중얼거렸다.


“유 가주를 거쳐 간 모든 은신처에 관해 알아내야 한다.”

청양은 화려의 지시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화려가 내리는 지시의 대부분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순순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청양이 물러나자 다시 월무궁은 사람 말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쓸쓸한 곳으로 돌아갔다.

화려는 뒷짐을 진 채 움푹 팬 흙구덩이를 계속해서 내려다보았다.


 

* * *

혼수상태에 빠진 4황녀는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가장 경사스러워야 할 날이 슬픈 날이 되어버리자 대신들은 안 됐다고 혀를 찼다.

그러면서도 교비와 1황자 쪽에 선을 대려던 대신들은 슬금슬금 발을 빼기 시작했다.

교비는 황제의 총애를 잃었고 4황녀는 황제에게 혼이 나자 홧김에 독을 먹어 의식이 없어졌다.

1황자는 원래도 멍청했다. 그나마 1황자비가 외국 공주 출신인 데다 1소황자가 영리해 미래가 보였으나 그 1소황자의 양육권마저 원비에게 빼앗겼다. 이제 교비 식구들은 황위 다툼에서 뒤처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교비와 1황자 부부, 4황녀가 황위 다툼에서 밀려났다고 해도 여전히 황제에겐 많은 황자들이 있었고 황제는 아직 젊었다.

또한 황제의 마음은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니 교비 역시 아직 기회가 있었다. 1소황자 역시 원비 밑에서 자라게 되었다고는 하나 어쨌든 장자였다.

이에 약간의 세력 변동 후. 대신들은 며칠 지나지 않아 4황녀에 대한 일을 잊고 평소처럼 경쟁을 시작했다.

4황녀 혼례 이후 그들이 가장 먼저 맞붙은 건 지왕주도에 지을 성에 관련된 문제였다.

황제가 축성을 관리 감독할 책임자를 황자 중 정하겠다고 하자, 1황자파는 1황자를 내세우고 2황자파는 2황자를 내세우는 식으로 제각기 제가 미는 황자들 이름을 내밀었다.

황제는 팔에 머리를 괴고서 대신들이 떠드는 모양새를 구경했다. 대신들이 이름을 내밀지 않는 건 세력이 없는 13황자와 몸이 너무 약한 3황자뿐이었다.


“폐하. 1황자께서는 원래도 토목을 좋아하셔서 관련된 인재들을 두루 만나시고 그에 관해 공부하시기도 즐기셨습니다.”

1황자 패거리들은 이번에 확실하게 치고 나가지 못한다면 정말로 뒤처질 게 두려워서 목소리를 크게 냈다.

다른 황자 패거리들은 ‘좋아한다고 잘하는 건 아니지. 1황자가 토목을 좋아하기만 할 뿐 관련된 일을 잘하는 건 아니잖아’라고 반박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렀다.

그들이 지지하는 황자가 아니라지만 나쁘게 말해서 밉보일 필요는 없었다. 승자가 누가 될지는 결국 끝까지 모르는 일 아닌가.

게다가 이 토목공사 건은 큰 건이긴 하지만, 얼굴을 붉히면서까지 경쟁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황자 지지자들은 목소리를 낮추었고, 종국에는 1황자 지지자들의 목소리만이 가장 크게 남게 되었다.

1황자 지지자들은 안도해서 황제를 간절히 바라보았다.

책임자라지만 어차피 실무 관리자들은 다 따로 있으니, 1황자는 이 건에서 그들의 의견만 잘 청취하면 되었다.

지지자들은 멍청한 1황자라도 이 정도는 해낼 수 있으리라 여겼다. 지금 1황자는 뭘 해서든 잃어버린 황제의 총애를 다시 받아와야 했다.


“1황자. 해도 괜찮겠지.”

황제가 자세를 바꾸며 중얼거리자 1황자 지지자들의 눈빛이 결연하게 빛났다.

하지만 황제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쉽게 윤허를 내리지 않았다.

필첩 때문이었다. 필첩에 2황자비의 쌍둥이 임신 소식 다음으로 ‘성’과 ‘1’이 들어가는 문구가 있던 게 찝찝했다.


“이 건은 짐이 생각해보고 내일 얘기하겠다.”

결국 황제는 바로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회의가 끝나자 송 태감을 시켜 요요화를 데려오라 지시했다.

