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1화. 사절의 요구 (121/159)


121화. 사절의 요구
2023.04.27.



 
제자가 말한 게 옷 찢은 이야기가 아니라 기억 이야기라면…….


-하지만 너무 경솔하셨습니다, 스승님. 조금 더 버티셔야지요.

그가 문을 열면서 중얼거린 말이 떠오르면서 등골이 스산해졌다.

아이구야. 나는 팔을 싹싹 문질렀다. 역시 회귀 전 기억이 있단 건 무조건 비밀로 해야 해. 반드시!

* * *

며칠 뒤 드디어 태월 사절이 도착했다. 나는 밥을 서른 번씩 꼭꼭 씹어 먹었다.


‘오늘은 아주 잘해야 해.’

그래야 보문 공주에게 그나마 큰 벌을 내리고 그걸로 나라에 이득을 챙길 수 있다.

반면 내가 행동을 잘못했다가 사절에게 꼬투리를 잡히면 황제와 대신들의 진노를 억울하게 살지도 몰랐다.


“소가주님. 오늘은 몇 시쯤에 돌아오실 거예요? 최근 며칠간 계속 늦게 오셨잖아요.”

‘그야 최근 며칠 간은 제자랑 사이좋게 보이는 연습을 한다고 그랬지.’

“모르겠어.”

“그러면 목욕물은 받아두지 않고 있을게요.”

나는 평소 보다 공들여서 단정하고 선해 보이게 꾸민 다음 월무궁으로 갔다.


‘저자.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다.’

긴장감은 월무궁에 가는 길이 더욱 높아졌다. 낯선 이들 한 무리가 길 변두리에 서서 내 쪽을 쳐다보고 있던 것이다.

태월 사절 일부가 나와 제자가 진짜로 부부나 다름없는 사이인지 미리 확인하러 나와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 시선에 배가 오그라드는 느낌이 났지만 나는 모른 척 턱을 들고 월무궁 안으로 들어섰다.


“전하. 전하.”

그러나 월무궁 문을 닫자마자 서재로 가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하지만 나와 달리 제자는 침착해 보였다. 그는 태월 사절이 오건 말건 전혀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왜 그러시는지요 스승님.”

“전하. 여기 오는 길에 낯선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분명 태월 사람들 같아요.”

내가 태월 사절 이야기를 해도 제자는 심드렁했다.


“그렇군요.”

아니 뭐야.


“안 놀라시네요?”

“그자들이 무얼 하겠습니까.”

“제가 전하랑 진짜로 부부 같은 사이인지 아닌지 몰래 엿보려고 온 거 같아요.”

“그자들이 엿보든 안 엿보든 스승님과 저는 몇 해 후면 부부가 될 겁니다. 그런데 무슨 상관인지요.”

“상관이 있으니 폐하도 사이좋은 시늉을 하라고 지시하셨겠지요.”

내가 야무지게 지적하자 제자는 이번에도 심드렁하게 코웃음 쳤다.


“사이 좋게 대화하면 되는 게 무엇이 어렵다고요.”

“어휴 어렵지요. 전하는 시시때때로 제게 시비를 거시잖아요.”

“제가요? 주어가 바뀐 게 아닐까요?”

“저는 시시때때로 전하께 시비가 걸리잖아요.”

“…….”

제자가 나를 입술을 꾹 다물고 쳐다보았다. 나는 서책으로 그 부리부리한 시선을 피했다.


“스승님.”

“네, 전하.”

“제자는 늘 스승님께 진심으로 대하니 스승님만 행동을 조심하시면 된답니다.”

“입에 침이라도 바르고 거짓말하세요.”

“혼인하기 전에는 입 맞추는 일은 없을 겁니다.”

무슨 소리야? 왜 갑자기 입 맞추는 얘기가…….


“그…… 침이 제 침 얘기는 아닌데요!”

나는 뒤로 물러나면서 내 입을 가렸다.

제자는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들어 놓고서는 혼자 시원스레 일어났다.


“곁방에 옷을 가져다 두었으니 갈아입고 나오시지요.”

 

* * *

곁방 안에 들어가니 전과 다른 복숭아색 의복이 준비되어 있었다. 머리 장식까지 복숭아색 보석이네. 색을 통일하는 걸 좋아하나?

어쨌든 의복을 다 갈아입고 나가자 제자가 망설이더니 내 쪽으로 천천히 손을 올렸다.


“잡고 가지요.”

“벌써요?”

“월무궁 앞에 태월 사절들이 있다 말씀하셨지요.”

신경 안 쓰는 척하더니. 신경 안 쓰지 않았나 보다.

내가 마지못해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올리자 제자가 손끝을 꽉 잡았다. 커다란 손안에 내 손이 묻히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제자는 다른 손으로 문을 열고서 월무궁 밖으로 나섰고, 나는 한 손을 잡힌 채 종종걸음으로 그를 따라갔다.

