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입을 잘 가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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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화. 입을 잘 가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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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화. 입을 잘 가리기
2023.06.29.
아무리 봐도 4황녀는 지금 내게 시비를 걸고 있다. 하얀 가루 같은 거야 자기가 그냥 가져다 묻히면 되는 거고.
‘선물이 하품 중의 최하품이라니.’
아까 13황자에게 화가 난 기색이더니. 설마 그 화풀이를 내게 하나? 젠장. 제자는 대체 뭘 했길래 4황녀를 저렇게 열 받게 한 거지?
어쨌든 4황녀가 저렇게 나오니 이쪽도 그에 맞추어 줄 수밖에.
“제 실책입니다. 죄송합니다, 전하.”
내가 당황한 표정으로 사죄하자 4황녀의 턱이 조금 위로 올라갔다.
“죄송? 이게 죄송하단 말로 될 일인가?”
그녀는 목걸이를 상자에 내려놓더니 손을 마구 털어댔다.
“이 가루는 뭐지? 설마 독 같은 건 아니겠지!”
“독이라니요. 절대로 아닙니다, 전하.”
“독이라니! 건드리지 말거라 기려야.”
독 이야기가 나오자 교비가 펄쩍 뛰며 외쳤다.
“독은 아닌 거 같아요.”
4황녀는 얼른 대답했다. 독 운운했다가 제대로 조사가 들어가면 자기가 일부러 저런 가루를 묻힌 게 들통날 테니 그 정도로 일을 키우고 싶진 않은가보다.
여기서 ‘혹시 독일지도 모르니 확인해보자’고 꼬투리를 잡을 수도 있겠지만…….
“소신이 제대로 선물을 확인했어야 했습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전하.”
나는 그러는 대신 더욱 쩔쩔매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하는군 이국사. 장차 열셋째와 혼인하면 이국사와 나는 한 가족이 되겠지. 그런데 대체 무슨 억하심정으로 내게 이런 걸 보낸 건가. 혼례 선물은 신중하게 골라야 하는데. 나와 싸운 적도 없으면서 무슨 원한이라도 있나?”
내가 계속 당황한 모습을 보이자 4황녀는 점점 더 목소리가 커지더니 나중에는 한탄하는 말투로 바뀌었다.
이 모습에 지켜보던 이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하자, 오늘 4황녀와 혼인한 부마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물었다.
“요 이국사. 왜 이런 하품 물건을 황녀께 바친 겁니까. 혹여 안 좋은 뜻이라도 있습니까.”
“아닙니다. 소신은 아주 귀한 물건이라 여겨서 황녀께 바친 겁니다. 정말입니다.”
“어디서 구한 물건인데 황녀께 바칠 만큼 귀하다고 여겼는지 어이가 없군요. 어디서 구했습니까? 이국사가 흑심이 있는 게 아니라 안목이 나쁜 거라 주장하고 싶다면 이를 확실히 해야 할 겁니다.”
나는 더욱 당황한 표정으로 쩔쩔매다가 두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대답했다.
“폐, 폐하십니다.”
그 말에 노한 표정을 하고 있던 4황녀와 엄숙하게 나를 질책하던 넷째 부마가 동시에 눈이 동그래졌다.
사람들도 수군대던 걸 멈추고 찬물에 맞은 듯 조용해졌다.
“무슨 그런 거짓말을!”
뒤늦게 4황녀가 의자 손잡이를 퍽 두드리며 벌떡 일어났다.
“짐이 준 게 맞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내내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던 황제가 드디어 나섰다.
4황녀는 다급히 황제 쪽으로 돌아섰다가 다시 나를 보았다가 다시 황제를 쳐다보았다.
황제는 낯빛이 완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아, 아바마마. 거짓말하지 마세요. 왜 요요화가 아바마마께 물건을 받아 제게 준단 말입니까!”
사색이 된 4황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외쳤다.
나는 두 손으로 계속 입가를 가렸다. 아니면 입꼬리 올라간 게 들킬지도 몰라.
“왜냐고?”
황제가 코웃음을 치자 송 태감이 슬그머니 앞으로 나섰다.
“황녀 전하. 원래 이국사가 준비한 선물은 다른 것이었사온데, 폐하께서 이국사께 아주 좋은 보옥 목걸이를 내리자 그걸 4황녀께 드리고 싶다고 청하였습니다. 이국사는 열심히 준비해도 이런 귀한 보옥 목걸이를 구할 수 없다고요.”
