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초면부터 동정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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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화. 초면부터 동정하는 사람
2023.07.10.
무슨 말을 하려고 나선 거지……?
“넷째 누님이 혼인 전까지 쓰던 거처도 확인해야지요.”
모두가 조마조마한 가운데 13황자가 4황녀를 거론하자 교비가 숨이 넘어갈 것처럼 크게 들이쉬었다.
“13황자!”
참지 못한 교비는 버럭 외쳤다.
“마음을 아프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마마.”
13황자는 침착하게 사과했으나 말을 무르지 않았다.
“열셋째 말도 일리가 있어요. 새로 이사 온 거처에선 수상한 물건이 나오지 않았다면서요. 하지만 넷째 언니는 바로 어제 낮까지만 해도 백부궁에서 살았잖아요.”
여기에 9황녀가 끼어들자 교비는 기절하기 직전처럼 얼굴이 새빨개졌다.
백부궁은 교비의 거처였고, 4황녀는 백부궁 안에 있는 전각 하나를 받아 거기서 지냈다.
“맞는 말이다. 송소우. 넷째가 이전에 쓰던 거처도 살피고 와라.”
황제가 13황자와 9황녀의 말에 수긍하자 송 태감은 바로 밖으로 나갔다.
교비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결국 비틀거리다가 옆으로 쓰러질 듯 넘어졌다. 1황자가 다급히 받지 않았더라면 세게 넘어졌을 것이다.
송 태감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내내 방 안은 견디기 어려운 정적이 내려앉아 있었다.
황제는 4황녀의 얼굴만 바라보았고, 황후는 한 번씩 5황녀를 힐긋거렸다. 5황녀는 차분하게 눈을 내리깐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예혜 낭자 역시 당당하니 불안할 게 없어서인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서 침착하게 굴었다.
나는 자꾸 제자에게로 시선이 가는 바람에 바지를 움켜잡고 억지로 눈동자를 통제해야 했다.
‘회귀 전 기준으로, 제자는 내년 겨울쯤이 되어서야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데. 왜 벌써 앞으로 나선 걸까.’
그러다가 참지 못하고 시선을 들어 보니, 예혜 낭자가 제자를 한 번 쳐다보고는 눈길을 돌리고 있었다.
‘예혜 낭자가 태연한 척하는데 많이 무서운가 봐…….’
그걸 보자 코끝이 찡해온다. 그러고보니 예혜 낭자 주위에는 아무도 서 있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만약을 대비해 예혜 낭자와 얽히지 않을 준비를 하느라 거리를 두고 있었다.
나는 충동적으로 예혜 낭자에게 다가가 목소리를 작게 해서 속삭였다,
“괜찮아요. 전, 예, 혜빈마마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자 예혜 낭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나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교분이 없는데 내가 갑자기 위로해주자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 모습조차 마음을 더 아리게 했다.
원래라면 3황자와 혼인해서 이런 일에는 얽히지도 않고 조용히 잘 지내야 할 사람이…….
“제가 옆에 있어 드릴게요. 같이 서 있어요.”
제자는 혼자서도 잘 해낼 사람이니 혼자 서 있어도 될 거야. 나는 예혜 낭자에게 다시 속삭이고서 그녀의 옆에 섰다.
“?”
예혜 낭자는 불안한 상황에 내가 곁에 와주자 감동을 받았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서 나를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내가 자기를 보면서 신뢰 가득한 미소를 지어주자, 눈이 한층 더 가늘어졌다.
‘아. 혹시 조금 경계하는 건가?’
그렇더라도 어쩔 수 없지. 나도 안 친한 사람이 와서 친한 척하면 당황스럽긴 할 거야.
그래도 나는 옆에 버티고 서서 그녀에게 튼튼한 버팀목 역할을 하려 애썼다. 예혜 낭자도 내가 꿋꿋하게 곁에 있자 더 쳐다보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폐하. 폐하.”
마침내 송 태감이 돌아왔다.
“확인해보았느냐.”
“네, 폐하. 혜빈마마의 거처에선 독이나 수상한 물건은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근래 수상한 자를 만나거나 따로 물품을 구입한 적도 없으십니다. 4황녀께 드린 선물은 비단인데, 폐하께서 하사하신 물건 중에 고르신 거였고요.”