월무궁과 대화원으로 이어진 좁은 길을 그렇게 걸어가고 있자니 아까 날 쳐다보던 태월 사절들이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게 보였다.


‘부디 그들이 나와 제자가 사이좋아 보인다고 생각하기를!’

그렇게 우리는 곧장 연회가 열리는 전각으로 걸어갔다.

전각 안에는 며칠 전 다 같이 식사할 때보다 좀 더 장식이 섬세하게 되어 있었고 준비된 자리도 많았다.


“어서 오십시오, 13황자 전하. 요 대인.”

태감들의 인사를 받고서 나와 제자는 끝자리 부근에 앉았다.

대부분은 며칠 전 ‘가족 식사’ 때와 비슷한 인물들이었고, 거기에 연배가 높은 이들이 몇몇 더 추가되었을 뿐이었다. 덕택에 월무궁을 오갈 때보다 오히려 긴장감은 조금 더 풀어졌다.

나중에 품계 높은 후궁들이 나타나고 황제와 황후가 나타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태월 사절이 나타나서 초대해주어서 고맙다느니 어떻다느니 인사를 하다가 슬쩍 내 쪽을 쳐다볼 때는 다시 긴장하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회귀까지 한 몸 아닌가. 인생을 두 번이나 살아가는 사람답게 나는 담대한 표정을 유지했다.


“스승님. 손 좀 그만 떠시지요.”

하지만 표정과 달리 손은 잘 통제되지 않았다. 내가 고개를 빠르게 저어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거란 신호를 보내자, 제자는 한숨을 내쉬더니 내 손을 자기 손으로 잡아 주었다.


 
그의 단단한 손안에 들어가자 내 손도 마침내 표정만큼 침착해졌다.


“송구합니다.”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인사하자 제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 손등을 제 다른 손으로 두어 번 두드려주었다.


“…….”

웬일이지? 마치 자신과 내가 한 편이라고 말해주는 태도였다.

아니 물론 지금 상황에선 한 편이 맞지만. 그리고 회귀 전에도 그가 날 독살하기 전까진 강제로 한 편이었던 것도 맞지만.

하여튼 제자가 탁자 아래에서까지 이렇게 자상한 척할 필요는 없는데. 그의 남모를 배려가 너무 이상해서 나는 제자의 옆모습을 쳐다보고 말았다.

부드러운 손동작과 달리 제자는 입술을 꽉 닫고 화를 누르는 모습이었다.


‘……나랑 손 좀 잡았다고 저렇게 싫어하다니. 심지어 자기가 잡은 거면서. 쟤는 진짜 날 어마어마하게 싫어하는구나.’

“하여, 보문 공주께도 스스로를 변호할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제자에게 팔렸던 정신은 태월 사신의 목소리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나는 제자를 힐긋거리기를 멈추고 놀라서 앞을 보았다.

태월 사절이 황제 앞에 서 있었고 황제는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황후 역시도 눈썹을 찡그리고 있었다.


“보문 공주는 짐이 처소 밖으로 나오지 말란 명을 내렸다.”

황제가 차갑게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폐하. 그래서 신도 화음에 왔으나 아직 공주 전하를 뵙지 못하였으니까요. 그러니 신과 공주 전하가 말을 맞출 염려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태월 사절은 황제의 목소리가 가라앉거나 말거나 자기주장을 계속 펼쳤다.

어쩌다가 이 화제가 나왔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정도만 들어도 태월 사절이 자기 나라 황제에게서 무슨 지시를 듣고 왔는지 알 수 있었다.


‘보문 공주를 어떻게 해서든 구할 셈인가.’

황제가 대답하지 않자 연회장 안의 모두가 침묵했다.


“좋다.”

불쾌한 표시가 충분히 될 정도의 침묵 뒤. 황제가 마침내 대답했다.


“공주를 불러오라.”

“예, 폐하.”

송 태감이 나가자 태월 사절 대표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공명정대하신 폐하께 감사를…….”

태월 사절 대표는 그제야 자기 자리로 걸어갔다. 자리에 앉을 때 그의 시선이 잠시 내게 닿았지만 아주 찰나였다.

젠장. 내 심장이야. 손이 다시 떨리려 한다. 보문 공주를 여기 부르다니. 그 공주는 보나 마나 또 억지를 부리면서 물귀신처럼 날 잡고 늘어질 텐데.

* * *

송 태감이 데려온 보문 공주는 수척해진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음식을 안 주진 않은 모양이다.

공주는 황제에게 인사를 하고 태월 사절 대표 옆자리로 가서 앉았지만 나나 13황자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가 시작되었다.


“보문 공주님은 저희 황제 폐하의 금지옥엽이십니다. 태월의 황제 폐하께서는 공주님을 태월로 데려가 벌하겠다 하셨습니다.”

하지만 태월 사절 대표는 내가 첫 숟가락을 뜨기도 전에 바로 본론을 냅다 집어 던졌다.


