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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시끄러운 건 질색이라 (125/159)


125화. 시끄러운 건 질색이라
2023.05.11.



 
저녁 식사 준비가 한창이라 집 안 곳곳에서 밥 짓는 냄새가 나고 있었다. 나는 집 안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 간섭하다가 어머니에게 불려갔다.


“요화야.”

“네, 어머니.”

무슨 일인가 했더니, 어머니는 슬쩍 외진 곳으로 날 불러 말했다.


“아버지한테 네 숙부들은 대체 언제 돌아갈 건지 한번 물어볼래?”

소가주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온 숙부 가족들이 돌아가지 않고 계속 머무르자 어머니가 영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그럴게요.”

나는 거처가 머니 마주칠 일이 없지만 아무래도 어머니는 집안을 꾸려나가야 하니 최소한 숙모들과는 계속 마주치겠지. 불편할 만도 하다.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이 빨리 해결돼야 할 텐데. 제대로 해결하지도 못하고 벌써 여덟 달 가까이 흘렀구나.”

솔직히 해결될 일이 있나 싶다. 아버지와 숙부들이 아무리 머리를 맞대 본들 무슨 소용일까. 소가주 자리를 노리는 이들이 언젠가 찾아오면 나는 밀려날 수밖에 없는데.


“그 사람들은 아직 움직임이 없나요?”

“그 사람들?”

“종증조할아버지 식구들이랑 5촌 당숙들이랑 아버지 서출 종형제들이요.”

어머니는 손을 내저었다. 생각하기도 골머리가 아픈 듯했다.


“마님, 소가주님!”

그때 하인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소가주님의 친구라 하시는데요.”

어머니가 나를 보았다.


“약속이 있니?”

“아뇨. 약속은 없는데요.”

선안이라면 하인들이 선안이라 했을 거고. 왜 꼭 제자 같지?


“일단 가볼게요.”

나는 ‘설마 설마’ 하면서 대문으로 걸어갔고 내 예감에 박수를 보냈다. 역시나. 대문가에 서 있는 건 제자였다.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자태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다. 실제로 지나다니는 하녀와 하인들 모두 그를 힐긋대고 있었다.

내가 종종걸음으로 다가가자 제자는 삿갓을 살짝 위로 올리고서 물었다.


“잠시 시간 되십니까.”

“왜 오신 거예요?”

“시간 되시는지요.”

“전하의 답에 따라 다를 거 같은데요…….”

“되나 보군요. 잠시 함께 가시지요.”

“어디로요?!”

펄쩍 뛰다가 보니 먼발치에서 어머니가 보인다. 걱정이 되는지 들어가지 않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제자가 문가를 톡톡 두드렸다.


“스승님.”

다시 제자를 보자, 제자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자와 어디 좀 같이 가주시지요.”

“어디로요……?”

“제자가 혼자 가기 어려운 곳입니다.”

“그게 어딘데요?”

제자는 말하지 않고 나가버렸다. 내 의사를 존중해주는 시늉은 끝났나 보다.

나쁜 놈!

* * *



“전하! 전하!”

늦은 새벽. 문 너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몇 해 만에 만나 꼭 붙어 자던 부부는 다급히 침상에서 일어났다. 1황자비는 이불을 안고 돌아앉았다.


“무슨 일이냐.”

오랜만에 숙면하던 1황자는 짜증이 나서 문을 열었다. 태감이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


“소황자님이 열이 떨어지질 않습니다!”

태감의 외침에 1황자비가 이불을 안고 뛰쳐나왔다.


“뭐라고?!”

다급히 겉옷만 걸친 황자 부부는 아이방으로 달려갔다.

유모들이 침상 근처에 서 있었다.


“마마, 소황자님이…….”

1황자비는 달려가서 가장 가까이 있는 유모의 뺨을 내리쳤다.

철썩 소리가 나며 유모가 쓰러지자 다른 유모와 궁녀들이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아이를 어찌 보는 게야!”

1황자비는 찢어지는 호통을 치고서 아이를 살폈다.


“어머니…… 어머니…….”

아이가 눈을 뜨지 못하고서 손을 휘젓고 있었다.


“어미 여기 있다. 운아. 어미 여기 있어.”

1황자비가 아이의 손을 잡았다.


“어의는?”

1황자가 묻자 무릎 꿇은 유모 하나가 대답했다.


“태감이 어의를 부르러 갔으니 곧 올 겁니다, 전하.”

