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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화. 원치 않은 총애 (135/159)


135화. 원치 않은 총애
2023.06.15.



 
계속 발뺌할까. 그러나 두 번이나 거듭해서 아니라고 말하기에는 황제가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이국사.”

황제가 재차 나를 불렀다.


“네, 폐하.”

“아니었다면 너는 계속 아니었다고 말했겠지. 아니라고 대답할까 맞다고 대답할까 망설이지도 못했을 거다.”

“!”

황제가 딱 잘라서 하는 말에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예지몽을 꾸는 편입니다.”

결국, 나는 회귀 이야기를 빼고 거짓으로 둘러댔다. 회귀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그러면 회귀 직전의 일에 관해 물어볼 거 아닌가.

회귀 직전에 황제가 잘살았다면 상관없지만, 제자가 황제 자리에 올랐고 황제는 감금당했으니 황제 앞에선 이 이야기는 절대 금물이다.


“예지몽?”

“네.”

“미래를 예지몽으로 다 본단 게냐.”

“아니요. 예지몽을 꾸긴 하지만 미래를 보는 수준까진 아닙니다, 폐하. 보통 꿈과 다를 바가 없어서 때론 예지몽 같았지만 아닐 때도 있고, 그냥 꿈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시일이 지나고서 보니 예지몽이었을 때도 있지요.”

황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 말을 믿을까 말까 고심하는 눈치였다.


“필첩을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전 어느 게 예지몽인지 구분하기 힘들어서요. 잘 보면 틀린 내용도 많습니다, 폐하.”

회귀 전과 회귀 후에 발생하는 일들이 달라지는 걸 이렇게 둘러댈 수 있구나. 다행이다.


“틀린 내용이 있긴 했지.”

다행히 황제도 이 부분은 수긍했다.


“예…….”

나는 두 손을 모으고서 황제를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그가 그냥 신기하게 여기고 필첩을 돌려주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게 헛된 희망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역시 자넨 이국사에서 멈추기엔 너무 아까워.”

황제가 턱을 괴더니 나를 빤히 살피며 중얼거렸다.


“폐하. 예지몽이라 하기에도 미약한 수준입니다. 앞날을 아예 못 보는 것보다 어중간하고 흐릿하게 보는 게 더 위험하기도 합니다. 편견을 가지게 되니까요.”

“요요화.”

“네, 폐하.”

“짐의 심복이 되어 이 나라를 위해 일하라.”

나는 두 손을 꽉 모아 쥐고서 입을 뻐끔거렸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말이 나가지 않았다. 싫어요. 하면 안 해도 되나?


“폐하. 소신은 13황자 전하의 이국사로 머물고 싶습니다.”

“13황자를 사모해서?”

황제가 내 대답을 뻔히 알겠다는 듯 심드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알면서 왜 묻지?


“예.”

“하지만 이국사가 되어선 큰 뜻을 세우기 어렵지. 관직이 더 올라가기도 힘들고 나라에 도움이 되어 이름을 떨치기도 힘들다.”

상관없는데. 이름은 떨치는 건 회귀 전에 해봤으니 이번엔 장수를 해보고 싶은데요.


“폐하. 신은 13황자 전하를 사모합니다.”

“이국사를 그만두고 비서부로 와 짐의 측근이 되어라.”

이 황제는 날 볼 때마다 벼루를 날려 대는구나. 전에는 단단한 벼루를 던지고 지금은 말로 만든 벼루를 던진다.


“폐하. 소신은…… 소신은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회귀자의 용기를 쥐어짜 대꾸했다. 황제에게 반발하다니. 미친 짓거리지만 황제의 측근이 되는 것도 미친 짓거리이니 별수 없었다.

황제가 입술을 꾹 닫고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 상태로 버티기를 얼마간.


“다음 대 황제가 열셋째이냐.”

황제의 말이 제일 커다란 벼루로 변해 날아왔다. 나는 놀란 표정을 짓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했다. 제자 앞에서 회귀를 감출 때 이상으로 노력했다.


“예?”

“그래서 열셋째 곁에 이렇게 붙어 있으려는 게냐.”

황제는 황제구나. 정말로 머리가 좋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요. 하오나 폐하. 소신의 예지몽으로는 그런 건 모릅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필첩에 나와 13황자의 결말은 적어두지 않았다.

