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0화. 과거와 같은 결말 (130/159)


130화. 과거와 같은 결말
2023.05.29.



 
제자는 별말 하지 않았다. 아이를 일찍 재우는 게 낫겠단 말과 최근에 숙모들과 많이 만났다는 말 정도만 했다.

숙모들과 많이 만났다는 말은 굳이 굳이 꼬아 듣는다면 1황자비에 대한 질책으로 볼 수도 있긴 하지. 하지만 1소황자에 대한 공격 같진 않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의심스럽지?’

내가 자꾸 힐긋거리자, 제자가 찻잔을 내려놓더니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제자만 보시면 사람들이 비웃을 겁니다.”

“전하가 너무 멋져서요.”

차마 의심해서 봤다고는 할 수 없어서 나는 적당히 둘러대고서 앞을 보았다. 그렇지만 아무리 봐도 수상하긴 마찬가지다.

평소 연회 때는 조용히 식사만 하는 제자가 왜 굳이 먼저 말을 걸었을까? 하지만 고작 저 정도 말만으로 아이에게서 저 말을 끌어낼 수 있나?


“얘가 무슨 소리야. 운아. 그런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돼.”

1황자비는 놀라서 굳었다가 뒤늦게 아이의 팔을 잡고서 수습하려 애썼다.

아이는 눈이 동그래져서 되물었다.


“네? 아랫사람들에게 잘 대하는 건 좋은 군주의 덕목이라고 배웠는데요. 소자가 말을 잘못하였나요?”

수습이 잘 안 되고 있구나.


“너는 군주가 아니고 숙모들은 모두 네 윗사람이란다. 그러니 함부로 그런 말을 하면 안 돼.”

이를 보던 황후가 끼어들려고 입을 열자, 황제가 손을 살짝 들고서 고개를 저었다. 황후는 입을 다물고서 차를 마셨다.


“하지만 어머니. 어머니가 숙모들은 소자가 황제가 되면 모두 아랫사람이 될 거라고 하셨잖아요.”

역시 아이 앞에선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돼. 애들도 다 안다니까.


“아주 좋은 교육을 시키고 계십니다, 형수님.”

7황자가 낄낄 웃으면서 불난 집에 부채질을 했다.

1황자비는 그를 무시하고 일어나더니 안 되겠다 싶더니 황제에게 허리를 숙이며 사죄했다.


“폐하. 아이가 철없어 허튼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송구합니다.”

“어머니. 소자가 뭘 잘못한 건가요?”

황제는 말없이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아무리 봐도 집어 던지고 싶은데 상대가 며느리라 최대한 참는 기색이었다.

그러다 1황자가 슬그머니 일어나서 “아바마마.” 하는 순간. 황제는 1황자에게 찻잔을 확 집어 던졌다.

그걸 본 제자가 “성질머리하고는.”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같이 석고대죄하고 싶지 않으면 입 다무세요 전하…….”

내가 귀에 대고 속삭이자 제자는 코웃음을 치며 입을 다물긴 했다. 그러고는 내 입술이 가까워졌던 귀를 괜히 막 문질렀다. 닿지도 않았는데 더럽다 이건가.

그 사이 1황자는 찻물에 흠뻑 젖은 옷을 닦지도 않고 중앙으로 나와 무릎을 꿇었다.


“아바마마. 오해십니다.”

“오해? 무슨 오해. 네 처가 아들 머리에 헛바람을 집어 넣어준 게 오해라?”

“헛바람이라니요. 아바마마, 충후 공주는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1황자가 절절한 목소리로 외쳤으나 황제는 감흥 받지 못한 듯했다.


“그래? 그럼 둘 중 하나겠구나. 네 아이가 거짓말을 하거나 네가 거짓말을 하거나.”

“어느 쪽도 아닙니다. 아이가 뭔가, 뭔가 오해를 한 듯합니다.”

1황자가 계속해서 아내를 감싸려 하자, 황제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덜덜 떨고 있는 아이를 보며 말했다.


“그러면 네 아이가 천성적으로 희대의 불효자인가 보구나.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데서 제 부모 얼굴에 먹칠하다니.”

1소황자는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자 울음을 터트렸다.

안 되겠다 싶던지 1황자비도 1황자의 옆으로 다가가 같이 무릎을 꿇었다.


“폐하. 운이에게 화내지 말아 주세요. 모두 다 신첩이 아이를 잘못 교육한 탓입니다. 아이가 성현의 말씀을 골고루 공부하다 보니 헷갈린 모양입니다.”