정확히는 교비의 친딸이자 1황자의 동복동생인 4황녀가 내게 그들을 대신해 꼬투리를 잡을지도 모른다고 여겨서 청한 거다.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폐하께선 그럴 필요 없다고 하셨지만 이국사께서는 4황녀 전하께 가장 좋은 선물을 드리고 싶다 하셨지요.”
“말도 안 돼……!”
4황녀는 버럭 외쳤다가 다급히 표정을 관리하고서 말했다.
“그, 그렇다면 아바마마. 아무래도 이국사가 물건을 잘못 보관했나 봅니다. 그래서 소녀가 제대로 물품을 보지 못한 듯합니다.”
송 공공의 낯빛도 덩달아 흐려졌다.
“황녀 전하. 요 대인께선 너무 귀한 보옥을 가지고 오가니 부담스럽다고 직전까지 소인에게 물건을 맡기셨습니다.”
“!”
“혼례식 때까지도 물건은 소인이 다른 후궁님들의 선물들과 함께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물건 상태는 소인이 전문가들을 불러 수시로 확인했습니다만…… 아무 문제 없었습니다.”
4황녀와 부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실망이구나 기려.”
황후가 차가운 목소리로 끼어들자 4황녀는 다급히 한쪽 무릎을 굽혔다.
“용서하세요 아바마마. 소녀가 안목이 부족해 아바마마의 성의를 제대로 보지 못하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폐하.”
부마도 4황녀 옆에 같은 자세로 앉으며 사죄했다.
하지만 황제의 표정은 구겨져서 펴지지 않았다. 눈앞에서 4황녀가 어마어마하게 귀한 보옥으로 꼬투리 잡는 걸 지켜보았기 때문이겠지.
황제의 총애를 오래 받은 교비 태생의 귀한 4황녀가 보옥과 하품 목걸이를 구별하지 못할 일 없단 걸 아니까.
“용서는 내가 아니라 이국사가 해야겠지.”
황제가 무뚝뚝하게 말하자 4황녀와 부마가 움찔했다.
“아바마마…….”
“짐이 내린 물건이 아니었다면 너는 요요화가 아무리 좋은 물건을 선물해도 꼬투리를 잡아 벌을 내렸을 게 아니냐. 영리하고 착한 줄 알았는데. 어찌 사람이 비열한 짓거리를 하느냐!”
“그런 게 아닙니다!”
“인륜지대사 경사를 이용해 남을 모욕하려 들다니.”
황제의 무시무시한 시선은 바로 부마에게로 넘어갔다.
“너도 똑같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바로 옆에 있는 너는 4황녀가 꼬투리 잡는 물건이 멀쩡하단 걸 알 수 있었겠지. 그런데도 4황녀를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기면서 일을 키워?”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럼 죽어라!”
황제가 버럭 외치자 교비가 다급히 앞으로 달려가 무릎을 꿇었다.
“폐하. 아이들이 요 몇 달간 혼사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 탓에 잠시 눈이 흐려져 괜한 사람에게 화풀이를 한 겁니다. 부디 고정하세요.”
“바쁘면 아무나 잡고 꼬투리를 잡아도 되는가.”
하지만 황후가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황후가 싸늘하게 말하자, 황후 곁에 앉아 있던 8황녀가 까르르 웃고서 말을 받았다.
“여기 모인 이중 요 이국사가 가장 관직이 낮지요. 넷째 언니는 피곤한 와중에도 제일 약한 상대가 누구인지는 철저하게 확인하고 괴롭히나 봅니다.”
“그런 모양이구나.”
황제는 차갑게 말하더니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가타부타 말을 얹지 않고 소매를 휘두르며 나가버렸다.
4황녀는 황제가 나간 후에야 천천히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하지만 오래 기다린 혼례에 기뻐하던 기색은 사라져 있고 얼굴은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부마가 그녀를 부축해 다시 의자에 앉혔다.
“이국사. 그만 들어가도 좋다.”
그 모습을 중앙에서 계속 보고 있자니 황후가 나서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나는 얼른 황후에게 허리를 숙이고서 조심조심 13황자 옆으로 다가가 섰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황후까지 나가 버렸고, 황후 소생의 황녀들도 모두 뒤를 따라 나갔다.
가장 높은 지위의 사람들이 빠져나가자 상황을 지켜보던 손님들은 머리를 굴렸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4황녀는 왜 굳이 요요화에게 꼬투리를 잡던 거지?”
