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손수 만들어주는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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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화. 손수 만들어주는 적
2023.06.05.
“태월 황제는 원하는 배상액을 다 줄 테니, 보문 공주를 3황자의 정비나 13황자의 차비로 들이길 바란다더군.”
태월 황제는 보문 공주를 무척 아낀다고 들었는데. 황실 체면이 상하게 되니 바로 버리는구나. 어차피 배상액을 낼 거라면 공주는 데려가는 게 좋을 텐데. 굳이 여기 두려 하다니.
금은보화를 들려 버리는 거긴 하지만, 이 일로 보문 공주가 꽤 충격을 받겠는걸.
“해서 너희를 불렀다. 마음에 차는 며느릿감은 아니지만 태월과 이 이상 척을 질 필요는 없지. 하니 13황자. 요요화. 너희에게 선택권을 주마.”
보문 공주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도 좀 충격을 받았다. 아니, 저걸 왜 우리한테만 물어보지? 3황자는?
하지만 눈치를 보아하니 황제가 추가로 사람을 부를 태세는 아니었다.
“폐하. 3황자 전하께도 여쭈어야 하지 않을까요? 3황자 전하의 일이기도 하니까요.”
이에 슬그머니 나서서 물어보자 제자가 정면을 보고 있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 좋은 시선은 아닌 듯하다. 눈을 마주하는 게 아닌데도 머리 옆쪽이 아주 찌릿찌릿하다.
“셋째는 성정이 좋고 여리지. 셋째를 불러 봤자 내 뜻이나 네 뜻대로 하라고 뒤로 빠질 거다.”
물론 그러겠지. 그래도 부르는 게 낫지 않나.
나는 제자를 곁눈질했다.
그 순간. 잠깐 황제를 보던 제자도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기분이 이상하게 술렁였다. 그의 눈빛이 차갑게 보였다. 아까 내가 3황자를 부르자고 해서 저러나?
“부황. 셋째 형님은 황자들 중 유일하게 정혼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는 나와 눈을 맞춘 상태 그대로 입을 열었다. 꼭 나더러 들으란 것처럼.
“그러니 보문 공주를 황자 중 누군가와 짝지어야 한다면 셋째 형님이 낫겠습니다.”
황제가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비웃었다.
“셋째를 위한 것처럼 잘도 둘러대는구나. 네가 그냥 보문 공주가 싫은 건 아니고?”
“보문 공주는 제 정혼녀를 죽이려 했습니다. 당연히 싫습니다.”
제자는 딱 잘라 말하고서 다시 황제를 쳐다보았다.
심장이 요동친다. 그가 날 위하는 척 말하는데도 기쁘기보다는 초조해졌다.
“소자는 여러 여인을 행복하게 해 줄 자신도 없습니다. 스승님 외 다른 여인은 누구도 옆에 두지 않을 겁니다.”
딱 잘라 말한 제자는 아예 날 향해 고개를 돌리며 확인까지 받았다.
“그렇지요, 스승님?”
솔직히 보문 공주처럼 남을 괴롭히고,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암살까지 시도하는 사람이 3황자의 아내가 되는 건 싫다.
3황자는 내가 아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바르고 좋은 사람이다.
황자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훨씬 사랑스럽고 좋은 사람인데. 그런 사람 옆에 보문 공주……
예혜 낭자는 괜찮았다.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니까. 게다가 진심으로 3황자를 좋아하니까.
하지만 보문 공주는 성격도 더러운 데다가, 결정적으로 13황자를 좋아하잖아?
“스승님.”
너무 대답을 오래 끌었는지 제자가 다시 나를 불러 재촉했다.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슬쩍 눈을 맞추어 보니 눈에 온기가 한 숟가락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요.”
어쩔 수 없이 나는 수긍하고서 고개를 숙였다.
……나 살자고 3황자님을 팔아먹은 기분이야.
* * *
3황자와 보문 공주가 정혼할 거란 소식이 그렇게 충격일까. 감당할 수 없는 공주를 자기 정혼자 차비로 들이고 싶을 만큼?
스승 요요화가 기운 없이 비틀비틀 걸어간다. 화려는 그 뒷모습을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았다.
화려는 스승이 보이지 않게 되자 월무궁으로 돌아가 운귀를 불렀다.
운귀는 마침 6황자와 대화원을 거닐던 중이었기에 바로 오지 못했다. 운귀가 틈을 봐서 월무궁에 왔을 때 화려는 얼굴이 꽝꽝 겨울 호수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전하. 일부러 늦은 게 절대로 아닙니다.”
운귀는 다급히 사죄했다. 하지만 화려는 표정이 풀리지 않았다.
