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황가는 바람 잘 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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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황가는 바람 잘 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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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황가는 바람 잘 날이 없다
2023.05.25.
미신이라 생각하면서도 말하기 찝찝한 것들이 있다. 하늘에 대고 맹세한다거나 자신의 가족을 걸고 맹세한다거나 그런 것들 말이다.
나도 그렇다. 한 번 회귀해서인지 몰라도 더 그렇다. 저런 맹세는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손을 모아 쥐고서 다른 정혼녀들을 살폈다. 다들 비슷비슷한 생각인지 입을 다물고 곁눈질하느라 바빴다.
“왜 다들 말이 없지?”
침묵이 길어지자 1황자비가 얼굴은 웃는데 목소리만 날카로워졌다. 1소황자는 제 어머니의 배를 끌어안고서 우리를 기웃거렸다.
“그런 말은 입 밖에 내기 좀 그렇잖아요, 전하.”
6황자 정혼녀가 웃으면서 슬쩍 조르는 투로 반박했다. 다른 정혼녀들도 살짝씩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무리 진실이라 해도 하늘이나 가족을 걸고 쉽게 맹세할 순 없지요.”
2황자비도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1황자가 똥멍청이이니 2황자비도 황태자비가 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그런 와중에 굳이 저주 같은 말을 스스로 입 밖에 내고 싶진 않겠지.
“아무도 말하지 못하는군.”
웃고 있던 1황자비의 표정이 점점 가라앉았다. 그래도 모두가 침묵하자 1황자비가 옆 탁자를 내리쳤다. 쾅 소리가 나자 소황자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전하. 소황자님을 데려갈까요?”
소황자를 데려온 여자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1황자비는 고개를 젓더니, 나와 정혼녀들을 둘러보며 호통쳤다.
“내가 각서를 쓰라고 했나 서약서를 쓰라고 했나. 그냥 아이가 호되게 앓았으니 마음이 편해지게 말 한마디 해달라 하지 않았나. 그런데 그것조차 못 해준다니!”
본인도 그런 말을 찝찝해할 거면서. 남한텐 잘 시키네.
“혹시 다들 다른 생각이라도 품고 있는 게 아닌가? 자네들, 겉으로는 얌전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자기 아이들이 우리 소황자를 누를 역심을 품고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냐 말이네!”
“역심이라니요.”
1황자비가 역심 소리를 뱉자 2황자비가 질색한 표정으로 반박했다.
“형님. 말씀을 조심하세요. 소황자는 아직 소황자일 뿐인데 역심이란 단어를 쓰면 안 됩니다.”
“이 아이는 폐하의 하나뿐인 손주이고 장손의 장손이네, 동서. 자네들은 지금은 운이의 숙모 신분이지만 나중엔 운이의 아랫사람이 될 이들이지. 그런데 고작 마음이 편해질 말조차 못 한다니.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잘 안 되는군!”
1황자비가 으름장을 놓자 정혼녀들이 다시 서로를 살폈다. 하지만 그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차례대로 말하게.”
그러자 1황자비는 내 쪽을 쳐다보며 지시했다.
“윗사람부터 말하기 곤란한 모양이니 요 이국사. 자네가 먼저 말하게. 자네가 가장 막내 황자의 정혼녀 아닌가.”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1소황자 역시도 자기 어머니에게 안긴 채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이이니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지는 못하겠지만, 지금 벌어지는 일들이 자신과 관련 있다는 정도는 이해하는 듯했다.
‘젠장. 어쩌지?’
눈 딱 감고 해야 한다면 할 수도 있지만…… 비현실적인 일을 실제로 겪었기 때문일까. 하늘에 대고 그런 불길한 맹세는 하고 싶지 않은데.
“이국사?”
주저하는 나를 1황자비가 재촉하듯 다시 불렀다.
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아이는 부모나 조부모를 닮기 마련이지요, 전하.”
“무슨 딴소린가.”
“그런데 폐하의 손주들이 타고날 자질보다 떨어지게 태어나길 하늘에 바라는 건 폐하의 우수한 기질을 물려받지 말길 맹세하는 게 아닙니까. 이는 폐하께 너무 불경한 일 같아 감히 입에 담기 두렵습니다.”
내 선에서 해결이 안 될 거 같으면 일단 황제 핑계를 대는 게 최고다.
1황자비의 요구를 황제에 대한 불경으로 돌려 버리고서 걱정하는 표정을 짓자 1황자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자네가 말장난을 하는군. 내가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는 건 자네도 알 텐데. 왜 폐하를 끌어들이지?”
“소신은 아직 황자비가 아니라 폐하의 신하입니다, 전하. 형님에 대한 예의도 중요하지만 폐하께 불충하고 싶지 않습니다. 소신이 너무 겁이 많아서요. 송구합니다.”
황제 방패 2탄을 내세우고서 고개를 숙이자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 얼음비가 우수수 떨어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제자에게 수업하면서 저런 시선쯤은 거의 이삼일에 한 번꼴로 맞고 있었다.
묵묵히 차가운 시선을 감내하기를 반 각가량.
“그래.”
