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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스승 체면 세워주기 (124/159)


124화. 스승 체면 세워주기
2023.05.08.



 
큰일이다. 제일 멍청한 황자의 아내 옆에서 아이는 아버지 머리 닮는다고 말해 버리다니.

나는 후들후들 떨리는 손을 감추려 얼른 찻잔을 양손으로 감쌌다. 찻잔 안을 바라보는데도 1황자비의 흉흉한 시선이 느껴졌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제가 제 아버지보다 과거 시험 성적이 많이 높답니다.”

아버지도 파는 수밖에.


“겸양하느라 남들한테는 말하지 않지만요. 제 할아버지가 아주 영리하셨거든요. 지금 황제 폐하께서는 뛰어난 군주시잖아요. 폐하의 핏줄이니 태어나는 황손들 모두 영민할 거예요. 우리 13황자님 아기도 영민할 기회가 있겠지요.”

아버지도 팔고 제자도 팔고서야 1황자비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 이국사. 요 대인의 영명함은 모두가 알고 있는데.”

다른 정혼녀들도 키득키득 웃는 걸 보니 가까스로 위기는 모면한 모양이다.

나는 너무 안도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 또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면서 2황자비 쪽을 힐긋 보니 그녀의 입꼬리가 삐딱하게 올라가 있었다.

* * *

다행히 이후로는 크게 긴장할 일 없이 차를 마실 수 있었다.

1황자비도 더는 시비 거는 걸 멈추고 자국에서 아들의 풍토병을 어떻게 치료했는지 이야기해주었다.

만약을 대비해서인지 정혼녀들은 물론 2황자비 역시도 신중하게 치료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살얼음 같은 대화를 마치고 전각 밖으로 나가 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 없는데. 우산을 빌려야 하나?’

우산을 가지고 있는 건 궁궐에서 사는 2황자비뿐이었다. 밖에서 대기하던 2황자비의 태감이 비가 오자 바로 자기네 거처로 가서 우산을 가져온 모양이다.

나는 우산을 빌리기 위해 1황자비의 궁녀를 찾았다.


“혹시 우산을 빌릴 수 있겠나?”

다른 사람도 비슷한 생각인지 6황자의 정혼녀가 먼저 궁녀에게 물었다.


“그럼요. 몇 개를 가져올까요?”

거기에 6황자 정혼녀가 대답하기 직전이었다.


“13황자?”

2황자비가 중얼거렸다.

그 소리에 대문가를 보니 뜻밖에도 제자가 우산을 들고 거기 서 있었다.


“전하?”

놀라서 부르자 제자가 바로 이쪽으로 걸어왔다.


“이제 나오십니까.”

다가온 제자는 그렇게 말하더니 우산을 조금 높이 들면서 내 곁으로 다가왔다.


“가시지요. 비가 옵니다.”

다른 황자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심지어 이미 혼인한 2황자도. 그런데 왜 내 제자는 혼자 여기 온 거지?

나는 당황해서 바로 우산 아래로 뛰어가지 못하고 입만 벌렸다.


“안 오실 건지요?”

제자가 입꼬리를 올리며 묻고서야 나는 기우뚱거리며 우산 아래로 들어갔다.


“송구합니다. 전하께서 오실 줄은 몰랐어요.”

“비가 오지 않습니까. 당연히 와야지요.”

‘그러면 안 온 황자들이 뭐가 되지.’


“제가 들게요.”

괜히 우산 손잡이를 잡는 척하며 나는 다른 황자 정혼녀들 쪽을 슥 훑었다. 다들 입을 벌리고 13황자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13황자의 말에 눈살을 찌푸린 건 이미 남편을 바꿀 수 없는 2황자비뿐이었다.


“스승님은 키도 작으면서 우산을 들려 하십니까. 제자가 들겠습니다.”

“그래도 될지…….”

“스승님은 제 팔을 잡으시지요.”

“그것도 좀…….”

“우산이 작아서 꼭 붙어야 비를 안 맞습니다.”

그럼 좀 큰 거로 가져오지.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제자와 티격태격할 수야 없다. 나는 이미 태월 사절 앞에서 공개적으로 제자를 무척 연모한다고 밝히지 않았던가.

나는 제자의 팔을 조심해서 잡고 슬쩍슬쩍 그의 몸으로 붙었다.


“다들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제자는 우산을 들지 않은 팔로 내 어깨를 감싸더니 뒤를 보며 말했다. 나도 정신없이 인사하고서 얼른 제자와 대문 밖으로 나갔다.

전각을 빠져나와 둘이서만 대화원 변두리에 난 길을 걷고 있자니 우산에 비 떨어지는 소리가 괜히 간지럽게 들려왔다.