“전하, 소인이 6황자 전하와 마침 외부에 있던지라-”
“네게 화난 게 아니니 필사적으로 변명할 필요 없다. 네가 대외적으로 6황자를 가장 우선해야 하는 걸 안다.”
운귀는 눈을 끔뻑거렸다. ‘네게 화난 게 아니다’라는 건 누군가에게는 화가 났다는 뜻인데?
“하명하십시오.”
운귀는 대체 뭔 일로 누구에게 화가 났냐고 캐묻는 대신 믿음직하게 굴었다.
“태월에서 보문 공주를 13황자의 첩이나 3황자의 아내로 보내라고 선택권을 주었다. 요요화가 3황자의 아내로 보내길 권했다. 이 소식을 혜빈과 3황자가 듣도록 해라.”
하지만 화려의 요구는 정말로 이상했다.
“예?”
* * *
운귀는 말을 만들어 퍼트리는 데 귀재였다. 그가 뿌린 이야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황궁 궁인들과 신하들에게 퍼졌다.
“요 이국사가 좋은 선택을 했군.”
신하들은 보문이 3황자와 맺어지게 되었다고 하자 안도했다.
보문 공주의 성정이 포악한 게 알려졌으나 그들에겐 이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공주를 아내로 맞이할 게 아니지 않는가.
신하들은 보문 공주가 정비로 들어오면서 태월과의 사이가 크게 나빠지지 않으리라 기대했다.
어떤 이들은 요요화가 자기보다 귀한 차비가 생기는 게 싫어서 영리한 선택을 했다고 했고, 어떤 이들은 공주를 아랫사람으로 둘 기회를 스스로 물렸으니 대단하다고 분석했다.
“요 이국사는 전하와 원한도 없는데 참으로 너무하십니다!”
하지만 3황자의 유모는 이 소식을 듣자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화를 냈다.
“직접 자객촌을 찾아갈 만큼 성정이 고약하고 잔인한 사람인 걸 알면서 전하의 정혼녀로 권하다니요! 자기 밑에 들이기 싫으니 전하를 팔아넘긴 게 아닙니까!”
3황자의 유모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그의 행복을 우선했기에 이 일을 환영할 수 없었다.
3황자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괜찮네. 보문 공주가 열셋째의 차비로 들어가 봤자 계속해서 싸움만 일어날 테지. 이게 모두에게 나을지도 모르네.”
“전하를 제외하고 말이죠! 전하를 제외한 모두에게 좋은 결과는 제겐 좋은 결과가 아닙니다!”
* * *
거의 엇비슷한 시각. 예혜의 궁녀 역시 내무부에 물건을 받으러 갔다가 이 소식을 듣고 와 씩씩대며 알려주었다.
예혜는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종이를 가위로 오리다가 3황자 이야기에 손을 멈칫했다.
“요 이국사로서는 당연한 선택이겠지요.”
궁녀는 예혜의 눈치를 보며 중얼거렸다.
“3황자 전하는 정혼녀가 없어서 점점 신분 낮은 여인을 찾아야 했고, 요 이국사는…… 어느 사람이 배우자를 여럿이 나누고 싶어 하겠어요.”
궁녀는 자기 입술을 찰싹 내리쳤다. 후궁이 된 주인 앞에서 꺼낼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혜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다시 종이를 사각사각 오리기 시작했다.
궁녀는 예혜의 눈치를 살피다가 그녀 옆에 놓인 찻잔이 비었는지 확인하고 들어 올렸다.
“차를 새로 끓여 올까요?”
“그러거라.”
차분하게 대답한 예혜가 종이와 가위를 내려놓고 붓을 들어 뚜껑을 열었다.
“!”
* * *
“혼인하게 되면 집에 행사가 있을 때 손님들에게 초대장을 보내야 한단다. 이때 누구를 초대할지, 어떤 방식으로 초대할지 등을 아주 신경 써야 해.”
수업이 없는 날. 어머니는 날 찾아와 이렇게 말하고서, 이번 신년일 초대장을 같이 적자고 했다.
이 때문에 내당에 붙들려서 쉼 없이 글씨를 쓰고 있는 도중이었다.
밖에서 소란이 들리는가 싶더니 아버지가 방 안으로 급하게 들어오며 외쳤다.
“여보, 여보, 요화 어딨습니까?”
아버지는 어머니와 마주 보고 앉은 날 발견하고는 “어이쿠!”하고 외치고서 재빨리 문을 닫았다.
“무슨 일 있어요?”
어리둥절해서 묻자 아버지는 어머니와 내가 머리를 모으게 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궁궐에 난리가 났습니다.”
“난리라니요?”
어머니가 날 쳐다본다.
“저도 오늘 입궐 안 해서 몰라요.”