회귀 전 마지막 날 13황자가 즉위하고 그날 내가 죽는다. 이건 필첩에 적지 않아도 잊을 수 없는 일이니 굳이 적을 필요가 없었다. 적어봤자 찝찝할 뿐이니까.

나는 황제의 눈치를 살피다가 얼른 덧붙였다.


“폐하. 예지몽이라고 해도 자주 꾸지도 않고, 꾸고 나면 까먹는 일이 많아서 일단 꿈 내용은 예지가 아닌 듯해도 다 적어둡니다. 잠결에 적은 게 대다수이니 제가 적고서도 까먹은 내용도 많지요. 폐하께서 필첩에 적은 숫자나 글자를 보고 무엇인지 물었을 때 제대로 대답할 자신이 없습니다…….”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나를 보기만 했다.

나는 표정 관리가 잘 안 된다던 제자의 말이 계속 귓가를 맴돈다. 진짜일까? 그렇더라도 부디 지금은 관리가 잘 되고 있기를!


“그러면 이렇게 하지.”

한참 만에야 황제가 입을 열었다.


“이국사 자리에는 그대로 두겠다.”

“황송하옵니다.”

“단. 조건이 있다.”

원래 관직을 잘못 없이 유지하는데도 조건까지 받아야 한다니. 이래서 다들 황제 하려는 건가. 권력자는 편하겠어.


“무엇인지요……?”

“짐이 부를 때마다 와서 필첩에 대해 해석해주어야 한다.”

“……폐하. 말씀드렸다시피 불완전한 내용입니다. 필첩에 엉터리로 적힌 부분도 많고요.”

“그래도 제대로 대답하기 위해 애써라.”

“물론 신은 최선을 다하겠지만 신이 최선을 다한다고 꿈이 정교해지고 그러는 건 아닙니다, 폐하.”

황제는 필첩을 다시 상소문 아래로 두었다. 돌려줄 생각이 없구나.


“그런 부분은 짐이 감안하고 듣겠다.”

황제와 독대를 끝내고 밖으로 나가자 송 태감이 호기심이 가득 드러난 얼굴로 서 있었다.


“마차를 타고 돌아가시지요, 대인.”

송 태감이 내가 타고 온 마차를 가리키며 권했다.


“괜찮네. 좀 걷고 싶어서.”

하지만 나는 머리가 어지러워서 마차를 거절하고 천천히 궁궐 안을 걸어갔다. 부담스러운 마음과 상황에 대한 피로감 때문에 머리가 너무 아팠다.

제자가 달아난 나를 온 힘을 다해 쫓지 않도록 적당히 호감을 쌓고 도망가려 했는데. 일이 이렇게 꼬이다니.

이러면 내가 달아났을 때 제자가 아니라 황제가 잡으러 올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제자를 두고 황제의 충신이 될 수도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고민하면서 가고 있자니 눈앞이 가물가물해졌다.


 

* * *

정신을 차리고서 놀라 앉아 보니 익숙한 장소였다. 제자의 서재에 딸린 그 곁방이었다. 내가 왜 여기 있지? 아까 분명 나는…….


‘기절했구나.’

어쩐지 눈앞이 가물가물하더라니 의식을 잃었나 보다. 나는 벽을 짚고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러고서 문가로 느릿하게 걸어가는데 문을 막 열려고 하자마자 누군가 뒤에서 먼저 문을 열었다.

세게 연 건 아니었으나 문이 열리면서 그 너머로 제자의 수려한 얼굴이 나타나자 순간 얼이 빠지고 말았다.


“전하.”

반쯤 넋이 나가서 부르자, 제자는 손만 뒤로 해 문을 닫고서 안으로 들어왔다.


“벌써 움직여도 괜찮으신지요? 스승님이 쓰러진 걸 발견해서 제자가 데려왔습니다.”

“네. 이제 멀쩡해요. 그런데 전하께선 어쩌다가 저를…….”

“마침 지나가던 길이었답니다.”

너무 성의 없는 변명 아닌가.

제자는 안으로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들어가서 좀 더 있다 가시지요.”

“송구합니다. 전 이제 가보려 했는데요.”

“지금 가다가 또 쓰러지면 제자가 스승님 뵐 낯이 없습니다.”

이 황제 부자는 나랑 전생에 무슨 원한을 맺었나?


‘원한을 지긴 했지.’

순순히 시키는 대로 아까 내가 누워 있던 침상에 갔다. 침상 끄트머리에 조심스럽게 앉자 제자가 내 이마 위에 자기 손을 올렸다.