그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리며 어의가 들어왔다. 뛰어온 듯 숨을 헐떡이던 어의는 누가 환자인지 대번에 눈치채고 침상으로 갔다.


“상태가 어떻습니까?”

뺨을 맞았던 유모가 침상 끝을 잡고 비틀비틀 일어나며 대답했다.


“축시 말경부터 계속 자다 깨서 목마르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다 잘 주무시기에 이제 괜찮으신 줄 알았는데, 보니 식은땀이 흥건하셨지요. 그땐 이미 열이 심했습니다.”

“아이가 이 지경이 되도록 몰랐다고!”

1황자가 호통치자 맞은 유모도 다급히 무릎을 꿇었다.


“빨리 아이를 보게. 빨리!”

1황자비가 재촉하자 어의는 서둘러 진찰 가방을 열었다. 어의가 아이를 진맥하는 내내 방 안에는 숨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1황자비는 1황자의 어깨에 기대어서 혹시라도 아들의 병이 재발한 게 아닐까 공포에 질렸다.


“어떤가?”

어의가 아이의 손목에서 손을 떼자 1황자비가 다급히 물었다.


“병인가? 가벼운 고뿔이지?”

어의는 새파래진 낯빛으로 황자 부부를 번갈아 보다가 가까스로 말했다.


“전하. 독…… 같습니다.”

 

* * *



“그게 무슨 소리냐! 독이라니!”

소식을 듣고 온 황제가 방 안에 들어서기도 전부터 외쳤다.


“폐하. 폐하. 우리 운이가 독을 먹었답니다!”

1황자비는 울면서 황제에게 다가갔다. 1황자가 황자비를 잡고 살짝 끌었다.


“고하라.”

황제가 지시하자 궁의가 참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닙니다. 아주 적게 드셨거나 아니면 희석된 상태에서 드신 듯합니다.”

“완쾌할 수 있단 게냐.”

“그건 지켜봐야 압니다, 폐하.”

“완치시켜라. 반드시.”

황제의 싸늘한 지시에 소식을 듣고 모인 모든 어의들이 동시에 허리를 굽혔다.


“아이를 어떻게 보는 게냐!”

황제의 뒤를 이어 나타난 황후가 1황자비에게 호통쳤다.


“유모들이 제대로 아이를 보지 못한 모양입니다. 아이 증세가 축시 말에 나타났는데도 물만 주고 있었답니다!”

1황자비가 흐느끼자 유모들이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덜덜 떨었다.

1황자비는 유모들을 증오스러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황후는 한심하다는 듯 황자비를 쏘아보다가 물었다.


“아이가 어디서 독을 먹었는지는 아느냐.”

“모릅니다, 마마.”

“네 아이 일인데 아는 게 하나도 없구나!”

황후의 꾸짖는 목소리에 1황자비는 억울해졌다. 아이를 본 건 유모들인데 황후가 왜 자신을 질책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이가 먹은 음식들을 조사해봐라.”

황제가 지시하자 태감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황제는 뒷짐을 지고서 자신의 첫 손자가 가냘픈 송아지처럼 끙끙거리는 모습을 눈썹을 찌푸리고 내려다보았다.

어의들이 계속 아이를 살폈으나 아이는 조금도 차도가 없어 보였다.

체감상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송 태감이 돌아와 말했다.


“폐하. 잔반을 확인하고 재료를 모두 확인했사오나 부엌에선 독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부엌에 있는 식재료와 음식을 사용한 게 언제이지?”

“오늘, 아, 어제입니다.”

주방을 맡은 궁녀가 겁먹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어제 먹은 음식 중엔 문제 될 게 없단 거로군. 그럼 그제는?”

“그제 사용한 식재료와 잔반은 모두 버려서 남아 있지 않습니다, 폐하. 하지만 폐하. 부엌에서 올리는 음식은 모두 소황자님이 드시기 전에 유모들이 미리 기미를 합니다. 주방에서도 자체적으로 기미를 하고요.”

궁녀의 목소리는 공포로 계속 갈라졌다.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황후가 나섰다.


“그럼 다녀간 손님은 없느냐.”

1황자비가 손수건을 꺼내며 중얼거렸다.


“제가 돌아온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손님이 왔겠습니까. 여기 온 손님이라고는 이틀 전에…….”

말을 하던 1황자비의 목소리가 점점 느려졌다. 1황자비는 눈가를 닦던 손수건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서 말을 맺었다.