“8황녀 말하는 거 못 들었나. 화나니까 그냥 가장 아랫사람인 요요화를 잡고 끌어들인 거지.”
“13황자 선물이 마음에 안 들어서 요요화한테 화풀이한 거 아닐까요?”
“내 생각엔 1황자 부부가 13황자를 싫어하니 대신 복수해주려다가 이리된 것 같습니다.”
“13황자에게 복수할 이유가 있나?”
“1소황자가 문제 될 발언을 하기 전에 13황자가 그 화제를 먼저 꺼냈다지 않습니까. 13황자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지만 속이 상하니 어디든 화풀이를 하고 싶은 거겠지요.”
사람들은 작게 속닥거렸지만 그 작은 소리들이 모이자 4황녀에게도 희미하게 이야기가 들려왔다.
4황녀는 주먹을 쥐고서 자기들끼리 대화하느라 정신없는 손님들을 노려보았다.
손님들 대다수는 자기들끼리만 속닥거렸다. 도저히 잔치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개중 몇몇은 그래도 용기 있게 자리를 이동해 돌아다녔는데, 그들이 향한 곳은 4황녀 부부나 교비가 아니라 2황자 부부와 2황자의 친모 순비 쪽이었다.
이 일로 교비와 교비 소생의 황자황녀가 모두 황제에게 미움을 사게 되자, 그다음으로 황위에 가까운 2황자 부부와 순비에게 잘 보이려는 것이었다.
게다가 2황자비는 지금 쌍둥이까지 잉태한 몸이 아닌가.
4황녀는 이를 지켜보다가 이를 갈며 요요화와 13황자를 노려보았다.
사실 그녀도 이렇게까지 트집 잡을 생각은 없었다. 그냥 ‘마음에 안 든다’는 선에서 넘어가려 했다.
그러나 13황자가 ‘선물용’으로 들였다는 금사연석 평상이 자기 게 아니란 걸 깨닫자, 자기 밑의 궁인들과 그 선물을 고대하며 들떠 있던 게 떠올라 노여워졌다.
그 탓에 조금 세게 요요화에게 꼬투리를 잡았는데. 설마 요요화가 황제의 선물을 바로 그녀에게로 돌렸을 줄이야!
화가 난 4황녀는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긴 신부 옷자락 끝을 집고서 정원 뒤쪽으로 가서 숨을 골랐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3황자였다.
“넷째. 괜찮으냐?”
눈이 마주치자 3황자가 다가오더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염려 마라. 부황께선 곧 화 푸실 것이다.”
3황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으나 4황녀는 그 말에 화가 더욱 치솟았다.
“오라버니는 폐하께 총애받은 적이 한 번도 없잖아. 그런데 꼭 부황께 총애를 받아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네.”
3황자는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하지만 넌 부황께서 아끼시니 곧 화가 풀리실 거란 뜻이었단다.”
“오라버니도 부황이 내게 화내서 기쁘지? 그렇다고 말해. 괜히 착한 척할 필요 없어. 첫째 오라버니와 내가 아바마마의 눈 밖에 나서 이득 볼 사람 중에 오라버니도 포함되어 있잖아.”
3황자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없이 미소 짓고서 돌아섰다.
“혼자 있고 싶은 모양이니 갈게.”
3황자가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자 4황녀는 더욱 분노가 솟아났다. 괜한 사람에게 화풀이를 했다는 생각이 들자 스스로가 한심스러워졌다.
4황녀는 커다란 바위를 걷어차고서 몸을 돌렸다. 몇 걸음 걸어가고 있으려니 멀지 않은 곳에 혜빈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혜빈이 차분하게 인사를 건넸다.
4황녀는 대답 대신 그녀를 지나쳐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
혜빈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 뒤를 쫓아갔다.
* * *
3황자, 4황녀, 예혜 낭자가 없네? 조심조심 식사를 하면서 상황을 보고 있으려니, 그 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4황녀야 화나서 나갔을 것 같다지만…… 3황자랑 예혜 낭자가 동시에 없는 걸 보자 심장 한구석이 쓰라린다. 혹시 둘이 같이 나갔나?
3황자와 예혜 낭자는 잘하면 맺어질 수도 있던 사이이지. 어쩌면 둘이 나갔다가 마주쳐서 그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 생각을 하자 더욱 심장이 아려서 나는 술잔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13황자가 내가 집어 들려는 술잔을 위에서 눌러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