마침내 1황자비가 꽉꽉 눌러 담은 살얼음 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동서가 내 요구를 불충이라고 우겨대면 더 요구하긴 힘들지. 하지만 섭섭하군. 나는 일전 소황자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도 폐하께 동서는 절대로 이 일과 연루되지 않았다고 감쌌거든.”
그야 내가 소황자를 만나지도 못한 걸 모든 사람이 다 봤으니까. 거기서 날 물고 늘어져 봐야 누가 믿겠어. 당연한 거로 왜 생색이지.
“난 동서에게 정을 보였는데. 동서는 내 마음을 거부하는군. 나는 관대한 사람이 아니라 섭섭한 마음이 오래 갈지도 모르겠네.”
“그렇군요. 전하께선 관대하지 않으시군요.”
1황자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스스로도 자기가 관대하지 않다면서. 남이 그런 말을 하면 싫은가 보다.
“이국사. 지금 날 모욕하는 건가?”
“그럴 리가요. 소신은 전하께서 관대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일쯤은 충분히 제 입장을 보아 넘길 수 있을 만큼 관대하시지요. 하지만 전하께서 스스로를 겸양하시니 저도 어쩔 수 없이 따라 말한 것뿐인걸요.”
“!”
* * *
“세 치 혀를 그따위로 놀리다니! 참으로 고약한 것입니다!”
동서들에게 위아래를 가르쳐주겠다던 1황자비가 울먹이며 뛰어 들어오자 1황자는 깜짝 놀랐다.
“괜찮습니까?”
1황자는 1황자비의 낯선 모습을 힐긋거리며 물었다.
“괜찮아 보이나요?!”
“아니…… 평소엔 잘 이러지 않으니까요.”
1황자비는 이를 갈며 그를 흘겨보다가 의자에 앉아 얼굴을 손에 파묻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1황자는 아내가 대답하기 힘들어 보이자 1황자비의 측근 궁녀에게 물었다.
“요요화가 말장난을 하고 말꼬리를 붙잡아서 전하를 모욕하였습니다.”
측근 궁녀가 얼른 대답하자 1황자는 주먹을 꽉 쥐었다.
“참으로 괘씸하군.”
“말단 관직에 있으면서도 그렇게 거만하니 혹시 관직이 오르기라도 하면 우리를 얼마나 더 괄시할지 두렵습니다!”
“요요화는 이국사 이상 관직에 오르지 못할 겁니다. 그럴 일은 없어요.”
“지금 요요화의 동생이 폐하께 가장 총애받고 있어요. 폐하께서 요요화에게까지 총애를 베풀 정도예요. 요요화가 관직이 오르지 않더라도 이러다 무사히 13황자와 혼인하고 아이를 낳으면요? 폐하께서 그 아이를 예뻐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어요!”
1황자비가 참담한 목소리로 외치자 궁녀들은 슬픈 표정을 지었다.
너무 앞서 생각하는 게 아닌가. 1황자는 그렇게 여기면서도 우선 아내에게 겉옷을 벗어 덮어주었다.
“자. 고정해요.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요씨 자매가 중병에 걸려 내일 죽는단 소식이 아니라면 필요 없어요.”
“조사해보니 한때 요 귀인이 난씨 가문 균이란 청년과 혼담이 오갔다 하더군요. 제대로 오가기 전에 파투가 났지만요.”
1황자는 그래도 슬픈 표정이었다.
“이미 끝장난 혼담이 뭐 어쨌다고요.”
“그거야 모르지요. 듣자 하니 난균이란 청년은 자태가 헌앙하고 영리해서 딸을 둔 집안에서 사윗감으로 많이들 노린다고 합니다. 그 청년을 부른 다음 요 귀인과 마주치게 해보지요. 그러면 두 사람이 혼담이 파투나서 슬퍼하고 있는지 아니면 서로에 대해 잘 모르는지 답이 나올 겁니다.”
* * *
“……라고 했습니다.”
운귀는 1황자 부부가 나눈 이야기를 그대로 13황자에게 전하고서 물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전하? 나서실 겁니까?”
13황자는 턱을 괴고서 붓을 제멋대로 움직였다. 운귀가 보기엔 꼭 낙서하는 듯했다. 하지만 대답이 없으니 운귀는 13황자를 계속 지켜보아야 했다.
“전하?”
반 각 정도를 기다린 운귀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13황자는 손을 내리면서 중얼거렸다.
“요 귀인은 이번 삶에서 예측하지 못한 사람이지.”
“예?”
운귀는 13황자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13황자도 알아듣길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13황자는 미끄러지는 듯한 글씨체로 ‘박쥐 부모’와 ‘박쥐 동생’을 적었다.
1황자가 웬일로 제대로 된 계략을 꾸몄다. 1황자가 하는 짓이니 계획이 힘을 얻지 못하고 그대로 꺼질 가능성이 컸지만…… 그래도 운이 좋아 일이 잘된다면 1황자는 요씨 가문과 요린화를 한 번에 쳐낼 수 있었다.
가족들이 한 번에 사라진다면 스승은 혼자가 된다. 13황자가 바라는 바였다.