“열은 안 나는군요.”

“처음 발견했을 땐 열이 났나요?”

“그건 아닙니다.”

제자는 손을 치우면서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았다. 두 뼘 정도 거리를 두긴 했지만 옆은 옆이었다.

그가 바로 내 옆에 앉을 줄은 몰랐던지라 나는 숨을 들이쉬고서 제자를 곁눈질했다. 왜 갑자기 옆에 앉지?


“스승님.”

“네, 전하.”

“오늘 부황은 왜 만난 건지요?”

이 얘기할 줄 알았어. 이 얘기할 줄 알았다고.


“제가 절대로 먼저 찾아간 거 아닙니다, 전하.”

“압니다. 그래서 더 신경 쓰여 묻는 겁니다.”

내가 두 손을 모아 무릎 위에 얹고서 우물쭈물하자 제자가 아까보다 좀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제자에게 알려줄 수 없는 이야기를 나누셨는지요?”

그가 갑자기 기분이 좋아질 리가 없으니, 날 꾀어내기 위해 일부러 저러는 게 틀림없었다.


“폐하와 나눈 이야기를 어찌 함부로 알리겠습니까.”

하지만 황제와 예지몽이니 미래를 보니 하는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털어놓기를 거부하자 제자가 눈썹을 찡그리고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가 기분 나빠하는 듯해서 나는 일전에 그가 꺼낸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전하께서 뭘 염려하시는지 알아요. 하지만 전하, 저는 관료이니 폐하께서 부르면 갈 수밖에 없고, 폐하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전하께 하나하나 다 전해드릴 수가 없어요.”

제자의 시선이 꼭 모아쥔 내 손에 닿았다. 그걸 눈치채고 얼른 무릎 위에서 손을 풀자 제자는 이번에는 내 눈을 쳐다보았다.


“스승님. 오늘 문안 때 황후께서 후궁들이 다 있는 곳에서 폐하께 청을 올렸다고 합니다.”

“청이요?”

“3황자의 혼담이 엎어졌고 어떻게 될지 모르니, 동생들이 먼저 혼인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청이었습니다.”

회귀 전에도 황후가 그러긴 했지. 하지만 그땐 2황자비의 쌍둥이가 태어난 뒤였다.

황제가 쌍둥이를 귀여워하는 모습을 본 황후가 그 틈에 제안한 거였다. 그런데 이번엔 벌써 제안하는구나.


“폐하께서 허락하셨어요?”

“예.”

이렇게 미래가 계속 바뀌는데 내가 어떻게 예언가 노릇을 하겠냐고.


“그렇군요.”

“앞으로 형님과 누님들이 줄줄이 혼인하겠지요. 이르면 스승님과 제자도 삼 년이나 사 년 뒤쯤엔 혼인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자와의 혼인날이 성큼 앞으로 다가왔구나. 긴장돼서 입이 마르는 느낌이 들었다.

제자와의 혼인날이 훌쩍 앞으로 다가왔다는 건, 내게 주어진 기한이 훌쩍 짧아진단 것이었다.

처음 내가 생각한 기한은 '제자가 황제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 사이가 좋아지는 것이었다.

그 기한은 정혼 하게 되면서 '제자와 혼인하기 전까지' 좋아지는 거로 짧아졌다. 그런데 혼례 시기가 앞당겨지면서 그 기한조차 더 짧아지다니.


“앞으론 수업 때 월무궁에 오시거든 어떤 식으로 궁을 단장할지 제자와 한두 시진 정도 더 이야기하고 가셔야겠습니다.”

“예?”

“시간이 오래 남았으니 천천히 꾸며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짧아졌으니까요. 지금부터 준비해야 스승님이 여기서 지낼 때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황제 만난 이야기를 하면서 경고하더니 왜 갑자기 월무궁 단장 이야기를 꺼내지?

혼인할 날이 머지않았는데 예비 시아버지인 황제와 추문이 돌게 하지 말란 뜻인가?

젠장. 황제는 이미 나를 주기적으로 불러 필첩에 관해 물어볼 거란 예고를 했는데.


“스승님. 앞으론 부황이 스승님을 부른다면 제자와 함께 가시지요. 제자가 따라가겠습니다.”

진퇴양난이구나. 정말로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는다. 남들은 부러워하는 황제의 인정과 총애를 얻게 되었는데 전혀 기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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