“그래. 아이가 뭘 알고 저런 말을 했겠느냐. 모두 다 제 부모가 헛바람을 넣으니 그대로 아는 거겠지.”

“부황. 오해십니다!”

“운이는 어린아이입니다, 폐하. 아이의 말실수를 부디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 주세요.”

꾸중을 듣는 건 1황자비 가족이었으나 다른 이들도 숨죽이고 있긴 매한가지였다. 몇몇이 입가를 가리고 있는 게 좀 의심스럽지만.


“아이를 탓할 필요는 없다. 짐도 알아.”

황제가 책상을 두드리자 쾅 소리가 났다.


“너희 부부가 아이 머릿속에 무도한 생각을 집어넣은 거지!”

송 태감이 황제의 팔꿈치에 맞아 떨어진 그릇을 얼른 주워 치웠다.

이를 보던 황후가 황제의 팔에 살짝 손을 올리며 말했다.


“폐하. 1황자비가 아이를 기르다가는 큰일 나겠습니다. 건장한 황자황녀들이 이리 가득하고 폐하께서 누구를 후계자로 삼을지 정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제 아들에게 저런 말을 하고 있다니요.”

말리는 줄 알았는데. 부추기려는 거였구나.

황제는 짜증 난단 표정으로 술을 한 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아이를 망치기 전에 다른 후궁에게 양육하게 해야겠습니다. 아직 어리니 잘 교육받으면 저런 헛된 마음을 뿌리 뽑을 수 있을 겁니다.”

황후가 살살 부채질을 더하자, 1황자비는 눈이 커다래져서 황후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빈 술잔을 내리며 물었다.


“황후가 운이를 기르고 싶소?”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겠단 투였으나 황후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신첩은 황녀 넷을 가르치기도 바쁜걸요. 게다가 9황녀와 15황녀도 워낙 말썽쟁이여야지요.”

“그렇지. 그러면 누가 기르면 좋겠소?”

1황자비는 바닥을 짚은 팔을 후들후들 떨었지만 끼어들지 못하고 황제 부부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소황자의 유모가 끅끅 우는 아이의 어깨를 계속해서 토닥였다.


“신첩이 보기엔…….”

황후는 말을 끌면서 후궁들을 한 번 주륵 훑어보고, 다음으로 현직 예비 황자비들까지 살핀 뒤 말을 이었다.


“아이가 아예 없는 후궁은 양육에 익숙하지 않지요. 자기 아이라면 실수를 거쳐 가면서 기르면 되겠지만 귀한 소황자를 바로 맡기기엔 걱정됩니다.”

황후는 어쩌면 저렇게 헛소리를 잘할까. 1소황자 입장에선 아이가 아예 없는 후궁 밑으로 가는 게 훨씬 낫지. 그 후궁들은 소황자를 맡게 되면 제 아이처럼 금이야 옥이야 기를걸.

황후는 좀 더 고심하는 척하다가 말했다.


“원비가 좋겠습니다, 폐하. 원비는 남아를 길러 보았고, 7황자는 장성하여서 손 갈 일도 없지 않습니까. 원비도 적적하겠지요.”

황제는 황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 원비.”

“네, 폐하.”

“앞으로 1소황자는 네가 기르거라.”

원비는 그리 기쁘지도 짜증 나지도 않는 표정으로 순순히 대답했다.


“예.”

“폐하! 어미인 제가 곁에 있고 건강한데 원비마마께 운이를 양육하라니요!”

1황자비가 커다란 목소리로 반발했으나, 1황자가 1황자비의 팔을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1황자비는 1황자를 뿌리치고 황제를 똑바로 쳐다보며 외쳤다.


“운이는 제 아들입니다! 교육에 문제가 있으면 스승을 바꾸면 될 일입니다, 폐하!”

“아무리 좋은 스승을 붙여봐야 부모가 헛된 꿈을 불어넣으면 소용없다. 앞으로 아이는 원비가 양육해라.”

어림없었지만.


“폐하! 아픈 아이를 데리고 먼 모국에 돌아간 것도, 저 아이를 치료하느라 매일같이 밤잠을 지새운 것도 저입니다! 가까스로 아이를 치료해 돌아왔는데 얼마나 지났다고 아이를 뺏으려 하십니까!”

1황자비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녀와 척을 진 내가 보기에도 가엾은 모습이었으나 황제는 살벌하게 선을 그었다.


“시끄럽다.”

황제는 1황자비를 달래줄 마음이나 기약 없는 약조조차 해주고 싶지 않은 듯했다.