예혜 낭자는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기 때문인지 기쁜 기색도 없었다.
“그럼 혜빈은 아니겠군.”
황제가 중얼거리자 송 태감이 “예예.” 하고 대답하더니 힐긋 교비를 쳐다보았다.
“저…… 폐하. 그리고 독은 4황녀께서 어제까지 사용하던 백아각에 있었습니다.”
교비는 송 태감을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다가 재차 몸에 힘을 잃고 쓰러지려 했다.
“어머니!”
1황자가 놀라서 교비를 부축하자 그녀는 힘없는 빨래처럼 축 늘어진 채 가까스로 몸만 일으켰다.
“말도 안 됩니다 폐하!”
교비는 일어나자마자 버럭 외치면서 울었다.
“혜빈이 4황녀 거처에 독을 버렸을 겁니다!”
송 태감은 쩔쩔매는 표정으로 황제와 교비를 번갈아 보더니, 두 손을 배에 대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송구하옵니다, 마마. 궁인들은 혜빈께서는 백부궁에도 온 적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교비의 거처인 백부궁에도 혜빈이 간 적이 없는데, 백부궁 안쪽 전각에서 지내는 4황녀 거처에 혜빈이 어떻게 갔겠냐는 말이었다.
황제는 한숨을 내쉬고서 이마를 짚었다.
어의가 쥐 죽은 듯 조용히 있다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4황녀 전하께선 독을 먹긴 했으나 치사량을 먹진 않았습니다.”
황제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의자가 뒤로 넘어가며 쾅 소리를 냈다.
서 있던 사람들 모두가 동시에 무릎을 굽혔다.
“참으로 고약하구나.”
황제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푹 숙인 머리 위로 들려왔다.
“고약한 불효자다. 잠깐 혼이 났다고 독약을 먹는 성질머리라니. 그것도 자기가 잘못해서 혼이 났으면서! 이런 막돼먹은 자식이 어디 있단 말이냐.”
4황녀 전각에서 독이 발견된 데다 먹은 독도 치사량이 아니라고 하자, 4황녀가 홧김에 독을 먹었다고 여기는 듯했다.
황제가 쓰러진 의자를 한 번 더 걷어차는 소리가 들려았다. 그래도 머리를 들지 않고 버티고 있으려니 옆쪽에서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살그머니 고개를 들어 보니 황제가 나가버린 듯했다. 교비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황제가 나가자 황후도 몸을 일으키고서 단정하게 옷매무새를 정돈하고는 곧장 나가버렸다.
황후가 나가자 그녀의 친딸들도 모두 따라 나갔고, 그들이 나가자 순식간에 꽉 찼던 침방은 빈 느낌이 돌게 되어버렸다.
다른 후궁과 황자 황녀들이 하나둘씩 뒤이어 나가는 걸 보다가 나는 제자의 소맷자락을 슬쩍 끌어당겼다.
“전하. 우리도 돌아가요.”
교비에게 위로의 말을 건넬까, 싶기도 한데. 내가 위로하는 말을 건네봤자 그녀가 품은 증오가 사라질 것 같진 않다.
그럴 바엔 차라리 눈에 띄지 않는 게 낫겠다 싶어서 나는 교비와 1황자비 부부 쪽은 쳐다보지 않고 걸어갔다.
제자도 내게 소매를 잡힌 채 순순히 곁에서 따라 걸었다. 그런데 둘이서 백림각 대문까지 걸어갔을 때였다.
“요 이국사.”
뒤에서 찬 물방울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예혜 낭자가 서 있었다.
“괜찮다면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눈이 마주치자 예혜 낭자가 의외의 제안을 했다. 예혜 낭자가 나랑 할 말이 있나?
“전 괜찮습니다, 마마.”
의아하지만 피할 이유는 없는지라,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서 제자를 돌아보았다.
“전하. 잠시 마마와 이야기하고 돌아가겠습니다. 괜찮으시지요?”
안 괜찮구나. 바로 미간 사이가 찌푸려지네.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심지어 이 제자가 꾀병을 시도한다. 제자가 갑자기 중얼거리면서 내 어깨를 잡는 바람에 나는 몸이 기울었다. 예혜 낭자의 눈 사이가 좁아졌다.
“많이 아프세요?”