‘조금 먹고 나서 시작할 줄 알았는데.’

나는 숟가락에 뜬 국을 다 놓치고서 힐긋 황제를 보았다.

황제는 아예 수저에 손도 안 대고 밥사발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러던가.”

“예. 태월과 화음은 대대로 사이좋은 우호국이었지요. 부디 금지옥엽 공주님을 외국에 보내고 걱정하는 부정을 헤아려 주시길 바랍니다.”

“그 금지옥엽이 내 금지옥엽을 죽이려 하였는데. 부정을 헤아려 달라?”

“아무 처벌도 하지 않으시겠다는 게 아닙니다. 자국에서 처벌하겠단 말씀이시지요.”

“공주를 금지옥엽처럼 길렀단 황제가 공주를 태월에 데려가서 진짜로 벌을 내릴지 벌 내리는 시늉만 할지 짐은 모르지.”

“태월 황제 폐하를 믿지 못하신단 말씀이십니까.”

“태월 황제는 짐을 믿지 못하는가.”

다시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못 먹고 있는 건 나만이 아니었다. 다른 후궁들도 모두 식사를 하지 못했다.

그나마 눈치껏 젓가락을 움직이는 건 저 뒤쪽에 앉은 선안과 9황녀 정도였다.


‘진짜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니까.’

“좋아.”

마침내 황제가 입을 열었다.


“소중한 자식이니 처벌을 약하게 하고 싶단 태월 황제의 마음을 이해하도록 하겠네.”

게다가 뜻밖에도 한 발 뒤로 물러나는 태세였다. 웬일이지?

태월 사절들과 보문 공주의 안색이 그 말에 대번에 밝아졌다.

황후는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황후 입장에서야 보문 공주가 벌을 받든 안 받든 그냥 쫓겨나기만 하면 될 테니까.


“공주가 받아야 할 벌에 합당하는 물건이나 돈을 내놓아라.”

황제의 말에 태월 사절들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사절 대표가 물었다.


“얼마를 생각하시는지…….”

“금전 만 개.”

땡그랑 밥그릇 엎어지는 소리가 났다. 사절 하나가 얼마나 놀랐던지 팔꿈치로 밥사발을 친 것이다.

사절은 다급히 밥사발을 들어 올렸다.

사절 대표는 파래진 낯빛으로 황제에게 물었다.


“진심이십니까.”

“농 같나.”

황제의 질문에 사절들이 자기들끼리 시선을 주고받았다.

금전 만 개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금전 만 개가 있으면 나라 사업 몇 개를 동시에 진행할 수 있을 정도였다.


“요요화란 여인은 정혼은 했지만, 아직 혼인하지 않았으니 황족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금전 만 개를 내놓으라 하십니까.”

“곧 혼인할 거고 이미 식구 대우를 받고 있지. 보문 공주도 이를 잘 알았다네.”

“3황자 전하 이후로 화음 황족들의 혼례가 줄줄이 막혀 있다고 들었습니다. 요요화란 자는 듣기로는 몇 해는 혼례를 치르지 못할 테고 그사이에 혼담이 엎어질지도 모르지요. 게다가 암살 의뢰도 실패한 거로 압니다. 그런데 황자비가 암살당한 거나 다름없는 배상액을 요구하시다니요.”

태월 사절이 딱 잘라 말하자 황제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러면 우리도 태월 황자비에게 암살자를 보내겠네. 태월 황제가 넘어가겠단 각서를 써서 보낸다면 말이지.”

“!”

사절은 눈이 커다래지는가 싶더니 내 쪽을 쳐다보았다.

나는 모른 척 숟가락을 들었다. 그 상태로 국을 연거푸 떠먹고 있으려니 사절이 말했다.


“그래도 되겠지요. 하지만 그러다 황자비께서 놀라 쓰러지기라도 하신다면 일이 더 복잡해질 겁니다. 그렇지만 폐하께서 태월에서 공주 전하를 제대로 처벌하지 않으시리란 염려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면 이렇게 하시지요.”

사절이 나와 보문 공주, 13황자를 번갈아 보다가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원하신 배상금을 공주 전하의 혼수로 보내겠습니다. 폐하께서는 공주와 13황자를 혼인시켜 주시지요.”

뭐야?! 그 말에 황제가 눈썹을 찌푸렸다.

보문 공주도 사절이 설마 이런 요구를 해줄 줄 몰랐던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사절이 나를 힐긋 보았다.


“그럼 우리 이국사는?”

황제가 묻자 사절이 태연히 대답했다.


“아직 혼인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정혼한 지 몇 해가 된 것도 아니니 이국사가 13황자 전하를 오래 기다린 것도 아니지요. 그렇다고 명문가 소저를 13황자의 첩으로 보낼 수는 없으니…… 폐하의 후궁이 되면 좋지 않겠습니까? 더욱 영광 아닙니까.”

“안 됩니다!”

나는 놀라 외치면서 일어났다. 순식간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0