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백년가약은 스승님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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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백년가약은 스승님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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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백년가약은 스승님뿐
2023.05.01.
내가 미쳤구나 내가 미쳤어! 방금 내 발언은 태월 사절만 거부하는 게 아니다. 황제를 거부하는 행동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런데 나서 버리다니.
“그쪽이 이국사인가 보군요. 뭐가 안 된단 말입니까.”
태월 사절은 제대로 낚았단 미소를 지으며 바로 나를 돌아보았다.
젠장! 황제가 이 일을 해결하게 두고 나는 숨어 있는 게 최고인데. 얼굴을 보이고 나서 버리다니!
나는 슬쩍 보문 공주 쪽을 확인했다. 태월 사절단과 공주는 내가 나서자 오히려 기쁜 얼굴이었다.
“혹시 폐하의 후궁이 되기 싫단 겁니까? 그거참 불경한 일이로군요. 폐하의 성총을 받는 건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일 아닙니까.”
그러면 자기가 후궁 되라지. 태월 사절은 일부러 보문 공주와 나 사이의 일을 황제와 나 사이의 일로 떠넘겼다.
“참으로 불경한 일 아닙니까.”
태월 사절은 하다못해 황제를 보며 자기가 황제와 같은 편이라는 듯 묻기까지 했다.
나는 힐긋 황제를 보았다. 황제도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이쯤 되자 더는 피할 수 없었다.
“저와 13황자 전하는 이미 사모하는 사이입니다. 가까스로 폐하의 은덕 덕분에 맺어지게 되었지요.”
나는 어쩔 수 없이 대꾸했다.
“그런데 보문 공주님과 13황자님이 혼인한다면 오히려 폐하의 은덕이 깨어지는 일입니다.”
나는 다시 이 일에 보문을 끌어들인 다음 그녀가 한 행동을 사절의 눈앞에 대고 흔들어주었다.
“게다가 보문 공주님은 13황자님과 혼인하기 위해 절 암살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벌이라면서 보문 공주님을 13황자님과 혼인하게 하다니요. 결국 뜻하는 바를 이루는 게 아닙니까. 암살자를 고용해 일을 이렇게 쉽게 해결할 수 있다면 모두가 원하는 바가 생길 때마다 암살자를 고용할 겁니다.”
보문 공주는 발끈해서 외쳤다.
“나는 13황자와 혼인하기 위해 자객촌에 간 게 아니다!”
“공주 전하도 13황자와 혼인하기 싫다 하시니 잘됐네요. 암살 의뢰 사안에서 13황자님은 빼도 되겠습니다.”
“나는 암살 의뢰를 하지 않았다!”
보문 공주는 다시 발끈해서 외쳤다.
“그 일은 이미 짐이 확인한 일이다, 보문 공주. 멋대로 왜곡하지 말라.”
가만히 지켜보던 황제가 단호하게 선을 긋자, 공주는 흥분해서 무어라 더 외치려다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 이건 어떻습니까?”
공주가 입을 다물자 이번에는 태월 사절 대표가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나섰다.
“보문 공주와 요 이국사를 13황자께서 같이 아내로 맞아들이는 겁니다. 둘 다 정실 아내 신분으로요. 이러면 괜찮겠지요?”
나는 미쳤다고 반발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처음에 ‘안 됩니다!’고 나섰을 때보다는 날 향한 주목도가 떨어져 있었다. 이 와중에 다시 나서서 이목을 집중시키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황후는 보문을 며느리로 들일 마음이 없으니 내가 침묵해도 알아서 쳐낼 것이다.
가만히 기다린 덕일까. 황후는 자기는 이 일과 관련이 없다는 태도로 우아하게 차를 마시다가 찻잔을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았다. 내가 알아서 치고받고 하니 뒤로 잘 빠져 있었는데 갑자기 내가 조용해지자 싫은 모양이었다.
“화음에는 정실 아내를 한 명 밖에 두지 못하네.”
황후는 어쨌든 나서긴 했다.
“그러면 혼수를 줄이고 대신 보문 공주님을 첩으로 삼으시지요. 이건 확실히 공주께도 벌이 되겠지요.”
그러자 태월 사절 대표는 아예 초강수를 두었다.
동시에 모두가 조용해졌다. 보문 공주 역시 눈이 커다래졌다. 미리 얘기된 이야기가 아닌가 보다.
나는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고서 발가락을 조용히 움직였다. 태월이 이렇게까지 했는데 공주를 거부하면 이젠 태월에서 자존심 상해할 수도 있었다.