제자가 꾀병인 걸 알지만 사람들 앞에서 그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묻자 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혜빈마마. 급한 이야기이신가요? 아니라면 나중에 들어도 괜찮을까요?”
한 대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서 나는 예혜 낭자를 쳐다보았다.
예혜 낭자는 잠깐 13황자의 고운 이마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젓고서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전하께서 저와 요 대인이 둘만 이야기하는 걸 원치 않으시는 모양이니까요.”
예혜 낭자도 제자가 꾀병인 건 아나보다. 어의를 부르라던가 빨리 가보라고 하지 않고 그냥 가까이 오는 걸 보니.
내가 눈치챈 걸 제자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을 텐데. 제자는 여전히 내게 기대고서 꾀병을 부렸다.
결국, 제자는 커다란 인형인 셈 치고서 예혜 낭자를 쳐다보자,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물었다.
“요 이국사. 아까는…… 왜 내게로 온 거였지?”
“그야 저는 혜빈마마가 범인이 아닌 걸 알았으니까요.”
예혜 낭자의 눈이 한층 더 가늘어졌다. 혹시 아부하는 빈 소리로 들릴까 봐 나는 눈에 힘을 주고서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했다.
“전 혜빈마마가 좋은 사람인 걸 알거든요. 거기 모인 사람 중 가장 결백한 사람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그건 혜빈마마일 거예요.”
예혜 낭자의 눈이 더 가늘어졌다. 나는 그녀를 향해 최대한 우호적인 미소를 지은 다음 13황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우리 전하가 많이 편찮으신 듯하니 이만 가볼게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 * *
“정말 눈치 없는 사람이네요. 수사관은 절대 하면 안 되겠어요.”
요요화가 멀어지자 예혜의 궁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범인 앞에서 ‘당신만큼은 범인이 아니다’라고 말하다니. 어쩌면 저렇게 맹한 사람이 있을까.
“똑똑하다더니. 역시 소문은 다 믿으면 안 되나 봐요. 오히려 13황자 전하가 소문과 다르네요.”
“그래. 만만하고 멍청한 황자가 절대 아니다.”
예혜는 일부러 4황녀의 옛 거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자신의 방에서 아무 증거가 나오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의 거처를 대대적으로 살필 테고, 4황녀의 거처에서 자연스럽게 ‘증거’가 나오리란 걸 예측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3황자가 말을 더하면서 생각보다 일의 진행 속도가 빨라졌다. 두 사람은 아무 친분이 없기에 결탁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13황자를 경계하는 편이 좋을까요?”
“모두를 경계해야지.”
예혜는 덤덤하게 말하고서 몸을 돌렸다.
“하지만 난 요요화 쪽이 더 신경 쓰여.”
“그냥 눈치 없는 사람 같던데요.”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예혜는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동정심 가득한 눈빛을 보내는 요요화를 떠올리자 혼란스러워졌다.
영리한 사람은 영리하게 대응하면 되지만 무슨 생각인지 모르는 사람은 무슨 생각인지 모르니 대응도 어렵다.
궁녀는 그런 예혜가 더 신기해서 입을 벌렸다. 어린 시절부터 사람들을 냉소적으로 판단해오던 주인이 이러는 건 처음이었다.
* * *
화려는 예혜와는 다른 의미로 속이 번잡했다. 그는 까마귀 머리통 같은 스승의 머리통을 내려다보며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예혜와 스승, 황제와 스승. 둘 다 회귀 전에 한 쌍으로 붙어서 그를 곤혹스럽게 한 바 있는 조합이었다.
과거 그를 배신하고 그들에게 붙은 바 있던 스승을 잘 단속한다고 했는데. 스승이 이번에도 그들과 가까워지는 듯하자 화려의 의심이 한층 더 어둡고 깊어지기 시작했다.
스승을 돌려보낸 뒤. 화려는 금사연석 평상을 치운 뒤 푹 눌린 흙구덩이 부근으로 걸어가 뒷짐을 졌다. 앙상한 묘목 두 그루가 그의 눈에 강하게 들어왔다.
그때 담벼락 부근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청양이 그곳에 나타나 있었다.
“전하.”
소리 없이 다가온 청양이 주위에 인기척을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에 말씀하신 은신처 하나를 알아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