“다들 부러워하네요.”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민망해서 나는 부러 말을 걸었다.


“부러워하라고 간 겁니다.”

“……너무 솔직하신 거 아니에요?”

“이래야 스승님 체면도 살지요.”

“제 체면 때문에 오신 거예요?”

“사람들 앞에서 절 사모한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 않으셨습니까.”

“누가, 제가, 아니, 저 소리는 안 질렀는데요?”

제자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내 어깨를 자기 쪽으로 좀 더 끌어당겼다.


“자꾸 뒤로 가지 마세요. 어깨에 비가 떨어집니다.”

“그럼 우산을 두 개 가지고 오시면 됐잖아요.”

“비가 오길래 마중하러 갔더니 더 잔소리를 듣는군요.”

“……송구합니다.”

마지못해 사과하자 제자가 혀를 차면서 나를 더 끌어당겼다. 빗줄기가 거세지면서 머리 위에서 투둑 투둑 비 떨어지는 소리도 더 커졌다.

너무 꼭 붙는 바람에 나는 이제 제자의 어깨에 완전히 기대 걷는 거나 다름없었다. 이 인간은 정말 키가 크구나.

사실 난 절대로 작은 키가 아니다. 남장하고 다닐 때도 키가 작단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다. 하지만 제자는 그런 나보다도 키가 껑충 컸다.


“전하. 전하.”

“네에.”

“그런데 정말로 제 체면 때문에 오신 거예요?”

“제자는 스승님이 다른 권력자들과 함께 있으면 신경이 쓰여서 혼자 두지 못합니다.”

“제가…… 좋아서요?”

“스승님이 박쥐여서요.”

나쁜 놈! 맨날 박쥐래. 그놈의 박쥐 박쥐. 저런 식으로 계속 박쥐라고 구박해대면 박쥐가 아닌 사람도 박쥐가 되겠다.

생각하니 화가 나서 나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가 그냥 비를 맞으며 혼자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는 제자가 그러면 쫓아올 줄 알았다.


‘안 오네.’

하지만 제자는 오지 않았다. 멈춰서서 돌아보니 그는 우산을 쓰고 혼자 그림처럼 걸어오고 있었다.

기가 막혀서 도로 돌아가자 제자가 들어오라는 듯 품을 벌렸다.


“왜 안 쫓아오세요?”

“비 맞고 싶어서 앞서가신 게 아니신지요?”

“아닌데요!”

“아니라니 유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보였답니다, 스승님.”

제자가 다시 한번 들어오라고 팔을 살짝 흔들었다. 나는 그 안에 들어가는 대신 제자 옆에 서서 밖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 * *

비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황제는 창가 벽에 삐딱하게 기대어 앉아 요요화의 필첩을 한 장 넘겼다.


“그게 재밌으십니까?”

차를 타온 태감은 그 모습을 보고서 웃으며 물었다. 필첩을 주운 지 몇 달이 되었는데도 황제가 한 번씩 꺼내서 보니 우스웠다.


“무슨 뜻일까. 궁금하구나.”

“정 궁금하시면 그냥 요요화에게 물어보시지요, 폐하. 폐하께서 물어보시면 대답할 겁니다.”

“대답은 하겠지. 하지만 그 대답이 진실일지 둘러대는 말일진 알 수 없지.”

태감이 찻잔을 황제 곁에 내려두며 물었다.


“소인도 한 번 같이 봐 드릴까요? 소인은 머리가 나쁘지만 가끔은 머리 나쁜 사람의 생각이 기발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찻잔을 집으며 물었다.


“12. 1. 남아. 이게 무슨 뜻 같으냐.”

“어이쿠.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요.”

황제가 빤히 쳐다보자 태감이 허리를 조아렸다.


“송구합니다, 폐하.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모르겠네요.”

황제는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그럼 2, 2, 남아는 무슨 뜻 같으냐.”

“그것도 모르겠습니다. 스물두 살 황자님을 말씀하는 걸까요?”

“내 황자 중에 남아라 부를 나이는 없는데.”

태감은 고민하는 시늉을 하다가 대답했다.


“역시 모르겠습니다.”

황제가 가라고 손짓하자 태감이 얼른 물러났다.

황제는 다시 벽에 기대어 앉아 필첩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12. 1. 남아. 2. 2. 남아…….’

 

* * *

다음날. 1황자비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남편과 함께 황후궁을 찾아갔다. 문안을 드리기 위해서였다.


“세상에. 많이 컸구나!”

황후는 허리께까지 오는 아이를 보고 활짝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이리로 와보거라. 할머니에게 와봐야지.”