문제는 지금 요씨 가문과 요린화를 묶어서 쳐냈다가는 아직 그곳 소가주 신분인 스승마저 연루되리라는 점이었다.
“전하?”
기다리다 못한 운귀가 시간을 확인하며 재차 13황자를 불렀다.
“소인은 빨리 6황자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마침내 13황자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지.”
* * *
자식이 많으면 생일도 그만큼 많단 뜻이다. 제자는 끄트머리 황자인 데다가 친모도 없고 후원자도 없기에, 그의 생일은 다들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10황녀의 생일은 전혀 달랐다.
10황녀의 생일날, 태감은 월무궁에서 수업 중인 나와 제자를 찾아와 밝은 목소리로 알렸다.
“연비마마께서 10황녀 전하의 생일을 위해 따로 자리를 마련하셨답니다. 가족들끼리 모이는 자리이니 13황자 전하와 요 이국사도 함께 오시지요.”
태감은 우리가 당연히 올 거라고 여기는 듯 웃으면서 나와 제자를 번갈아 보거니 돌아서서 가버렸다.
‘아이고.’
나는 슬쩍 제자의 눈치를 살폈다. 기분 상했으려나?
다행히 제자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하도 여러 번 회귀를 반복하다 보니 이런 일쯤은 아무렇지 않나 보다.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게 굴 수 없었다.
“어쩌지요 전하? 오늘이 10황녀 전하 생일인 건 알았지만 절 부를 거란 생각은 못 해서요. 선물을 준비하지 않았는데요.”
회귀 전엔 실제로도 날 부르지 않았다. 난 13황자의 스승이지 정혼녀가 아니었으니까.
“괜찮습니다. 제자가 준비했으니 스승님까지 준비하진 않아도 됩니다.”
“아직 우리가 혼인한 사이가 아닌데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그래도 신경 쓰이신다면 부황이 스승님께 하사한 물건을 하나 골라 선물로 드리시지요.”
뭘 하든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니까.
“그러려면 다시 집에 가야 하잖아요.”
좀 티격태격하긴 했지만 어쨌든 나는 곁방으로 들어가 제자가 준 옷으로 갈아입은 뒤 10황녀의 처소로 갔다.
최근 1황자비에게 불려 다니면서 얼굴을 익힌 몇몇 정혼녀들이 내게 아는 척을 해왔다.
“요 이국사! 이리 보니 좋네요.”
특히 6황자 정혼녀는 일전에 1황자비의 맹세 요구를 내 선에서 끊어서 그런가. 유난히 반가워하는 태도로 다가와 팔짱을 끼려고까지 했다.
6황자 정혼녀가 내 팔을 잡기 전에 제자가 교묘하게 내 어깨에 팔을 둘러 차단해 버렸지만.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하지만 6황자 정혼녀는 그 와중에도 꿋꿋하게 내 팔을 잡았다. 역시 6황자 정혼녀는 조금 눈치가 없어.
다행히 연회장 안 분위기는 밝은 편이었다. 태월 사절 때와 달리 다들 춤을 보고 노래를 들으며 친한 이들과 즐겁게 떠들기만 했다.
중간에 황제가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말 없는 눈치 싸움이 후궁과 황손들 사이에서 가끔 돌기도 했지만 무난한 수준이었다.
“형수님. 운이는 나이가 어리니 슬슬 재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운이에겐 낯선 사람들뿐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갑자기 제자가 1소황자 이야기를 꺼내자,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나만 혼자 심장이 조여들었다.
뭐야. 왜 갑자기 저런 말을 해? 자기 형제자매들을 내치는 제자가 난데없이 조카한테 애정이 생겨서 저러진 않을 텐데?
“괜찮습니다. 아직 눈이 말똥말똥한걸요. 피로해할 때 데려가면 돼요.”
1황자비는 미소 지으면서 1소황자에게 “그렇지?” 하고 물었다.
1소황자가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자 제자는 덩달아 웃으면서 말했다.
“하긴. 숙모와 예비 숙모들을 몇 번 보았으니 아주 낯설진 않겠군요.”
“맞아요!”
1소황자가 씩씩하게 대답하자 주위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제자는 더 말을 걸지 않고 자기 찻잔을 집었다.
다행히 이대로 넘어가는구나. 안도하려는데, 이번에는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래. 운이가 숙모들을 몇 번 만났지. 운아, 숙모 중 누구와 가장 친해졌느냐?”
그 말에 6황자의 정혼녀가 자기를 지목해 달라고 손을 흔들었고, 그걸 본 사람들이 다시 웃어댔다.
1소황자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나와 예비 숙모들을 번갈아 보더니 자랑스럽게 말했다.
“아직 가장 친한 사람은 없어요. 하지만 모두 소자의 아랫사람이 될 사람들이니까 골고루 친해질 거예요.”
아이의 말에 연회장이 찬물을 들이부은 것처럼 싸늘해졌다. 다들 숨을 들이쉬고서 황제를 보았다.
나만이 제자를 쳐다보았다. 제자는 무표정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제자랑…… 관련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