나는 어머니에게 내가 알고도 입 다문 게 아니라고 알리고서 아버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보문 공주가 3황자와 정혼하기로 되지 않았냐.”
“네. 왜요? 안 한다고 가출이라도 했어요?”
“가출했다면 차라리 낫지!”
“그럼요?”
설마 또 자객을 구하려다가 걸린 건 아니겠지. 아닐 거다. 지금 보문은 이동이 자유롭지 못하니까.
“독을 구해 먹고 자결했다더라! 유서가 발견됐는데 13황자가 아니면 혼인하기 싫다고 쓰여 있더래.”
“어머나!”
어머니는 소리 지르면서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앉으면서 소곤소곤 물었다.
“자결은 확실한가요? 독살은 아니고요?”
“태월 사절도 이 때문에 펄쩍 뛰었지요. 하지만 조사해보니 최근에 보문 공주가 몰래 독을 구한 정황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입을 막고서 눈을 깜빡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쁜 사람이지만 13황자 전하에 대한 흠모는 진심이었나 보네요. 그렇게까지 하다니…….”
“그나마 독살이 아니라 자결이라 다행이지요.”
아버지도 중얼거렸다.
“그러네요.”
나도 일단 부모님 말씀에 동의했다. 하지만 속으로까지 동의한 건 아니다.
뭐야. 엄청나게 의심스러운데?
회귀 전 보문 공주는 쫓겨날 처지가 되자 그냥 돌아갔다. 이후로도 그녀가 13황자가 그리워 자결했단 소식은 듣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자결?
‘물론 자객촌에 다녀온 일로 궁지에 몰렸긴 하지만…….’
“왜 그러느냐? 요화야, 뭐 달리 짐작 가는 게 있느냐?”
아버지가 대번에 내가 미심쩍어하는 기색을 눈치채고 묻는다.
“아니요.”
나는 웃으면서 초대장을 쓸 빈 종이를 앞으로 끌어왔다.
“혹시 너 때문이라고 자책하거나 하진 말거라.”
“당연하죠. 저랑 무슨 상관이라고요.”
‘제자도 이 일과는 상관없겠지……? 없어야 할 텐데. 왜 신경 쓰이지?’
* * *
보문 공주의 자결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잊혀졌다.
딱히 그녀와 친하게 지낸 사람이 없는 데다 마지막에 그녀 때문에 태월과 화음 사이까지 나빠질 뻔했기 때문이었다.
몇 달간 그녀가 자기 처소 밖으로 나오지 못했던 것도 거기에 한몫했다.
보문 공주의 궁녀가 ‘우리 공주님은 자결할 분이 아니다’고 주장했으나, 증거 없는 주장일 뿐이라 태월 사절조차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궁녀가 주인을 지키지 못한 죄로 처벌받을 게 두려워 그렇게 주장한다고만 생각했다.
며칠 뒤. 태월 사절은 보문 공주의 시신을 챙겨 서둘러 돌아갔다.
궁궐에서는 신년일을 대비하느라 궁인들이 바쁘게 움직였고, 마침내 신년일이 되었을 때는 누구도 보문 공주 이야기를 꺼내지 않게 되었다.
나는 보문 공주의 죽음에 미심쩍어하는 부분이 있다 보니 남들보다는 더 오래 신경 썼다.
하지만 신년일에 황친들끼리 모여 식사하는 데 초대받고 나자, 나도 이제 그녀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작년에는 린화가 없어 쓸쓸했는데. 올해는 너까지 황실 행사에 가버리니 더 쓸쓸해지겠구나.”
어머니는 내가 치장하는 걸 하나하나 감독하며 쓸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눈치 보다가 빠져나올 수 있게 되면 바로 나올게요. 전 거기서 사는 게 아니니까 집에 돌아올 수 있어요.”
“그래. 혹시 모르니 기다리고 있을게.”
“네. 그런데 치장이 너무 화려한 거 같은데요.”
“다들 화려하게 치장하고 오는데 너만 소박하게 가면 그게 더 눈에 띌걸?”
그런 말이 어딨냐고 반박하려다가 그 말도 맞겠다 싶어서 입을 다물었다. 학 사이에 참새 하나 껴 있으면 눈에 엄청나게 띄겠지.
묻혀 가야 해. 다들 지금은 보문 공주 건을 잊어버리고 있지만 날 보면 떠올릴 수도 있다고.
“다녀올게요.”
치장이 끝난 뒤 나는 평소와 달리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그러나 묻혀 가리란 다짐은 월무궁 앞에서 제자를 마주하자 쏙 사라졌다. 제자는 문간을 걸어 나오다가 날 보더니 눈에 띌 정도로 표정이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