* * *



“이 부분. 무슨 뜻이지?”

수업이 거의 끝나갈 무렵 송 태감에게 불려 황제의 서재에 도착하자마자 필첩이 내밀어졌다.

나는 두 손으로 황제가 펼쳐서 내린 필첩을 받아들었다. 1, 여름, 성이라고 쓰인 부분이었다.


‘어쩌지? 솔직하게 말해야 하나?’

2황자비 회임은 기쁜 소식이지만 이건 그리 좋은 소식이 아닌데……. 게다가 교비 식구들은 지금도 날 원망하고.


“요요화.”

내가 망설이는 기색을 눈치챘나.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황제가 내 이름을 불렀다.


‘말하자. 지금 황제는 4황녀 건으로 심기가 불편한 상황이잖아.’

“1황자 전하께서 여름에 축성을 맡아 하시다가 일이 어그러지는 꿈을 꾸었습니다, 폐하. 하지만 폐하.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이게 그냥 개꿈인지 예지몽인지는 소신도 알 수 없사옵니다.”

나는 공손하게 필첩을 황제에게 도로 건넸다.


“상관없다.”

황제는 입꼬리를 올리고서 필첩을 받아들었다.


“그런 것까지 짐이 다 고려해서 들을 테니.”

책임도 고려해서 다 져주신다면 좋겠는데 말이죠…….

* * *

다음날.

아침 조회 때 황제는 지왕성도의 축성 문제에 대해 지시를 내렸다.


“이번 축성을 맡아서 할 이는…….”

1황자의 지지자들은 긴장해서 황제의 대답을 기다렸다. 다른 황자의 지지자들이 막판에 다 꼬리를 내렸으니 그들이 기대할 만도 했다.


“2황자다.”

그러나 황제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가장 먼저 토목공사 건을 포기한 2황자였다.

1황자의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2황자의 지지자들까지 믿기지 않는 이야기에 입을 벌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폐, 폐하. 하오나 어제까지만 하셔도…….”

1황자의 지지자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가 동료 대신이 팔꿈치로 툭 치자 가까스로 입을 다물었다.

어제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황자 지지자들의 말에 수긍하는 기색을 보이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기색’이었다.

1황자 지지자들은 입을 다물고서 2황자 지지자들을 노려보았고, 2황자 지지자들은 영문은 모르겠지만 기뻐서 낯빛이 환해졌다.

1황자가 지자마자 2황자께서 빛을 보시는구나!

아침 조회가 끝나고 황제가 물러나자 대신들도 하나둘 어전 밖으로 걸어 나갔다.

밖으로 나간 대신들은 친한 대신들끼리 모여서면서 이번 일에 대해 수군거렸다.

이건 그냥 황제가 1황자를 싫어하게 되어서 나온 결과일까. 아니면 2황제에게로 어심이 흐르는 걸까.

그때 대신 중 하나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어제 폐하께서 조회가 끝난 후 곧장 요 이국사를 불렀다고 하시던데. 이 일과 관련이 있을까요?”

다른 대신은 코웃음을 쳤다.


“그럴 리가요. 그냥 요 귀인의 언니이니 부르신 거겠지요. 원래도 요 귀인께 선물을 보낼 때 자주 같이 보내시지 않습니까.”

몇몇 대신들은 황제를 놀리는 듯해 감히 입 밖에 내진 않았으나, 황제가 요 이국사를 부른 건 그녀가 대단한 미인이기 때문일 거라고 여겼다.


“아니, 하지만 회의가 끝나자마자 이국사를 불렀지 않습니까. 전에 격일사께도 요 이국사보다도 도움이 안 된다고 화낸 적이 이미 있으시고요.”

돌아가는 길이야 거기서 거기기에 대신들이 떠드는 소리는 주위의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누군가 “아!” 하고 탄성을 터트리며 말을 보탰다.


“그러고보니 4황녀 전하께서 독을 먹었을 때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폐하께서 요 이국사만 따로 빈방에 보내 이 일에 대해 머리를 짜내보라고 했다지요.”

대신들의 시선이 바쁘게 허공을 오갔다.

마침내 한 사람이 용기 있게 상황을 정리했다.