‘젠장. 보문 공주랑 같이 13황자의 아내가 되라고? 미친 거 아냐? 나 혼자 아내여도 싫을 판에 날 죽이려 한 사람이랑 같이 아내가 돼?’
“이 일은 보문 공주가 암살자를 고용해 황자비로 예정된 여인을 해치려 한 사건의 처우를 논하는 자리이지.”
그때. 내내 조용히 있던 5황녀가 살얼음 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웬일이지?’
이상한 일이었다. 5황녀는 황제가 주시할 때가 아니면 나서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상해서 옆을 보니 황제가 묘한 시선으로 5황녀를 보고 있었다.
‘아!’
황제가 내내 조용하다 싶더라니. 그는 일부러 황손들의 대응을 보고 있던 것이다. 이를 눈치챈 5황녀가 나선 것이고.
나는 사람들이 5황녀를 보는 사이 슬며시 자리에 앉았다.
제자는 나를 미묘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대차게 일어나 소심하게 앉는 걸 비웃나.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살짝 제자의 옆구리 옷을 잡아당기고서 그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재촉했다.
“전하. 전하도 좀 나서 보세요.”
제자는 눈썹을 찌푸리고서 나를 바라보았다.
“제가 왜요?”
“전하. 제 일이잖아요.”
“그런데 왜 제자가 나서야 합니까.”
“전하, 폐하께서 사이좋은 부부처럼 굴라고 하셨잖아요. 전하가 가만히 있으면 사이좋아 보이지 않을 거예요.”
“…….”
제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다시 제자의 옆구리를 흔들었다.
“이국사. 할 말 있으면 하십시오.”
그러나 제자가 대꾸하기도 전에 태월 사절이 먼저 나를 불렀다. 태월 사절은 내가 가장 만만하니 5황녀는 건너뛰고 일부러 또 날 건드리는 게 분명했다.
“…….”
‘제자는 안 나서려나 보네.’
거기에 어쩔 수 없이 내가 입을 열려는 순간.
“보문 공주는 스승님을 암살하려 했습니다. 사형 시켜야 합니다.”
제자가 옆자리에서 파격적인 발언을 던졌다. 순식간에 연회장 안이 싸늘해졌다. 다들 입을 쩍 벌리고 제자를 쳐다보았다. 나 역시도.
‘아니…… 이번엔 너무 갔잖아!’
“무슨 소립니까!”
태월 사절 대표는 뒤늦게 펄쩍 뛰었다.
“태월 공주를 사형시키자니요! 13황자. 말을 조심하세요.”
황후도 13황자를 엄격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보문 공주는 낯빛이 새하얗게 질려서 충격받은 표정으로 13황자를 바라보았다.
“공주를 따라 자객촌에 간 이들은 모두 죽었네. 그자들은 공주의 명령에 따른 죄뿐이었지. 그런데 공주는 절대로 사형시키면 안 되나.”
13황자가 덤덤한 목소리로 내뱉는 말에 태월 사절 대표가 수염을 파르르 떨었다.
“지금 일개 궁인들과 공주님의 생명이 같다고 여깁니까! 화음의 13황자는 우리 태월을 무시하는 겁니까!”
분노한 사절 하나가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그자가 일어나며 밀린 의자가 쿵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갔다.
“고정하게, 대인. 열셋째는 친모가 궁인이다 보니 남들보다 아랫것들 입장을 많이 살펴 준다네. 아주 다정한 성품이지.”
7황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자 사절은 그제야 의자에 앉았다.
‘칭찬하는 척 제자를 까다니. 너무하네.’
나는 힐긋 제자를 살폈다. 제자가 기죽진 않았을까?
“나는 내 아내를 죽이려 한 사람을 아내로도 첩으로도 맞이할 수 없네.”
하나도 기 안 죽었구나! 표정 변화 없이 자기 할 말을 잘하고 있다.
“공주를 내 첩으로 보낸다면 내가 거부하긴 힘들겠지. 하지만 공주를 처소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하게 하겠네. 그래도 된다면 보내게.”
태월 사절이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그는 또렷하게 분노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 매정하십니까.”
보다 못한 보문이 일어나며 물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은 가냘프고 애처로워 보였다.
“제가 다정하게 대해야 할 사람은 백년가약을 맺은 스승님뿐입니다.”
“!”
* * *
식사 시간 내내 서로를 헐뜯고 말다툼을 한 결과. 일단은 증거를 잔뜩 쥐고 있는 화음 측에서 승기를 잡았다.
태월 사절은 가시를 씹어 먹는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태월 황제께 폐하께서 말씀하신 배상금이 가능할지 여쭙고 돌아오겠습니다.”