1소황자는 아주 어릴 때 황궁을 떠난 터라 황제나 황후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하지만 부끄러워하는 대신 얼른 황후에게 달려가 안겨 인사했다.


“할마마마.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보고 싶었습니다.”

“할머니도 우리 춘운이 보고 싶었단다.”

황후는 아이의 등을 토닥거리다가 1황자비에게 물었다.


“춘운이 올해 몇 살이지? 여섯 살이던가?”

“일곱 살입니다, 마마. 어릴 때 앓아서 또래보다 조금 작지요.”

1황자비는 낯선 황후에게도 싹싹하게 구는 아들을 뿌듯한 눈으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1황자도 몇 해 만에 보는 아이가 건강하고 영리해져 돌아오자 기쁜지 평소보다 밝게 덧붙였다.


“하지만 병이 나은 후로는 다른 아이들보다 빨리빨리 크고 있다 하니 곧 키도 더 클 거고 살도 더 붙을 겁니다. 그렇지 운아?”

“그럼요.”

1황자비는 황후가 애정 가득한 눈길로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자 타박하는 척 자랑했다.


“우리 운이도 다른 아이들처럼 밖을 뛰어다니면서 놀아야 할 텐데요. 어릴 때 몸이 약해서인지 늘 제자리에서 책만 보려 해서 걱정이에요, 마마.”

“오. 그런가?”

“네. 그래도 덕택에 조금 영리해지긴 하였답니다. 부황께서 제 오라비와 남동생들도 우리 운이 나이 땐 이처럼 영리하지 못했다고 했어요. 벌써 사촌 형님들보다 학습 진도도 빠르답니다.”

1황자비는 자랑을 하다 보니 견디지 못하고 줄줄 다 읊고 말았다.

그녀는 혼인한 후 1황자가 너무 공부를 못해서 내내 걱정이었다. 아들이 아버지를 닮으면 어떻게 하나.

그런데 태어난 아들은 1황자처럼 건강하지조차 못하고 늘 병치레를 앓다가 결국 풍토병까지 걸려버렸다.

그런데 아이가 건강을 회복할수록 조금씩 머리가 좋아지더니 지금은 또래들보다도 훨씬 영리하고 공부를 잘하자 얼마나 기특한지 몰랐다.

그녀에게 1소황자는 그 무엇과도 바꾸지 못할 보물이었다. 그녀는 아들이 없는 황후가 자신의 아들을 예뻐해서 후계자로 밀어주기를 원했다.


“운아. 할머니께 얼마 전 외운 시를 읊어드리거라. 효도에 관한 시 말이야.”

아이가 또박또박 시를 읊기 시작하자 황후는 미소 띤 얼굴로 연신 박수를 쳤다.


“그러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어마마마, 나중에 또 오겠습니다.”

하지만 1황자 부부가 아이를 데리고 사라지자 인자하던 황후의 얼굴에서는 순식간에 미소가 사라졌다.

황후와 같이 웃고 있던 궁녀들도 눈치껏 표정을 관리했다.


“황후마마. 괜찮으신가요?”

황후의 측근 상궁이 얼른 다가가 물었다.


“괜찮을 리가.”

황후는 한숨을 내쉬고서 작은 베개에 달린 술을 잡아 뜯었다.


“저 똥멍청이한테서 저렇게 영특한 아들이 나올 줄이야.”

황후는 이를 갈았다. 1황자는 서장자이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주 무식했다. 차라리 영민한 2황자를 경계할지언정 황후는 1황자에 대해서는 조금 안온하게 여겼다. 황제나 대신들이 웬만큼 돌지 않고서야 1황자를 지지하진 않을 테니까.

그런데 1황자에게 저렇게 영리한 아들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폐하는 아직 젊으시지. 게다가 건강하다. 생전에 양위한다고 해도 앞으로 스무 해나 서른 해는 충분히 더 통치할 수 있어. 그 정도면 소황자가 성인이 되어 제 아이를 낳고 양위를 받고도 남을 나이 아니냐!”

“마마…….”

최악의 경우 황제가 황위 싸움을 피하기 위해 1황자를 후계자로 삼은 다음 그를 건너뛰고 1소황자에게 바로 양위할 수도 있었다.


“이를 어쩐다…….”

“아이가 영민하니 황후마마께서 교육시키겠다 하시고 데려와 기르시면 어떨까요? 엉터리로 훈육하면 제 아비처럼 자랄 겁니다.”

“폐하가 멍청이 같으냐. 똑똑한 아이가 멍청해지면 당연히 날 의심하실 거다.”

“그렇지요…….”

황후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물었다.


“어제 1황자비가 부른 사람들이 누구라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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