“남장을 허락한 것도 그렇고 남장한 게 밝혀졌을 때 일이나 이국사로 계속 두시는 것도 그렇고…… 폐하께선 요 이국사를 상당히 아끼시나 봅니다.”

 

* * *



“이행위서(요화 아버지 관직). 참으로 잘 되었군요.”

요 가주가 업무를 마친 뒤 조회 때 일을 떠올리며 집으로 걸어갈 때였다. 누군가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린 요 가주는 깜짝 놀랐다. 상대가 황후의 오라비였던 것이다.


“대인.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요.”

요 가주는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하게 물었다. 황후의 오라비는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조회 때 요 가주도 그 자리에 있었으니 무슨 말인지 알 게 아닙니까.”

“!”

“폐하께서 요 귀인을 총애할 뿐만 아니라 요 이국사까지 총애하는 모양이더군요. 그럴 만도 하지요. 요 이국사는 시험에도 좋은 성적으로 들어왔으니까요.”

요 가주는 황후 오라비의 거침없는 칭찬에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부족한 솜씨인걸요.”

“요 이국사가 부족하다면 요 이국사를 시험했던 대신들 모두가 멍청이가 되는 셈입니다. 일전에 이국사 자리를 두고서 시험을 보지 않았습니까.”

황후 오라비가 딱 잘라 말하자 요 가주는 목덜미까지 붉어졌다. 황후 오라비는 개의치 않고서 소리 높여 웃었다.


“폐하께서 요 귀인을 총애하고 요 이국사를 신뢰하니 이행위서도 앞날이 튼튼하군요.”

요 가주는 머쓱해서 웃기만 했다. 과한 칭찬은 거부하기도 난처하고 받아들이기도 곤란했다.

하지만 황후의 오라비가 계속해서 요화 린화 자매에게 좋은 말을 해주자, 요 가주의 입꼬리도 슬슬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실은 이행위서. 내가 이행위서를 부른 건 그 문제가 아니라…….”

 

* * *



“그게 무슨 말인가요? 혼담이 쏟아지고 있다니요? 우리 집 딸들은 모두 시집가고 정혼했잖아요?”

집에 도착한 요 가주는 아내를 맞은편에 앉게 하고서 어제오늘 들어온 혼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요화의 남장 건으로 우리 가문 직계들이 죄다 여아라는 걸 모두가 알게 되었지 않습니까. 그래서인 모양입니다.”

요 가주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사흠은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그런 거라면 요화가 여인인 게 밝혀지자마자 혼담이 쏟아져야지. 안 그러다가 난데없이 지금 혼담이 쏟아진다니?


“그 소식이 난 지가 몇 달인데 지금 혼담을 갑자기 많이 넣는대요?”

요 가주는 사흠에게 1황자와 2황자가 토목공사 건으로 대립한 일과 거기에 요화가 한마디를 얹은 거로 추정된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요 가주는 말을 마치자 흥분해서 물을 한 번에 입에 틀어넣었다.


“린화와 요화 모두 잘나가고 폐하께서 어여삐 여기시니 대신들이 우리 가문이 새삼 눈에 보이나 봅니다.”

요 가주는 요화의 남장 소식이 밝혀진 몇 달간 그의 동료들이 요씨 가문을 어떻게 취급했는지는 아내에게 알리지 않았다. 어차피 아내 역시 사대부 부인들과의 모임에서 충분히 겪었을 테니까.


“두 딸아이 모두 잘나가니까 우리 요씨 가문 여자들은 똘똘하고 영리하고 복이 많단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답니다. 그래서 대신들이 혼담을 계속 넣고 있어요.”

요 가주는 기뻐서 다시 물을 마시려 했으나 이미 물잔은 비어 있었다.


“잘하면 조카들 혼처를 아주 좋은 곳에 잡아줄 수 있겠어요.”

사흠은 요 가주의 빈 잔에 물을 따라주지 않았다. 그녀는 기쁨에 붉어진 남편의 얼굴을 굳은 표정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 * *



“소가주님, 소가주님!”

누워서 자고 있는데 시비인 월섬이 작은 목소리로 나를 깨웠다.


“어? 어? 왜?”

가까스로 눈을 뜨자 월섬이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나리랑 마님께서 크게 싸우고 계세요. 소가주님이 말리셔야 할 거 같아요.”

“어? 이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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