태월 사절은 보문 공주를 데려가고 싶어 했으나, 황제는 보문 공주도 두고 가도록 요구했다.
대신 태월에서 공주를 모셨던 궁녀들이 여기에 함께 남아 공주를 보필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그걸로 식사는 끝났다. 그러나 수시로 이름이 불린 탓에 월무궁에 돌아가는 내내 나는 반쯤 영혼이 나간 상태였다.
게다가 제자가 한 말도 좀 신경 쓰였다. 다정하게 대할 사람이 나뿐이라고? 정말일까? 아니면 그냥 그 자리에서 사이좋아 보이려 한 말일까?
“스승님.”
“네, 전하.”
“할 말이 있으면-.”
또 ‘할 말이 있으면 하시지요.’라고 말하려나.
“스승님은 눈을 좌우로 빠르게 움직입니다.”
“!”
“솔직히 보기 좋진 않군요.”
나는 끙끙대며 걷다가 멈춰 섰다. 뭐라고? 당황해서 쳐다보자, 제자가 후회하는 척 말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스승님은 모르는 듯해서요.”
“제가 항상 그러나요?”
“예. 그러니 할 말이 있으면 그냥 하세요. 티가 나니까요.”
제자가 다시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녁노을이 돌담 사이로 비스듬하게 지면서, 골목길을 제자가 즉위할 때 밟고 간 융단처럼 만들었다.
나는 그 길을 뒷짐을 지고서 살금살금 따라 걷다가 제자가 원하는 대로 그냥 물어버렸다.
“전하. 저랑 백년가약 맺고 싶으세요?”
“아니요.”
“아…… 그렇군요.”
그럼 그냥 그 자리에서 한 말이었구나. 역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스승님과 백년가약은 이미 맺은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어?
“무슨 소리세요?”
설마 회귀 이야기인가. 회귀하면서 나랑은 계속 얼굴을 봤으니 백년가약이나 다름없단 이야기인가?
그가 내게 기억 이야기를 꺼냈는데, 내가 알아듣지 못해서 운 좋게 넘어간 일이 떠오른다. 혹시 그런 상황인가?
“무슨 소리 같습니까?”
“저야 모르지요.”
심장이 조마조마했지만 나는 일단 발뺌했다. 제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뒷짐을 풀고서 전혀 꿇릴 게 없단 태도로 제자를 마주 보았다.
“스승님은 저와 백년가약을 맺고 싶으신지요?”
제자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뒤돌아 성큼성큼 다가와 물었다.
그 바람에 골목길에 생겨난 불그스름한 빛이 그의 이마에도 드리워졌다. 노을을 받은 제자의 눈동자는 깊고 아름다워 보였다.
“당연하지요. 저는 전하를 연모하니까요.”
“그 말이 진심일까요?”
“당연하지요. 왜 그런 걸 물어보세요? 박쥐라 그렇단 말은 금지.”
“스승님은 박쥐니까요.”
“……내가 금지라고 했는데.”
“제가 명령을 들어야 합니까?”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자 제자가 “또 오리 입.” 하고 타박하고는 뒷짐을 지고서 다시 앞서가기 시작했다.
그게 얄미워서 일부러 뒤에서 마구 째려보자 제자가 걷다가 대번에 멈추어 섰다. 얼른 눈에 힘을 풀자 제자가 뒤돌아보며 물었다.
“안 오십니까.”
“천천히 가고 있어요.”
“옆으로 오세요.”
“저랑 같이 걷고 싶으세요……?”
“네. 스승님이 뒤에 서 있으면 무섭습니다.”
독살은 자기가 해 놓고서 왜 나더러 무섭대. 물론 그 전엔 내가 했다지만. 아무래도 그 기억은 없다 보니 실감 나지 않는다.
“전하. 전하. 만약 보문 공주보다 더 아름답고 더 귀하고 더 영민한 사람이 전하한테 혼인하자고 하면 어쩌지요? 그때도 저뿐이라고 말씀하실 거예요?”
“아니요.”
“!”
기가 막혀! 바로 아니라고 하네!
제자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절대로 내가 제자를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다. 질투도 아니다.
제자가 저렇게 마음이 가볍고 아무한테나 쉽게 흔들리는 사람이라면 나중에 내가 위험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보문 공주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내 자리를 노리고서 날 없애 달라고 하면 제자가 좋다고 없애줄 게 아닌가.
“전하. 전하. 그럼 우리 사이 정은 어쩌지요?”
칼자루는 자기가 쥐고 있다 이건가. 나는 심각한데 자기는 왜 웃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