1황자는 눈물을 흘리면서 1황자비의 팔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너희가 열째 생일을 망치는구나. 1황자. 아내를 데리고 돌아가라. 다른 사람들까지 밥맛이 사라진다.”

황제는 화내기도 지치는지 축객령까지 내려버렸다.

그러나 일이 마무리될 듯하자 이번에는 1소황자가 중앙으로 뛰쳐나오더니 울면서 1황자비 옆에서 외쳤다.


“할아버지. 어머니와 아버지를 용서해 주세요. 소자는 어머니 옆에 있고 싶습니다.”

황제는 대꾸하지 않고 아이를 데려가라고 손을 내저었다.

송 태감이 얼른 1소황자 곁으로 다가가 아이를 돌려세우며 말했다.


“소황자님. 돌아가시지요. 원비마마는 좋은 분이십니다.”

“싫어! 난 어머니가 좋다! 원비는 싫어!”

“원비마마 곁에서 열심히 공부하면 폐하께서도 진노를 푸실 겁니다. 게다가 거처가 살짝 멀어질 뿐 근처에서 지내지 않습니까. 몇 발자국만 걸으면 언제든 어머니를 보러 갈 수 있답니다.”

송 태감은 능숙하게 아이를 달래서 데리고 나갔다.


“운아…… 운아!”

1황자비는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으나 잡지 못했다. 1황자는 아내를 부축해 일으키고서 연회장 밖으로 나갔다.

나는 다시 제자를 보았다. 모두가 숨죽인 와중에 제자는 여전히 혼자 심드렁했다.


‘역시 쟤가 의심스럽단 말이지.’

게다가…… 착잡해진다. 회귀 전과 과정도 사건도 달랐지만 결국 돌고 돌아 1소황자는 원비가 양육하게 되는구나.

나도 제자의 손에 죽지 않기 위해, 제자가 조금이라도 내게 호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 중이다. 가끔은 노력이 효과를 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또 같은 결과를 내면 어쩌지? 제자가…… 회귀를 몇 번이나 거듭하면서도 계속 내게 독살당했다고 털어놓은 것처럼?


“스승님.”

“네?”

“다른 데 시선 돌리지 말고.”

“!”

“제 옆에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스승님껜 아무 일 없을 겁니다.”

 

* * *

생일잔치가 어색한 분위기에서 파하고 다들 돌아가기 시작할 때였다. 나도 나가려고 일어나서 엉거주춤하게 몸을 움직이고 있는데, 사람들 사이로 3황자가 보였다.


‘전하…… 혼자 정혼녀가 없으시구나.’

다른 황자황녀들은 모두 끼리끼리 쌍으로 있는데. 3황자만 혼자였다.

다른 황자황녀들은 자기들 정혼 상대와 대화를 나누며 걸어 나가는데, 혼자 우두커니 나가는 3황자는 유독 쓸쓸해 보였다.

3황자는 원래 연회에 잘 나오지 않는데. 오늘은 동복 누이동생이라 참여했나 보다.

그러다 3황자가 이쪽을 보면서 나와 눈이 마주쳤다. 3황자는 웃으면서 미소를 건넸으나, 나는 제자 눈치가 보여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렇지만 역시 신경 쓰여서 다시 고개를 들려 했으나, 제자가 팔을 올리더니 내 눈앞을 자기 소매로 가려버렸다.


“전하? 왜 그러세요?”

올려다보며 묻자 제자는 허리를 굽히더니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스승님. 절 연모하고 계셔야지요. 셋째 형님을 쳐다보면 제자가 오해합니다.”

“안 쳐다봤어요.”

힘없이 반박하자 제자가 코웃음 치며 허리를 펴더니 소매도 내렸다. 발 한 번 밟고 싶네. 그러면 죽겠지?

그런데 투덕거리면서 막 문밖으로 나가려 할 때였다.


“요 대인. 요 대인.”

송 태감이 다가오더니 내게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폐하께서 잠시 부르십니다.”

아…… 또 왜. 불만이 치솟았으나 나는 표정을 관리하고서 제자에게 말했다.


“전하. 저는 따로 가겠습니다.”

그러고서 송 태감을 따라서 안쪽으로 들어가자, 황후가 나를 스쳐 지나가면서 묘한 미소를 흘렸다.

황제는 상석에 혼자 그대로 앉아 있다가 나를 보자 손짓했다.


“와보라 이국사. 짐이 물어볼 게 있다.”

그 말대로 몇 걸음 더 다가갈 때였다. 뒤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부황. 스승님을 자꾸 따로 부르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자 목소리! 뒤를 돌아보자 진짜 제자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