“동서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순식간에 그 동서들에 대한 의심이 가득해졌다.


“전부 불러와라. 자고 있으면 깨워서라도 데려와라.”

황제가 지시하자 송 태감이 얼른 밖으로 나갔다.

궁궐에서 지내는 2황자비가 2황자와 가장 먼저 도착했다.

그다음으로 집이 가까운 순서로 황자의 정혼녀들이 하나둘 겁에 질려 도착했다.

영문 모르고 온 정혼녀들은 사태를 파악하자 공포에 질려서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어댔다.

황제의 하나뿐인 손자를 독살한 일과 조금이라도 연루된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정도로 중벌을 받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모든 정혼녀들과 달리 딱 한 사람만 오지 않았다. 요요화였다.

1황자비가 그 사람에 관해 묻기 전 송 태감이 먼저 황제에게 보고했다.


“폐하. 이국사는 볼일이 있어 어제 출타하고 집에 없답니다.”

두려워하던 2황자비가 바로 물었다.


“찔리는 게 있어 달아난 게 아닐까요?”

“폐하. 요요화는 안 불러도 될 겁니다.”

하지만 1황자비가 바로 끼어들었다.


“이국사가 여기 있을 땐 운이가 자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13황자가 이국사를 데리러 와서 가장 먼저 떠났지요. 이후 마침 운이가 깨어났다고 해서 운이를 불러와 다 같이 보았습니다. 이국사는 확실하게 범인이 아닙니다.”

1황자비는 요요화를 딱히 좋아하진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자기 아들을 해코지한 범인을 찾는 게 중요했다.

요요화는 범인이 확실히 아니니 아예 이 자리에 없는 게 용의자들을 추궁하기 나았다.

13황자가 비가 온다고 자기 정혼녀를 데리러 오더니. 그 덕에 요요화는 아예 이런 오해에서도 풀려나는구나. 정혼녀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자신들의 정혼자를 속으로 욕했다.

* * *

갑자기 따라 나오라고 하더니. 제자가 날 데려간 곳은 근처 호숫가였다.

제자는 뱃사공을 불러서 돈을 두 배로 준 다음 아예 반나절 동안 배를 빌려버렸다. 그러고는 먹을거리까지 사 왔고.

우리는 덕택에 두 시진 째 배 위에서 음식을 먹고 있었다.


 


“여긴 왜 온 거예요?”

식은 만두를 세 개째 먹다가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나는 제자가 이렇게까지 나오길래 뭐 아주 중요한 할 말이라도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제자는 배에 몸을 기대고서 호숫물에 손을 넣고 물장난이나 치며 대답했다.


“제자는 시끄러운 건 딱 질색입니다.”

“…….”

시끄러우니 닥치고 만두나 먹으란 건가.


“수영 잘하시는지요 스승님?”

시끄럽게 굴면 호수 가운데에서 밀어버린단 건가. 문득 그의 말에 긴장돼서 나는 얼른 배 끄트머리로 이동했다.

그러고서 깨달았는데, 제자는 이미 저만치 끄트머리에 앉아 있었다. 나와 뚝 떨어져서.

설마 내가 자기 떠밀까 봐 저기로 가 있는 건 아니겠지.


“그건 왜 물어보세요?”

“스승님이 심심하신 듯해 물었습니다.”

“여기서 저 혼자 수영하라고요?”

“가능하신지요?”

“전하는 가능하세요?”

제자가 물장난을 멈추고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픽 웃고서 단호하게 말했다.


“가능합니다.”

“그런데 진짜로 여긴 대체 왜 온 거예요?”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제자는 시끄러운 게 싫습니다.”

진짜 이해할 수가 없네. 하지만 제자가 아무 생각 없이 이런 행동을 할 인물은 아닌데. 뭘까. 이건 제자가 판 함정인가.

모르겠다. 일단 만두나 먹자.

그렇게 몇 시진을 더 호수 위에서 떠돈 후에야 나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살펴 들어가시지요.”

제자는 나를 집 앞에 바래다주고는 자기는 어디론가 휘적휘적 가버렸다.

그 뒷모습을 보다가 집 안에 들어가자, 뜻밖에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내게 달려왔다.


“어머니? 아버지?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어요?”

놀라서 묻자 아버지가 우리만 들을 수 있도록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궁궐에서 난리가 났다.”

“난리가 나다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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